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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양 시인

부흐고비 2021. 9. 22. 08:36

참숯 / 정양
간장독에 띄울 숯을 사러/ 읍내에 간다/ 나무 타다 만 게 숯인데/ 나무토막 태워서 쓰자고 해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는 참숯만 써야 한단다// 읍내 장터를 다 뒤져도 숯이 없다/ 가슴속 한 세상 더글거리는/ 타다 만 숯덩이들은 쓸모가 없겠지/ 육십릿길 더 달려간 도회지 시장통에서/ 가까스로 숯을 만난다/ 휘발유값이 몇 배는 더 들겠다//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 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참숯이 된다고,/ 참숯은 냄새도 연기도 없다고/ 숯가게 할아버지 설명이 길다/ 참숯은 냄새까지 연기까지/ 감쪽같이 태우나 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내 청춘은 그나마 참숯이 되어 있는지/ 언제쯤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릴지 어쩔지// 간장독에 둥둥 떠서 한평생/ 이글거리지도 못할/ 까만 비닐봉지 속 숯토막들이/ 못 견디게 서걱거린다//

건망증 / 정양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번이 아니다// 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 그냥 내려왔다 누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낄 위인도 못된다/ 아마 잘 닫고 잘 잠갔을 것이다// 혼자 남은 주막에서/ 술값을 치르다가 다시 미심쩍다/ 창문을 닫은 기억이 없다/ 출입문 잠근 기억이 전혀 없다/ 전기코드도 꽂아둔 채로/ 그냥 나온 것만 같다/ 다들 가고 없지만 누구와도/ 헤어진 기억이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 일이냐/ 매일같이 닫고 잠그고 뽑는 것이/ 보통 일이냐, 그래, 보통 일이다/ 헤어진 기억도 없이/ 보고 싶은 사람 오래오래/ 못 만나는 것도 보통 일이다/ 망할 것들이 여간해서 안 망하는 것쯤은/ 못된 짓 못된 짓 끝도 없는 것쯤은/ 열어놓고 꽂아놓고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보통 일이다//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열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아침저녁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개펄냄새 / 정양
어금니 갈아 끼우는 동안/ 한 달 가까이 조개 속살을 먹고 살았다/ 이 세상에는 무슨 조개들이 그리 많은지/ 노랑조개나 모시조개, 꼬막이나 생합이나 바지락 말고도/ 이름 모를 벼라별 조개들을 먹는 김에 다 먹어 보았다./ 초장에 찍어 날것으로도 먹고 구워도 먹고/ 쌀과 녹두를 섞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그 중에 제일로 많이 먹은게/ 흔하고 값싸고 맛있는 바지락이다./ 먹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삼시세끼 조갯살만 먹고/ 한 일주일 지나면서부터는 트림을 하거나/ 방구가 나올 때마다 희한하게도 그 속에서/ 매콤시큼한 개펄냄새가 나곤 했다// 사람살이에 가장 요긴한 것들을/ 하늘은 애당초 흔전만전 차려 놓았다고 하거니와/ 햇빛이나 땅덩이나 물이나 공기도 물론 그렇거니와/ 땅에서 나는 풀 중에서도 이 세상에/ 흔전만전 자라서 흔전만전 번지는 쑥잎이/ 사람 몸에 제일로 좋다고도 하거니와,/ 잡아도 잡아도 흔전만전 잡히는 개펄의 그 바지락이/ 아닌게아니라 오장을 윤택하게 하고 눈도 밝아지고/ 정력에도 좋고 술독 푸는 데도 그만이라고들 한다// 이빨 다 갈아 끼운 뒤에도 나는/ 변산반도 그 옆구리에 있는/ 사람들 바글바글 모여드는 바지락집을/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찾아가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트림을 해도 똥을 누어도/ 정다운 개펄냄새가 나지 않는다/ 바지락집 오가는 바닷가/ 흔전만전 누워 있는 개펄 위에는/ 바다새들이 쑤월거리며 흔전만전/ 그리운 냄새를 쪼아먹고 있다//

