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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1 /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2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그리우면 / 유치환
뉘 오는 이 없는 곬에는/ 하늘이 항시 호수처럼 푸르러/ 적은 새 가지 옮으는 곁에/ 송화가루 지고/ 외떨기 찔레/ 바위돌 하나/ 기나긴 하로해 직하기 제우노니/ 참으로 마음속 호올로 숨겼기에 즐거워/ 고은 송화가루 송화가루/ 손에만 묻다//
행복 / 유치환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일월(日月) / 유치환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바위 /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기(旗)의 의미(意味) / 유치환
여기 망망한 동해에 다다른/ 후미진 한 적은 갯마을// 지나 새나 푸른 파도의 근심과/ 외로운 세월에 씻기고 바래져// 그 어느 세상부터/ 생긴 대로 살아온 이 서러운 삶들 위에// 어제는 인공기 오늘은 태극기/ 관언(關焉)할 바 없는 기폭이 나부껴 있다//
기(旗) 없는 깃대 / 유치환
편편히 명암(明暗)하던 그/ 기억의 구름 종잇장이라도 와서 걸리렴/ 말을 잃고/ 멀거니 내민 채 공중은/ 벽같이 잡을 데가 없다//
뉘가 이 기(旗)를 들어 높이 퍼득이게 할 것이냐 / 유치환
듣거라/ 진실로 시방 이때이다./ 이 날을 놓친다면/ 만 번을 뉘우쳐 죽더라도 미치지 못하리니// 보라/ 이웃이 이웃을 믿지 않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매/ 물로 가면 목메어 목메어 우는 여울물 소리/ 들로 가면 솔바람 통곡소리/ 그러나 이제는/ 여울도 마르고/ 산천에 초목도 다 마르고/ 짐승마저 깃을 거둬 자취를 감추거늘/ 나라도 인류도 이대로 망할까보냐// 시방 이때이다/ 슬픔에 죽어가는 형제를 붙들어 일으키고/ 악한 자는 눈물로서 마음 돌이켜/ 이웃과 이웃/ 사람과 사람이 일월(日月)처럼 의지할 때는 이때어니/ 그렇지 아니한들/ 강팍한 자(者)여 너희도/ 겨울 동산에 홀로 남은 이리처럼 고독히 죽고/ 새벽 하늘에 별빛 쓰러지듯/ 쓰러진 나라 위에 다시 나라가 쓰러지고/ 드디어 인류(人類)는 속절없이 망멸(亡滅)하리니// 진실로 시방 이때이다/ 이 모질고 슬픈 인류의 마음을/ 햇빛같이 깨우칠 기(旗)를/ 높이 높이 들어 퍼득일 때는//
생명의 서 일장(一章)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바람에게 / 유치환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구름 / 유치환
다시 한 번 우러러 구름을 보소// 인정의 고움을 가리워 구름은/ 노래인 양 저렇게 세상을 수(繡)놓았나니//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책장처럼 넘어가는 푸른 조석(朝夕)인데도// 그대 곰곰이 마음 지쳤을 때는/ 나의 꿈꾸고 두고 간 저 구름을// 다시 한 번 조용히 우러러보소//
아지랑이 / 유치환
어화능 어화능 어화능차 어화능!// 천지는 온통 아슴아슴 피어나는 봄인데/ 종다리는 어디메서 저렇게 울어만 쌓는데/ 아지랑이 보오얀 장막, 풋보리 푸른 이랑을/ 빨간 만장, 노란 만장 나부끼고 가는/ 죽음 하나// 천지는 온통 피어나는 목숨에 젖었는데/ 한 지엄한 가르심은 가르심대로 있어/ 이제 육신은 들녘으로/ 목메이는 정은 가슴팍에―/ 절통한 비정(非情)도 이렇듯 스스로이 이루어지매/ 한 가지에 피는 꽃, 지는 꽃이 있듯이/ 그래 삶은 있는가? 흐느낌도 고운 것인가?// 짐짓 목숨이란 아지랑이,/ 설우면 설운 대로 아지랑이,/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아지랑이, 아지랑이/ 그대 가고 내 남을 그날이여/ 내가 가고 그대 남을 그날이여/ 모처럼 상기(上氣)한 하루 공짜표도/ 그저 아깝고 겨웁기만 하여/ 화안한 치레들이 안으로 곪기만 한다//
선(善)한 나무 / 유치환
내 언제고 지나치는 길가에 한 그루 남아 선 노송(老松) 있어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아무렇게나 뻗어 높이 치어든 그 검은 가지는 추추히 탄식하듯 울고 있어, 내 항상 그 아래 한때를 머물러 아득히 생각을 그 소리 따라 천애(天涯)에 노닐기를 즐겨하였거니, 하룻날 다시 와서 그 나무 이미 무참히도 베어 넘겨졌음을 보았나니// 진실로 현실은 이 한 그루 나무 그늘을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보다 빠개어 육신의 더움을 취함에 미치치 못하겠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虛空)에 올려 보았으나, 그러나 어찌 나의 손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소리 생길 리 있으랴// 그러나 나의 머리 위, 저 묘막(渺漠)한 천공(天空)에 시방도 오고 가는 신운(神韻)이 없음이 아닐지니 오직 그를 증거할 선(善)한 나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나무의 노래 / 유치환
외로움, 그것이 외로운 것 아니란다/ 그것을 끝내 견뎌남이 진실로 외로운 것/ 세월이여, 얼마나 부질없이 너는/ 내게 청춘을 두고 가고 또 앗아가고/ 그리하여 이렇게 여기에 무료히 세워 두었는가// 무심히 내게 와 깃들이는 바람결이여, 새들이여/ 너희 마음껏 내게서 즐검을 누리고 가라/ 그러나 마침내 너희는 나의 깊은 안에는 닿지 않는 것// 별이여, 오직 나의 별이여/ 밤이며는 너를 우러러 드리는 간곡한 애도에/ 나의 어둔 키는 일곱 곱이나 자라 크나니/ 허구한 낮을 허전히/ 이렇게 오만 바람에 불리우고 섰으매/ 이 애절한 나의 별을 지니지 않은 줄로 아느냐// 아아 이대로 나는 외로우리라, 끝내 정정하리라//
나무여 너에게 할 말이 많다! / 유치환
나무여, 너에게 할 말이 많다!// 오늘도 나는 원남동 대학병원 뜰을 지나 돌아오노라니/ 지척에서 종일을 염열과 스스로의 광분에 쫓기는 거리에는/ 다시 하루의 피치 못할 실의(失意)의 일몰이 밀려오는데/ 여기 너희가 팔 뻗고 우거져 사는 마을은/ 오직 성스레도 짙은 정열과 화평만이 고요히 서려/ 더러는 이마에 낙락히 마지막 햇빛을 걸고/ 바람 기척 하나 느낄 수 없는데도/ 풍월(風月)을 읊조리는 장자(長子)처럼 조용히 몸짓하고 있고/ 그 곁엔 높다랗게 올라앉은 시계탑의 하얀 시간(時間)의 얼굴/ ―지금 그는 19시(時) 45분(分)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론/ 소리 없이 펼쳐 물든 진달래빛 꽃물결과/ 일편(一片)의 조각달―// 아아 여기는 영원한 흐름 중의 일순의 여울목/ 이 지점(地點)에서 나무여, 너희는/ 먼 산악이 더욱 더 안타까이 발돋움하고 우러러 섰듯/ 그지없는 목숨의 몸부림과/ 광막한 비정(非情)을 한품에 안고서/ 이렇듯 너그러이 우주를 거느렸거니// 나무여, 진정 너에겐 할 말이 많다!//
매화나무 / 유치환
