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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심훈 시인

부흐고비 2021. 9. 28. 08:35

심훈의 시가집 〈그날이오면〉은 1932년, 간행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좌절되었다. 저자가 사망한 뒤, 1949년 한성도서(주)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왼쪽 사진은 삼판본으로 세로 18cm×가로 12cm다.(출처: 코베이 경매)

 그날이오면〉시가집을 검색해 목차순으로 발췌하였다.

찾지 못한 시가와 수필은 제목만  적었다. 

 

머리말씀

나는 쓰기를 위해서 시를 써 본 적이 없읍니다. 더구나 시인이 되려는 생각도 해 보지 아니하였읍니다. 다만 닫다가 미칠 듯이 파도치는 정열에 마음이 부대끼면 죄수가 손톱 끝으로 감방의 벽을 긁어 낙서하듯 한 것이 그럭저럭 근 백 수나 되기에 한 곳에 묶어 보다가 이 보잘것없는 시가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가에 관한 이론이나 예투의 겸사는 늘어놓지 않습니다마는 막상 책상 머리에 어중이떠중이 모인 것들을 쓰다듬어 보자니 이목이 반듯한 놈은 거의 한 수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병신 자식이기 때문에 차마 버리기 어렵고 솔직한 내 마음의 결정인지라 지구에게 하소연이나 해 보고 싶은 서글픈 충동으로 누더기를 기워서 조각보를 만들어 본 것입니다.

30이면 선다는데 나는 아직 배밀이도 하지 못합니다. 부질없는 번뇌로, 마음의 방황으로 머리 둘 곳을 모르다가 고개를 쳐드니 어느덧 내 몸이 30의 마루터기 위에 섰읍니다. 걸어온 길바닥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나이만 들었으니 하염없게 생명이 좀 썰린 생각을 할 때마다 몸서리를 치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체법 걸음발을 타게 되는 날까지 내 정감의 파동은 이따위 변변치 못한 기록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리라고 스스로 믿고 기다립니다.

1932년 9월 가배절 이틑날
당진 향제에서 심 훈

 

서 시

밤 / 심훈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 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장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 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 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봄의 서곡

봄의 서곡 / 심훈
동무여,/ 봄의 서곡을 아뢰라,/ 심금엔 먼지 앉고 줄은 낡았으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새 봄의 해조를 뜯으라!// 그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줄이야 말 아니 한들 어느 누가 모르냐/ 그러나 그 아픔은 묵은 설움이/ 엉기어 붙은 영혼의 동통이 아니요/ 입술을 깨물며 새로운 우리의 봄을/ 빚어 내려는 창조의 고통이다./ 진달래 동산에 새 소리 들리거든// 너도 나도 줄거이 노래 부르자/ 범나비 쌍쌍이 날아 들거든/ 우리도 덩달아 어깨춤 추자./ 밤낮으로 탄식만 한다고 우리 봄은 저절로 굴러들지 않으리니 --/ 그대와 나, 개미 떼처럼/ 한데 뭉쳐 꾸준하게 부지런하게/ 땀을 흘리며 폐허를 지키고/ 또 굽히지 말고 싸우며 나가자./ 우리의 역사는 눈물에 미끄러져/ 뒷걸음치지 않으리니--// 동무여,/ 봄의 서곡을 아뢰라/ 심금엔 먼지 않고 줄은 낡았으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닥쳐올 새 봄의 해조를 뜯으라.//

피리 / 심훈
내가 부는 피리 소리 곡조는 몰라도/ 그 사람이 그리워 마디마디 꺽이네./ 길고 가늘게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어서--/ 봄 저녁의 별들만 눌물에 젖네.//

봄비 / 심훈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 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엔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숨도 못이루시네//

거리의 봄 / 심훈
지난 겨울 눈밤에 얼어 죽은 줄 알았던 늙은 거지가/ 쓰레기통 곁에 살아 앉았네/ 허리를 펴며 먼 산을 바라보는 저 눈초리/ 우묵하게 들어간 그 눈동자 속에도/ 봄이 비치는구나 봄빛이 떠도는구나/ 원망스러워도 정든 고토에 찾아드는 봄을/ 한번이라도 전 눈으로 더 보고 싶어서/ 무쇠도 얼어붙은, 그 치운 겨울에 이빨을 앙물고 살아왔구나/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뻗어 볼 시절이 올 것을/ 점쳐 아는 늙은 거지여 그대는 이 땅의 선지자로다// 사랑하는 젊은 벗이여/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거두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탄식의 뿌리를 뽑아버리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아 왔거늘/ 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앞에 오고야 말 것을/ 아아, 어찌하여 그대들은 믿지 않는가?//

영춘 삼수(詠春 三首) / 심훈
책상 위에 꺾어다 꽂은 복숭아꽃/ 잎잎이 시들어선 향기 없이 떨어지니/ 네 열매는 어느 곳에 맺으려는고.// 개천 바닥을 뚫고서 언덕 위로/ 파릇파릇 피어오르는 풀잎새/ 망아지나 되어지고 송아지나 되어지고.// 창경원 벗꽃 구경을/ 휩쓸려 들어갔다가 등을 밀려 나오니/ 街燈(가등) 밑에 기다란 내 그림자여!//

나의 강산이여 / 심훈
높은 곳에 올라 이 땅을 굽어보니/ 큰 봉우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여, 아지랑이 속으로 시선이 녹아드는 곳까지 오똑오똑 솟았다가 굽이쳐 달리는 그 산 줄기 네 품에 뒹굴고 싶도록 아름답구나/ 소나무 감송감송 목멱의 등어리는/ 젖 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은 적의 앞에 뽑아든 칼끝처럼 한번만 찌르면 먹장구름이 쏟아질 듯이/ 아직도 네 기상이 늠름하구나// 에워싼 것이 바다로되 물결이 성내지 않고 샘과 시내로 가늘게 수놓았건만 그 물이 맑고 그 바다 푸르러서/ 한 모금 마시면 한 백년이나 수를 할 듯 퐁퐁퐁 솟아서는 넘쳐 넘쳐 흐르는구나// 할아버지 주무시는 저 산기슭에/ 할미꽃이 졸고 뻐꾹새는 울어예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도 돌아만 가면 저 언덕 우에 편안히 묻어 드리고/ 그 발치에 나도 누워 깊은 설움 잊으오리다// 바가지 쪽 걸머지고 집 떠난 형제/ 거칠은 벌판에 강냉이 이삭을 줍는 자매여/ 부디부디 백골이나마 이 흙 속에 돌아와 묻히소서/ 오오 바라다볼수록 아름다운 나의 강산이여//

어린이날 / 심훈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의 행렬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축여줍니다./ 비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자손들이라,/ 일년의 한 번 나들이에도 깃이 젖습니다그려.// 여러분은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살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만 얼크러진 벌판에도 봄이 오며는/ 하늘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 지둥 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돌아가지이다 / 심훈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동요(童謠)의 나라, 동화(童話)의 세계(世界)로/ 다시 한 번 이몸이 돌아가지이다.// 세상 티끌에 파묻히고/ 살 길에 시달린 몸은/ 선잠 깨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루만지던 엄마의 젖가슴에 안기고 싶습니다, 품기고 싶습니다./ 그 보드랍고 따뜻하던 옛날의 보금자리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오리까/ 엄마의 젖꼭지는 말라 붙었고/ 제 입은 계집의 혀를 빨았습니다/ 엄마의 젖가슴은 식어 버리고/ 제 염통에는 더러운 피가 괴었습니다.// 바람이 부더이다, 바람은 차더이다./ 온 세상이 거칠고 쓸쓸하더이다./ 가는 곳마다 차디 찬 바람을/ 등어리에 끼얹어 주더이다.// 오오 와다오, 포근한 잠아!/ 하염없는 희망을 덮고/ 끊임없이 근심스러운 마음 위에/ 한 번 다시 그 잠이 와주려무나./ `자장자장 잘두 잔다/ 얼뚱아기 잘두 잔다/ 자장골에 들어가니/ 그 골에는 잠두 많어/ 센둥이두 자드란다/ 검둥이두 자드란다'/ 엄마도 이 노래를 부르시다가 꼬박꼬박 졸음이 와서/ 내 이마에다 이마뚝도 하셨었지.// 노곤한 봄날/ 낮잠 주무시는 할아버지의/ 은실 같은 수염을 뽑아 가지고/ 개나리 회초리에 파리를 매어/ `잠자리 종조옹/ 파아리 종조옹/ 이리 오면 사느니라/ 저리 가면 죽느니라……'// 고초 자지 달랑거리고/ 논둑 건너 밭이랑 넘어/ 나비 같이 돌아다니던/ 귀여운 어린 천사(天使)야/ 아아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 함박눈이 울 안을 덮고/ 밭 전(田) 자 들창에 달빛이 물들 때/ 언니하고 자릿속에서 듣던/ 할머니의 까치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도 재미가 있었을까요?/ 여우한테 물려 간 까치 새끼가/ 가엾고 불쌍해서 울었었지요/ 찾아다 달라고 떼를 쓰며 울었었지요.// 아아 옛날의 보금자리에/ 이 몸을 포근히 품어 주소서./ 하루도 열두번이나 거짓말을 시키고도/ 얼굴도 붉히지 말라는 세상이외다./ 사람의 마음도 돈으로 팔고 사는/ 알뜰히도 더러운 세상이외다./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동요(童謠)의 나라, 동화(童話)의 세계(世界)로/ 한 번만 다시 돌아가지이다.//