내 살던 뒤안에 / 정양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 아아, 그 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 감는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환성들이/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익는 흙담을 끼고/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뭄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주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천정을 보며 / 정양
우리네 사는 일 따뜻하여/ 잠 아니 올 때/ 내 기억 밖에서 흘러가던 바람소리/ 어쩌다 되돌아와서/ 내 영혼의 우수의 석경을 닦는다./ 추적추적 궂은비가 내리는 새벽에// 비로소 잠이 들던 친구의/ 피곤한 꿈자리를 지나서/ 높고 가난하고 또 쓸쓸한/ 우리 스승의 숙명의 한많은/ 걸음걸이나 시늉하며 따라가다가/ 문득 오랫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죽음이라는 걸 생각하면서/ 엄청난 차부일지 어쩔지/ 좀처럼 요약되지 않는 우리네/ 사랑이여 예감이여/ 뉘우침이 모두/ 그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쓸쓸한/ 휴식이 되어/ 아무려면 괜히 목숨이 탈까/ 목숨이 탈까 사랑이여!//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서 소식 없는/ 우리 곁에서 수없이 떠나간 사람들의/ 남긴 시간을 보자./ 우리의 살다 남는 시간을 보자.// 피곤한 음계를 오르내리며/ 한세상 가고/ 우리의 생활은 바람의/ 절망의 저 건너편에서 시작되어도/ 우리네 초라한 희로애락/ 모두 맘에 들어라.// 내 기억 밖에서 흘러가던 바람소리/ 다시 기억 밖으로 흘러가고/ 모든 자랑의 사랑의 절망의/ 뉘우침의/ 저 바람소리엔 주석이 필요치 않다.//
*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저녁놀 / 정양
울타리마다 내버리듯/ 남은 인정을 널어놓고 떠나던 길/ 묵은 쌀빚 받으러 가는 고향길에/ 노을이 탄다/ 수수밭머리 낯익은/ 눈 녹는 모습/ 산기슭 들판머리로/ 눈 덮힌 노을/ 노을이여/ 긴 겨울잠 속에 숨어 흐르는/ 검은 피를 가리고 핏빛/ 살냄새를 가리고/ 횟배 앓던 유년의 어지럼증을/ 저 빛깔들을 거슬러오는 동화여/ 노을 비끼는 수수밭머리 들판머리로/ 왜 이리 들개처럼 내닫고만 싶은가/ 검은 살냄새 두르고 외로운/ 짐승처럼 울고 싶은가/ 나에게로 오는 휴식처럼 사랑처럼/ 서러운 빛깔들처럼/ 서러운 묵은 빚 받으러 오는/ 노을이 탄다//

가을햇살 / 정양
산모퉁이 빈집/ 바랭이풀이 토방까지/ 술취한 여자처럼 쓰러져 있다./ 초가을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누가 보든 말든/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먹고/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바랭이풀 함부로 쓰러진 텃밭에/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연신 아는 체를 하고 있다/ 대숲에는 댓잎들이/ 보일 듯 말 듯 자디잘게/ 그 햇살을 쪼아먹는데// 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을 감추고 있다/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 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

겨울 / 정양
이 겨울/ 눈 내리는 들판은 더/ 넓어지고 있을 것이다./ 빈 들에 사무치는 아우성으로/ 바람소리는 파랗게/ 날이 서고 있을 것이다.// 목숨이란 어차피/ 천벌인 것을/ 백성들이 갈수록/ 천해진다 쿨룩거리며/ 사랑채는 겨울밤이 더/ 길어질 것이다.// 대처로 떠나 잘된 이들도/ 갈수록 천해져서 떠돌고/ 이 겨울 고향 강물은/ 더 깊어지고 있을 것이다.//

조약돌 하나로 / 정양
깎아지른 바닷가/ 그 땅끝에 가서/ 한세상 하염없이 출렁이는/ 물결의 끝으로 가서/ 던져버릴 것인가/ 던져버릴 것인가/ 고통과 진실의 끝/ 목숨과 그리움의 끝/ 피할 길 없는 무게를/ 땅끝에 매달린 온갖 무게를/ 조약돌 하나로/ 가늠해본다//

무게 / 정양
쇠창살로 얽힌 개차가 왔다/ 개값이 금값되는 복더위를/ 미처 못 기다리고 이 이른봄에/ 김씨는 개를 팔아치울 작정이다/ 앉은저울이 나오고/ 김씨가 먼저 저울 위에 올라선다/ 그렇게 사납던 개들이/ 개장수 앞에서는 오금을 못 편다/ 오들오들 떠는 개들을/ 김씨가 차례로 끌고 나온다/ 앉은저울 위에 김씨는/ 엉거주춤 개를 보듬고 앉아서/ 저울눈을 헤아린다/ 김씨 몸무게를 빼고/ 남은 무게가 개값이란다/ 오들오들 주인 품에 안기어/ 무게를 잰 개들은/ 저마다 주인 몸무게를 빼고/ 무더기로 개차에 실리어 떠나고/ 김씨는 다시 저울 위에 올라/ 혼자 무게를 잰다/ 마지막 무게가 저울추에 매달려/ 적막하게 흔들리고 있다//

