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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풍란(風蘭) / 이병기

부흐고비 2021. 9. 16. 09:14

 

나는 난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 집이라기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하였다.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냉 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계동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독서, 작시도 하고, 고서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 세계에 들어 무아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함흥서 2년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수 이상이 죽었다. 그 해 여산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해방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와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나게 하였다. 건란과 춘란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 하던 것이, 또 6·25 사변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 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고해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재에 있으매, 소공이 건란 한 분을 주었고, 고경선 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는 웅란, 자란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 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다복하게 길렀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 되어 곽란이 났다.
5, 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달여 먹고 나았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풍란은 곁에 두었다. 하이얀 꽃이 몇 송이 벌었다. 방렬·청상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이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이여 그 향을,
숲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완당 선생이 한 묵연이 있다듯이 나는 난연이 있고 난복이 있다. 당귀자·계수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에는 백중할 수 없다. 이 웅란은 난 가운데에도 가장 진귀하다.

"간죽향수문주인"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 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그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고서도 없고, 난도 없이 되잖은 서화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릿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 병을 두었다면 삼공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름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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