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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붕자골 / 주인석

부흐고비 2021. 9. 4. 02:20

수필가 주인석의 실험수필 3


만일 골짜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산을 무엇이라 불렀을 것 같소? 한 덩어리가 되어 팽팽하게 솟구친 땅을 두고도 우리는 산이라 불렀겠소? ‘산’이라는 낱말의 탄생은 ‘골’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르오. 나는 골짜기의 고통이 아름다운 산을 만들었다 생각하오. 우리의 삶도 굴곡이 있을 때, 더 인간답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오.

울산의 송정과 대송 그리고 평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삼형제 마을이라 하오. 이 마을 산신령은 자부심이 대단했소. 커다란 산을 지킨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산짐승들의 충성심이 더 큰 이유였소. 많은 짐승들은 앞을 다투어 산신령에게 좋은 선물을 했소. 그런데 우리 참새족속들은 신령님께 한 번도 선물을 하지 못했소.

나는 다리도 짧고 입도 작아 스스로 먹고 살기에도 힘이 들고 바빴소. 기가 죽은 나는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간절곶 바닷가로 날아갔소. 그때 마침 해변에서 꿈틀거리는 무리들이 내 눈에 보였소.

“저게 무엇인고?”

나는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가까이 가 보았소. 길쭉한 것들이 무리지어 모래를 뚫고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는 것이었소.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은 번들거렸소. 길게 나있는 옆줄은 꼬리부터 머리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검은 배에는 비늘이 하나도 없었소. 뱀은 아니나 뱀 같았소. 나는 어디선가 많이 본 모양이다 싶었소. 그 순간, 일전에 신령님의 말을 기억해내고는 내 무릎을 쳤소.

‘내가 요즘 밤소경병이 들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누가 약을 좀 구해 다오. 다산이라는 학자가 ‘해대려海大鱺’라는 것을 다려서 먹으면 좋다고 했다는구나. 그 모양새가 낮에는 모래에 몸통을 반쯤 숨긴 채 머리를 쳐들어 눈을 번들거리며 사방을 살피는 섬뜩한 모습이고, 밤에는 다른 물고기들이 잠잘 때 습격해 잡아먹는 괴물이라 하는구나.’

동물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소. 괴물을 잡아온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오. 해대려를 신령님께 갖다 바치는 동물은 분명히 큰 칭찬과 포상을 받을 것이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큰일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나는 심장이 뛰어서 날갯짓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소.

‘이놈이 해대려구나.’

단숨에 해대려를 물어다 신령님께 갖다 바치고 싶었지만 너무나 무섭고 떨렸소. 나는 하루 종일 해대려를 지켜보았소. 저녁노을이 짙어지자 그것들이 휴식을 취하려는 듯 길게 누워 눈을 감는 것이 보였소.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해대려들의 눈을 향해 직진으로 날아갔소. 나는 사정없이 해대려의 눈을 쪼아놓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소. 통증으로 온몸을 꿈틀거리던 해대려가 실신했는지 죽었는지 조용해졌소.

나는 살금살금 날아가서 꿈쩍도 안하는 해대려를 다시 쪼아보았소. 움직임이 없었소.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해대려를 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신령님께로 날아갔소. 산꼭대기에 거의 다 갔을 즈음, 갑자기 해대려가 꿈틀거렸소. 나는 너무나 놀라서 물고 있던 해대려를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소. 해대려는 산에 떨어졌고 발버둥을 쳤소.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한 덩어리였던 산이 움푹 파여 두 개로 나누어지고 골짜기가 생겨났소.

해대려는 골짜기에서 몸부림치다 쳐 박혀 그대로 죽었소. 해대려는 다른 말로 붕장어라고도 한다오. 해대려가 떨어진 골짜기는 그의 모양을 닮아 구불구불하다고 사람들은 ‘붕자골’이라 불렀소. 해대려를 신령님께 바치지도 못하고 움푹 패인 골짜기만 만들었다고 산짐승들의 원성이 컸소.

그보다도 눈앞에서 해대려를 놓쳐버린 나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소. 신령님께 칭찬을 받고 포상으로 우리 참새족속들이 권세를 누리기 일보직전이었소. 나는 충격이 너무 컸소. 몸집이 작아서 가만있어도 적이 수두룩한데, 조잘조잘 애교가 많다고 시기 질투하는 짐승까지 모두 나의 적이 되었소. 게다가 나는 못 생겼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니 속이 상해 죽을 지경이었소. 나는 날짐승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 못마땅했소. 늘 불만 속에 살았소. 그래서 그 길로 나는 산을 내려와 사람들이 사는 들판으로 갔소.

그때까지 들판에는 다른 새들은 없었소.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나를 위한 것이었소. 나는 새로운 세상을 얻었소. 부지런히 움직이니 들판에 곡식이 모두 내 것이었고 양식 걱정 없이 살았소. 또 만물의 영장인 사람과 가장 가까운 새라는 자부심도 있었소. 나는 산에서 내려온 것을 잘한 일이라 생각했소. 그런데 그 행복은 길지 않았소.