필경(筆耕) / 심훈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耕]며 나간다./ 한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唯一)한 연장이다./ 거칠은 산(山)기슭에 한 이랑[畝]의 화전(火田)을 일려면/ 돌뿌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 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 그러나 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靜脈)과 동맥(動脈)의 피/ 최후(最後)의 일적(一滴)까지 종이 위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歷史)의 바퀴가 역전(逆轉)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審判)날을 기약(期約)하는 우리의 정성(精誠)이 굽힐 것인가/ 동지(同志)여 우리는 퇴각(退却)을 모르는 전위(前衛)의 투사(鬪士)다./ `박탈(剝奪)', `아사(餓死)', `음독(飮毒)', `자살(自殺)'의 경과보고(經過報告)가 우리의 밥벌이냐/ `아연(俄然)활동(活動)', `검거(檢擧)', `송국(送局)', `판결언도(判決言渡)', `오년(五年)', `십년(十年)'의/ 스코어를 적는 것이 허구한 날의 직책(職責)이란 말이냐/ 창(槍)끝 같이 철필(鐵筆)촉을 베려 모든 암흑면(暗黑面)을 파헤치자/ 샅샅이 파헤쳐 온갖 죄악(罪惡)을 백주(白晝)에 폭로(暴露)하자.// 스위치를 젖쳤느냐 윤전기(輪轉機)가 돌아 가느냐/ 깊은 밤 맹수(猛獸)의 포효(咆哮)와 같은 굉음(轟音)과 함께/ 한 시간(時間)에도 몇 만(萬)장이나 박아 돌리는 활자(活字)의 위력(威力)은,/ 민중(民衆)의 맥박(脈搏)을 이어 주는 우리의 혈압(血壓)이다./ 오오 붓을 잡은 자(者)여 위대(偉大)한 심장(心臟)의 파수병(把守兵)이여!//

명사십리(明沙十里) / 심훈
시푸른 성낸 파도(波濤) 백사장(白沙場)에 몸 부딪고/ 먹장구름 꿈틀거려 바다 위를 짓누르네/ 동해(東海)도 우울(憂鬱)한 품이 날만 못지 않구나.// 풍덩실 몸을 던져 물결과 태껸하니/ 조알만한 세상 근심 거품 같이 흩어지네,/ 물가에 가재 집 지며 하루 해를 보내다.//

          해당화(海棠花) / 심훈


해당화(海棠花) 해당화(海棠花) 명사(明沙) 십리(十里) 해당화(海棠花)야/

한 떨기 홀로 핀 게 가엾어서 꺾었거니/

네 어찌 가시로 찔러 앙갚음을 하느뇨.//

빨간 피 솟아 올라 꽃입술에 물이 드니/

손 끝에 핏방울은 내 입에도 꽃이로다/

바닷가 흰 모래 속에 토닥 토닥 묻었네.//


송도원(松濤園) / 심훈
뛰어라 창랑(滄浪) 우에 굴러라 백사장(白沙場)에/ 여름이 한철이니 기를 펴고 뛰놀아라/ 아담과 이브의 후예(後裔)어니 무슨 설음 있으랴.// 물 넘어 지는 해에 흰 돛이 번득이고/ 백구(白鷗)도 돌아들 제 뭍[陸]에 오른 비너스/ 송풍(松風)에 머리 말리며 파도(波濤) 소리 듣더라//

총석정(叢石亭) / 심훈
멀리선 생황(笙簧)이요 다가 보니 빌딩일세/ 촉촉(矗矗) 능릉(稜稜) 온갖 형용(形容) 엄청나 못 붙일레/ 신기(神奇)타, 조물주(造物主)의 손장난도 이만하면 관주러라.// 벌집같이 모난 돌이 창(槍)대처럼 뻗어 올라/ 창공(蒼空)이 구멍날 듯 비바람 쏟아질 듯/ 격랑(激浪)에 돌뿌리 꺾여질까 소름 오싹 돋더라.//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통곡(痛哭) 속에서 / 심훈
큰 길에 넘치는 백의의 물결 속에서 울음소리 일어난다/ 총검이 번뜩이고 군병의 말발굽소리 소란한 곳에/ 분격한 무리는 몰리며 짓밟히며/ 땅에 엎디어 마지막 비명을 지른다/ 땅을 두드리며 또 하늘을 우러러/ 외치는 소리 느껴 우는 소리 구소(九所)에 사모친다// 검은 ‘댕기’ 드린 소녀여/ 눈송이 같이 소복 입은 소년이여/ 그 무엇이 너희의 작은 가슴을/ 안타깝게 설움에 떨게 하더냐/ 그 뉘라서 저다지도 뜨거운 눈물을/ 어여쁜 너희의 두 눈으로 짜내라 하더냐?// 가지마다 신록(新綠)의 아지랑이가 되어 오르고/ 종달새 시내를 따르는 즐거운 봄날에/ 어찌하여 너희는 벌써 기쁨의 노래를 잊어버렸는가?/ 천진한 너희의 행복마저 차마 어떤 사람이 빼앗아 가던가?// 할아버지여! 할머니여!/ 오직 무덤 속의 안식 밖에 희망이 끊긴 노인네요!/ 조팝에 주름잡힌 얼굴은 누르렀고 세고(世苦)에 등은 굽었거늘/ 창자를 쥐어짜며 애통하시는 양은 차마 뵙기 어렵소이다// 그치시지요 그만 눈물을 거두시지요/ 당신네의 쇠잔한 자골이나마 편안히 묻히고저 하던 이 땅은/ 남의 호미가 샅샅이 파헤친 지 이미 오래거늘/ 지금에 피나게 우신들 한번 간 옛날이/ 다시 돌아올 줄 아십니까?// 해마다 봄마다 새 주인은/ 인정전(仁政殿) 벚꽃 그늘에 잔치를 베풀고/ 이화(梨花)- 이 휘장은 낡은 수레에 붙어/ 티끌만 날리는 폐허를 굴러다녀도/ 일후(日後)란 뉘 있어 길이 설워나 하련마는// 오오 쫓겨 가는 무리여/ 쓰러져 버린 한날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라!/ 덧없는 인생 죽고야 마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어니/ 한 사람의 돌아오지 못함을 굳이 설워하지 말라// 그러나 오오 그러나/ 철천(徹天)의 한을 품은 청상(靑孀)의 설움이로되/ 이웃집 제단조차 무너져 하소연할 곳 없으니/ 목메쳐 울고저 하나 눈물마저 말라붙은/ 억색(抑塞)한 가슴을 이 한날에 두드리며 울자!/ 이마로 흙을 비비며 눈으로 피를 뿜으며//

생명의 한 토막 / 심훈
내가 음악가(音樂家)가 된다면/ 가느다란 줄이나 뜯는/ 제금가(提琴家)는 아니 되려오./ High te.까지나 목청을 끌어 올리는/ `카루소'같은 성악가(聲樂家)가 되거나/ `샬랴핀'만치나 우렁찬 베이스로/ 내 설음과 우리의 설음을 버무려/ 목구멍에 피를 끓이며 영탄 노래를 부르고 싶소.// 장자(腸子) 끝이 묻어나도록 성량(聲量)껏 내뽑다가/ 설음이 복받쳐 몸 둘 곳이 없으면/ 몇만(萬) 청중(聽衆) 앞에서 거꾸러져도 좋겠소.// 내가 화가(畵家)가 된다면/ `피아드리'처럼 고리삭고/ `밀레'처럼 유한(悠閑)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線)이 살아서/ 구름 속 용(龍)같이 꿈틀거리는/ `반․고호'의 필력(筆力)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꺼멓고 싯붉은 원색(原色)만 써서/ 우리의 사는 꼴을 그려는 보아도,/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전(傳)하여 보여 주고 싶지는 않소./ 그 그림은 한칼로 찢어버리기를 바라는 까닭에……// 무엇이 되든지 내 생명(生命)의 한 토막을/ 짧고 굵다랗게 태워 버리고 싶소!//

너에게 무엇을 주랴 / 심훈
너에게 무엇을 주랴/ 맥이 각각(刻刻)으로 끊어지고/ 마지막 숨을 가쁘게 들이모는/ 사랑하는 너에게 무엇을 주랴// 눈물도 소매를 쥐어짜도록 흘려 보았다./ 한숨도 땅이 꺼지도록 쉬어 보았다./ 그래도 네 숨소리는 더욱 가늘어만 가고/ 시방은 신음(呻吟)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물도 한숨도 소용(所用)이 없다/ `죽음'이란 엄숙(嚴肅)한 사실(事實) 앞에는/ 경(經) 읽거나 무꾸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당장에 숨이 끊어지는 너를/ 손 끝맺고 들여다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에게 딸린 생명(生命)이 하나요 둘도 아닌 것을……// 오직 한가지 길이 남았을 뿐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따끈한 피를/ 그 입 속에 방울방울 떨어뜨리자!/ 우리는 반드시 소생(蘇生)할 것을 굳게 믿는다./ 마지막으로 붉은 정성(精誠)을 다하여/ 산 제물(祭物)로 우리의 몸을 너에게 바칠 뿐이다!//