낙화암에는 / 정양
천 년 넘도록 낙화암에는/ 삼천궁녀들이 꽃처럼 뛰어내렸다고/ 그냥 믿어버리는 이들이 아직 많아서/ 사람들 북적대는 낙화암에는/ 봄마다 지친 꽃잎이 진다// 나라 잃고 가장 잃고 사내 잃고/ 나당연합군에게 무참히 짓밟힌/ 백제의 아녀자들 아니었냐고/ 짓밟힌 아녀자들을 무차별/ 학살한 게 아니었냐고 물어도,// 궁녀가 그토록 많은 나라라면/ 망해버리길 차라리 잘했노라고/ 백제 유민들이 망해버린 제 나라를/ 쓰라리게 비아냥대도록 꾸며낸/ 그런 떼죽음이 아니었냐고 물어도// 백마강도 낙화암도 물론 대답이 없다/ 천 년 넘도록 낙화암에는/ 볼 테면 보라고 봄마다/ 지친 꽃잎들이 짓밟힌다//

난로 앞에서 / 정양
퇴근 시간 지나서/ 식어가는 난로 앞에 앉는다.// 빈 운동장 가득하게/ 눈 내리고, 겨울은/ 유년의 늪 속에 빠지던 눈보라로/ 눈보라 속 대숲의/ 새소리로/ 목숨의 마디마디를 시리게 한다.// 작년에도 이맘때쯤/ 그렇게도 눈 내리고/ 사람도 사람들도 보고 싶더니/ 새소리로 휘날리는 눈, 대숲의/ 새소리로 쌓이는 눈// 설합 속/ 휴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 식은 난로에 불을 지피면/ 새로 만나는 추위를 쪼이며/ 망설이며 있는 이 한참을/ 망설이며 망설이며 살아나는 불꽃/ 묵은 시간들이 불붙어/ 기억의 마른 살가죽에/ 타오르는 불꽃.// 내 기억의 목숨의 기슭에/ 불을 지르고/ 해목은 불장난처럼/ 겨울은/ 식은 난로처럼 남아 있다.//

빈 무덤 / 정양
형무소에 끌려가서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육이오를 맞았고/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냈다는/ 그럴듯한 풍문도 아랑곳없이/ 인공 난리 다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틀림없이 살아서 돌아온다고/ 안 돌아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던 점쟁이 아줌마는/ 마을을 온통 사람범벅으로 만들어 놓고/ 돌아온다고 못박고 그 날짜에 으시딱딱/ 종적을 감추기도 했었습니다// 휴전선이 생기던 해부터 어머니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오다가/ 몸져눕기 한 해 전에/ 팔아먹다 남은 산자락에/ 빈 무덤 하나 지었습니다.// 사람 죽으면 어채피 흙 되드라/ 넋은 넋대로 떠돌드라도/ 떠돌다가 필경은 담길 디가 있어야지// 탄광파업철도파업대구폭동여순반란/ 아직도 그런 일로 떠돌지 싶은/ 떼죽음 따라 난리를 따라 풍문을 따라/ 떼죽음의 산기슭 검붉은 속살을 헤집어/ 백지에 삼베에 명주베에/ 겹겹이 퍼담은 지리산 흙/ 살 대신 뼈 대신 어루만지며/ 넋받이로 깊이 파묻은 지리산 흙// 전라도땅 김제군 공덕면 마현리/ 산 십구번지 야산 자락에/ 잡초 무성한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그 꿈 다 잊으려고 / 정양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토막씩/ 말도 안 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것이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되는 몇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없어도 그만인 것을 / 정양
집만 덜렁 지어놓고/ 서둘러 이삿짐을 옮겼다// 대문이며 울타리며/ 이 집에는 아직/ 그런 것들이 없다/ 앞산이 뒷산이 첩첩해도/ 그런 것들 없는 것이/ 맘에 걸린다// 없어도 그만인 것을/ 있어도 소용없는 것을/ 있어서 더 성가신 것을// 어쩌자고 또 그것들이/ 자꾸만 맘에 걸린다//

이슬 / 정양
생전의 슬픔이 저렇게/ 이슬로 맺힌다던가/ 원한도 미움도 그리움도/ 저렇게 이슬로 내린다던가// 밤길에 채이는 이슬을/ 이슬털이 씸김굿 삼고/ 젖은 바지 걷으며 바라보는/ 눈부시는 풀밭의 아침// 우리네 슬픔이 저렇게 반짝일 수 있다면/ 미움이 그리움이 저렇게/ 눈부시게 아름답다면// 부대끼며 남은 것들이/ 못 견디게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맘놓이리리//

첫 눈 / 정양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 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아/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 저 첫눈 보아라//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처럼/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

눈 오는 날 / 정양
낮잠을 자다가/ 잘못 걸린 전화를 받는다/ 무슨 지랄로 집구석에만 자빠졌느냐/ 나잇살이나 넉넉히 들어 보이는/ 술 취한 목소리가/ 해라쪼로 나를 당장 나오라고 한다/ 여기는 군산집, 세상에는 지금/ 눈이 쌓였다고 한다 눈이/ 펑펑펑펑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펑펑펑펑 쏟아지던/ 그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금방 찾아낼 것 같은 그 목소리는/ 눈 내리는 군산집은, 눈 내리는/ 이 도시의 어디쯤이냐/ 술 취한 눈을 맞으며/ 기웃거리는 골목길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해라쪼로 자꾸만 눈이 내렸다//

