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서 / 이영도

통일호 열차가 부산에 닿자 숱하게 흩어져 내리는 학생들 속에서 나는 검정색 셔츠에 단발머리 모습의 딸아이를 찾느라 눈이 바빴다.

그런데 어느새 내렸는지 ‘엄마’하고 뒤에서 어깨를 껴안는 음성이 바로 갈색 스웨터에 주름을 잔뜩 잡아 세운 폭넓은 스커트를 멋있게 차려입은 딸아이였다.

“넌 무슨 옷을 그렇게 입었니?” 나의 핀잔에

“이거 멋있잖아요. 엄마” 하면서 한 바퀴 무용하듯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다음 날 저녁, 모녀가 나란히 자리에 누워 책을 읽다 말고 문득 딸아이는 내게다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학교 영문학 시간에 배운 소설 가운데 ‘논리적인 어머니’란 제목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꼭 엄마와 같더라고 한다. 너무나 까다롭고, 매사에 이치로만 따지려 드는 엄마가 슬프다는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자식을 반가워하기에 앞서 먼저 옷차림부터 나무라는 그 비판적인 사랑이 외롭다고 한다.

어떤 동무의 어머니는 찻간에서 내리는 딸을 보고는 마구 달려들어 껴안고 ‘아가, 우리 아가’ 하면서 그냥 울음을 터뜨리더라고 한다. 그것은 무절제한 행위라기보다 오히려 아름다운 모성애의 거리낌 없는 표현 같아 부럽기 한량없더라고 한다. 모성애도 의무로만 표시하고, 사회의 체면과 교양을 지키기에 너무나 싸늘한 엄마의 지성적인 사랑이 외롭기 한이 없노라고 한다.

언제나 곱게 가꾸어 놓은 화단 같은 處世! ‘여기는 장미를 심고, 그 앞쪽에는 봉숭아를 심어야지. 이것은 잡초니까 뽑아버리고…. 그리고 저 목련 가지는 멋이 없으니 잘라야겠군.’ 하는 식으로 온갖 것을 제자리에 놓아야 하고, 균형이 잡혀야 하고, 운치를 위해선 뻗어나는 생가지도 꺾어야 하고, 그리하여 한 폭의 그림 같이 다듬어진 화단-곧 그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정리된 엄마의 생활 곁에 오면 무언지 마음이 어렵고 피곤을 느낀다고 한다.

제멋대로 피어 헝클어진 화단, 한옆엔 잡초도 우거져 있고 간혹 썩은 가지도 비스듬히 남아 있는 그러한 정원에는 때로 잔디에 두 다리를 뻗고 뒹굴며 쉴 자리가 있어 마음 수월코 편안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어리광도 받아주고 사리에 닿지 않는 억지도 더러는 못 이기듯 통과시키고, 이별이 서러울 때는 정거장이고 뱃머리고 가릴 것 없이 흐느껴 울 수 있는 그러한 盲目的인 모성애가 그리울 때가 있다고 한다.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밤 내 만 가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과연 나는 맹목 할 줄 모르는 불행을 지닌 인간인지 모른다. 자식에의 열정도 항상 도리와 책임에 치중하여 그 행위를 따지며 타이르기에 세세한 잔정을 억눌러 왔고, 哀樂의 감정도 체면에 얽매어 마음 놓고 터뜨려 보지 못한, 오직 세상 윤리와 도덕 앞에서는 목숨 같은 사랑도 안으로 다스리며 스스로 冷却하기에 앞서왔으니 그 自制의 생애가 그대로 生長의 태반과 함께 하나의 체질로 굳어져 오늘에 와서는 단 하나의 혈육인 외동딸에게까지 수월한 마음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하는 어미가 되어버리고 만 것인가?

이러한 나의 논리적인 성격은 결국 자신도 주변도 고독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우정에 있어서도 친구들로 하여금 마음 수월하게 접할 수 없게 하였음인지 1년이 넘도록 같은 집에서 사는 H여사도 농담 한마디 내게는 나누는 일 없고, 십년지기의 K도 깍듯한 예절로만 서로 사귀어 오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일찍이 교양의 우리 안에다 꿈 많고 정열 많은 내 본연의 자태를 겹겹이 가두어 놓고, 婦德이라는 하나의 형틀에 맞추어 인간을 다듬어 온 내 생활의 외면치레가 얼마나 어리석고도 참혹한 인생의 손실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지 않을 수 없어진다.

이제는 정말 수월히 살아야 하겠다. 함부로 무성한 뜨락같이 세상에 피곤한 목숨이 어느 때고 찾아와 두 다리를 뻗고 쉴 수 있는 인정의 동산을 내 마음속에 가꾸어야겠다. 내가 如如한 청산을 좋아하듯 그렇게 남들이 나를 친애할 수 있는 청산같이 어수룩한 여유를 나의 성품 속에 길러야 하겠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뇌이며 눈을 감고 있으니 일찍이 내가 악한처럼 배격했던 Y의 戀情도, 못 견디게 지분거리며 따르던 S의 모습도 모두가 아쉽고 눈물겨운 인정의 몸부림인 양 마음에 느껴지며 미소로운 추억으로 살아 오르고, 인생을 더욱더 넉넉히 사고할 줄 아는 딸아이의 잠든 얼굴이 봄날같이 다사롭게 피어오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