박군의 얼굴 / 심훈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콜>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같이 부풀어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 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에/ 양미간에는 가까이 못 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사람의 박(朴)*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生)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뀌어져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아 박군아 XX*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 경성고보 동창이고 친구인 박헌영이 신의주 사건으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되고 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매우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에 분노하여 시를 지은 것(1927.12.2.)
* 박(朴): 일본 황태자 암살사건에 연루된 아나키스트 박열, C사: 시대일보, 박: 제2차 공산당 사건으로 잡혀 고문을 당하던 끝에 죽은 박순병, XX: 헌영, 네 아내: 주세죽, X: 恨으로 추측

조선은 술을 먹인다 / 심훈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입을 벌리고 독한 술잔으로 들이붓는다// 그네들의 마음은 화장터의 새벽과 같이 쓸쓸하고/ 그네들의 생활은 해수욕장의 가을처럼 공허하여/ 그 마음 그 생활에서 순간이라도 떠나고저 술을 마신다/ 아편 대신으로 죽음 대신으로 알코올을 삼킨다// 가는 곳마다 양조장이요 골목마다 색주가다/ 카페의 의자를 부시고 술잔을 깨뜨리는 사나이가/ 피를 아끼지 않는 조선의 테러리스트요/ 파출소 문 앞에 오줌을 갈기는 주정꾼이/ 이 땅의 가장 용감한 반역자란 말이냐?/ 그렇다면 전봇대를 붙잡고 통곡하는 친구는/ 이 바닥의 비분을 독차지한 지사로구나// 아아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뜻이 굳지 못한 청춘들의 골을 녹이려 한다/ 생나무에 알코올을 끼얹어 태워버리려 한다.//

독백 / 심훈
사랑하는 벗이여/ 슬픈 빛 감추기란 매맞기보다도 어렵소이다/ 온갖 설움을 꿀꺽꿀꺽 참아 넘기고/ 낮에는 히히 허허 실없는 체 하건만/ 쥐죽은 듯한 깊은 밤은 사나이의 통곡장이외다// 사랑하는 벗이여/ 분한 일 참기란 생목숨 끊기보다도 힘드오이다/ 적덩이처럼 치밀어 오르는 가슴의 불길을/ 분화구와 같이 하늘로 뿜어내지도 못하고/ 청춘의 염통을 알콜에나 짓담그려는/ 이 놈의 등어리에 채찍이라도 얹어 주소서// 사랑하는 그대여/ 조상에게 그저 받은 뼈와 살이어늘/ 남은 것이라고는 벌거벗은 알몸 뿐이어늘/ 그것이 아까워 놈들 앞에 절하고 무릎을 꿇는/ 나는 샤일록보다도 더 인색한 놈이외다/ 쌀 삶은 것 먹을 줄이나 아니 그 이름이 사람이외다//

조선의 자매여 -홍(洪), 김(金) 두 여성(女性)의 변사(變死)를 보고 / 심훈
나는 그대들의 죽음이 너무나 참혹(慘酷)하여 눈물지었노라/ 그대들의 흘린 피가 너무나 값 없음을 아끼어 울었노라/ 우리는 흙 한 줌 보태기에도 오히려 작은 알몸 뿐이다/ 강아지에게 던져도 씹지 않을 고기덩이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생선(生鮮) 같은 청춘(靑春)의 몸을 철로(鐵路)바탕에 쌍(雙)으로 던져/ 이십년(二十年)이나 자라난 사지(四肢)를 잘리고 뼈를 갈아 버리다니/ 그 한 점의 살 한 방울의 피가 그다지 값 없는 줄 알았던가// 오 약(弱)하고 가엾은 이 땅의 누이들이여,/ 그대들이 저주(詛呪)한 모든 제도(制度)는 본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랑도 허무(虛無)도 마음 속에 떠도는 한 조각의 구름짱인걸/ 무엇을 끄리어 주순(朱脣)을 열어 부르짖지도 못하고/ 가냘픈 손에나마 반역(反逆)의 깃대를 들지 못했는가/ `청천백일(靑天白日)'밑에 팔을 뽐내는 이웃 나라의 여성(女性)을 보라.// 사랑에 침취하여 쥐 잡는 약(藥)을 사람이 삼키고/ 인생(人生)이 허무(虛無)하다 하여 헛되이 생명(生命)을 태질치던 것은/ 이미 세기(世紀)가 몇 번이나 바뀌인 옛날의 비극(悲劇)이다/ 우리에게서 청산(淸算)된 지 오래인 소극(消極)의 감정(感情)이다/ 가엾다!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그 잔혹(殘酷)을 마시며/ 생목숨 끊는 것으로 유일(唯一)한 자유(自由)를 삼으려는가/ 어버이와 형제(兄弟)의 은혜(恩惠)를 자멸(自滅)로써 갚으려 하는가// 젊고 아름다운 이 땅의 여성(女性)이여,/ 지금은 봄이다! 사월(四月)의 태양(太陽)이 굴르는 폐허(廢墟) 위에/ 기를 펴고 우리와 함께 달음질할 준비(準備)를 하자!/ 개천 바닥에 콸콸콸 얼음장 뚫는 물소리 들리나니/ 한 방울의 피라도 혈관(血管) 밖으로 쏟아 버리지 말라/ 가슴 속에는 정의(正義)에 불붙는 새빨간 염통이 방아를 찧거늘/ 그 소중(所重)한 염통을 양잿물로 썩히거나 철로(鐵路) 바탕에 버리지 말라/ 나의 사랑하는 조선(朝鮮)의 자매(姉妹)여!//

 

짝 잃은 기러기

짝 잃은 기러기 / 심훈
짝 잃은 기러기 새벽 하늘에/ 외마디 소리 이끌며 별밭을 가[耕]네./ 단 한 잠도 못 맺은 기나긴 겨울 밤을/ 기러기 홀로 나 홀로 잠든 천지(天地)에 울며 헤매네.// 허구헌 날 밤이면 밤을/ 마음 속으로 파고만 드는 그의 그림자./ 덩이피에 벌룽거리는 사나이의 염통이/ 조그만 소녀(少女)의 손에 사로잡히고 말았네.//

고독 / 심훈
진종일 앓아누워 다녀간 것들 손꼽아 보자니/ 창살을 걸어간 햇발과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 두 손길 펴서 가슴에 얹은 채 임종 때를 생각해보다// 그림자하고 단 둘이서만 지내는 살림이어늘/ 천장이 울리도록 그의 이름은 불렀는고/ 쥐라도 들을세라 혼자서 얼굴 붉히네// 밤 깊어 첩첩이 닫힌 덧문 밖에 그 무엇이 뒤설레는고/ 미닫이 열어젖히자 굴러드느니 낙엽 한 잎새/ 머리맡에 어루만져 재우나 바시락거리며 잠은 안 자네// 값없는 눈물 흘리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맹세했던고/ 울음을 씹어서 웃음으로 삼키기도 한 버릇 되었으련만/ 밤중이면 이불 속에서 그 울음을 깨물어 죽이네//

한강의 달밤 / 심훈
은하수가 흘러 나리는 듯 쏟아지는 달빛이/ 잉어의 비늘처럼 물결 위에 뛰노는 여름밤에/ 나와 보트를 같이 탄 세 사람의 여성이 있었다// 으늑한 포플라 그늘에 뱃머리를 대고/ 손길을 마주 잡고서 꿈속같이 사랑을 속삭이려면/ 달도 부끄럼을 타는 듯 구름 속으로 얼굴을 가렸었다// 물결도 잠자는 백사장에 찍혀진 발자국은/ 어느 곳에 끝이 나려는 두 줄기 레일이던가/ 몇 번이나 두 몸이 한 덩이로 뭉쳤었던가// 아아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모든 것이 꿈이외다/ 초저녁 꾸다가 버린 꿈보다도 허무하고/ 기억조차 저 물결 같이 흐르고 말려 한다// 그 중에 가장 어여쁘던 패성의 계집아이는/ 돈 있는 놈에게 속아서 못된 병까지 옮아/ 피를 토하다가 청춘을 북망산에 파묻었다// ‘당신 아니면 죽겠어요’ 하던 또 한 사람은/ 배 맞았던 사나이와 벌어진 틈에 나를 끼워서/ 얕은 꾀로 이용하고는 발꿈치를 돌렸다// 마지막 동혈(同穴)의 굳은 맹세로 지내오던 목소리 고운 여자는/ ‘집 한 간도 없는 당신과는 살 수 없어요’라고/ 일전(一錢) 오리(五里) 엽서 한 장을 던지더니 남의 첩이 되었다// 그들은 달콤한 것만 핥아가는 꿀벌과 같이/ 내 마음의 순진과 정열을 다투어 빨아가고/ 물안개처럼 내 품에서 감돌다가는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밤도 그 강변에 그 물결이 노닐고 그 달이 밝다/ 하염없이 좀 썰려 꺼풀만 남은 청춘의 그림자를/ 길로 솟은 포플라 그늘이 가로 세로 비질을 할 뿐//