싸락눈 / 정양
검불 덮힌 마늘밭/ 언 마늘씨를 캐먹으며/ 아이들은 속이 쓰리다.// 싸락눈 몰아오는/ 흐린 하늘 밑// 손바닥으로 혓바닥으로/ 싸락눈을 받아먹으며/ 아이들은 또 어디로들 갔는지/ 어디로들 가서/ 쓰리고 긴 겨울을 캐고 있는지// 흐린 하늘을 휩쓸며/ 희끗희끗 또/ 싸락눈 이 내린다.//

눈길 1 / 정양
흐린 하늘 밑/ 들 건너 마을이 자꾸 멀어 보인다/ 눈에 묻힌 길은 아예 잃어버렸다/ 들판을 무작정 가로지른다/ 발목이 아무 데나 푹푹 빠진다// 잃어버린 길 위에 까마귀 떼/ 까마귀 떼도 길을 잃었나보다/ 어디로 날아가지도 않고/ 눈밭에 우두커니들 서 있거나/ 느릿느릿 서성거린다// 길이 보여도 길을/ 잃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고/ 길이란 잃어버리려고 있는 거라고/ 구구구구 두런거리며 눈 덮인 들판을/ 조금씩 비껴주는 까마귀 떼// 들끓는 검은 피에 취하여/ 차라리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여는 까마귀를 따라간다/ 또 눈이 오려는지/ 먼 마을 연기가 낮게 깔린다//

눈길 / 정양
하늘은 본래 저런 색이던가/ 눈보라에 휩쓸려 묻어온 하늘이/ 들판에 하얗게 쌓이고/ 뒤돌아보면 더 눈부신/ 눈에 묻혀 사라진 길 위에/ 내 발자국도 가물거린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채/ 헛것에 매달려 살다 가는 게/ 사람의 길이라고/ 길도 발자국도 사라진 하얀 들판이/ 천지사방에 어른거린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침내/ 쓸쓸하니 가버린다는 것을/ 하늘보다 먼저 잽싸게 알아버린 눈보라가/ 길 잃어 우두커니 서 있는 백발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지나간다//

대설(大雪) / 정양
마을 공터에 버스 한 대/ 며칠째 눈에 파묻혀 있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아무 때나 들어서면 거기/ 국수 내기 화투판 끝에/ 세월을 몽땅 저당잡힌 얼굴들이/ 멸치국물에 묵은 세월을 말아먹고 있을/ 눈에 묻힌 외딴집 앞// 눈에 겨운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 덜프덕 눈더미 내려앉는 소리에/ 인기척 없던 외딴집 되창문이/ 잠시 열렸다 닫히는 것 같다// 잊고 살던 얼굴들이 모여 있는지/ 아무데나 들어서서 어디 한번/ 덜컥 문을 열어보라고/ 제 발자국도 금세 지워버리는 눈보라가/ 자꾸만 바람의 등을 떠민다//

진달래 캐러 왔다가 / 정양
뜰에 옮기려고/ 진달래 캐러 산에 왔다가/ 진달래꽃 흐드러진 산자락/ 삽자루에 기대어 넋놓고/ 꽃구경만 한다// 마음 다 비운 듯이/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래도 꽃들이 심상치 않다/ 화장끼도 화냥끼도 없이/ 그냥 바람난/ 바람난 게 무언 줄도 모르고/ 그냥 바람난/ 아슬아슬한 여자애들만 같다// 누가 진실로 마음 비우고/ 하염없이 바라본다면/ 그 곁에 다가와 비로소/ 맘놓고 곱게 필 진달래꽃// 꽂았던 삽 뽑아들고/ 돌아보지도 말고 그냥 돌아갈거나/ 그냥 돌아가고픈 속을/ 환히 알고 있는지/ 어디 한번 일 저질러보라고/ 깔깔거리는 산자락마다/ 흐드러지는 진달래꽃//

벚꽃길 / 정양
알부민이나 로얄제리 같은/ 귀한 것들은/ 아무데나 내둘리면 금방/ 상해버린다고, 꽁꽁 냉동보관이나 해야/ 가까스로 견뎌낸다고,/ 사람 사랑하는 일도 그와 같다고,/ 눈감고 입다물고 겨우내/ 묵은 벚나무들 줄지어 서 있던 길/ 보고 싶은 옷깃이나 꽁꽁 여미며/ 나는 그 길을 지나다녔네// 그 길 그 하늘에/ 저 숨막히는 눈부신 꽃잎들 보아,/ 무슨 독한 맘먹고/ 볼 테면 보라고/ 못 견디어 휘날리는가// 다 들켜도 짓밟혀도 좋다고/ 벚꽃은 저렇게/ 휘날리려고 피는가보다//

