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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꿈꾸는 카트 / 최지안

부흐고비 2021. 9. 6. 08:33

마트에 묶인 머슴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트, 정규직이다. 눈 감고도 매장을 훤히 꿰뚫을 만큼 도가 튼 베테랑 직원이지만 임금이 없다. 임금이 없으니 노조도 없다. 노조가 없으면 파업이나 태업도 없다. 고용주 입장에서 인간이 아닌 직원은 더할 나위 없는 환상적인 파트너다.

사각의 프레임과 동그란 바퀴. 카트는 네모와 동그라미의 공존으로 굴러간다. 발 없는 철재 프레임을 바퀴 4개가 이끈다. 프레임이 아무리 견고하고 훌륭해도 바퀴가 있어야 제구실을 한다. 바퀴도 마찬가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동그라미가 없다면 네모는 무용지물이고 네모가 없다면 동그라미도 쓸모없다. 전체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모든 관계는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네가 없다면 나의 존재 이유가 불투명하듯이.

둥근 바퀴가 프레임을 끌고 가듯 세상을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세상을 거대한 톱니바퀴라고 가정한다면 그 바퀴를 움직이는 힘이 있을 것이다. 작은 부속품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커다란 톱니바퀴를 돌린다. 바퀴를 돌리는 또 다른 힘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보이는 구조와 보이지 않는 의도로 굴러간다. 국부론을 쓴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하게 놔두라고 했지만 시장은 그리 완벽하지도 않았으며 보이지 않는 의도가 늘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손님이 카트를 집는다. 철커덕. 백 원을 물려주면 동료와 묶였던 쇠줄이 풀어진다. 독립이다. 아니다. 자유지만 자유가 아니다. 자유주의가 진정한 자유를 주지는 않았던 것처럼, 아프리카 신생국가들이 독립을 했지만 강대국의 경제적 식민수탈은 여전한 것처럼 말이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저개발국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되듯 평등하지 않은 출발점에서의 자유는 독이 되고 만다.

재미있는 것은 손님이 카트를 오른쪽으로 밀고 가길 좋아한다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도는 사람의 무의식. 그에 따라 계산된 마케팅은 오른쪽으로 가치를 부여하고 물건을 배치한다. 백화점을 보더라도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오른쪽과 내려오는 곳의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간다. 그곳에 쉽게 지갑을 열 수 있는 만만한 상품을 진열한다. 오른손을 바른손이라 했던 시대도 갔지만 오른쪽에 대한 무의식적인 선호는 영업 전략에 요긴하다. 물론 영업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매장을 다 돌고 손님이 차에 물건을 옮겨 실어야 일이 끝난다. 물건 값을 지불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서비스를 다한다. 볼일을 다 봤다고 사다리를 걷어차지 않는다. 사다리 올라갈 때 마음 다르고 올라간 다음은 더 다른 강대국과는 다르다. 오히려 손님이 카트를 걷어차도 묵묵히 참을 뿐이다. 일이 끝나면 먹었던 백 원을 손님에게 얌전히 내주기까지 한다.

잠깐 쉴 때가 이때다. 다음 손님이 카트를 뺄 때까지 쉴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카트는 동료와 무언의 인사를 주고받을 것이다. 매일 같은 일과의 마트가 지겨워 어디든 가고 싶다든가 색다른 매장에서 일을 하고 싶다든가 가보지 않은 곳으로 떠나고 싶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저들끼리도 하지 않을까.

인간을 흉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손님’은 알뜰해서 가격을 따져보고 다른 제품과 비교해보며 꼼꼼히 장을 보더라는 둥. 어떤 ‘진상’은 매너 없이 카트 안에 쓰레기를 놓고 가버렸다는 둥. 어떤 ‘망나니’는 직원에게 삿대질을 하며 ‘갑질’을 하더라는 둥 하소연을 할 것이다. 그들의 말을 못 알아들으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마트에서 별별 인간을 상대하는 카트에게 감정이 있다면 아마 사람에게 달려들어 해코지할지도 모른다.

그쯤은 양반이라며 애먹은 일을 털어놓는 카트도 있을 것이다. 어떤 손님은 아파트 자신의 집에 카트를 밀고 가서 쓰레기까지 버리는 용도로 사용하고 쓰레기장 근처에 버려놓고 가더라고 흥분할 것이다. 만약 카트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공적인 직무를 사적인 일로 해결하는 데 쓰는 손님들 명단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과태료를 물게 하라고 점장에게 요구할지도 모른다.

오늘도 카트는 마트 앞에 정렬해 있다. 제 삶의 동선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마트가 일터고 집이고 삶이다. 당당한 정규직이지만 근로시간 단축도 그에게는 비껴간다. 장시간 노동과 결근 없이 일해도 노후는 보장받을 수 없다. 그는 평생 80여 평의 매장을 분주히 오가며 마트에서 낡아갈 것이다.

장을 봤다. 나도 오른쪽으로 카트를 밀며 콩나물과 토막 친 고등어, 세제를 샀다. 매일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하루에 한 번 청소기를 돌리고, 하루에 두 번 쌀을 씻어 안치고, 일주일에 한두 번 집과 마트를 오간다. 매일 정해진 일과와 일주일 정해진 일들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나는 아직 현직이다. 결혼과 동시에 자동으로 주어진 주부라는 직업.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일터고 삶이다. 정규직이지만 최저시급 7530원으로도 계산된 적 없으며 이십여 년 가정에 정신적 육체적 투자를 했지만 그에 대한 수익률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결국 나도 카트처럼 이 제도권에 머물며 몇 평 되지 않는 집과 반경 1,2킬로미터 사이를 종종거리다가 늙어갈 것이다.

하지만 카트도 꿈꾸고 있지 않을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질 날을, 이 제도권에서 이탈할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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