풀밭에 누워서 / 심훈
가을날 풀밭에 누워서/ 우러러보는 조선의 하늘은/ 어쩌면 저다지도 푸르고 높을까요?/ 닦아 논 거울인들 저보다 더 깨끗하리까// 바라면 바라볼수록/ 천리만리 생각이 아득하여/ 구름장을 타고 같이 떠도는 내 마음은/ 애달픈 심란스럽기 비길 데 없소이다/ 오늘도 만주벌에서 몇 천 명이나 우리 동포가/ 놈들에게 쫓겨나 모진 악형가지 당하고/ 몇 십 명씩 묶여서 총을 맞고 거꾸러졌다는 소식!/ 거짓말이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거짓말 같사외다/ 고국의 하늘은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무심하거늘/ 같은 하늘 밑에서 그런 비극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소이다// 언땅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상팔자지요/ 철창 속에서라도 이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이 명랑한 햇발을 쬐어 볼 수나 있지 않습니까?// 논두렁 버티고 선 허자비처럼/ 찢어진 옷 걸치고 남의 농사에 손톱발톱 달리다가/ 풍년 든 벌판에서 총을 맞고 그 흙에 피를 흘리다니// 미쳐날 듯이 심란한 마음 걷잡을 길 없어서/ 다시금 우러르니 높고 맑고 새파란 가을하늘이외다/ 분한 생각 내뿜으면 저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 듯 하외다//

가배절(嘉排節) / 심훈
팔이 곱지 않았으니 더덩실 춤을 못 추며/ 다리 못 펴 병신 아니니 가로 세로 뛰진들 못 하랴/ 벼 이삭은 고개 숙여 벌판에 금물결이 일고/ 달빛은 초갓집 용마루를 어루만지는 이 밤에-/ 뒷동산 솔잎 따서 송편을 찌고/ 아랫목에 신청주 익어선 밥풀이 동동/ 내 고향의 추석도 그 옛날엔 풍성했다네/ 비렁뱅이도 한가위엔 배를 두드렸다네// 기쁨에 넘쳐 동네방네 모여드는 그날이 오면 기저귀로 고깔 쓰고 무등 서지 않으리/ 쓰레받기로 꽹가리 치며 미쳐나지 않으리/ 오오, 명절이 그립구나! 단 하루의 경절(慶節)이 가지고 싶구나!//

고향은 그리워도 / 심훈
나는 내 고향(故鄕)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십년(十年)이나 되건만/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넘어연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文化住宅)이 서고/ 사당(祠堂)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 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 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오대(五代)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後園)의 은행(銀杏)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굵도록 정(情)이 든 그 산(山)과 그 들을/ 무슨, 낯짝을 쳐들고 보더란 말이요?/ 번접하던 식구는 거미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 줄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花壇)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최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追憶)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山)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 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前)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고향(故鄕)엔 가지 않겠소.//

추야장(秋夜長) / 심훈
귀뚜라미는 문지방을 쪼아 내고/ 뭇 벌레 덩달아 밤을 써는데/ 눈 감고 책상(冊床) 머리에 앉았으려면/ 내 마음은 가볍고 무거운 생각에 눌려,/ 깊이 모를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백(百)길 천(千)길 한정(限定)없이 가라앉는다.// 그 물 속에서 가만히 눈을 뜨면/ 작은 걱정은 송사리 떼처럼 모여들어/ 머리를 마주 모았다가는 흩어지고/ 큰 근심은 낙지발 같은 흡반(吸盤)으로/ 온 몸을 칭칭 감고 떨어질 줄 모른다/ 나는 그 근심을 떼치려고 몸을 뒤튼다.// 그럴 때마다 내 눈앞에 반짝 띠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꽃 같이 새빨간 산호(珊瑚)다./ 파아란 해초(海草) 속에서 불이 붙는 산호(珊瑚) 가지는/ 내 가슴에 둘도 없는 귀여운 패물(佩物)이다./ 가지마다 새로운 정열(情熱)을 부채질하는/ 꺼지지 않는 사랑의 조그만 표상(表象)이다.// 바닷속은 캄캄하고 차디 찬 물결이 흘러도/ 그 산호(珊瑚) 가지만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 괴로울 것이 없다./ 불타는 사랑과 뜨거운 정열(情熱)로/ 이 몸을 태우는 동안에는 온갖 세상 근심이/ 고기밥이 된다 거품처럼 흩어지고 만다.// 귀뚜라미야 밤을 새워 가며 울거나 말거나/ 바람이야 삭장귀에 목을 매달거나 말거나/ 나는 잠자코 내 가슴의 보배를 어루만진다./ 밝을 줄 모르는 가을 밤, 깊이 모르는 바다 속에서/ 눈을 감고 그 산호(珊瑚) 가지를 어루만진다.//

소야악(小夜樂) / 심훈
달빛같이 창백(蒼白)한 각광(脚光)을 받으며/ 흰 구름장같은 드레쓰를 가벼이 끌면서/ 처음으로 그는 세레나아드를 추었다.// `챠이코프스키'의 애달픈 멜로디에 맞춰/ 사뿟 사뿟 떼어 놓는 길고 희멀건 다리는/ 무대(舞臺)를 바다 삼아 물생선처럼 뛰었다.// 그 멜로디가 고대로 귀에 젖어 있다./ 두 손을 젖가슴에 얹고 끝마칠 때의 포오즈가/ 대리석(大理石)의 조각(彫刻)인 듯 지금도 내 눈 속에 새긴 채 있다.// 그때까지 그는 참으로 깨끗한 소녀(少女)였다./ 돈과 명예(名譽)와 사나이를 모르는 귀여운 처녀(處女)였다./ 나의 청춘(靑春)의 반(半)을 가져 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첫눈 / 심훈
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립니다./ 삼승버선 엎어 신고 사뿟사뿟 내려 앉습니다./ 논과 들과 초가집 용마루 위에/ 배꽃처럼 흩어져 송이송이 내려 앉습니다.// 조각조각 흩날리는 눈의 날개는/ 내 마음을 고이 고이 덮어 줍니다./ 소복 입은 아가씨처럼 치맛자락 벌이고/ 구석구석 자리를 펴고 들어앉습니다.// 그 눈이 녹습니다, 녹아 내립니다./ 남몰래 짓는 눈물이 속으로 흘러들 듯/ 내 마음이 뜨거워 그 눈이 녹습니다./ 추녀 끝에, 내 가슴 속에, 줄줄이 흘러 내립니다.//

눈 밤 / 심훈
소리 없이 내리는 눈, 한 치, 두 치 마당 가득 쌓이는 밤엔/ 생각이 길어서 한 자외다. 한 길이외다./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편지나 써서 온 세상에 뿌렸으면 합니다.//

패성의 가인(浿城의 佳人) / 심훈
네 무덤에 눈이 덮였구나/ 흰 조갑지를 씻어서 엎어 논 듯/ 새하얀 눈이 소복히 쌓였구나.// 흑진주(黑眞珠)같이 영롱(玲瓏)하던 너의 눈도/ 복숭아를 쪼개 논 듯 연붉던 너의 입도/ 그리고 풀솜처럼 희고 부드럽던 너의 살도,/ 저 눈 속에, 저 흙 속에 파묻히고 말았구나./ 네 마음 속의 조그만 허영(虛榮)이/ 죄(罪) 없는 네 몸을 죽음의 길로 이끌었다./ 참새가 한 섬 곡식을 다 먹지 못하고/ 비단 옷도 열 겹 스무 겹 껴입지는 못할 것을/ 돈에 몸을 팔아 일찌감치 죽음을 샀구나.// 구두를 전당(典當)잡혀 고무신짝을 끌고/ 네게로 달려갔을 때 너는 나를 보지도 않았더니라./ 병(病)든 네 몸을 위하여 그 사나이와 칼부림할 때/ 너는 돌아앉아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더니라.// 대동강(大洞江)은 얼음만 풀리면 전(前)과 같이 흐르려니/ 이제 청류벽(淸流壁)을 끼고 도는 내 그림자만 외롭구나!/ 봄이나 와야 저 산(山)기슭에 새들이 울어 주지 않으랴/ 꽃이나 피어야 네 무덤에 한 송이 꽂아 주지 않으랴.//

동우(冬雨) / 심훈
저 비가 줄기줄기 눈물일진데/ 세어 보면 천만 줄기나 되엄즉허이/ 단 한 줄기 내 눈물엔 배게만 젖지만/ 그 많은 눈물비엔 사태가 나지 않으랴/ 남산인들 삼각산인들 허물어지지 않으랴/ 야반에 기적 소리!/ 고기에 주린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냐/ 저력 있는 그 소리에 주춧돌이 움직이니/ 구들장 밑에서 지진이나 터지지 않으려는가?// 하늘과 땅이 맞붙어서 맷돌질이나 하기를/ 빌고 바라는 마음 간절하건만/ 단 한 길 솟지도 못하는 가엾은 이 몸이여/ 달리다 뛰면 바다인들 못 건너리만/ 걸음발 타는 동안에 그 비가 너무나 차구나//

