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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질경이의 꿈 / 정문숙

부흐고비 2021. 9. 10. 08:31

칼끝이 무디다. 거친 사포로 문지르고 고운 사포로 마름질하여 가지런히 옆에 놓는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작업에 나무판을 정리하다 칼을 매만지기만 반복한다. 서각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슷한 각도의 빗음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거실에 걸어둘 작품을 만드는 중이다. 식구들이 자주 보는 곳에 걸어두고 풀어내기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무너지지 않는 용기를 북돋우고 타성에 젖어 안주하는 마음이 생길 때 깨우침을 줄 만한 글귀를 고르느라 고심한 끝에 이만한 게 없다 싶은 글귀를 찾아냈다.

질경이, 우리나라 전 국토에 뿌리를 내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식물의 대명사로 큰 울림을 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난다 하여 길경이 또는 차전자라고도 불린다. 봄 여름에 걸쳐 어린잎과 뿌리는 나물로, 말린 것은 차로, 한약재로도 사용되는 유용한 약초이기도 하다.

다섯 글자가 그려진 종이를 나무판에 붙인다. 칼끝을 글자에 대고 망치로 칼등을 두드린다. 나무판에 깊은 글 이랑이 생긴다. 이랑을 따라 식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꿈 씨앗을 뿌리고 바람을 심는다. 한 획 한 획 빚어내는 일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 다루듯 여간 조심스럽지 않지만 오랜 시간의 굽이를 지나 품이 널찍해진 나무판은 각자장 흉내를 내는 초보자의 손길에 넉넉한 웃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땅과 호흡하며 한 생의 굴곡을 결마다 새겨 넣은 나무판이 일 년간 그늘에서 좌선하며 속엣 것 죄다 버리고 오직 하나의 쓰임으로 내 손까지 왔으니 소홀히 다룰 수 없다. 피나무는 재질이 부드러워 작업이 쉽다더니 초심자에게는 여간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직 손에 익지 않은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일도 만만치 않거니와 구불구불 휘어진 나뭇결은 손에 붙지 않고 겉돌기만 한다.

대동여지도의 목판본도 피나무다. 주로 사용하던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보다 재질이 부드러워 작업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란다. 목판에 산맥과 구릉을 그리고 마을로 가는 길을 내어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독도까지 한 폭에 담아낸 일등공신이 아닌가.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전국을 세 번 돌고 백두산을 여덟 번 오르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담아냈다고 한다. 또 무수한 자료를 토대로 역사의 고증을 거쳐 만들어진 고지도의 완성본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전에 박물관에서 고지도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고지도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고학자의 강의를 들으며 무지했던 역사에 얄팍한 실눈이나마 뜰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도는 박물관에 소장될 자료가 아니며 밖으로 나와 현장에 있을 때 그 가치를 드러낸다는 말이었다. 또 고지도는 중심에 배치한 것이 중요하며 그 공간에는 사람들의 꿈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지도는 사람들의 실생활을 반영한 것이므로 현재의 시각으로 지도를 읽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거실 벽에 지도를 붙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선사시대 바위 동굴에 그린 벽화와 전쟁으로 사라져 버린 지도들, 실물로 존재하는 고려의 지도와 조선의 대동여지도 그리고 현재의 지도를 떠올렸다. 지도를 보며 지금 우리들의 꿈과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야 할 오늘을 사는 자들이 해야 할 몫에 대한 생각으로 늦은 밤까지 뒤척였다.

