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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말이라는 고향 마을의 이름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반드시 내가 나고 자란 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태어남과 자람과 방황과 깨달음의 시간이 있는 보금자리고 내가 돌아갈 마지막 안식처다.

그 고향 안의 모든 것들한테 나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친구 이상수에 대하여 쓰고 싶었지만 그게 그렇듯 쉽게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에게도 나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와 나는 열정병과 실존주의병을 함께 앓고 함께 방황을 했었다.

「승원아!」

한밤중이나 새벽녘쯤에, 친구 이상수는 문득 우리집으로 달려와서 잠들어 있는 나를 불러 깨우곤 했다. 봄이든지 여름이든지 가을이든지 겨울이든지를 가리지 않았다.

이십대 초반의 일이었다. 나는 그 무렵 전라남도 남단의 섬 덕도 내 고향마을에서 농사짓고 김양식도 하면서 소설 공부를 한답시고 하고 있었다. 낮에 고된 일을 한 까닭으로 나는 초저녁부터 깊은 잠에 떨어져 있곤 했다.

나의 객기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거부하게 하였다. 그 객기는 도와주는 이 없이도 혼자 농사짓고 김양식을 하면서 소설가나 시인이 될 수 있다며 외곬으로 파고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렇듯 쉬운 일인가. 나는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절망은 나를 몸부림치게 하고 헤매게 하였다. 이때 나를 붙잡아 주고 길안내를 해 준 사람이 그 친구 이상수였다.

그는 내 고향 덕도와 마주 바라보는 회진 포구 태생으로 어느 대학교의 국문과에 다니고 있었다. 학교 생활에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헤매다가 군대엘 갔고, 거기서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는 탈영을 했다. 그는 탈영한 뒤 갇혀 있는 삶의 답답증을 이기지 못하고 헤매다가 문득 나를 그렇게 무시로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나도 그를 그렇게 찾아가곤 했다. 초저녁이든지 한밤이든지 낯이든지 꼭두새벽이든지 찾아가서 막걸리나 수주를 마시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면서 넘치는 열정을 태우곤 했다.

우리 실존주의병과 열정병 환자들에게는 사르트르와 카뮈, 하이데거와 키에르케고르, 쇼펜하워와 니체가 술안주였다. 우리는 시지프처럼 고독과 불안과 부조리의 영웅들이 되어 있었다. 《이방인》의 주인공들이 되어 포구 마을과 덕도의 바닷가 모래밭을 휩쓸고 다녔다.

그는 시를 쓰고 유행가 가사를 썼다. 하얀 가는베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었다. 나도 그랬다. 호주머니 없는 옷이었으므로 담배나 용돈은 양말 속에 넣고 다니거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려 그 속에 넣고 다녔다. 그것들을 책 속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나와 그의 하얀 가는베 바지저고리만 입은 모습을 까치에 비유하고, 흰물새에 비유하곤 했다.

그와 내가 어울려 미친 듯이 부르고 다니던 그 노랫소리들은 아직도 내 고향 마을의 바다와 모래밭에 그대로 엉기어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렇게 열정병을 앓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는 자수를 하고 탈영 생활을 마감했다. 나하고 헤어지면서 그는 나보고 서울에 있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창과에 진학을 하라고 권했다.

이듬해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그 학교에 찾아 들었다.

1학년 2학기 한가을의 어느 날, 미아리 고갯마루의 서라벌예술대학 앞마당에서 6개월 간 감방살이를 하다가 나와서 이제 부대 배속을 받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창동에 보충 부대가 있다고 했다.

그때 얼굴에 노인들의 얼굴에 피어난 저승꽃들처럼 기미가 거뭇거뭇하게 끼어 있던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볼 만했다. 모자도 쓰지 않고 작업화끈을 매지도 않고 윗옷 단추들을 모두 풀어헤쳐 놓고 목의 머플러도 매지 않았다. 「순개판 군인」이었다.

그날 저녁 해가 질 때까지 우리는 길음동 돌산 밑의 대폿집에서 하늘이 노래지도록 술을 마셨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헤맸다. 저녁놀을 등지고 그는 창동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가 못 쓴 소설하고 시하고 니가 다 써라.」

그의 말에 나는 웃기만 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초여름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편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그의 편지는 이상수의 죽음을 전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말이 그렇지 정말 자살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의 무덤은 회진 마을 뒷산 언덕 자기 집 산밭 귀퉁이에 있었다. 그날 비가 왔다. 그의 여동생이 비닐우산을 준비했다. 그의 여동생이 앞장서고 내가 뒤따랐다. 빗방울들은 우리가 쓴 비닐우산을 짓두들겨댔다.

그의 무덤은 초라하고 앙증스러웠다. 무덤의 표피에서 피 같은 황톳물이 흘렀다. 나는 그 무덤을 등지고 선 채 회진 앞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내 귀에 그의 기타 소리와 슬프게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잠을 자다가 문득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깨곤 했다. 그는 지금도 내가 사는 서울 우이동 내 방 앞에 와서 서성거리곤 할는지도 모른다. 열정이 남다르던 그 사람, 어떻게 그 열정병을 여의고 떠나갔을까. 「흥남 부두 울며 찾던 눈보라치던 그날 밤」을 피맺힌 소리로 부르면서 그는 모든 밤을 호랑지빠귀처럼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 이상수를 위하여 소설집을 바쳤다. 나는 중편 〈까치노을〉을 그 「순개판 군인」을 생각하고 가슴 아파하면서 썼다. 사내답지 못한 일이지만 그 소설집의 교정지를 읽으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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