선생님 생각 / 심훈
날이 몹시도 춥습니다./ 방 속에서 떠다 놓은 숭늉이 얼구요,/ 오늘밤엔 영하(零下)로도 이십도(二十度)나 된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속에서 오직이나 추우시리까?/ 얼음장 같이 차디찬 마루방 위에/ 담요 자락으로 노쇠(老衰)한 몸을 두르신/ 선생님의 그 모양 뵈옵는 듯합니다.// 석탄(石炭)을 한 아궁이나 지펴 넣은 온돌(溫突) 위에서/ 홀로 딩굴며 생각하는 제 마음 속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습니다그려./ 아아 무엇을 망설이고 진작 따르지 못했을까요?/ 남아 있어 저 한 몸은 편하고 부드러워도/ 가슴 속엔 성에가 슬고 눈물이 고드름 됩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젊은데요/ 어째서 벌써 혈관(血管)의 피가 말랐을까요?/ 이 한밤엔 창(窓) 밖에 고구마 장사의 외치는 소리도/ 떨리다가는 길 바닥에 얼어 붙고/ 제 마음은 선생님의 신변(身邊)에 엉기어 붙습니다./ 그 마음이 스러져가는 화로(火爐) 속에 깜박거리는/ 한 덩이 숯[木炭]만치나 더웠으면 합니다.//

 

태양의 임종

태양의 임종(臨終) / 심훈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너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태양(太陽)이여, 네게는 운명(殞命)할 때가 돌아오지 않는가'하고.// 억만년(億萬年)이나 꾸준히 우주(宇宙)를 밭 갈고 있는/ 무서운 힘과 의지(意志)를 가지고도 너는 눈이 멀었다// 사람은 뒷간 속의 구데기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정의(正義)의 심장(心臟)은 미친 개의 잇발에 물려 뜯기되/ 못본 체하고 세기(世紀)와 세기(世紀)를 밟고 지나가는 너의 발자취!// 너는 ○억만(億萬) 촉광(燭光)의/ 엄청난 빛을 무심(無心)한 공간(空間)에 발사(發射)하면서/ 백주(白晝)에 캄캄한 지옥(地獄) 속에서 울부짖는 무리에게는/ 반딧불만한 편광(片光)조차 아끼는 인색(吝嗇)한 놈이다.// 네 얼굴에 여드름이 돋으면 지각(地殼)에 화산(火山)이 터지고/ 네 한 번 진노(震怒)하면 문명(文明)을 자랑하던 도시(都市)도/ 하루 아침에 핥어버리는 몇만도(萬度)의/ 잠열(潛熱)을 지배(支配)하는 위력(偉力)을 땅 속에 감추어 두고도/ 한 자루의 총칼을 녹일 만한 작은 힘조차/ 우리 젊은 사람에게 빌려주고저 하지 않는다.// 해여 태양(太陽)이여!/ 대륙(大陸)에 매어달린 조그만 이 반도(半島)가/ 네 눈에는 쓸데 없는 맹장(盲腸)과 같이 보이는가?/ 우주(宇宙)를 창조(創造)하신 하나님도/ 이다지도 이다지도 짓밟혀만 살라고/ 악착한 운명(運命)의 부작(符爵)을 붙여서/ 우리의 시조(始祖)부터 흙으로 빚었더란 말이냐?// 오오 위대(偉大)한 항성(恒星)이여,/ 일분(一分) 동안만 네 궤도(軌道)를 미끄러져/ 한 걸음만 가까이 지구(地球)로 다가오라!/ 그러면 우리는 모조리 타 죽고나 말리라./ 그도 못하겠거던 한 걸음 뒤로 물러서라―/ 북극(北極)의 흰 곰들이나 우리의 시체(屍體) 위에서/ 즐거이 뛰놀며 자유(自由)롭게 살리라.//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네가 지평선(地平線)을 넘은 뒤까지도/ `차라리 너의 임종(臨終) 때가 돌아오지나 않는가' 하고―//

광란(狂亂)의 꿈 / 심훈
불어라, 불어!/ 하늘 꼭대기에서/ 내리질리는 하늬바람,/ 땅덩이 복판에 자루를 박고/ 모든 것을 휩싸서 핑핑 돌려라./ 머릿속에 맷돌이 돌듯이/ 세상은 마지막이다, 불어 오너라.// 쏟아져라, 쏟아져!/ 바다가 거꾸로 흐르듯/ 폭포수(瀑布水)같은 굵은 빗발이/ 쉴 새 없이 기울여 쏟아져서/ 사람의 새끼가 짓밟은/ 땅 위의 모든 것을/ 부순 듯이 씻어 버려라.// 번갯불이 뻔쩍/ 으지끈 뚜욱 따악/ 벼락 불똥이 튀어/ 뾰족집을 후려갈기고/ 우상(偶像), 동상(銅像)을 자빠뜨리고/ 선정비(善政碑), 송덕비(頌德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닥치는대로 깨뜨려서/ 모든 거룩하다는 것 위에/ 벼락불의 세례(洗禮)를 내려라.// 지진(地震)이다, 지진(地震), 대지진(大地震)이다!/ 나무 뿌리가 하늘로 솟고/ 바윗덩이가 굴러 내린다./ 지심(地心)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라/ 지구(地球)는 두 쪽에 갈라지고/ 모든 것은 거꾸로 섰다, 뒤집혀졌다.// 불이야 불이야!/ 분(粉) 바른 계집의 얼굴을 끄스르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조동아리를 지져 놓아라!/ 길로 쌓인 인류(人類)의 역사(歷史)를/ 첫 페지부터 살라 버리고/ 천만 권(千萬卷) 거짓말의 기록(記錄)을/ 모조리 깡그리 태워 버려라.// 우루루, 우루루!/ 집채가 넘어가고 산(山)이 무너진다./ 십육 억(十六億)의 사람의 씨알들이/ 앙마구리 끓듯 한다, 아우성을 친다./ 사람은 이빨을 갈며/ 사람의 고기를 물어 뜯고/ 뼉다귀를 다투어 깨무는/ 주린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해골(骸骨)을 쪼아 먹는 까마귀의 떼울음!// 불길이 훨훨 날으며/ 온 지구(地球)를 둘러쌌다,/ 새빨간 혀 끝이 하늘을 핥는다/ 모든 것은 죽어 버렸다,/ 영원(永遠)히 영원(永遠)히 죽어 버렸다!/ 명예(名譽)도, 욕망(慾望)도 권력(權力)도 야만(野蠻)도 문명(文明)도―// 바람 소리 빗소리!/ 해가 떨어지고 별은 흩어지며/ 땅이 울고 바다가 끓는다./ 모든 것은 원소(元素)로 돌아가고/ 남은 것이란 희멀건 공간(空間) 뿐이다,/ 오오 이제까지의 인류(人類)는 멸망(滅亡)하였다!/ 오오 오늘까지의 우주(宇宙)는 개벽(開闢)하고 말았다!//

마음의 낙인 / 심훈
마음 한복판에 속 깊이 찍혀진 낙인을/ 몇 줄기 더운 눈물로 지어 보려 하는가/ 칼끝으로 도려낸들 하나도 아닌 상처가 가시어질 것인가/ 죽음은 홍소(哄笑)한다. 머리맡에 쭈구리고 앉아서/ 자살한 사람의 시집을 어루만지다 밤은 깊어서/ 추녀 끝의 풍경소리 내 상여 머리에 요령이 흔들리는 듯/ 혼백은 시꺼먼 바다 속에 잠겨 자맥질하고/ 허무히 그림자 악어의 입을 벌리고 등어리에 소름을 끼얹는다// 쓰라린 기억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앞길은/ 행복이란 도깨비가 길라잡이 노릇을 한다/ 꿈속에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어릿광대들/ 개미 때처럼 뒤를 따라 쳇바퀴를 돌고 도는 걸// 캄풀 주사 한 대로 절맥되는 목숨을 이어 보듯이/ 젊은이여 연애의 한 찰나에 목을 매달려하는가?/ 혈관을 토막토막 끊으면 불이라도 붙을 성 싶어도/ 불 꺼져 재만 남은 화로를 헤집는 마음이여!// 모든 것이 모래밭 위의 소꿉장난이나 아닌 줄 알았더면/ 앞장을 서서 놈들과 걷고 틀어나 볼 것을/ 길거리로 달려 나가 실컷 분풀이나 할 것을/ 아아 지금엔 희멀건 허공만이 내 눈앞에 틔어 있을 뿐//

