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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매실의 초례청 / 류창희

부흐고비 2021. 9. 7. 08:17

연 분홍빛 소녀의 얼굴로 은은한 향을 풍기던 매화. 어느덧 매실이 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매실을 준비하는데, 오래 전 초례청에 들어서던 동갑내기 우리부부를 보는 듯 마음이 설렌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고, 마지막 절차는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혹, 불길한 기운이라도 스밀 새라, 한지로 항아리 아가리를 딱 붙였다. 신방인 셈이다. 목화솜처럼 뽀얀 새 이부자리 위에 축사로 매화송이를 그릴까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었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창에 기대니 밤빛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 가지에 둥근 달이 걸려있네
不復更喚微風至 소슬바람을 새삼 불러 무엇하랴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온 집안에 가득하다 (退溪)

첫날밤은 몰래 들여다보는 객이 있어 더욱 긴장감이 돈다. 숨기운을 낮추고 손가락에 침 발라 창호지문을 뚫어야 서둘러 불이 꺼진다. 솜털 보송보송한 새파란 고것들이 무얼 안다고, 나는 시 한 수 바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심했었는지.

진작,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는 부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자랐더라면 좀 나았을까. 병풍 뒤로 드나들며 저어주고 뒤집어 주어 신혼 방의 조명쯤은 밝혀주었어야 했다.

아버지는 타지에 나가 계시고 엄마와 나는 방을 같이 썼다. 엄마는 등잔불 밑에서 저고리 섶이나 버선코를 날렵하게 빼 내어 인두로 꼭꼭 누르고, 할머니는 화롯불을 쬐며 아귀가 맞느니 안 맞느니 타박을 하셨다.

시집간 고모님이 어쩌다 친정나들이를 오면, 대청마루에서 스스럼없이 고모부의 귀를 파 내주고 등을 긁어드렸다. 서로 그윽하게 바라보며 손장난을 걸면 고모는 간지럽다며 콧소리를 냈다. 지극히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이었건만, 그 당시 나는 매우 기분이 언짢았다. 고부간의 부덕만 익숙하게 보면서 자랐지 부부간의 부덕을 보지 못했으니.

내가 결혼할 때, “그저 사내 녀석들은 마음만 바쁘지. 손이 어줍으니 살짝 뿌리치는 척 하면서 도와줘야 하느니라.” 고모님이 넌지시 한마디만 일러 주었더라도, 그렇게 오래도록 남편을 애 터지게는 안 했으리라. 온몸을 감싸 안고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아내가 워낙 수줍음을 타다보니 그런가보다, 아이를 낳으면 나아질까. 둘을 낳아도 그 버릇이 고쳐지지 않자, 혹 이 여자는 근본적으로 이성을 싫어한다는 오해를 받을만했다.

유두가 봉긋해질 소녀시절, 동구 밖 울타리도 사립문도 없는 외딴집 초가지붕 위로 박 넝쿨이 올라갔다. 밤이면 박꽃이 하얗게 피어 마당을 환하게 비춰줄 것이다. 우리들은 숨소리를 죽이며 뒤 곁으로 돌아가 나지막한 굴뚝 위에 호미를 걸어놓고는 냅다 뛰어 개울건너로 줄달음쳤다.

동네의 개 짖는 소리도 물 흐르는 소리도 고요하다. 방아깨비가 긴 다리를 어기적댄다. 알록달록 무당벌레가 업은 듯 포개어 지나가고, 물잠자리도 덩달아 서로 꼬리를 맞대고 주위를 맴돈다. 진공상태처럼 답답하다. 매듭 풀잎을 뜯어 손끝으로 잡아당기니 오린 듯 자웅(雌雄)으로 쪼개진다. 아마도 머지않아 아기고무신이 댓돌 위에 놓이리라.

어떤 이는 매실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항아리에 담아놓고, 밤이면 앞 베란다에 내 놓았다가 낮이면 뒤 베란다로 옮겨 검은 천으로 가려준다고 한다. 그래야 수줍음을 감추고 마음 놓고 애무를 즐겨 향기로운 매실즙이 된다나.

“하이고~! 별꼴 다 보겄네. 매실이 무슨 수줍음이 있능겨. 그거 말짱 헛것이여. 아 그 김치항아리에 넣는 두꺼운 비닐 봉다리 안 있소. 거기다 매실과 설탕을 대충 때려 버무려 서너겹 단단히 묶어 마루귀탱이에 쳐 박아 놓았다가, 오며가며 발길질로 냅다 걷어차 보소. 뒤굴뒤굴 굴러다니며 제절루 삭는 것을. 그게 제일 맛좋은 매실즙이지. 겉멋이 뭐 필요있능겨.”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환한 대낮에 길거리에 나와 그래 나 죽고 너 죽자. 언제 제대로 서방노릇이나 했느냐면서,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바지가랑이를 부여잡고 피멍이 들도록 싸우는 부부들을 보았었다. 저러면서 왜 살지 싶어도 그들의 악다구니는 절절한 사랑가였다. 밤이면 상처까지 보듬어 안아주고 아침이면 배시시 웃으며 보약 달이는 아낙네들의 삶에서, 짓물러 터지고 곰삭는 진한 부부애가 샘솟는 것을, 내 어찌 알 수가 있었으리.

가끔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았었다. 한지에 노르스름한 물이 배여 눅진하게 스며 올라오는 기운이 내 기분까지 무르익게 했다. 아직 날짜가 있으니 성급하게 굴지 말고 기다려야지. 두어 달이 지나 드디어 개봉박두! 가슴이 쿵쿵거린다.

봉함을 뜯었다. 매실들이 조글조글 액은 다 빠지고 씨와 껍데기만 남았다. 건더기를 다 건져냈다. 어쩜 내 인생도 요렇게 성공적일 때가 다 있다니 신통하기도 하지. 흥에 겨워 국자를 휘휘 젓는데…….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은 풀지도 못한 체 속곳부터 벗기려 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있다. 밤마다 실랑이만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

초례청에 들여만 놓으면, 저절로 거문고와 비파가 부부의 금슬(琴瑟)을 근사하게 연주하는 줄 알았는데, 매실도 제 생긴 대로 제 사랑방식대로 다루었으니. 공연히 고매한 매화 시를 쳐다보기 민망하다.

주례자의 객기만 홀로 소슬바람을 불러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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