겨우 소한(小寒)을 넘어선 뜰에 내려/ 매화나무 가지 아래 서서 보니/ 치운 공중에 가만히 뻗고 있는/ 그 가녀린 가지마다에/ 어느새 어린 꽃봉들이 수없이 생겨 있다// 밤이며는 내가 새벽마다 일어 앉아/ 싸늘한 책장을 손끝으로 넘기며 느끼는/ 엊저녁 그 모색(暮色) 속 한천(寒天) 아래 까무러치듯/ 외로이도 얼어붙던 먼 山山들!/ 그러면서도 무엔지/ 아련하고도 따뜻이 마음 뜸 돌던 느낌을/ 이 가지들도 느껴 왔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표연히 집을 나서/ 어디고 먼 바닷가에나 가서/ 그 바다의 양양(洋洋)함을 바라보고/ 홀로의 생각에 젖었다 오?음!/ 이런 수럿한 심정도 어쩌면/ 저 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적에/ 내가 느껴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매운 바람결이 몰려 닿을 적마다/ 어린 꽃봉들을 머금은 가녀린 가지는/ 외로움에 스스로 다쳐서는 안 된다! 고/ 살래살래 타일르듯 흔들거린다//
거목에게 / 유치환
몇백년이나 났을까 삼백년(三百年)?// ―아니 사백년(四百年)!// 무모(無謀)한 나무여, 미련하고도 허망스런 나무여, 하늘 끝 등성이 저 수수만(數數萬)의 어린 풀들의 그 가냘픈 팔아귀를 내저으며 애닯게도 탄식하며 환호하며 꽃 피우고 씨 맺고 시들고 나고 시드는 그 목숨의 그지없는 애환의 반짝임을 아는가// 아아 진실로 목숨의 생겨남과 한가지로 죽음도 또한 거룩한 은총이거니 사백년(四百年)의 기나긴 각박한 세월을 완(頑)하게도 녹슬고 굳은 몸뚱어리를 하고 하늘의 일각(一角)을 어두이 가리어 선 채 또 하나 마련된 목숨의 지복(至福)을 놓친 아아 이 형벌의 나무여//
고목 / 유치환
내 고궁(古宮) 뒤에 가서 보니/ 뉘 알려지도 않은 높다란 고목 있어/ 적막히 진일(盡日)을 바람에 불리우고 있었도다/ 그는 소경인 양 싹도 틀려지 않고/ 겨우살이 말라 얽힌 앙상한 가지는// 갈리바의 머리깔처럼 오작(烏鵲)이 범하는대로/ 오오랜 고독에 무쇠같이 녹쓸어/ 종시 돌아옴이 없는 저 머나먼 자를 향하여/ 소소(嘯嘯)히 탄식하듯 바람에 울고 있었도다//
노송 / 유치환
아득한 기억의 연령을 넘어서 여기/ 짐승같이 땅을 뚫고 융융히 자랐나니/ 이미 몸둥이는 용의 비늘을 입고/ 소소히 허공을 향하여 여울을 부르며/ 세기의 계절 위에 오히려 정정히 푸르러/ 전전 반축하는 고독한 지표의 일변에/ 치어든 이 불사의 원념을 알라.//
송림(松林)에 와서 / 유치환
정정(亭亭)히 우거 선 노송(老松) 새에 오니/ 써늘히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 숙연(肅然)한 기운은 무엇인가.// 보아 해야 두루 목석(木石)들뿐인데/ 꿇어앉혀 바위는 이끼를 씌우고/ 나무는 짐승 같은 비늘을 입혀/ 험상스리 하늘까지 뽑아 세워들/ 대령하고 기다리는 이것은 무엇인가.// 아득히 바람소리 교향(交響)하는 시공(時空) 이편/ 하마 지엄한 기침 소리 나실 듯 둘러 서/ 외롭느니 슬프느니 그립느니 하는 따위/ 목숨의 하잖은 몸부림 같은 것은/ 아예 아랑곳없는 이것은 무엇인가.//
솔밭에 와서 / 유치환
솔밭에는 솔바람 여울이 울고/ 솔바람 여울 위에 가치떼 설레고/ 가치 설레는 위에 하늘만 푸르고/ 내사 외로워 생각이고 무에고//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 유치환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 해바라기들 새에 서서/ 나도 해바라기가 되려오.// 황금사자(黃金獅子) 나룻/ 오만(傲慢)한 왕후(王候)의 몸매로/ 진종일 찍소리 없이/ 삼복(三伏)의 염천(炎天)을 노리고 서서/ 눈부시어 요요히 호접(蝴蝶)도 못오는 백주(白書)!/ 한 점 회의(懷疑)도 감상(感傷)도 용납치 않는/ 그 불령(不逞)스런 의지(意志)의 바다의 한 분신(分身)이 되려오.//
죽(竹) / 유치환
흙을 밀고 생겨난 죽순ㅅ적 뜻을 그대로/ 무엇에도 개의챦고 호올로 푸르러/ 구름송이 스쳐가는 창궁(蒼穹)을 향하야/ 오로지 마음을 다하는 이 청렴의 대는/ 노란 주둥이 새새끼 굴러들 듯 날러 앉으면/ 당장에 한그루 수묵(水墨)이 향그론 그림이 되고/ 푸른 달빛과 소슬한 바람이 여기 잠기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유현(幽玄)한 죽림의 일원이 되다//
꽃 / 유치환
가을이 접어드니 어디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와 모우기를 하였다/ 봉숭아 금전화 맨드라미 나팔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수선화 / 유치환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항가새꽃 / 유치환
어느 그린 이 있어 이같이 호젓이 살 수 있느니 항가새꽃/ 여기도 좋으이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내 여기도 좋으이/ 하세월 가도 하늘 건너는 먼 솔바람 소리도 내려오지 않는 빈/ 골짜기/ 어느 적 생긴 오솔길 있어도 옛같이 인기척 멀어/ 멧새 와서 인사 없이 빠알간 지뤼씨 쪼다 가고/ 옆엣 덤불에 숨어 풀벌레 두고두고 시름없이 울다 말 뿐/ 스며오듯 산그늘 기어내리면 아득히 외론 대로 밤이 눈감고 오고/ 그 외롬 벗겨지면 다시 무한 겨운 하루가 있는 곳/ 그대 그린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여기도 즐거웁거니/ 아아 날에 날마다 다소곳이 늘어만 가는/ 항가새꽃 항가새꽃//
치자꽃 / 유치환
저녁 어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가는 고향의 슬프디슬픈 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天幕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복사꽃 피는 날 / 유치환
한풍(寒風)은 가마귄 양 고목에 걸려 남아 있고/ 조망(眺望)은 흐리어 음우(陰雨)를 안은 조춘(早春)의 날/ 내 호젓한 폐원(廢怨)에 와서/ 가느다란 복숭아 마른 가지에/ 새빨갛게 봉오리 틀어오름을 보았나니/ 오오 이 어찌 지극한 감상이리오/ 춘정(春情)은 이미 황막한 풍경에 저류하여/ 이 가느다란 생명의 가지는 뉘 몰래 먼저/ 열여덟 아가씨의 풋마음 같은/ 새빨간 순정의 봉오리를 아프게도 틀거니/ 오오 나의 우울은 고루하여 두더지/ 어찌 이 표묘(漂渺)한 계절을 등지고서/ 호을로 애꿎이 가시길을 가려는고// 오오 복사꽃 피는 날 온종일을/ 암(癌)같이 결리는 나의 심사여//
광야에 와서 / 유치환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의주 길 / 유치환
장안을 나서서 북쪽가는 천 리 길/ 아카시아 꽃수술에 꿀벌 엉기는/ 이 길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안하리니// 속눈썹 감실감실 사랑한 너야/ 이대로 고이 나는 너를 하직하노니/ 누가 묻거들랑 울지 말고 모른다 하소.// 천리 길 너 생각에 하염없이 걷노라면/ 하늘도 따사로이, 뒷등도 따사로이/ 가며가며 쉬어쉬어 울 곳도 많아라.//
춘신(春信) / 유치환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석경(夕景) / 유치환
달 희고/ 잔양(殘陽) 가지 끝에 남아 걸려/ 참새떼 마을에 돌아와/ 아이들처럼 법석대는 저녁은/ 땅거미같이 은밀히/ 내 오랜 가향(家鄕) 생각에 늙었음이여//
저녁놀 / 유치환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치환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학(鶴) / 유치환
나는 학이로다// 박모(薄暮)의 수묵색(水墨色) 거리를 가량이면/ 슬픔은 멍인 양 목줄기에 맺히어/ 소리도 소리도 낼 수 없누나// 저마다 저마다 마음 속 적은 고향을 안고/ 창창(蒼蒼)한 담채화 속으로 흘러가건만/ 나는 향수할 가나안의 복(福)된 길도 모르고// 꿈 푸르른 솔바람 소리만/ 아득한 풍랑인 양 머리에 설레노니// 깃은 남루하여 올빼미처럼 춥고/ 자랑은 호을로 높으고 슬프기만 하여/ 내 타고남이 차라리 욕되도다/ 어둑한 저잣가에 지향 없이 서량이면/ 우러러 밤서리와 별빛을 이고/ 나는 한 오래기 갈대인 양// ― 마르는 학이로다//