대동여지도 목판본은 나무판에 타각 기법으로 산을 그려 넣고 강을 옮겨놓았다. 60여 개의 목판에 새겨 스물두 개의 첩을 이어 붙여 찍어낸 것이 대동여지도다. 잘못된 목판을 도려내 새로운 나무조각을 붙이는 상감기법을 사용하여 필사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를 막았다. 산의 표현이 달라진 부분과 점이 없어진 곳이 현재 남아있는 목판과 판본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독도 소식지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김정호가 27년 앞서 그렸던 청구도는 독도가 있으나 1/162,000 축적을 사용한 실측도인 대동여지도에는 0.187㎢인 독도를 제 위치에 표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 장의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를 넣기 위해 따로 구분하여 옮겨놓았단다. 지리박물관 Y 관장은 조선 시대 목판 지도에 그려진 독도가 지도마다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한국령 독도’를 밝히기 위해 조선 시대 독창적인 목판 지도의 접는 제작 기법을 알고 지도를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서히 글자의 윤곽이 드러난다. 마치 각자장이 된 양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여백을 파내는 초벌 작업에서 칼을 쥔 손이 벌써 뻐근하다. 손을 펴보니 마디마저 굵어진 듯하다. 옛 각자 장인들이 글자를 파낼 때, 창칼로 밀어서 파내어 초벌 작업을 했다. 엇결에는 나무판을 돌려서 파내었다고 하니 힘들기가 곱절이었을 게다.

예부터 지도를 제작할 때 독도를 빠트린 것은 바로 파기했다고 한다. 공간이 무너지면 백성의 가치관이 바뀌고 우리의 정신도 무너진다는 선조들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지금까지 굳건하게 우리 땅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고지도를 공부하며 지금까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저들의 끈질긴 주장이 억지라는 것을 물증으로 확인했다.

대동여지도 목판본은 불태워지고 없다는 기록과 달리 육십여 목판 중에 경상도 일대를 기록한 열두 판만 남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목재 수장고에서 임시번호를 단 유물로 오래 방치되어 있다가 1995년 수장고의 문이 열리며 공개되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당한 우리의 역사를 되찾은 셈이다.

각자상의 작업을 본 일이 있다. 단단하고 결이 고운 나무를 선택하여 다듬어서 준비한 후 새겨야 할 글을 뒤집어서 붙인다. 종이를 갈아내고 기름을 발라 글씨가 잘 보이도록 한다. 글씨의 생김새와 특징을 고려해 다양한 칼과 끌 망치 등으로 글자를 새긴다. 각자 작업이 끝나면 양옆에 마구리를 끼워서 목판본을 완성한다. 알맞은 먹물을 고르게 칠한 후 용지를 대고 문질러 찍어낸다. 이처럼 대동여지도는 나무에서 목판에 이르러 우리 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오래전, 읽기 쉽고 실생활에 쓸 수 있는 지도를 남기려는 선조들은 붓과 먹, 벼루를 넣은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길을 떠났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남겨진 가족과 이별한 슬픔보다 세상에 제대로 된 지도를 남기겠다는 사명감이 더 컸으리라. 방방곡곡 질경이가 춤을 추는 산천으로,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의 비바람을 맞으며 등고선을 따라 뜨고 지는 해를 보며 걸었을 터다. 비에 젖은 종이를 가슴에 품고 지새웠던 동굴에서의 밤, 어둠 속에서 먹을 갈아 그려 넣었던 발자취를 목판에 새겼으리라.

‘세상이 어지러우면 지도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린다.’ 대동여지도 첫머리 ‘지도유설’을 인용한 말이다. 읽기 쉬운 지도를 보급하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대동여지도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도를 만든 고산자의 뜻을 지키는 것이 후대를 사는 우리의 할 일이지 싶다.

초벌 작업을 끝내고 획 사이를 파내는 재벌 작업과 마무리가 남았다. 사포로 갈아내고 니스칠을 하고 색을 입혀 벽에 걸 때까지 몇 번 더 내 손을 거쳐야 한다. 낮은 자들의 발걸음 따라 번지던 질경이는 겨울에도 땅 속을 파고들었을 거다. 봄이 되면 연둣빛 여린 싹이 자라나 하얀 촛대를 올린다. 완성된 작품이 거실에 걸리면 집안은 온통 초록빛일 거다. 사시사철 초록 꽃대 위에 하얀 꽃을 피워 올려 집안을 환하게 밝혀줄 것 같다.

질경이의 꿈, 고산자 김정호가 그랬듯이 종이에 대고 글자를 찍는 상상을 한다. 눈앞에 드러난 다섯 글자 위에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간 옛 어른들의 발자취가 겹쳐진다. 배를 타고 독도로 향하는 발자국마다 초록빛 꿈이 일렁인다. 그 뒤를 따르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세상은 질경이로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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