토막생각 / 심훈
날마다 불러가는 아내의 배/ 낳은 날부터 돈 들 것 꼽아 보다가/ 손가락 못 편 채로 잠이 들었데/ 뱃속에 꼬물거리는 조그만 생명/ ‘네 대에나 기를 펴고 잘 살아라!’/ 한 마디 축복밖에 선사할 게 없구나// ‘아버지’ 소리를 내 어찌 들으리/ 나이 30에 해 놓은 것 없고/ 물려줄 것이라곤 ‘선인(鮮人) 밖에 없구나// 급사의 봉투 속이 부럽던/ 월급날도 다시는 안 올 성싶다/ 그나마 실직하고 스무 닷새 날// 전등 끊어가던 날 밤 촛불 밑에서/ 나어린 아내 눈물지며 하는 말/ ‘시골 가 삽시다. 두더지처럼 흙이나 파먹게요.’// 오관으로 스며드는 봄/ 가을바람인 듯 몸서리쳐진다/ 조선 팔도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느냐// 불 꺼진 화로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내듯이/ 식어버린 정열을 더듬어 보는 봄 저녁// 옥중에 처자 잃고/ 길거리로 미쳐간 머리 긴 친구/ 밤마다 백화점 기웃거리며 휘파람 부네// 선술 한 잔 내라는 걸/ 주머니 뒤집어 털어 보이고/ 돌아서니 카페의 붉고 푸른 물// 그만하면 신경도 죽었으련만/ 알뜰한 신문만 펴들면/ 불끈불끈 주먹이 쥐어지네// 몇 백 년이나 묵어 구멍 뚫린 고목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엄이 돋네/ 뿌리마다 썩지 않은 줄이야 파보지 않은들 모르리//

어린것에게 / 심훈
고요한 밤 너의 자는 얼굴을 무심코 들여다볼 때,/ 새근새근 쉬는 네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아비의 마음은 해면(海綿)처럼 사랑에 붇[潤]는다./ 사랑에 겨워 고사리 같은 네 손을 가만히 쥐어도 본다.// 이 손으로 너는 장차 무엇을 하려느냐/ 네가 씩씩하게 자라나면 무슨 일을 하려느냐,/ 붓대는 잡지 마라, 행여 붓대만은 잡지 말아라/ 죽기 전 아비의 유언이다 호미를 쥐어라! 쇠망치를 잡아라!// 실눈을 뜨고 엄마의 젖가슴에 달려 붙어서/ 배냇짓으로 젖 빠는 흉내를 내는 너의 얼굴은/ 평화의 보드러운 날개가 고히 고히 쓰다듬고/ 잠의 신(神)은 네 눈에 들락날락 하는구나.// 내가 너를 왜 낳아 놓았는지 나도 모른다./ 네가 이 알뜰한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너도 모르리라/ 그러나 네가 땅에 떨어지자 으아 소리를 우렁차게 지를 때/ 나는 들었다 그 뜻을 알았다. 억세인 삶의 소리인 것을!// (이하(以下) 십이행(十二行) 략(略))// 조선 사람의 피를 백대(百代)나 천대(千代)나 이어 줄 너이길래/ 팔 다리를 자근자근 깨물고 싶도록 네가 귀엽다./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고야 말 우리 집의 업둥이길래/ 남달리 네가 귀엽다 꼴딱 삼키고 싶도록 네가 귀여운 것이다.// 모든 무거운 짐을 요 어린것의 어깨에만 지울 것이랴/ 온갖 희망을 염체 네게다만 붙이고야 어찌 살겠느냐/ 그러나 너와 같은 앞날의 일군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우리의 뿌리가 열 길 스무 길이나 박혀 있구나.// 그믐 밤에 반딧불처럼 저 하늘의 별들처럼/ 반득여라 빛나거라 가는 곳마다 횃불을 들어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어서 어서 저 주먹에 힘이 올라라/ 오오 우리의 강산은 온통 꽃밭이 아니냐? 별투성이가 아니냐!// (1932. 9. 4. 재건이 낳은 지 넉달 열흘 되는 날)//

R씨의 초상(肖像) / 심훈
내가 화가(畵家)여서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지금 십년(十年)만에 대(對)한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면/ 채색(彩色)이 없어 파레트를 들지 못하겠소이다./ 화필(畵筆)이 떨려서 획(劃) 하나도 긋지 못하겠소이다.// 당신의 얼굴에 저다지 찌들고 바래인 빛깔을 칠할/ 물감은 쓰리라고 생각도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마에 수(數) 없이 잡힌 주름살을 그릴/ 가느다란 붓은 준비(準備)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결 거칠은 황포탄(黃浦灘)에서 생선(生鮮)같이 날뛰던 당신이/ 고랑을 차고 삼년(三年) 동안이나 그 물을 뜨다니 될 뻔이나 한 일입니까/ 물푸레나무처럼 꿋꿋하고 물 오른 버들만치나 싱싱하던 당신이/ 때아닌 서리를 맞아 가랑잎이 다 될 줄 누가 알았으리까.// `이것만 뜯어 먹고도 살겠다'던 여덟 팔자(八字) 수염은/ 흔적(痕迹)도 없이 깎이고 그 터럭에 백발(白髮)까지 섞였습니다그려./ 오오 그러나 눈만은 샛별인듯 전(前)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불똥이 떨어져도 꿈쩍도 아니하던 저 눈만은 살았소이다!// 내가 화가(畵家)여서 지금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백호(百號)나 되는 큰 칸바쓰에 저 눈만을 그리겠소이다./ 절망(絶望)을 모르고 끝까지 조금도 비관(悲觀)치 않는/ 저 형형(炯炯)한 눈동자만을 전신(全身)의 힘을 다하여 한 획(劃)으로 그리겠소이다.//

만가(輓歌) / 심훈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수의(壽衣)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뻑이는데/ 동지들은 헐벗던 알몸이 추울 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이하 6행은 일본 총독부의 검열로 잘려져 나감)//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송장들은/ 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곡 서해(哭 曙海) / 심훈
온 종일(終日)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 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仁旺山)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잘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이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것의 약(藥)을 지어다 주던 그대여/ 어린것은 나아서 요람(搖籃)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 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사기(邪氣) 없는 표정(表情)은 어느 얼굴에서 찾드란 말이요?/ 사람들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습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遺言)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心思)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노모약처(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삼십(三十) 평생(平生)을 숨도 크게 못 쉬도록 청춘(靑春)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現實)에 치(齒)가 떨릴 뿐이외다!//

 

거국편

잘 있거라 나의 서울이여 / 심훈
오오 잘 있거라! 저주(詛呪)받은 도시(都市)여,/ `폼페이'같이 폭삭 파묻히지도 못하고,/ 지진(地震) 때 동경(東京)처럼 활활 타 보지도 못하는/ 꺼풀만 남은 도시(都市)여, 나의 서울이여!// 성벽(城壁)은 토막이 나고 문루(門樓)는 헐려/ `해태'조차 주인(主人) 잃은 궁전(宮殿)을 지키지 못하며/ 반(半) 천년(千年)이나 네 품 속에 자라난 백성들은/ 산(山)으로 기어오르고 두더지처럼 토막(土幕) 속을 파고들거니/ 이제 젊은 사람까지 등을 밀려 너를 버리고 가는구나!// 남산(南山)아 잘 있거라, 한강(漢江)아 너도 잘 있거라/ 너희만은 옛 모양을 길이 길이 지켜 다오!/ 그러나 이 길이 영원(永遠)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겠느냐/ 내 눈물이 마지막 너를 조상(弔喪)하는 눈물이겠느냐/ 오오 빈사(瀕死)의 도시(都市), 나의 서울이여!//

현해탄(玄海灘) / 심훈
달밤에 현해탄(玄海灘)을 건너며/ 갑판(甲板)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몇해 전 이 바다 어복(魚腹)에 생목숨을 던진/ 청춘(靑春) 남녀(男女)의 얼굴이 환등(幻燈)같이 떠오른다./ 값 비싼 오뇌(懊惱)에 백랍(白蠟)같이 창백(蒼白)한 인테리의 얼굴/ 허영(虛榮)에 찌들은 여류예술가(女流藝術家)의 풀어 헤친 머리털,/ 서로 얼싸안고 물 위에서 소용돌이를 한다.// 바다 위에 바람이 일고 물결은 거칠어진다,/ 우국지사(憂國志士)의 한숨은 저 바람에 몇 번이나 스치고/ 그들의 불타는 가슴 속에서 졸아 붙는 눈물은/ 몇 번이나 비에 섞여 이 바다 위에 뿌렸던가/ 그 동안에 얼마나 수(數)많은 물건너 사람들은/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을 부르며 새 땅으로 건너 왔던가// 갑판(甲板) 위에 섰자니 시름이 겨워/ 선실(船室)로 내려가니 `만연도항(漫然渡航)'의 백의군(白衣群)이다,/ 발가락을 억지로 째어 다비를 꾀고/ 상투 자른 자리에 벙거지를 뒤집어 쓴 꼴/ 먹다가 버린 벤또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강아지처럼 핥아 먹는 어린것들!// 동포(同胞)의 꼴을 똑바루 볼 수 없어/ 다시금 갑판(甲板) 위로 뛰어 올라서/ 물 속에 시선(視線)을 잠그고 맥 없이 섰자니/ 달빛에 명경(明鏡) 같은 현해탄(玄海灘) 위에/ 조선(朝鮮)의 얼굴이 떠오른다!/ 너무나 또렷하게 조선(朝鮮)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 둘 곳 없어 마음 붙일 곳 없어/ 이슥토록 하늘의 별 수(數)만 세노라.//