사루비아 / 정양
너를 안으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거센 물길로 지친 산길로/ 너를 보내고/ 물길도 산길도 오만가지로/ 다 막히고/ 미친 바람만 그렇게도 불어쌓더니/ 선사(先史)의 어느 가을 햇살을 훔치어/ 너는 반짝이며 돌아오느냐/ 오만가지 그리움으로 눈이 부시어/ 미치다 만 햇살로 돌아오느냐/ 잊을 일도 버릴 일도 이제는 없는/ 햇살만 햇살만 뜰에 남아서/ 숨 막히어 훔쳐보는 사루비아꽃/ 새빨간 거짓말처럼/ 사루비아는 한사코 피어 있다//

들길에서 / 정양
눈발에 가리어 더 아득한 들 건너 마을로 눈이 온다 눈은 내릴 만큼 내려서 더 내려도 표도 안 나는 이 들판에 아직은 지워버릴 일이 더 있다는 듯이 바람 한 점 안 묻히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눈이 온다 두어 개피 남은 성냥을 그어대다가 불도 못 붙인 담배만 입에 물고, 입에 문 담배를 잊어버리며 눈이 온다// 저 들 건너 마을 누구네 군불더미 속에는 시방도 깜박 잊어먹은 고구마들이 까맣게 타고 있는지 누구네 되창문을 열어제끼고 펑펑펑 쏟아지는 눈구경으로 깜박 잊은 굶주림들이 하얗게 얼고 있는지 누구네 막힌 고래를 못 뚫어서 생솔 타는 연기들은 매운 눈물을 흘리며 눈을 맞는지, 매운 눈물을 글썽이다가 펑펑펑펑 쏟아지는 눈물로 한세상을 매운재처럼 삭아가는지// 눈을 맞으며 눈사람되는 자랑도 잊어버리고 신나던 미끄럼도 눈싸움도 잊어버리고 월사금 못 내어 쫓겨오던 이 들녘의 머스매들아 고개 숙이고 쫓겨오던 지지배들아, 마흔 살 먹은 눈사람으로 이 들길에 들어섰다가 이제는 또 무슨 땅 꺼지는 아픔으로 나는 이길을 쫓겨올거나// 우리네 무거운 발자국들이 벼포기처럼 찍히어 눈에 덮였다 반절쯤 쓰러지는 허수아비도 한쪽 팔이 눈에 덮이어 눈도 코도 귀때기도 다 지워버리고 아직도 내버릴 그 무엇이 남아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눈을 맞는다//

들 건너 불빛 / 정양
밤 깊은 들판은/ 지척인지 천리인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지척이 천리인 내 사랑은/ 헤아리기가 더 어렵습니다// 지척에도 천리에도/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창밖을 자주 내다봅니다/ 천리 밖에도 진눈깨비인가요/ 쌓이지도 못하는 진눈깨비만/ 오다 말다 방안을 기웃거립니다// 하나둘씩 꺼지고 아직도 남은/ 들 건너 마을 불빛 두어 개/ 지척도 천리도 한꺼번에 사무칠/ 눈보라가 그리운 불빛 두어 개/ 지척인 듯 천리인 듯/ 밤새 깜박이는 들 건너 불빛//

까마귀떼 / 정양
흰 고무신 새로 신고/ 엊그제 내린 겨울비로 질퍽거리는/ 전라도 길을 걸었습니다// 흐린 하늘 서쪽으로/ 시린 바람 일고/ 토주(土酒)에 취한 까마귀떼가 떠 있습니다// 내 아는 세상일/ 신바닥으로 짓이기면/ 신등으로 시린 진흙만/ 묻어오르고// 산갈대 허옇게 젖는/ 산그늘에/ 까마귀떼 내려앉더니// 목숨의 마지막처럼 비어 있는/ 흐린 하늘을/ 까마귀떼가 떠오릅니다/ 산갈대가 허옇게 흔들립니다//

지척인지 천리인지 / 정양
소식 끊어진/ 천리가 안타깝던가/ 만날 길 없는/ 지척이 더 적막하던가// 지척이 천리인/ 저 눈발 보아라/ 천리보다 지척보다/ 더 사무치는 눈발// 정처없는 꿈이 삭아서/ 지척이란 저렇게도/ 아득하구나// 눈 부비며 바라보아도/ 지척인지 천리인지/ 눈이 흐리다.//