가끔 우리 족속들이 덜 익은 곡식에 입을 대다가 허수아비한테 혼이 나기도 하고, 아이들이 쏘는 총에 맞아 죽는 일이 허다해졌소. 또, 가끔 산에서 내려온 매나 독수리 같은 족속들과 싸움도 해야 했소. 산에서 살 때보다 더 마음고생이 심해졌소. 원래 살던 곳이 더 좋았는지 모르겠소. 나는 들로 내려온 것을 후회하며 잘못된 일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소. 다시 산으로 돌아갈까 마음먹은 적도 있었소. 그런데 내가 살던 그곳은 이미 다른 짐승이 터전을 일구고 권세를 부리며 살고 있다 들었소.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들판을 떠나지 않고 있소. 어느 곳이든 적이 없는 곳이 있겠소? 그렇게 생각하니 다소 마음이 편해졌소.

아아,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이오? 새들도 눈앞에 보이는 것에 금세 좋았다 금세 싫어지는데 하물며 사람 사이의 일이야 오죽 하리오? 세상사 변덕을 부리지 않고 어떤 일에도 무던한 마음으로 한 자리를 지키며 신의로 대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생각하오?

나를 두고 덜 익었느니, 깊이가 없느니 하며 촐싹댄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소. 그렇다면, 그들은 잘 익어서 남을 나무라는 것이오? 정말로 잘 익으면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다니기 때문에 남이 눈에 안 들어온다고 하였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소는 소요, 아무리 집을 잘 지켜도 개는 개요, 모든 동물들을 위협하고 사람을 물어뜯어 죽일 위세를 가져도 사자는 사자요. 결국 짐승은 짐승일 뿐이라는 것이오. 짐승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개과천선해야 한다 들었소.

최소한 100일 동안 굴 속에 갇혀 쑥과 마늘을 먹고 묵묵히 앉아 스스로를 고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이미 잘 알지 않소? 나보다 덩치가 열배나 큰 해대려를 물고 나처럼 산을 오른 짐승이 있소? 내가 산을 떠나오면서 만들어 놓은 붕자골의 물을 먹고, 마시며 누리는 그들이 나보다 나은 것은 무엇이오?

“알게 모르게 오래도록 변덕을 부리며 살아왔으니 하루아침에 무던해지기란 쉽지 않을 것이오.”

내가 해대려 사건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면서 느껴지는 바가 있어 붕자골 이야기로 그 뜻을 부연해 보았소.


실험수필을 쓰면서 / 주인석

 
수필에다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접목시키고, 가전체 소설 형식을 빌려 스토리텔링화한 수필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필+구전된 이야기+가전체 소설 +스토리텔링 = 실험수필입니다. 저는 신춘문예 등단 이후, 수필에다 구전된 이야기를 입혀 스토리텔링 책을 4권 출간했습니다. <울산사랑길><감포깍지길><울산어울길><간절곶소망길> 외에 수필집으로는 <낀>이 있습니다.
 
수필의 형식을 약간 벗어나 실험적 수필을 쓴 것은 지금까지 수필이 너무나 형식적이고, 비슷한 내용이 많아 지루하고, 사적인 이야기에 치우쳐 있음을 탈피하자는데 큰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구전된 이야기가 지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수필 형식으로 꼭 풀어보겠다는 제 의지는 스토리텔링기법이었습니다.
 
가전체 문학에서 차용한 의인화 기법은 남녀노소 누구나 재미있게 읽으며 교훈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할머니세대가 사라지면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도 함께 소멸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라면 아무리 바빠도 끝까지 듣고 맞장구쳐주며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그냥 녹취록 기록하듯이 옮겨 적기만 하면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필과 접목시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든 문학의 전환점에는 시끄러운 말들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수필이니, 수필이 아니니 왈가왈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교시의 문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구전된 이야기에 저의 체험을 덧붙여 주제문을 확실히 살렸습니다. 그러니 구전된 문학을 접목시켰다하여 수필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구전된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화하여 가전체 소설을 접목시켜 실험수필로 쓰게 된 배경과 목적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에 덧붙여 실험수필에 선구자로 나서주신 많은 원로작가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특히, 실험수필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으신 윤재천선생님과 오차숙선생님은 우리 시대 실험수필의 큰 기둥이 되어주셨고, 새내기 수필가인 저는 서까래 몇 개를 보태지만 집 한 채를 짓는 것만큼 기쁩니다. 실험수필이 널리 알려져서 수필이 문학의 변두리로 내몰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설픈 작품 세 편을 보탭니다. 변변찮은 사람의 작품을 실어주심에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부끄럽습니다.

 
                                                                                                                              2013년 9월 19일 가을
 
                                                                                                                                       수필가 주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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