무장야(武藏野)에서 / 심훈
초겨울의 무장야(武藏野)는/ 몹시도 쓸쓸하였다./ 석양(夕陽)은 잡목림(雜木林) 삭장귀에/ 오렌지 빛의 낙조(落照)를 던지고/ 쌀쌀바람은 등어리에/ 우수수 낙엽(落葉)을 끼얹는데/ 나는 그와 어깨를 겯고/ 마른 풀을 밟으며 거닐었다.// 두 사람의 시선(視線)은 아득히/ 고향(故鄕)의 하늘을 더듬으며/ 쏘프라노와 바리톤은/ 나직이 망향(望鄕)의 노래를 불렀다,/ 내 손등에 떨어진 한 방울의/ 따끈한 그의 눈물은/ 여린 정(情)에 아름다운 결정(結晶)이매/ 참아 씻지를 못했었다.// 이윽고 나는 참다 못하여/ 끓어오르는 마음을/ 그의 가슴에 뿜고 말았다/ 손을 잡고 사랑을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말이 없었다/ 능금같이 빨개진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은 채……// 그의 작은 가슴은/ 비 맞은 참새처럼 떨리고/ 그의 순진한 마음은/ 때아닌 파도(波濤)에 쓰러지는/ 해초(海草)와 같이 흔들렸을 것이다./ 햇발이 우리의 발치를 지난 뒤에야/ 그는 조심스러이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더 자라거든요/ 인제 세상을 알게 되거든요// 나는 입을 다문 채/ 무안에 취(醉)해서 얼굴을 붉혔다./ 깨끗한 눈 위에다가/ 모닥불을 끼얹어 준 것 같아서……/ 가냘픈 꽃가지를 꺾은 것처럼/ 무슨 큰 죄(罪)나 저지른 듯하여서……/ 말없이 일어서 지향 없이 거닐었다./ 쓸쓸한 황혼(黃昏)의 무장야(武藏野)를―//

북경의 걸인(北京의 걸인乞人) / 심훈
세기말(歲己末) 맹동(孟冬)에 초췌한 행색(行色)으로 정양문(正陽門) 차참에 내리니 걸개의 떼 에워싸며 한 분(分)의 동패(銅牌)를 빌거늘 달리는 황포(黃包) 차상(車上)에서 수행(數行)을 읊다.// 나에게 무엇을 비는가?/ 푸른 옷 입은 인방(隣邦)의 걸인(乞人)이여/ 숨도 크게 못 쉬고 쫓겨 오는 내 행색(行色)을 보라,/ 선불 맞은 어린 짐승이 광야(曠野)를 헤매는 꼴 같지 않으냐.// 정양문(正陽門) 문루(門樓) 위에 아침 햇발을 받아/ 펄펄 날리는 오색기(五色旗)를 치어다보라/ 네 몸은 비록 헐벗고 굶주렸어도/ 저 깃발 그늘에서 자라나지 않았는가?/ 거리거리 병영(兵營)의 유량한 나팔(喇叭) 소리!/ 내 평생(平生)엔 한 번도 못 들어 보던 소리로구나/ 호동(胡同)* 속에서 채상(菜商)의 외치는 굵다란 목청/ 너희는 마음껏 소리질러 보고 살아 왔구나.// 저 깃발은 바랬어도 대중화(大中華)의 자랑이 남고/ 너의 동족(同族)은 늙었어도 `잠든 사자(獅子)'의 위엄(威嚴)이 떨치거니/ 저다지도 허리를 굽혀 구구(區區)히 무엇을 비는고/ 천년(千年)이나 만년(萬年)이나 따로 살아온 백성(百姓)이어늘―// 때 묻은 너의 남루(襤褸)와 바꾸어 준다면/ 눈물에 젖은 단거리 주의(周衣)라도 벗어 주지 않으랴/ 마디마디 사모친 원한을 나눠 준다면/ 살이라도 저며서 길바닥에 뿌려 주지 않으랴/ 오오 푸른 옷 입은 북국(北國)의 걸인(乞人)이여!//
* 호동(胡同): 골목

고루의 삼경((鼓樓의 三更) / 심훈
눈은 쌓이고 쌓여/ 객창(客窓)을 길로 덮고/ 몽고(蒙古)바람 씽씽 불어/ 왈각달각 잠 못드는데/ 북이 운다 종(鐘)이 운다./ 대륙(大陸)의 도시(都市), 북경(北京)의 겨울 밤에―// 화로(火爐)에 메취ㄹ[煤炭]도 꺼지고/ 벽(壁)에는 성애가 슬어/ 얼음장 같은 촹* 위에/ 새우처럼 오그린 몸이/ 북소리 종(鐘)소리에 부들부들 떨린다./ 지구(地球)의 맨 밑바닥에 동그마니 앉은 듯/ 마음조차 고독(孤獨)에 덜덜덜 떨린다.// 거리에 땡그렁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호콩 장사도 인제는 얼어 죽었나 보다./ 입술을 꼭꼭 깨물고 이 한밤을 새우면/ 집에서 편지나 올까? 돈이나 올까?/ 만터우* 한 조각 얻어먹고 긴 밤을 떠는데/ 고루(鼓樓)에 북이 운다 종(鍾)이 운다//
* 촹: 나무 침상(寢床), 만터우: 밀가루떡

심야과황하(深夜過黃河) / 심훈
별그림자……그믐밤의 적막(寂寞)을 헤치며/ 화차(火車)는 황하(黃河)의 철교(鐵橋) 위를 달린다/ 산(山) 하나 없는 양안(兩岸)의 묘망(渺茫)한 평야(平野)는/ 태고(太古)의 신비(神秘)를 감춘 듯 등(燈)불만 깜박이고/ 황하(黃河)는 장사(長蛇)와 같이 꿈틀거리며/ 중원(中源)의 복판을 뚫고 묵묵(黙黙)히 흐른다.// 찬란(燦爛)한던 동방(東方)의 문명(文明)은/ 이 강(江)의 물줄기를 따라 일어났고/ 사억(四億)이나 되는 중화(中華)의 족속(族屬)은/ 이 연안(沿岸)에서 역사(歷史)의 첫 페지를 꾸몄거니.// 이제 천년(千年) 만년(萬年)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는 싯누렇게 지쳐 늘어지고/ 이 물을 마시고 자라난 백성(百姓)들은/ 아직도 고달픈 옛 꿈에 잠이 깊은데/ 난데없는 우렁찬 철마(鐵馬)의 울음소리!/ 무심(無心)한 나그네를 싣고 화차(火車)는 황하(黃河)를 건넌다.//

상해의 밤 / 심훈
우중충한 농당(弄堂)* 속으로/ 훈둔*장사 모여들어 딱딱이 칠 때면/ 두 어깨 웅숭그린 년놈의 떠드는 세상/ 집집마다 마작(麻雀)판 뚜드리는 소리에/ 아편에 취(醉)한 듯 상해(上海)의 밤은 깊어 가네.// 발 벗은 소녀(少女), 눈먼 늙은이를 이끌며/ 구슬픈 호궁(胡弓)의 맞춰 부르는 맹강녀(孟姜女) 노래,/ 애처롭구나 객창(客窓)에 그 소리 창자를 끊네.// 사마로(四馬路) 오마로(五馬路) 골목 골목엔/ `이래양듸', `량쾌양듸' 인육(人肉)의 저자/ 침의(寢衣) 바람으로 숨바꼭질하는 야아지*의 콧상둥이엔/ 매독(梅毒)이 우굴우굴 악취(惡臭)를 풍기네.// 집 떠난 젊은이들은 노주(老酒)잔을 기울려/ 걷잡을 길 없는 향수(鄕愁)에 한숨이 길고/ 취(醉)하고 취(醉)하여 뼛속까지 취(醉)하여서는/ 팔을 뽑아 장검(長劍)인듯 내두르다가/ 채관 쏘파에 쓰러지며 통곡(痛哭)을 하네.// 어제도 오늘도 산란(散亂)한 혁명(革命)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까오리'* 망명객(亡命客)의 심사를 뉘라서 알꼬/ 영희원(影戱院) 산데리아만 눈물에 젖네.//
* 농당(弄堂): 세(貰) 주는 집, 훈둔: 조그만 만두속 같은 것을 빚어 넣은 탕(湯), 야아지: `야계(野鷄)' 매소부(賣笑婦) 중에도 저급한 종류, 까오리: 고려(高麗)

 

항주유기

항주유기 ㅣ 평호추월 ㅣ 삼담인월 ㅣ 채련곡 ㅣ 소제춘효 ㅣ 남병만종 ㅣ 누외루 ㅣ 방학정 ㅣ 악왕분 ㅣ 고려사 ㅣ 항성의 밤 ㅣ


전당강(錢塘江) 상(上)에서 / 심훈
가거라! 가거라!/ 지나간 날의 애처로운 자취여/ 가엾이도 희고 여윈 얼굴이여/ 나의 머리에서 가거라!// 눈 앞에 보이지도 말고/ 꿈 속에 오지도 말고/ 소낙비 뒤의 구름같이/ 흩어져 없어져서/ 다시는 내 마음 기슭으로/ 기어들지를 말아라.// 불같은 키쓰를 주던/ 나의 입술은/ 하염없는 한숨에 마르고/ 보드러운 품에 안기던 가슴 속엔/ 서리가 내렸다.// 아! 첫사랑의 애닯던 꿈이여!/ 두견새 우는 느근한 봄 밤/ 나그네의 베갯머리로는/ 제발 떠오르지를 말아라//