양말을 벗으며 / 정양
머리맡에 양말을 벗어놓으면 꿈자리가 사나운 법이라면서 양말 벗어던지는 내 버릇을 어머니는 생전에 늘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젊어서 객지로 떠돌닐 적에는 돈이나 떨어지면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머리맡에 양말 벗어던지는 그 버릇은 나이 들도록 무심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꿈자리는 더 사납고 오늘밤도 꿈자리보다 더 모질고 사나운 중년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며 문득 사무치도록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가짜 김일성 교육 / 정양
나이 든 사람들 말로는/ 왜정 말기에도 각급 학교에서/ 가짜 김일성 교육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가짜인지 교육이 가짜인지/ 육이오 이후에는 나도/ 가짜 김일성 교육을 받았고 가르쳤다// 남북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82세의 그 북한 주석이 죽었다/ 그는 진짜로 가짜 김일성인가/ 온 세상이 며칠이고 며칠이고/ 그의 죽을을 낮밤으로 떠들면서 정작/ 그토록 열올리던 진짜 가짜 문제는/ 아무데서도 아무런 말들이 없다// 마른 장마와 무더위와 가뭄의/ 이 여름이 유난히 길다/ 80년 만의 무더위라고들 한다/ 숨막히는 이 진짜배기 무더위는 아무리 진짜라도 어차피 지나갈 테지만/ 비바람도 태풍도 겪어가면서/ 어떻게든 가을도 겨울도/ 통일도 올 테지만// 신화도 조작도 음해도 아닌/ 진짜 김일성 교육이 언젠가는/ 꼭 필요할 것만 같다//

야이 슈발 / 정양
조심조심 다녀오세요/ 알았어요 조짐조짐// 어린이 놀이터에 가려고/ 손자녀석 데리고 나오면서/ 자식에게 예사로 경어를 쓰는/ 아들녀석 말투 때문에/ 할아버지 마음이 내내 편하지 않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서 세 살짜리 손자에게/ 현관을 발로 힘껏 걷어차고/ 야이 씨팔 문 안 열래?/ 큰 소리로 외쳐보라고/ 문 여는 법을 알려준다/ 손자는 시키는대로/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시키지 않아도 거듭 걷어차며 외친다// 질색하며 나온 며느리가/ 제 아들을 꺼안고 황급히 들어간다/ 잠시 후 손자가 다시 와서/ 할아버지 대학교수 맞냐고/ 앵무새처럼 쪼아린다//

보리민대 / 정양
보리알 여물기 훨씬 전부터/ 겨우 물알이 든 보리이삭을 잎사귀째 잘라/ 죽을 쑤어 먹었다 그게 청맥죽이다/ 오랜만에 곡기 든 죽을 먹으니/ 별똥 떨어지듯 눈물이 떨어진대서/ 별똥죽이라고도 했고, 눈물 섞어 먹는대서/ 젊잖게 옥루죽이라고도 했다// 물알이 틉틉해진 보리이삭을 따서/ 가마솥에 삶아내어 말려 바순 게/ 파렇게 쫄깃거리는 보리민대다/ 아이들은 물알이 더 틉틉한 이삭을 골라/ 어른들 몰래 끼리끼리 구워 먹었다/ 불에 그슬려 구워낸 뜨거운 보리이삭을/ 손바닥에 비벼서 후후 불어낸/ 그 퍼런 보리알도 보리민대다/ 손바닥에 묻은 껌댕이가 꺼멓게/ 입 언저리에 묻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보리민대를 허겁지겁 씹어먹었다// 며칠만 지나면 토실토실한 알보리밥을/ 고봉으로 꾹꾹 눌러 배 터지게 먹으리라/ 진달래꽃 따먹으며 허천나던/ 지긋지긋한 봄날도 이제는 끝, 아이들은/ 보릿고개의 마지막 먹거리/ 행복한 보리민대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손바닥 껌댕이를 옆엣놈 앞엣놈 낯바닥에/ 다투어 처바르며 낄낄거렸다//

