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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물 건너 숲 / 김은주

부흐고비 2021. 9. 13. 08:20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꼭 안개를 봐야 했기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조급증 탓인지 주산지 들머리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길은 여러 갈래였고 절 골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한 동안 시간을 지체 했다. 어두운데다 초행길이다 보니 길을 잃은 것이 당연지사겠지만 잠시 당황스러웠다. 살다보면 어디 길을 한두 번 잃어 보던가?

헤매다가 쉽게 길을 찾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맴돌기만 할 뿐 길 찾기가 영 어려워지는 때도 있는 법이다. 허나 가끔 있는 이런 지체들이 인생에 마디를 만들어 주고 그 마디들이 쌓여 삶의 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리 생각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느긋해 졌다. 더운 커피 한잔을 돌려 마시다 보니 어느새 주산지에 닿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주산지로 오르는 길은 이제 막 어우러지기 시작한 잎 새들이 제가끔 이슬을 털어내고 있었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기운이 깔때기 모양의 능선을 따라 극 대비의 선명한 색을 뿌려 놓는다. 능선은 아직 검고 그 배경은 붉고 밝다. 잠이 덜 깬 주산지 또한 검붉은 얼굴이다. 실 붓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은 능선이 점점 환해져 온다. 웅크리고 있던 숲 속 어둠이 쫒기 듯 달아난다. 차츰 밝아오는 기운에 어둠이 자리를 내 줄때 쯤 안개사이로 두둥실 주산지가 떠오른다.

막 비등점에 다다른 끓는 솥 마냥 하늘로 끝없이 안개를 승천시킨 주산지는 제 속의 열을 주체하지 못하는듯하다. 수런거리는 안개를 휘장처럼 두른 왕 버들은 몇 백 년을 살았다는 전설이 무색할 정도로 머리 하나 세지 않고 푸르게 서 있다. 안개는 잠시 주춤대다 다시 하늘로 오르고 버들의 허리통을 감아 조였다가는 다시 훑어 내리기도 하더니 끝내는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잠시 자연이 부리는 조화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든다. 전부를 보여주지 않고 자꾸만 가렸다 여는 그 모습이 차라리 선계에 서 있는 듯 나를 황홀하게 한다.

안개를 다 몰아내고서야 햇살이 등성이에 번지기 시작했다. 감히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연출할 수 없는 거대한 비경이 시간차를 두고 공격해 온다. 잔잔한 수면위에 한줄기 바람이 인다. 바람은 남은 안개마저 모조리 밀어내더니 사방에 둘러 쳐진 푸른 숲을 그 위에 끌어들인다. 연두가 분명한 아침 숲은 햇살을 받기가 무섭게 황금빛 물결로 출렁거린다. 분명 안개를 놓칠까 노심초사 하며 쫒아온 길인데 이제 보니 주산지의 원석은 따로 있는듯하다. 푸르디 푸른 저 물빛이 그것이다.

반짝 거리는 물비늘 사이로 미처 떠나지 못한 겨울 숲이 간간히 물속에 잠겨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미완의 연두가 물살을 가르며 밀려오고 있다. 돌을 던져 보지 않고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푸르다. 아득한 깊이를 숨긴 채 저수지는 표면 가득 물살을 일으킨다. 잘게 일어난 물비늘은 연두 빛 애벌레 같다. 수천수만의 애벌레가 저수지 가장자리로 기어 나와 내 발 아래 찰랑인다.

여름이면 절정의 초록이 물빛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가을이면 숲에서 쏟아지는 핏빛 단풍에 물은 절로 얼굴을 붉힐 것이며 겨울이면 얼음위에 눈발을 뒤집어 쓴 저수지는 사철 출렁이던 가슴을 잠재우고 고요한 동면에 들것이다. 이렇듯 물의 심사와는 상관없이 사철 숲이 부리는 조화에 물은 순순히 제 몸을 맡겨 놓고는 아무 저항이 없다. 고유의 물빛은 따로 있지만 물은 언제나 숲의 변화에 자신을 맞춘다. 이물 없이 서로 스며드는 것, 물은 숲 안으로 숲 역시 물속으로 잔잔히 젖어드는 그 모습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숲과 물은 분명 멀리 떨어져 거리를 두고 있지만 지그시 굽어보면 동색이다. 둘이 합쳐져 내는 그 빛깔은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주산지만의 비색이다.

내 주변에는 주산지의 물빛을 꼭 빼 닮은 왕 고모 내외가 사신다. 고모님은 치마만 둘러 여자지 대장부 못지않다. 그에 반해 기가 보드랍고 세세한 고모부는 바깥출입이 적고 다감하시다. 집안의 대소사를 내 손안에 있는 듯 잘도 두량하시는 고모님은 통이 크고 화통하시다. 우리들 앞에서는 도무지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없어 뵈지만 고모부 앞에서만은 천상여자다. 이런 고모님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고모부는 자주 앓으신다. 그럴 때 마다 밥상머리에서 생선살을 발라 수저위에 올려놔 주시기도하고 하루에도 몇 가지씩 죽을 새로 끓여 내시기도 한다.

그 뿐이랴 두 분이서 도란도란 재미난 이야기라도 나누실 때의 모습을 보면 그 큰 도량은 다 어디로 가셨는지 볼그스레한 볼을 한 손으로 가리고 웃기까지 하신다. 가만 보고 있자면 저 분이 고모님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평소 두 분은 전혀 다른 색이라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간베기 고등어에 소금 스며들듯 서로 잘도 스며들어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주산지의 풍경만큼이나 그윽하고 아름답다. 서로 다른 남남이 만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저 숲과 물처럼 서로에게 자연스레 스며들어야 할 것이다. 물은 숲의 색깔을 인정하고 숲 또한 물의 마음을 읽어야 할 것이다. 상대의 마음에 낚시 줄을 드리우지 않고서도 그 수심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무던한 세월만이 가능 한 것 같다.

피안을 건너듯 주산지 허공 속으로 삶의 나룻배 한 척 건너간다. 물 건너 기슭 백양나무 가지에 산 까치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아오른다. 저수지 속살 안에 잔 고기떼들이 생래의 즐거움으로 노닐고 구부정한 왕 버들은 물살위에 거꾸로 서 있다. 몇 백 년을 저렇게 서서 벌을 섰겠지만 버들은 본래의 제 모습인 듯 담담하다. 오늘 보니 물과 숲은 따로 자라는 게 아닌 듯싶다. 물은 숲이 푸르러야만 함께 푸를 수 있다는 간단한 진리를 주산지에 와서야 새삼 깨닫게 된다. 새 한 마리 자기 몸을 쳐서 물을 건너 숲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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