별 / 유치환
어느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 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별 하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나누어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 밖에 없는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새 / 유치환
12월에 접어드는 추운 하늘 아래/ 먼 소백산맥이 소리 없이 돌아앉은 거리// 하룻날 표연히/ 내 여기에 내린 뜻을 뉘가 알리오// 벗과 만나 받는 술잔도 입에 쓰고/ 오직 한 마리 땅에 내린 새 모양/ 마음 자리 찾지 못하노니//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하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에/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가마귀의 노래 / 유치환
내 오늘 병든 즘생처럼/ 치운 십이월의 벌판으로 호올로 나온 뜻은/ 스스로 비노(悲怒)하야 갈 곳 없고/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로다// 삭풍에 늠렬(凜烈)한 하늘 아래/ 가마귀떼 날러 앉은 벌은 내버린 나누어/ 대지는 얼고/ 초목은 죽고/ 온 것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올 법도 않도다// 그들은 모다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내 또한 그 거리에서 살어/ 오욕(汚辱)을 팔어 인색(吝嗇)의 돈을 버리려 하거늘/ 아아 내 어디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戮屍)하료// 증오하야 해도 나오지 않고/ 날새마자 질타하듯 치웁고 흐리건만/ 그 거리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노니/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가마귀 모양/ 이대로 황망한 벌 끝에 남루히 얼어붙으려 하노라//
향수 / 유치환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여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여/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져 있나니// 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사향(思鄕) / 유치환
향수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어 와/ 내 대신 내 자리에 살째기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 양 밀어 놓고/ 가만히 일어 창에 가 서면/ 푸른 모색(暮色)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 같은 등불 두엇!//
귀고(歸故) / 유치환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松栢)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처럼 다정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크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 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언(行而不言)하시는 아버지께서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칼을 갈라! / 유치환
- 칼 가시오!/ - 칼 가시오!/ 한 사나이 있어 칼을 갈라 외치며 간다.// 그렇다/ 너희 정녕 칼들을 갈라./ 시퍼렇게 칼을 갈아 들고들 나서라.// (…)// 그 환도를 찾아 갈라/ 비수를 찾아 갈라 /식칼마저 모조리 시퍼렇게 내다 갈라.// 그리하여 너희들 마침내 이같이/ 기갈 들여 미치게 한 자를 찾아/ 가위 눌려 뒤집이게 한 자를 찾아/ 손에 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같이 덤벼/ 남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 대로 컥컥 찔러/ 황홀히 뿜어 나는 그 새빨간 선지피를/ 희광이 같이 희희대고 들이켜라는데/ 그리하여 그 목마른 기갈들을 추기라//
광야(曠野)에 와서 / 유치환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 흥안령(興安嶺): 북만주의 지명, 암수(暗愁): 남모르게 품은 근심, 호읍(號泣): 목놓아 큰 소리로 욺
수(首) / 유치환
십이월의 北滿(북만)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가성) 네거리에/ 匪賊(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한천)에 模糊(모호)히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除(제)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法度(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烈(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暝目(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북방(北方) 10월 / 유치환
이곳 시월은 벌써 죽음의 계절의 시초리뇨/ 까마귀는 성(城)귀에 모여들 근심하고/ 다시 천일(天日)도 볼 수 없는 한 장 납빛 하늘은/ 황막한 광야를 철책인 양 눌러 막아/ 아아 북방 이 거대한 울암(鬱暗)의 의지는/ 창부(娼婦)인 양 허무를 안고 나누었나니/ 내 스스로 여기에다 버리려는 고독한 사유도/ 이렇게 적고 찾을 길 없음이여/ 호을로 허물어진 성(城)터에 서건대/ 삭풍에 남은 고량(高梁)대만/ 갈 데 없는 감정인 양 못 견디어 울고/ 한떼 기마(騎馬)의 흙빛 병정 있어/ 인력이 아닌 듯/ 묵묵히 서쪽 벌 끝으로 향하여 달려가도다//
북방추색(北方秋色) / 유치환
먼 북쪽 광야에/ 크낙한 가을이 소리 없이 내려서면// 잎잎이 몸짓하는 고량(高梁)밭 십리(十里) 이랑 새로/ 무량한 탄식같이 떠오르는 하늘!// 석양에 두렁길을 호을로 가량이면/ 애꿎이도 눈부신 제 옷자락에// 서른 여섯 나이가 보람 없이 서글퍼/ 이대로 활개치고 만리(萬里)라도 가고지고//
너에게 / 유치환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을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치환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출생기(出生記) / 유치환