보리방귀 / 정양
보리밥 먹는 여름철에는/ 방귀 많이 뀌는 게 큰 자랑이다/ 상학이 방귀는 동네뿐만 아니라/ 5학년 1반만 아니라 전교생이 다 알아준다/ 상학이가 방귀 뀌는 걸 보고/ 담임선생님도 놀란 얼굴을/ 좌우로 위아래로 흔들며 몇 번이나/ 올림픽 금메달깜이라고 했다.// 뭘 모르는 아이들은 아무 때나/ 상학이만 보면 방귀 좀 뀌어보라고/ 무턱대고 졸라대지만 사정 아는 아이들은/ 상학이 낯빛이 치잣물에 적신 것처럼/ 노랗게 질릴 때를 기다렸다// 어쩌다 한번씩 은행나무 밑에서/ 상학이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엉덩이를 깐다/ 한꺼번에 힘을 모아 큰 소리로 터뜨리는/ 그런 예사 방귀가 아니다/ 두 손으로 오르락내리락 총 쏘는 시늉을 하면서/ 엉덩이를 뒤로 조금 내밀고 무릎은/ 엉거주춤 오므리고// 불알이 달랑거리거나 말거나/ 엉덩이와 오금쟁이와 뱃살과 똥구멍으로/ 골고루 힘을 나누어 자디잘게 움짓거리면/ 품 넓은 은행나무 그늘 속에는/ 염소똥 같은 자디잔 방귀총 소리가/ 번번이 백방도 넘게 이어지는 것이다/ 일부러 꽁보리밥 배 터지게 먹고/ 곁에서 상학이를 흉내내던 복철이는/ 스무 방도 못 넘기고 철프덕/ 생똥을 싸버린 적도 있다// 은행나무 잎들도 방귀총 소리에 숨을 죽인다/ 야든일곱 야든여덟 야든아홉/ 방귀총 소리에 맞추어/ 숨죽여 수를 세는 아이들 목소리가/ 백 방을 넘기면서 점점 커지다가/ 방귀총 소리 놓칠까봐 다시 숨을 꺾는다/ 조용히 좀 하라고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입술께를 두드리면서/ 상학이 엉덩이 근처에 바짝/ 귀를 들이미는 아이들도 있다// 백아홉, 백열, 백열하나, 백열둘// 상학이는 무릎 펴고 허리 펴고 바지춤을 올린다/ 우와아 신기록이다 백열둘 백열둘 백열둘/ 아이들 함성에 은행나무 잎들이 화들짝 놀란다/ 샛노랗던 상학이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점점 커지는 아이들 목소리가 합창으로 바뀐다// 상학이 똥은 맴생이똥 상학이 방구는 보리방구/ 상학이 똥은 퇴깽이똥 백 방도 넘는 보리방구/ 상학이 방구는 줄방구 올림픽 금메달깜 줄방구//

창밖에는 / 정양
전화도 티브이도 뽑아놓고/ 종일 집안에서 지낸다// 먹고자고싸고마시고/ 안경도 벗어놓고/ 수염도 안 깎고 세수도 안 하고// 담배나 끊어볼까/ 단식이나 할까/ 내 몰골 흉하거나 말거나/ 창밖에는 펑펑/ 눈이 오고 있다//

이별 / 정양
길가에 너를 내려놓고/ 남은 말들이 신호등에 걸려 머뭇거린다/ 뒷거울 속 네 발길 밑에는/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고 적혀 있다// 뒷거울 속은 멀어도 가깝고/ 뒤에 있는 것들은 가까워도 멀다/ 돌아보지 말자고 우리는/ 서로 뒤에 있는데/ 맘 놓고 돌아보라고/ 신호등에 걸린 세월도/ 저만큼씩 뒤에 있구나// 멀리 보이는 슬픔보다/ 참아버린 말들이 가깝다/ 가까워도 멀리 보이는/ 뒷거울 속 네 뒷모습//

해장국밥 앞에서 / 정양
김남주 시인 죽은 다음날/ 술도 잠도 덜 깬 늦은 아침/ 서둘러 해장국밥 먹으러 간다// 길모퉁이 녹다 만 눈들도/ 서둘러 녹고, 오가는 발길 사이로/ 햇살이 어지럽게 부서진다// 어젯밤 술자리 끝자락에/ 안경알 빠져버린 걸 미처 모르고/ 세상이 다 흐려보이는 것을/ 술 덜 깬 탓으로만 여겼다/ 해장국밥 기다리면서/ 안경알이나 닦으려다가/ 알 빠진 안경테처럼 나는 멋쩍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그냥쟝 잊어버리고 사는 것들이/ 토막난 필름들이 토막난 그리움이/ 한꺼번에 다투어 지나간다/ 난데없는 눈물이/ 토악질처럼 쏟아지려 한다/ 이승의 해장국밥이/ 더 흐려보인다//

화학 선생님 / 정양
중간고사 화학시험은/ 문항 50개가 전부 OX 문제였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 시간에 번호순으로 채점결과를 발표하셨다/ 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 “아니 이 녀석은 전부 X를 쳤네,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점”/ 그러시고는 다음 차례 점수를 매기셨다/ 모두들 선생님의 장난말인 줄로만 여겼는데/ 며칠 뒤에 나온 내 성적표에는 화학과목이/ 정말로 100점으로 적혔다/ 백발성성한 지금도 그 점수를 믿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아지는 것도/ 나는 아직 믿을 수가 없다//

