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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종점(終点) / 김상립

부흐고비 2021. 9. 14. 08:13

누구에게나 인생여정에서는 크고 작은 목표가 있을 것이다. 마치 완행열차를 타고 먼 길을 떠나면 만나게 되는 여러 개의 역(驛)처럼. 물론 열차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느냐에 따라 머물게 되는 역의 성격이나 환경은 각기 다르겠지.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선택했던 간에 도중에 만나는 역이 마음에 들거나 제게 이익이 될 것 같다 하여, 아예 그 곳에 눌러 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머물고 싶어도 시간되면 다음 역을 향해 떠나야 하는 게 인생길이기 때문이다. 떠남은 시간의 흐름이요, 목적이란 스쳐 지나가는 삶에서의 작은 매듭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목표만을 내세워 끝을 보려 하는 행위가 과연 최선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무소속(無所屬)으로 평생 일곱 번을 국회의원 출마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고, 어릴 적부터 돈을 벌겠다고 집을 떠났다가 먼 나라의 건설현장에서 유명을 달리한 사람도 있다. 또 고시(高試)공부 한다고 대학진학도 포기하고 고교졸업 후 돌연 산으로 들어간 지인은 몇 번을 반복하여 떨어지더니,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을 감추었고 난 여태 소식을 모른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일관되게 동경하는 성공을 목표로 삼고 살게 되면, 이루어낼 확률도 낮아지겠지만, 개성이나 능력, 가치관이나 기호(嗜好)같은 개인적 특성이 그 속에 묻히게 되어, 도리어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결과를 빚을 수가 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출세하여 권력을 잡는다든지, 큰돈을 벌어 떵떵거리고 살겠다는 목적만이 최상인줄 알고 인생 전부를 걸고 달려간다. 물론 아무리 애를 써도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요행이 성공한 사람도 뜻대로 미래가 열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돈이나 권력을 잡고 나면 그것을 유지하거나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갈 길이 한 참이나 남은 인생길 에서, 제가 설정해둔 최고의 목적지에 닿았다고 해서, 마치 여행을 끝낸 사람처럼 온갖 유혹의 열매를 따며 즐기다 보면 실패하기가 십상일 터이다.

반대로 평생을 음지에서 열심히 살다가 종착역에 와서야 큰 깨달음을 얻고,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훈을 남기고 떠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세월이 가도 후학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설정한 세속적인 목표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내달리는 일이 꼭 능사는 아니라 본다. 자칫 실패를 연속하다 보면 그 길 위에서 폐인이 될 수도 있고, 설령 성공했다 해도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제일 큰 약점은 사람을 진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출세라는 어떤 정형화된 틀에 맞는 자리를 가질 때만, 성공으로 인정하는 폐습이다. 이렇게 잘못 설정된 기준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한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무겁다.

누가 뭐래도 삶에서 확실한 미래란 없다. 내가 좀 오래 살아보니 사람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산다기보다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갈 때 마다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열심히 헤쳐가며 산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삶은 어떤 특정 목적만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살아내며 여러 개의 삶의 결과를 경험할 뿐이다. 다만, 길고 긴 그 과정을 어떻게 하나하나 엮으며 잘 살았는지가, 훗날 더욱 가치 있는 삶으로 남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게 있다면 죽음이라는 종점뿐이다. 영혼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바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하겠지만, 이승의 삶은 일단 죽음이라는 종착역에서 결산하고 쉬어가야 한다. 그 휴식이 금새 끝날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살아생전 보통 사람들끼리 따뜻한 정을 나누는 소박한 삶이 더 행복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수백 수천 가지가 있을 터이니, 공연히 남의 행복을 시샘하거나 폄하하지 말고, 제게 맞는 행복을 찾아서 살면 그게 바로 만족이다.

나처럼 나이가 많아지면 설령 세상을 요리하는 능력을 가졌다 해도, 후배들이 하는 이런저런 일에 앞장서서 설치는 일은 삼가 해야 한다. 역사 적으로 보면, 세상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경영할 세대들은 대개 순리대로 정해져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이에 비례하여 겸손함을 쌓아가는 일은 꼭 필요한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노령에 들면 제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될 것이다.

멀리서라도 아름다운 세상 만드는 일을 적극 응원하고, 자신의 평온한 종점을 위하여 애쓰는 생활을 쉬지 않고 해 나아가는 게 노인의 올바른 길일 터이다. 나는 오늘도 수필이라는 배낭을 메고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종점을 향해 쉬지 않고 걷고 있다. 설령 내 예상보다 종점에 더 빨리 도착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요, 다행이 종점이 좀 더 늦게 다가온다면, 하루하루를 더욱 감사하게 받아들여 살아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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