검정 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남쪽 먼 포구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세대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융희(隆熙) 2년!//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多彩)하여/ 지붕에 박넌출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엔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 나를 잉태(孕胎)한 어머니는/ 짐즛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못댁 제삿날밤 열 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삿밥을 먹고 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번문욕례(繁文縟禮) 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신월(新月)같이 슬픈 제 족속의 태반(胎盤)을 보고/ 내 스스로 고고(呱呱)의 곡성(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명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돌메라 이름 지었다오//
목숨 / 유치환
하나 모래알에/ 삼천 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수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한 이 즐거움이여//
병처(病妻) / 유치환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 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에 엉기인 유정(有情)의 거미줄을 관념(觀念)하며/ 요요(遙遙)한 태허(太虛) 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성망(星芒)을 지키며/ 소조(蕭條)히 지저(地底)를 구우는 무색 음풍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윈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 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愛憎)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소조(蕭條)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만약 그대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즘생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죽음 앞에서 / 유치환
그 날 절벽같은 너의 죽음 앞에서/ 다시도 안 열릴 석문을 붙들고/ 아무리 불러 호곡한들/ 내 소리 네가 들으랴?/ 네 소리내게 들리랴?//
산 1 / 유치환
그의 이마에서부터/ 어둔 밤 첫 여명이 떠오르고/ 비 오면 비에 젖는 대로/ 밤이면 또 그의 머리 위에/ 반디처럼 이루날는 어린 별들의 찬란한 보국(譜局)을 이고/ 오오 산이여/ 앓는 듯 대지에 엎드린 채로/ 그 고독한 등을 만리허공(萬里虛空)에 들내어/ 묵연(黙然)히 명목(瞑目)하고 자위하는 너/ ― 산이여/ 내 또한 너처럼 늙노니//
산 4 / 유치환
오오래 내게/ 오르고 싶은 높으고도 슬픈 산(山) 있노니// 내 오늘도 마음 속 이를 념(念)한 채로/ 부질없이 거리에 나와 헤매이며/ 벗을 만나 이야기하는 자리에도/ 향(香)그론 푸른 담배 연기 너머 아늑히/ 그의 아아(峨峨)한 슬픈 용자(容姿)를 보노라// 해 지고/ 등불 켜인 으스름 길을 돌아오노라면/ 어디메 또 이 한밤을/ 그 막막한 어둠 속에 방연(尨然)히 막아 섰을/ 오오 나의 산(山)이여/ 산(山)이여//
산화(山火) 1 / 유치환
뉘가 산을 저렇게 진노하게 하였는가./ 여태껏 참고 견뎌 온 저 산들을/ 뉘가 실없이도 성냥개비를 그려 뎅겨/ 저렇게 무서운 진노에 불을 붙였는가.// 보라/ 몇날 며칠을 두고/ 길길이 타오르며 번져나는 분노의 불길은/ 어두운 야공(夜空)을 아수라(阿修羅)의 하늘처럼 물들여/ 저대로 온 강산(江山)을 태워버릴 듯 그칠 줄을 모르나니.// 누구인가 어벌쩡스럽게/ 두려움에 꽁무니 빼고 숨어 앉았는 자(者)는./ 어서 나오라/ 어서 다들 나와/ 저 무서운 진노 앞에 조아리며 늘어서서/ 진심으로 뉘우침의 마음의 고사를 드려 빌어라.// 아아 뉘가 산을 저렇게 노하게 하였단 말인가.//
산화(山火) 2 / 유치환
날 저문 길가에 나서서들 머언 산(山)불을 보다/ 머언 산(山)불은 산(山)허리를 타고 올라/ 자자(藉藉)한 여주빛 제등행렬인 양 한데/ 뿔뿔히 돌아가 문을 걸고 자는 한밤에도/ 휘ㅅ한 거리에는 어두운 길만 남아 있고/ 옷칠 같은 아득한 가운데/ 머언 산(山)불은 번져 이내 꽃밭이란나//
산처럼 / 유치환
오직 한 장 사모의 푸르름만을 우러러/ 눈은 보지도 않노라/ 귀는 듣지도 않노라// 저 먼 땅끝 닥아 솟은 산,/ 너메 산, 또 그너머/ 가장 아슬히 지켜 선 산 하나--/ 아아 그는 나의 영원한 사모에의 자세// 무수히 침부하는 인간의 애환의 능선 넘어/ 마지막 간구의 그 목마른 발돋움으로/ 계절도 이미 絶한 苛熱에 항시 섰으매// 이 아침날에도/ 그 아린 孤高를 호궤받듯/ 정결히도 백설 신령스리 외로 입혀 있고// 내 또한 한 밤을/ 전전(轉輾)없이 안식함을 얻었음은/ 그 매운 외롬 그같이 설은 축복 입더메서랴// 아아 너는 나의 영원--/ 짐짓 소망없는 저자에/ 더불어 내 차라리 어리숙게 살되// 오직 너에게의 이 푸르름만을 우럴어/ 귀는 듣지 않노라/ 눈은 보지 않노라//
산사(山寺) / 유치환
염(念)하여도 염하여도 무연(無緣)하여/ 솔바람 유현(幽玄)한 탄식에/ 산그늘 사이 기왓골 외로이 늙고// 어두운 법당 안엔/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일월이 낙엽처럼 쌓이는 속에/ 적막히 앉아 기다리시고// 대웅전 돌아가면/ 이름도 까마득한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별 바른 앞뜰의 황국(黃菊)도/ 쓸쓸히 인간의 애환을 여민 채// 먼 마을의 인정스런 낮닭 소리도 안 들리고/ 정적도 그양 법열(法悅)이어서/ 아끼듯 들려오는 조왕당 부엌소리//
석굴암대불(石窟庵大佛) / 유치환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년(千年)을 차거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목숨이란! 목숨이란―/ 억만 년을 원(願) 두어도/ 다시는 못 갖는 것이매/ 이대로는 못 버릴 것이매//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연(蓮)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없이 지새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寂寂)히 눈감고 가부좌하였노니//
세월 / 유치환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여기 외따로이 열려 있는 하늘이 있어// 하냥 외로운 세월이기에/ 나무그늘 아롱대는 뜨락에/ 내려앉는 참새 조찰히 그림자 빛나고// 자고 일고/ 이렇게 아쉬이 삶을 이어감은/ 목숨의 보람 여기 있지 아니함이거니// 먼 산에 雨氣 짙은 양이면/ 자욱 기어드는 안개 되창을 넘어/ 나의 글줄 행결 고독에 근심 배이고//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외따로이 열고 사는 세월이 있어//
슬픔은 불행이 아니다 / 유치환
모색(暮色)이 초연한 거리 끝에 서서/ 내가 이렇게 눈물짓는 것은/ 불행(不幸)하여서가 아니다.// 시방 기척 없이 저무는 먼 산이며/ 거리 위에 아련히 비낀 초생달이며/ 자취 없이 사라지는 놀구름이며-/ 이들의 스스로운 있음과 그 행지(行止)의 뜻을/ 나의 목숨이 새기어 느낄 수 있음의/ 그 행복(幸福)에 흐느껴 눈물짓는 것이다.// - 진실로 진실로/ 의지없고 덧없음으로 하여/ 보배롭고 거룩한 이 꽃받침자리여.//