수수깡을 씹으며 / 정양
떡 한 쪼각 주면 안 잡어먹지/ 떡 한 쪼각 더 주면 너/ 안 잡어 먹지/ 이 땅의 호랑이들은 처음에는/ 떡 한 쪼각만 달라고 하더란다.// 고개고개 너머 어쩌면 그리/ 고개도 많은지/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산모퉁이/ 첩첩한 고갯길마다/ 안 잡아 먹히어 다행스러운/ 숨이 가쁘다./ 굶어죽게 생긴 자식들/ 산 너머 두고/ 수수깡이나 씹으며 돌아가는 길/ 가진 떡을 다 주어도 소용없는 고갯길.// 치마저고리 벗어주면 너/ 안 잡어 먹지/ 고쟁이까지 벗어보이면 정말로/ 안 잡어 먹지/ 부끄럼도 욕됨도 잊어버린/ 이 고개의 알몸,/ 아무리 시달려도 소용없는 알몸,/ 팔뚝 하나 띠어주면/ 안 잡어먹지/ 정갱이까지 띠어주면/ 안 잡어먹지// 고개고개 너머 어쩌면 그리/ 고개도 많은지/ 소용없는 정갱이 소용없는 허벅지 소용없는/ 엉덩짝 소용없는 젖퉁이……// 기다리다 지친 자식들/ 산 너머 두고/ 넋 달아났으므로 아픔도 없는/ 아무 소용없는 피비린내만/ 소름끼치며 흩어지더란다.// 고을마다 피먹은 이야기들이/ 깨물어도 깨물어도 소용없는/ 수수깡으로 자라서 쓰러진다.//

We have to / 정양
중간고사 끝난 다음 주 노총각 영어선생이/ 울그락푸르락한 얼굴로 용출이를 불러내더니/ 답안지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꾹꾹 찍으면서/ 시험이 장난이냐 이 쌍녀르 새끼야/ 쌍소리 묻은 쓰리빠로 철석철석/ 용출이 낯바닥을 때리다가/ 쓰리빠도 내던지고 주먹질로 발길질로/ 미친 듯이 퍽퍽퍽 두들겨팼다/ 용출이는 맞을 때마다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억울하지 않으면 아무리 맞아도/ 소리 없이 맞는다는 걸 우리는 안다/ 선생님 나간 뒤 용출이를 부축하며/ 왜 저 지랄이냐고 아이들이 물었다/ 헤브 투로 짧은 글 짓는 문제에/ 우이 헤브 투 핸드플레이라고 썼더니 저런다고/ 눈물을 훔치며 용출이는 더 크게 울었다/ 저 하던 짓 들킨 줄 아나 보다고/ 아이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키득거렸다/ 아이들 대여섯이 용출이를 손가마 태워/ 강용출강용출 연호하는 사이사이에/ 그보다 더 큰 소리로/ 우이 헤브 투 핸드플레이도 합창하면서/ 교실과 복도와 운동장을 누볐다/ 손가마 탄 채 용출이도/ 연신 눈물을 훔쳐 가며 웃었다//

봄 나들이 / 정양
지긋지긋한 이 아파트 말고/ 어느 산기슭 어느 시냇가에/ 집 하나 이쁘게 짓고 사는 것이/ 아내는 소원이라고 한다/ 말 못하는 짐승들도 기르고/ 오가는 새들 모이도 뿌려주면서/ 채소랑 곡식이랑 감 대추들 다 가꾸어/ 고맙고 다정하고 아까운 이들과/ 골고루 나누고 싶다고 한다// 그런 소원쯤 언젠가 못 들어주랴 싶고/ 사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산기슭 그런 시냇가를 틈 날 때마다/ 눈 여기며 나는 늙는다/ 먼 길 나다니는 차창마다 그런 산천을/ 먼 발치로 탐내는 것이, 부끄럽지만/ 어느새 버릇이 되어 있다/ 친해지는 건지 철이 드는 건지/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햇빛 바르고 물길도 곱고 바람 맑은 곳/ 혼자서 점찍어보는 그런 자리가/ 나다니다 보면 참 많기도 하다// 점 찍어보는 데가 너무 많은가/ 간이라도 빼주고 싶은 아내에게/ 간 빼낼 재주가 나에게는 영 없는가/ 간도 쓸개도 뱃속에 있기나 한가// 모처럼 아내와 나선 봄나들이/ 나이 들수록 속절없이 산천은 곱다/ 꽃범벅으로 점찍어보는 그리움들이/ 먼 발치로 자꾸만 외면하면서 지나간다//

 



정양 시인
1942년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태어나, 이리 남성고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1965년)하고 1977년 원광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김제군 죽산 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이리 원광고, 전주 신흥고를 거쳐 2007년 우석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정년퇴직했다.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청정을 보며〉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1977년 윤동주 시에 관한 평론 〈동심의 신화〉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모악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백석문학상, 구상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까마귀떼》《수수깡을 씹으며》《빈집의 꿈》《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나그네는 지금도》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철들 무렵》《헛디디며 헛짚으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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