겨울밤에 내리는 비 / 심훈
뒤숭숭한 이상스러운 꿈에/ 어렴풋이 잠이 깨어/ 힘없이 눈을 뜬 채 늘어져/ 창 밖의 밤비 소리를 듣고 있다.// 음습한 바람은 방안을 휘돌고/ 개는 짖어 컴컴한 성안을 울릴 제/ 철 아닌 겨울밤에 내리는 비!/ 나의 마음은 눈물비에 고요히 젖는다.// 이 팔로 향기로운 애인의 머리를 안고/ 여름밤 섬돌에 듣는 낙수의 피아노/ 즐거운 속살거림에 첫닭이 울던/ 그윽하던 그 밤은 벌써 옛날이여라.//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꿈에라도 좋으니 잠깐만 다녀가소서/ 찬비는 객창에 부딪치는데 긴 긴 이밤을/ 아, 나 홀로 어찌나 밝히잔 말이냐.//

 

기적 / 심훈

뻐꾹새가 운다 / 심훈
오늘 밤도 뻐꾹새는 자꾸만 운다/ 깊은 산 속 빈 골짜기에서/ 울려 나오는 애처로운 소리에/ 애끊는 눈물은 베개를 또 적시었다.// 나는 뻐꾹새에게 물어 보았다/ `밤은 깊어 다른 새는 다 깃들였는데/ 너는 무엇이 설기에 피나게 우느냐' 라고/ 뻐꾹새는 내게 도로 묻는다/ `밤은 깊어 사람들은 다 꿈을 꾸는데/ 당신은 왜 울며 밤을 밝히오' 라고.// 아 사람의 속 모르는 날짐승이/ 나의 가슴 아픈 줄을 제 어찌 알까/ 고국은 멀고 먼데 임은 병들었다니/ 차마 그가 못 잊어 잠 못드는 줄/ 더구나 남의 나라 뻐꾹새가 제 어찌 알까.//

 

절필

오오, 조선의 남아여! -백림(伯林)* 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에게 / 심훈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 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 3백만의 한사람인 내 혈관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戰勝)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속에 짓눌렀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 백림(伯林): 베르린, 손, 남 양군: 손기정, 남승용
* 1936.8.10. 새벽 신문호외 이면에 쓴 절필.

 

수필

조선의 영웅 ㅣ 2월 초하룻날 ㅣ 적권세심기 ㅣ 봄은 어는 곳에? ㅣ 7월 바다 ㅣ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어머님께 / 심훈
1// 어머님!// 오늘 아침에 차입해 주신 고의적삼을 받고서야 제가 이 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둥이의 생사를 한 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 길 없으셨으니 그 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저는 이 곳까지 굴러 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고생을 겪었건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집에 와서 지냅니다. 고랑을 차고 용수는 쎴을망정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사까지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애세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 들어가는 듯하였습니다.//


2// 어머님!// 제가 들어 있는 방은 28호실인데 성명 3자도 떼어버리고 2007호로만 행세합니다. 두간도 못되는 방 속에 열 아홉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했는데 그 중에는 목사님도 있고 시골서 온 상투장이도 있구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수염 잘난 천도교 도사도 계십니다. 그밖에는 그날 함께 날뛰던 저의 동무들인데 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귀염을 받는답니다.//


3//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의 얼굴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처럼,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조차 엄숙합니다. 날마다 이른 아침 전등불이 꺼지는 것을 신호삼아 몇천 명이 같은 시간에 마음을 모아서 정성껏 같은 발원으로 기도를 올릴 때면 극성맞은 간수도 칼자루 소리를 내지 못하며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발꿈치를 돌립니다.//


4//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무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함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길래 나이 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와하여 하소연해본 적이 없읍니다.//


5// 어머님!//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천 분이요, 또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먹기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6// 어머님!// 오늘 아침에는 목사님한테 사식(私食)이 들어왔는데 첫술을 뜨다가 목이 메어 넘기지를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외다. 아내는 태중에 놀라서 병들어 눕고 열 두살 먹은 어린 딸이 아침마다 옥문 밖으로 쌀을 날라다가 지어드리는 밥이라 합니다. 저도 돌아앉으며 남 모르게 소매를 적셨읍니다.//


7// 어머니!// 며칠 전에는 생후 처음으로 감방 속에서 죽는 사람의 임종을 같이하였습니다. 돌아간 사람은 먼 시골의 무슨 교를 믿는 노인이었는데, 경찰서에서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어 나와서 이 곳에 온 뒤에도 밤이면 몹시 앓았습니다. 병감은 만원이라고 옮겨 주지도 않고, 쇠잔한 몸에 그 독은 나날이 뼈에 사무쳐 그 날에는 아침부터 신음하는 소리가 더 높았습니다.// 밤이 깊어 악박골 약물터에서 단소 부는 소리도 끊어졌을 때,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그의 머리맡을 에워싸고 앉아서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덮쳐 오는 그의 얼굴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희미한 눈초리로 5촉밖에 안 되는 전등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추억의 날개를 펴서 기구한 일생을 더듬는 듯하였습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본 저는 무릎을 베게삼아 거의 머리를 괴었더니, 그는 떨리는 손을 더듬더듬하여 제 손을 찾아 쥐더이다. 금세 운명을 할 노인의 손아귀힘이 어쩌면 그다지도 굳셀까요, 전기나 통한 듯이 뜨거울까요?//


8// 어머니!//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벌떡 솟구치더니 ‘여러분!’하고 큰 목소리로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찢어질 듯이 긴장된 얼굴의 힘줄과 표정, 그날 수천 명 교도 앞에서 연설을 할 때의 그 목소리가 이와 같이 우렁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는 마침내 그의 연설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하고는 뒤미처 목에 가래가 끓어올랐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분이 유언할 것이 없느냐 물으매 그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흐려지는 눈은 꼭 무엇을 애원하는 듯합니다마는, 그의 마지막 소청을 들어줄 그 무엇이나 우리가 가졌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그 날에 여럿이 떼지어 부르던 노래를 일제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첫 소절도 다 부르기 전에 설움이 북받쳐서, 그와 같은 신도인 상투 달린 사람은 목을 놓고 울더이다.//


9// 어머님!// 그가 애원하던 것은 그 노래가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일각의 원혼을 위로하기에는 가슴 한복판을 울리는 그 노래밖에 없었습니다. 후렴이 끝나자 그는 한 덩이 시뻘건 선지피를 제 옷자락에 토하고는 영영 숨이 끊어지고 말더이다.// 그러나 야릇한 미소를 띤 그의 영혼은 우리가 부른 노래에 고이고이 싸이고 받들려 쇠창살을 새어 나가 새벽 하늘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저는 감지 못한 그의 두 눈을 쓰다듬어 내리고 날이 밝도록 그의 머리를 제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10// 어머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록사록이 아프고 쓰라렸던 지난날의 모든 일을 큰 모험삼아 몰래몰래 적어두는 이 글월에 어찌 다 시원스러이 사뢰올 수가 있사오리까? 이제야 겨우 가시밭을 밟기 시작한 저로서 어느새 부러 이만 고생을 호소할 것이오리까?// 오늘은 아침부터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더위가 씻겨내리고 높은 담안에 시원한 바람이 휘돕니다. 병든 누에가이 늘어졌던 감방 속의 여러 사람도 하나 둘 생기가 나서 목침돌림 이야기에 꽃이 핍니다.//


11// 어머니!// 며칠 동안이나 비밀히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어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덧 멈추고 날은 오늘도 저물어 갑니다.// 구름 걷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니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답사온 듯 먼 천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심훈이 3.1 운동 참여로 인하여 투옥되었을 당시 어머님에게 쓴 편지이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이란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심훈(沈熏, 1901년~1936년) 독립운동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 영화감독
본명은 심대섭(沈大燮)이다. 경기도 과천군(현재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명으로 삼보(三保)나 삼준(三俊)을 사용하였다. 친일 시류에 순응한 가족들과는 달리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고 학교에서도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중국에 몇 해 체류하면서 신채호와 이회영 등과 교우하며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부르짖었다. 1924년 귀국 후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에서 '동방', '불사조' 등의 소설을 연재하다가 일제의 게재 중지 조치로 연재를 중단하게 된다.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 소설 《상록수》가 당선되었다. 이듬해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사후 1949년에 시집 《그 날이 오면》, 1952년에 《심훈집》 7권과 1996년에 《심훈 전집》 3권이 출간되었다.

 

 

심훈기념관

당진에서 상록수를 집필하신 심훈 선생님의 상록수 정신을 기리고 지역민의 축제 마당을 만든다는 취지로 지난 1977년에 시작된 상록문화제가 변화를 거듭하여 우리고장의 최대 축제로 자리매

www.dangji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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