시인에게 / 유치환
영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정수리 위에 도사려/ 내가 목숨을 목숨함에는/ 솔개에게 모자보다 무연(無緣)한 것.// 이 날 짐짓/ 나를 붙들어 놓지 않는 것은/ 살아 있으므로 살아야 되는 무가내한 설정에/ 비바람에 보듬긴 나무./ 햇빛에 잎새같은 열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의 사무치는 뜨거움에/ 차라리 나는 가두 경세가(經世家).// 마침내 부유의 목숨대로/ 보라빛 한 모금 다비되어/ 영원의 희멀건 상판을 기어 사라질 날이/ 얼마나 시원한 소진이랴.// 그러기에 시인이여/ 오늘 아픈 인생과는 아예 무관한 너는/ 예술과 더불어 곰곰히 영원하라.//
입추 / 유치환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너머 하늘이 한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낙화(落花) / 유치환
돌돌돌 가랑잎을 밀치고/ 어느덧 실개울이 흐르기 시작한 뒷골짝에/ 멧비둘기 종일을 구구구 울고/ 동백꽃 피 뱉고 떨어지는 뜨락// 창(窓)을 열면/ 우유빛 구름 하나 떠 있는 항구(港口)에선/ 언제라도 네가 올 수 있는 뱃고동이/ 오늘도 아니 오더라고/ 목이 찢어지게 알려오노니// 오라 어서 오라/ 행길을 가도 훈훈한 바람결이 꼬옥/ 향긋한 네 살결 냄새가 나는구나/ 네 머리칼이 얼굴을 간질이는구나// 오라 어서 오라/ 나의 기다림도 정녕 한이 있겠거니/ 그때사 네가 온들/ 빈 창(窓) 밖엔/ 멧비둘기만 구구구 울고/ 뜰에는 나의 뱉고 간 피의 낙화!//
낙엽 / 유치환
낙엽이 지니 훠언해진 건너편 등성이에/ 뜻하지 않은 집이 한 채 있고/ 저녁답이 되어 내가 마당에나 나설 양이면/ 그쪽에도 애기를 안은 사나이가 서서/ 외로운 양으로 이편을 바라보고 있다//
철로(鐵路) / 유치환
사나운 정염(情炎)이 불을 품은/ 강철의 기관차 앞에/ 차가이 빛나는 두 줄의 철로는/ 이미 숙인(宿因) 받은 운명의 궤도가 아니라/ 이 거혼(巨魂)의/ - 스스로 취하는 길/ - 취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길/ 의지를 의지하는 심각한 고행의 길이로다/ 비끼면 나락(奈落)!/ 또한 빠르지 않으면 안 되나니/ 오오 한자락 자학에도 가까운 의욕과 열의의 길이로다// 보라/ 처참한 폭풍우의 암야(暗夜)에 묻히어/ 말없이 가리치는 두 줄의 철로를/ 그리고 한결같이 굴러가는/ 신념의 피의 불꽃의 화차(火車)를//
차창에서 / 유치환
달아 나오듯 하여/ 모처럼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새에 자리 잡고 앉으면/ 이게 마음 편안함이여/ 의리니 애정이니/ 그 습(濕)하고 거미줄 같은 속에 묻히어/ 나는 이렇게 살아 나왔던가/ 기름대 저린 ‘유 치환’이/ 이름마저 헌 벙거지처럼 벗어 팽가치고/ 나는 어느 항구의 뒷골목으로 가서/ 고향도 없는 한 인족(人足)이 되자/ 하여 명절날이나 되거든/ 인조 조끼나 하나 사 입고/ 제법 먼 고향을 생각하자/ 모처럼 만에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틈에 자리 잡고/ 홀로 차창에 붙어 앉으면/ 내만의 생각의 즐거운 외로움에/ 이 길이 마지막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라도/ 나는 하나도 슬퍼하지 않으리//
시일(市日) / 유치환
흰 인파는 땅에 넘치고 훤연(喧然)하건만/ 공중에는 나는 새 그림자 하나 없어/ ― 적요(寂寥)는/ 어안(魚眼)같이 백일(白日)과 함께 살도다//
풍일(風日) / 유치환
바람이 바닷소리를 하고 부는 날은/ 보오얀 사진(沙塵)에 하늘도 산도 안 보이고/ 슬픈 햇빛은 마음의 한편만을 비추고/ 어디를 가도 바닷소리만 들리어/ 나는 창망한 변두리의 한 개 외로운 바위!//
격투(格鬪) / 유치환
창망(滄茫)한 수천(水天)에 진일을 낭랑(朗朗)히 할 일 없는 파랑(波浪)을 굴르므로 헛헛한 욕정(慾情)의 도리어 하늘같이 부풀기만 부풀기만 함이여.// 드디어 가눌 길 없던 그 미친 마을이―// 멀리 대해(大海)를 바라다보는 언덕, 눈썹 위 아득한 천상의 요염(妖艶)한 숨가쁜 정염(情炎)이 문득 여기 땅 위에 꿈 이룬 화림(花林)을 무도히도 노략하여// 그의 불지른 낭자한 비바람은 시방 때 아닌 요란(燎爛)한 꽃보라를 대작(大作)하였나니.// 보라 여기에 아리따와 차라리 번수에 사는 자(者)와 영원(永遠)을 염원(念願)하여 오히려 창광(猖狂)하는 자(者)의// 아아 이 현란한 격투 처참한 이 상극(相剋)을!//
감옥묘지(監獄墓地) / 유치환
버릴 대로 버려진 여기 반역의 무덤 위에/ 우거진 쑥대도 노(怒)하여 허허(虛虛)히 웃는가/ 진실로 너희 인간이었기에/ 한 개 빨가숭이, 원죄의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이 굴욕의 골고다에 견마(犬馬)로 버리었거니/ 절치(切齒)하고 무릅쓰는 이 단죄의 채찍이/ 제아무리 모질고 가혹할지라도/ 윤리란! 법도란! 도덕이란!/ 그 엄청난 가면과 위선과 허구를 겨뤄[抗]/ 끝까지 조소 부정(否定)하는 너희의 행위야말로/ 차라리 꽃같이 진한 목숨의 산화(散華)!/ ―다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그 무도(無道)를/ 너희 허구로 고발하라// 이미 값 치지 않은 저희와 나의 삶이었기에/ 혈육도 피하는 이 능멸과 모멸인즉/ 아예 두려워하고 뉘우칠 바 없건마는/ 나의 길을 먼저 간 형제여/ 그 어느 날 마침내 추운 영혼이/ 구원의 문전(門前)에 남루히 이르러/ 고아처럼 채수리고 흐느끼지 않을까를/ 내 오직 저어하고 분히 여길 뿐이어니// 저 썩어진 인간에서 버림받음이야/ 우거진 마른 쑥대도 허허(虛虛)히 웃으라//
울릉도 / 유치환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곽이라사후기행(郭爾羅斯後紀行) / 유치환
1. 조주성(肇州城)// 성문은 또렷이/ 안타깝게도 닿을 데 없는 먼 광야로 열려 있고/ 따뜻이 흐린 초춘(初春)의 조주성은/ 어디선지 낮닭소리 옛적같이 들려오고/ 까마귀 날아 노는 네거리 백양나무 아랜/ 팔리러 온 새끼 당나귀 한 마리 두고/ 서너 사람 한가로이 보고 섰는 밖에// 2. 도리만성(桃李滿城)// 사람도 육축(六畜)같이 슬픈 진눈까비만/ 그지없이 내리는 이 먼 조원(肇源)의 거리는/ 절도(絶島)인 양 한 자욱도 나갈 데 없고/ 호을로 사회교육관의 초옥(草屋)으로 찾아오니/ 녹슬은 난로 연료의 고량(高梁)대만 삭막(索漠)히 쌓여 있고/ 도리만성(桃李滿城)의 족자 하나 바람벽에 걸렸나니/ 아지랑이 저물은 먼 봄하늘 아래/ 꿈인 양 적적(寂寂)히 떠오른 그 도원성(桃源城) 아래 와서/ 나는 우러러 가장 남루한 나그네였다// 3. 몽기(蒙旗)에 와서// 가도 가도/ 희멀건 하늘이요 끝없는 광야이기에/ 어디로 사람이 오고가는지 알 바 없고/ 멀수록 알뜰한 너 생각 의지하고/ 이 외딴 세상의 외딴 하늘 우러러/ 나는 가축과 더불어 살 수 있으리//
사만둔(沙曼屯) 부근(附近) / 유치환
쓸쓸히 육교의 난간을 비추던 낙조도 사라지고/ 먼 거리로 돌아가는 인차(人車) 소리 끊이고 나면/ 어디선지 말똥 냄새 풍기는 푸른 밤이 고요히 드리워져/ 보슬보슬 별빛 내리는 채전(菜田) 새로/ 화안히 불 밝힌 성글은 창(窓)마다/ 단란한 그림자 크다랗게 서리고/ 이슥하여/ 차창마다 꽃다발 같은 여수를 자옥 실은/ 이십삼시 십칠분 마지막 남행열차(南行列車)가/ 바퀴 소리 멀리 멀리 남기고 굴러간 때는/ 도란도란 이야기에도 지치어/ 마을은 별빛만 찬란하오//
거제도(巨濟島) 둔덕(屯德)골 / 유치환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의 살으신 곳/ 적은 골 안 다가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 왔던가/ 시방도 신농(神農) 적 베틀에 질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칠촌(七寸) 조카 젊은 과수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호연(浩然)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詩書)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증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고치 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 생전 날세고 다니던 밭머리/ 부조(父祖)의 묏가에 부조(父祖)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不惑)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父祖)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日出而耕)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밤 진해만두(鎭海灣頭)에 서서 / 유치환
밤 진해만두(鎭海灣頭)에 서건대/ 시방 진리(眞理)처럼 돌아와 여기에 펼쳐진 것.// 억조(億兆) 성수(星宿)는 어둠을 얼싸안아/ 그 광대(廣大)한 날개를 고요히 내려 펴뜨리고/ 귀를 앗아 가는 우람한 파랑(波浪)의 포호(咆號)는/ 사뭇 허공(虛空)에 울림하여 내뒹굴 뿐이어니// 일찍 한낮의 햇빛과 더불어 다투어 형상(形象)하던/ 산악(山嶽)도 구름도 삼림(森林)도/ 오고 가던 배들도 속절없이 그 자취 감추고/ 여기 일체(一切)를 거부하는 시공(時空)의/ 이 장엄한 향연(饗宴)에 참례하여 서면―// 나여 나여/ 어디메에 더욱 네가 있는가/ 아아 드디어 바람처럼 흩날리고/ 너는 의지(意志), 허무(虛無) 그것이어니// ―이 밤을 낭랑(朗朗)히 울림하라./ 낮게 낮게 날개 펴라.//
마지막 항구 / 유치환
어디를 가도 애 터지게 불어쌓는 바람이여/ 끝끝내 날 죽일 바람이여/ 꿈도 보람도 깡그리 불리우고/ 흘러 흘러 드디어 예까지 왔노니// 여기는 나의 청춘의 마지막 항구/ 오만 기폭은 일제 날 따라/ 한 가지 향을 하고 못 견디어 퍼덕여라// 마침내 옷자락같이 찢기인/ 나의 목숨이 깃대에서 사라지는 날/ 바람이여 실상 나는 너 안에/ 이미 붉은 장미의 무덤을 지녔더니라//
동해(東海)여 / 유치환
이 길을 가며 가며 비로소 깨닫노니/ ―동해(東海)여// 반만 년을 아니/ 하늘과 땅과 물이 처음 가름되던 그날로부터/ 나의 사랑하는 조국 반도의 산하는/ 당장엔 모를 커다란 애정 같은/ 너의 한결같은 다스림에 이룩되어 왔나니// 창망히 부풀어 구우는 그 푸른 꿈과/ 때로는 파란만장하는 너의 기상은/ 아슬히 산악을 고르고/ 골골이 강과 들을 일으켜/ 여기 깃들인 가난한 백성과/ 그의 오랜 성쇠를 간곡히 지켜 왔나니// 그렇기에 나랏일이 근심스런 오늘은/ 자옥히 우수의 운하(雲霞)에 잠기어 나뉘었노니/ 아아 나의 조국의 어머니 동해여 동해!//
동해안에서 / 유치환
백일(白日)은 중천(中天)에 걸리어 나의 무료에 연(連)하고/ 망망한 조수(潮水)는 헛되이 간만을 거듭하여 지표(地表)를 씻는 곳/ 여기는 나의 적요(寂寥)의 공동(空洞)/ 투명히 절연체 된 망각의 변애(邊涯)어니/ 의미 없는 애수는 드디어 묘막(渺漠)하여 돌아오지 않고/ 오로지 무념(無念)한 고독은 한 마리 소해(小蟹)에 멸(滅)하나니/ 나는 호을로 이 무인(無人)한 백사(白沙) 위에/ 걸인처럼 인생을 나태하노라//
봄바다 / 유치환
한창 꿀벌이 닝닝거리는 살구꽃이 피어 있는/ 여기 동대신동(東大新洞) 한 모퉁이 채마밭 옆댕길을/ 시방 나비가 앞서가고 내가 따라가고/ 머리를 돌리면 멀리 거리 위에 치쳐오른/ 아아 묘묘한 봄바다 푸른 수평선//
단애(斷崖) / 유치환
거기엔 저 천공(天空)으로 뻗으려는 절정이 없다/ 오직 발알로 깎여 떨어진 천길의 나락// 어느 짬 우주의 윤회에서 생긴 지락(地落)이/ 오오랜 햇살과 비바람을 겪고/ 스스로 한 풍모를 갖추었나니// 한 줄기 푸른 칡도 기어오르지 못하는/ 천년의 절망에 지꿎이 늙어/ 이 우울 무사(無事)한 지표(地表)에 절박한/ 아아 저 독올(禿兀)한 불모의 면상을 보라//
경이(驚異)는 이렇게 나의 신변에 있었도다 / 유치환
저물도록 학교에서 아이 돌아오지 않아/ 그를 기다려 저녁 한길로 나가보니/ 보오얀 초생달은 거리 끝에 꿈같이 비껴 있고/ 느릅나무 그늘 새로 화안히 불 밝힌 우리 집 영머리엔/ 북두성좌의 그 찬란한 보국(譜局)이 신비론 푯대처럼 지켜 있나니/ 때로는 하나이 병으로 눕고/ 또는 구차함에 항상 마음 조일지라도/ 도련도련 이뤄지는 너무나 의고(擬古)한 단란을/ 먼 천상(天上)에선 밤마다 이렇게 지켜 있고/ 인간의 수수한 영위(營爲)에/ 우주의 무궁함이 이렇듯 맑게 인연 되어 있었나니/ 아이야 어서 돌아와 손목 잡고/ 북두성좌가 지켜 있는 우리 집으로 가자//
그의 일단(一團) / 유치환
길 떠날 채비에/ 너희끼린 지줄대며 한창 법석이었으리니/ 나는 몰랐구나 제비야/ 너희 떠난 뒤의 조선 하늘은/ 아아 이렇게 비어 있다//
깨우침 / 유치환
깊은 잠결의 어느 겨를에 생겼음인지 한결같이 울려 오는 낭랑한 먼 다듬이 소리는 한 홰 두 홰 간곡히 외치는 닭 울음소리로 더불어 겨우 짐작할 수 있는 새벽의 가차워옴에 따라 점점 맑아질 따름이었다// 열사흘 달은 어느덧 서쪽 대밭 위에 기울고 마을은 집집이 지닌 한량없이 아늑한 제 그늘에 가리어 누리는 늘어진 안식도 이미 몇 고비를 무르익은 무렵 차라리 먼 암자의 인경소리는 겨을한 중의 선하품과 시금한 눈시울의 여운을 늘여뜨려 오건만 어느 마을 방 어둑한 등잔 아래 초롱초롱 맑은 눈매와 단정한 앉음새로 홀로 일어 깨우치는 이 여인의 다듬이 소리는 물 같은 밤 고요의 온갖에 울림하여 남김없는 그 대기(大氣)의 무늬는 드디어 깊이 잠든 먼 별들까지 즐거운 선율로 눈뜨이고 다시 몇 억만광년(億萬光年)을 인과불멸(因果不滅)의 법칙과도 같이 무궁으로 무궁으로 번지어 갈지니// 저 먼 동방(東方)의 항가새꽃빛 새벽을 부르며 부르며―//
뉘가 이것을 만들었는가 / 유치환
표표히 고독한 옷자락을 나부끼며 저 무인(無人)한 바닷가를 거닐어/ 거기에 이름 없이 굴러 있는 한 개 고둥껍질을 줍거들랑/ 다시 한 번 인류(人類)의 가장 소박(素朴)한 지식(知識)으로 돌아가 너는 의문(疑問)하라./ 진주(眞珠) 바탕에 아련히 무지개빛 감도는 이 아름다운 성곽(城郭)은/ 진실로 뉘가 이것을 만들었는가?/ 사람의 솜씨런가?/ 또한 인위(人爲)와 천연(天然)은 무엇으로 분별하는가?/ 요행 너의 적은 식(識)이/ 이는 자연(自然)의 무위(無爲)한 해학(諧謔)의 소치(所致)가 아니라/ 일찍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宇宙)에 생(生)을 받은 한 슬픈 복족류(腹足類)의/ 그의 절대(絶對)한 생명(生命)의 영위(營爲)에서 결과(結果)된 바 건축(建築)임을 깨칠진대/ 그러면 이 묘막(杳漠)한 바닷가에 밤을 낮으로/ 첩첩 파도(波濤)를 아득히 굴러 오는 보라빛 바람이 스쳐 울 적마다/ 듣는 이 없는 절묘(絶妙)한 가락을 은은히 젓대 부는 무수한 이 유적(遺蹟)들이/ 한결같이 한가지 방향(方向)으로 꿈꾸듯 또아리 틀어 앉았음은/ 아아 또한 어느 뉘 뜻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거느렸음이런가.// 표표히 옷자락을 나부끼고 무인(無人)한 바닷가를 거닐어/ 거기에 버려진 한개 고둥껍질을 주워 보면/ 그지없이 적은 한낱 석회질(石灰質)의 이 빈 물체는/ 그가 잣[紡]는 상념(想念)은 상념(想念)을 불러 요요히 끝간 데를 모르거늘/ 아아 너는 우러러 표묘(漂渺)한 천지간(天地間)에 물으라./ 진실로 진실로 뉘가 이것을 만들었는가?//
대인(待人) / 유치환
나날은 훠언히 하늘만 뜨는 것./ 재 넘어도 뱃길로도/ 아무도 안 오는 것./ 한 잎 두 잎 젊음만/ 꽃잎 지는 것.//
돌아오지 않는 비행기(飛行機) / 유치환
그날 X도(島)의 기지를 출발한 그의 애기(愛機)는 예정의 시간이 지나도 다음 착륙지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지점에 불시착을 하였단 말인가 불안은 아무리 그를 불러내어도 종시 이렇다 할 신호조차 없다 묘연(杳然)한 그의 행방을 알아내기에 세계 각국의 공항과 공항이 이루 전파(電波)의 접촉을 거듭하여 보아도 위대한 X국(國) 해군(海軍)의 힘마저 빌려 반드시 있어야 할 범위 안을 샅샅이 찾아 보아도 마침내 기체의 유편(遺片)조차 얻어볼 수 없다/ 그러면 이 동그란 지구의 어디메에 그가 있단 말인가/ 저 공막(空漠)한 허공으로라도 내쳐 사라져 가 버렸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내가 잡은 조종간을 어느 방향으로 돌리지 않으리라 이 공막(空漠)한 길 없는 길 ― 온갖 악덕(惡德)과 애노(哀怒)와 또한 순정(純情)의 마음 저림이 함께 있는 저자에 살며/ (어느 패륜(悖倫)의 뒷골목에서 내 보람 없이 비명(非命)하기로 애석잖는 목숨이여!)/ 아아 이 헛헛한 허공! 갈수록 아득히 두고 온 인간 삶의 환호가 등불처럼 마음 끄는 이 무한 고독을 헤치고 이대로 나는 나의 길을 가리니/ 어느 날 뜻않이 나의 자리 비었음을 보거들랑 사랑이여 원수여 그날 그렇게 죽자 하던 은수(恩讐)를 넘어―오늘이 너와의 있음은 진정 증거할 수 없는 바람의 몸짓일 뿐, 마침내 저 허무로!/ 표표히 왔던 길 다시 돌아감이 있음을 정녕 보아라//
문을 바르며 / 유치환
울 가에 황국(黃菊)도 이미 늦은 뜰에 내려/ 겨울맞이 문장지를 바르노라면/ 하얀 종이의 석양볕에 눈에 스밈이여.// 첫째는 시집 가고/ 둘째는 타관으로 보내고/ 한 겹 창호지로도 족히/ 몇 아닌 식구의/ 추위와 욕됨을 가릴 수 있겠거늘/ 아내여/ 가난함에 애태우지 말라./ 또한 가난함에 허물 있이 말라./ 진실로 빈한(貧寒)보다 죄 된/ 숱한 불의(不義)가 있음을 우리는 알거니.// 얼른 이 문짝을 발라 치우고/ 저녁놀이 뜨거들랑/ 뒷산 언덕에 올라/ 고운 꼭두서니빛으로 물든 먼 세상의/ 사람들의 사는 양을 바라다 구경하자.//
박쥐 / 유치환
너는 본래 기는 짐승/ 무엇이 싫어서/ 땅과 낮을 피하여/ 음습한 폐가의 지붕 밑에 숨어/ 파리한 환상과 괴몽(怪夢)에/ 몸을 야위고/ 날개를 길러/ 저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서/ 호을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비력(非力)의 시(詩) / 유치환
우환은 사자(獅子) 신중(身中)의 벌레/ 자학의 잔은 담즙같이 쓰도다/ 진실로 백일(白日)이 무슨 의미러뇨/ 나는 비력(非力)하여 앉은뱅이/ 일력(日曆)은 헛되이 모가지에 오욕의 연륜만 끼치고/ 남은 것은 오직 짐승 같은 비노(悲怒)이어늘/ 말하라 그대 어떻게 오늘날을 안여(晏如)하느뇨//
비새 / 유치환
전갈도 없이 아까 너희/ 흐린 나의 화초밭 새에 나타나/ 이루 우짖다 가 버리더니/ 이렇게 세찬 비바람을/ 나는 이제사 맞이하고 깨닫는고야//
소리개 / 유치환
어디서 창랑의 물결 새에서 생겨난 것./ 저 창궁(蒼穹)의 깊은 남벽(藍碧)이 방울져 떨어진 것/ 아아 밝은 칠월달 하늘에/ 높이 뜬 맑은 적은 넋이여/ 오안(傲岸)하게도/ 동물성의 땅의 집념을 떠나서/ 모든 애념(愛念)과 인연의 번쇄함을 떠나서/ 사람이 다스리는 세계를 떠나서/ 그는 저만의 삼가하고도 방첨(放瞻)한 넋을 타고/ 저 무변대(無邊大)한 천공(天空)을 날아/ 거기 정사(靜思)의 닻을 고요히 놓고/ 황홀한 그의 꿈을/ 백일(白日)의 세계 위에 높이 날개 편/ 아아 저 소리개//
송가(頌歌) / 유치환
쫓기인 카인처럼/ 저희 오오래 어두운 슬픔에 태었으되/ 어찌 이 환난을 짐승이 되어선들 겪어나지 못하료/ 저 머언 새벽날 미개의 종족이/ 어느 암상(岩上)에 활과 살을 팔짱에 끼고 서서/ 크낙한 향로(香爐)인 양, 자운(紫雲) 속에 밝아오는 연만(連巒)을 우러러/ 염원하여 저들의 융성을 맹세하고 여기 만년/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저희와 함께 있었고/ 풍상(風霜)은 오로지 좋은 시련이 되었거늘/ 오늘 쓰라린 인고의 울혈(鬱血) 속에 오히려 맥맥히/ 그 정한(精悍)하던 저희 발상(發祥)의 거룩한 피를 기억하고/ 그날 산전에 유량히 노래하던 야성(野性)의 교망(翹望)이/ 저희의 귀에 다시금 맹아리처럼 새로웁도다/ 항상 저희는 이렇듯/ 슬프고도 오롯한 계도(系圖)를 자랑으로 받듦으로/ 머언 유업(遺業)을 그대로 이어/ 오직 옳고 강하기를 소망하고/ 좋은 원수를 일컫되 간사함은 미워하고/ 어떠한 악의와 모함에도 견디어/ 끝내 굴종에 길들지 않고/ 하여 눈은 눈으로!/ 이는 죽음과 같은 저희의 피의 법도(法度)가 되어지이다//
아기 / 유치환
아기야. 너는 어디서 온 나그네냐? 보는 것, 듯는 것, 만 가지가 신기롭고 이상하기만 하여그같이 연거푸 울음을 쏟뜨리는 너는, ―몇 살이지? ―네 살? 어쩌면 네가 떠나 온 그 나라에선 네가 집 나간 지 나흘째밖에 아닌지 모르겠구나!//
악대(樂隊) / 유치환
하늘은 음산히 치웁고/ 눈 나리려는 날/ 낮게 웅크린 회빛 거리를/ 한 악대의 행렬은 지나가나니/ 반향(反響)도 없는 허공에 나팔을 높이 불고// 귀도 무너지라듯 북을 울리며/ 가난한 아이들은 허리를 구부려/ 깃대에는 핏기 없는 내장을 매달아 메고/ 무거이 앞뒤를 따랐나니// 아아 이 파리한 인생의 행렬은/ 무엇을 보이려 함이런고/ 무엇을 알리려 함이런고//
어느 갈매기 / 유치환
창광부지소구(猖狂不知所求)/ 부유부지소주(浮游不知所住)// 나의 세상은 모두가 서툴렀거늘/ 만사는 될 대로 되는 것이어늘// 밤비 나리는 도회여/ 이 밤 호면(湖面) 같은 나의 포도(鋪道)에/ 아롱이는 등(燈)들도 저윽이 구슬퍼/ 나는 젖는 대로 비에 젖는/ 어느 한 마리 외로운 갈매기로다// 원(願)하여 이룬 바 없고/ 회한은 오직 병 같아// 내 무뢰한같이 헐한 주점에 앉아/ 목을 메우는 한 잔 호주(胡酒)에/ 오늘밤 어느 갈매기처럼 오열(嗚咽)하노니/ 오오 나의 골육이여 너는 어느 때/ 개인 너의 하늘을 깨달으려느뇨//
어리석어 / 유치환
내 여기 어리석게 섰으되/ 유구(悠久) 반만 년의 광망(光芒)의 끝머리에 있노니// 풍수(風水)와 사대(事大)의 욕된 병도/ 오히려 애닯게 울고 온 나의 울음// 목마르면 물 마시고/ 별 뜨면 잠자고/ 어떤 오욕의 비와 바람에도/ 오직 족속에의 슬픔만으로 견디어 왔나니// 아아 나의 피는 나의 조국!// 오작떼 우짖는 어느 고독한 골짜기로 쫓길지라도/ 나는 나의 의(義)로움에/ 끝내 어리석어 짐승으로 죽게 하라//
원수(怨讐) / 유치환
내 애련(愛憐)에 피(疲)로운 날/ 차라리 원수를 생각노라./ 어디메 나의 원수여 있느뇨/ 내 오늘 그를 만나 입맞추려 하노니/ 오직 그의 비수(匕首)를 품은 악의(惡意) 앞에서만/ 나는 항상 옳고 강(强)하였거늘.//
절명지(絶命地) / 유치환
고향도 사랑도 회의도 버리고/ 여기에 굳이 입명(立命)하려는 길에/ 광야는 음우(陰雨)에 바다처럼 황막히 거칠어/ 타고 가는 망아지를 소주(小舟)인 양 추녀끝에 매어두고/ 낯설은 호인(胡人)의 객잔(客棧)에 홀로 들어앉으면/ 오열인 양 회한이여 넋을 쪼아 시험하라/ 내 여기에 소리 없이 죽기로/ 나의 인생은 다시도 기억치 않으리니//
정적(靜寂) / 유치환
불타는 듯한 정력에 넘치는 칠월달 한낮에/ 가만히 흐르는 이 정적이여// 마당가에 굴러 있는 한 적다란 존재―/ 내려쪼이는 단양 아래 점점이 쪼그린 적은 돌멩이여/ 끝내 말없는 내 넋의 말과 또 그의 하이함을/ 나는 너게서 보노니/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그림자 알풋이 자라나서/ 아아 드디어 온 누리를 둘러싸고/ 내 넋의 그림자만의 밤이 되리라// 그러나 지금은 한낮, 그림자도 없이/ 불타는 단양 아래 쪼그려/ 하이한 하이한 꿈에 싸였나니/ 적은 돌멩이여, 오오 나의 넋이여//
오월우(五月雨) / 유치환
어디메 요란한 화림(花林)을/ 낭자하게 무찌르고 온 비는 또/ 나의 창(窓) 앞에 종일을 붙어서서/ 비럭지처럼 무엇을 조르기만 한다//
조춘(早春) / 유치환
밤새 자애로운 봄비의 다스림에/ 태초의 첫날처럼 반짝 깨어난 아침// 발돋움하고 빨래 너는 아내의 모습도 어여쁘고/ 마을 위 고목가지에 깍깍이는 까치소리도 기름져// 흠뻑 물오른 검은 가지, 엄지 같은 움/ 하늘엔 자양(滋養)한 햇발이 우유처럼 자옥하다//
일모(日暮)에 / 유치환
만 번을 뉘우쳐도 미칠 길 없는/ 드디어 날 떨어진 이때에도/ 동해는 사뭇 못내 애달파 딩굴고/ 그 열모(熱慕)에 가사(袈裟)는 젖어/ 아득한 금강(金剛)은 더욱 고독에 우러른다//
주사(蛛絲) / 유치환
우주란 사유(思惟)!/ 무한대한 그 일각(一角)에다/ 한 뼘 은실 그물을 치고/ 비늘 반짝이는 적은 사상(思想)을/ 가만히 지켜 고기잡이하는 자//
지연(紙鳶) / 유치환
우러르면 만만(滿滿)한 한천(寒天)에 지연(紙鳶) 몇 개/ 나의 향수(鄕愁)는 또한 천심(天心)에도 있었노라//
창천(蒼天)에 취(醉)하다 / 유치환
저 산악들이 지그시 견디고 있는 것// 무(無) 위에 무(無), 그 위에 또 무(無), 또 그 위에 또 무(無)……/ 오늘 영취산(靈鷲山) 연봉(連峰) 위 중중(重重)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은/ 상제(上帝)의 처소 앞 조요로운 댓돌까지 화안히 보이도록/ 으리으리 투철하고 짙푸르러/ 이렇게 우러러보노라도 나는 취한다, 취해 온다// 시방 저 창창(蒼蒼)한 하늘과 산악을 대하고서/ 내가 황홀히 취케 되는 내 안에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저 창창(蒼蒼)한 하늘과 산악을 대하고 서면/ 나를 무한한 법열(法悅)의 열반으로 이끌어가는 연유는 무엇인가?// 슬프게도 가멸(可滅)한 목숨을 내게 보내/ 스스로를 엄연히 형자(刑姿)하듯이/ 다만 흙과 바위로 된 산악이여, 너희가 있으므로/ 이 무량광대한 실재―/ 시방 저 영취산(靈鷲山) 연봉(連峰) 위에 커다랗게 날개 펴뜨리고/ 걸터 있는 것// 나를 붙들어다 저 상상봉(上上峰)에 비끄러매어/ 나의 오장(五臟)을 쪼아 뜯어먹여 다오, 푸로메듀스처럼/ 그 가열한 발톱과 부리의 의지로써/ ―아아 나는 취한다/ 취하여 그만 여게 풀섶에 쓰러지것다//
초려(焦慮) -시계(時計)! 네 년석이 생각느니보다 시대(時代)는 저물었다. ―보들레르 / 유치환
나는 초려(焦慮)의 까마귀, 고독에 암울한 나의 나날을 어디로 향을 하고 이 포호(咆號)를 보내랴/ 뉘는 이르기를 세월이 좀먹느냐고, 아니로다 아니로다/ 일순(一瞬)의 멎음 없이 사멸하여가는 시간을 정녕 나에게서 볼지니/ 냉혹(冷酷)히 내 위에 임(臨)하여 나보다 오직 완전하고 영원한 그의 존재(存在)를 증거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 왔거늘/ 만져보라 각각으로 목석같이 굳어가는 나의 안타까운 목숨의 단층(斷層)을// 아아 이미 회한(悔恨)에 낡아빠진 이 초려(焦慮)를 박제하여 등에 지고 광야같이 저물은 저자에 서서 나는 나사레 사람처럼 까마귀처럼 외쳐 이를 증거하랴//
추양(秋陽) / 유치환
눈물나게 눈부신 백금(白金)빛 구름이/ 멎고 안 가는 날이 많은 거리는/ 행결 오정이 짧아지고/ 사람들은 서글퍼/ 발자욱마다 설운 목금(木琴) 소리가 울리었다//
한구(寒鳩) / 유치환
날씨가 이렇게 찌푸려 치운데야/ 먼 웃녘은 정녕 눈이 대단한가베/ 잎 다 진 언덕 가지 높이 모여 앉아/ 어젯밤 꿈에 보던 그 한창 눈보라를/ 지향 없이 바라보는 멧비둘기 슬픈 얼굴들//
할렐루야 / 유치환
마침내 절통한 억울이/ 이 허허(虛虛)로운 홍소(哄笑)로 통함을 아느냐// 보라 여기에 한 미치광이 여인은 가나니/ 차라리 왕녀처럼 부끄러운 데를 넝마로써 가리우고/ 우러르면 해바라기 같은 눈부신 햇님이/ 몇 개라도 푸른 공중에 웃고 있어/ 거리에 넘치는 이 숱한 고양이들은/ 귀여운 내 사내 자식새끼 몸종들이란다께// 권도라면 개 같은 아유구용!/ 법과 제도의 허울 뒤에 숨겨진/ 갖은 불법과 무도의 거미줄을 타고/ 거짓과 인색과 간사와 비겁의 소용돌이 속/ 이 미끈한 외면치레들이 얼마나 고우냐 보란다께// 헐벗기고 짓밟히고 내쫓기는/ 가난하고 약한 자(者)의 화려한 꽃밭에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천주(天主)에게 드리는 영광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우냐 들으란다께// 모조리 잘리우면 천지(天地)가 다 내 것 됨을 아느냐/ 절통한 억울이 커다란 홍소(哄笑)로 통함을 아느냐//
호천(好天) / 유치환
오만분지일(五萬分之一)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섰는/ 연대장의 넓죽한 어깨 위에/ 어디서 잠자리가 한 마리 와서 앉는다// 멀리 영흥만(永興灣) 쪽으로 고요히 흐르는 것은/ 구름인가/ 포연(砲煙)인가//
황혼(黃昏)에서 / 유치환
뉘가 이 아기를/ 이렇게도 설게 울게 하는가.// 서천(西天)을 물들였던 놀구름도 사라지고/ 이제 황혼이 자욱 기어 드는 거리에/ 다박머리 아기 하나 울고 울고 섰나니.// `아가야 엄마는?/ 너이 집은 어디?'/ 울다 말고 말꾸러미 쳐다보는/ 가득 눈물 어린 끝없이 어진 눈.// 까만 동자에 비취는 세상이 그 얼마만 한들/ 오직 하나 세상보다 넓고 큰 것이여./ 너는 무어기에 어디로 가고 없이/ 이 설은 설은 채수림을 모르는가.// 하늘에 놀구름도 사라지고/ 이제 무한한 밤이 닥쳐오는 행길에/ 다박머리 아기 하나 울고 울고 섰나니./ 무엇이 이를/ 이렇게도 설게 울게 하는가.//
유치환(柳致環, 1908년~1967년) 시인, 교육자
호는 청마(靑馬)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외가인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초등학교 입학 전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읍 본가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그는 극작가 유치진의 아우이기도 하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도요야마[豊山]중학에서 4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정지용(鄭芝溶)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9년 첫 번째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발표하였다. 교육계에 투신하였던 그는 시작과 교사 일을 병행하면서 통산 14권에 달하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예술원공로상·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부산남여상(현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도중 1967년 2월 13일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셨다. 사후에 그의 오랜 연고지인 경주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시조 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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