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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초여름 글밭을 짓다 / 허숙영

부흐고비 2021. 10. 9. 04:42

2021 호미문학대전 금상

초여름 이랑사래는 초록 문장으로 빼곡하다. 너른 밭이랑 곳곳에 나름대로 구두점이 찍혀있지만 나는 수시로 난독을 하고 만다.

고추 감자, 채소들은 목차에 일치감치 자리매김을 끝내고 느긋하다. 마지막으로 심은 참깨가 애를 태웠다. 연장 탓으로 돌려보지만 탈자가 너무 많았다. 띄어쓰기도 제대로 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흩뿌린 티가 난다. 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표가 난다. 실패를 거듭 한 후에는 손으로 직접 씨앗을 넣고 흙을 덮어주었더니 겨우 자리를 잡았다. 세 번째 씨를 뿌린 뒤에야 겨우 착상이 된듯하다. 깨알 같은 단어들이 오종종 실눈을 뜬다. 제대로 된 문장하나 건지기 위해 이렇듯 애를 쓰는데 제아무리 단단한 땅인들 품을 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단단히 뿌리 내릴 때까지 쉼 없는 관심이 필요하다. 물은 마르지 않는지, 해충이 꼬여들지 않는지, 그악스럽게 엉켜드는 잡풀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텅 빈 원고지 칸칸에 채워 넣을 레이아웃으로 설레던 날들이 있었다. 소재는 다양한데 풀어내기가 어려웠다. 구성도 쉽지 않았다. 작년에 심었던 작물을 같은 곳에 심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루갈이를 해야 한다.

이른 봄부터 수시로 공책을 펴고 남의 좋은 글 필사도 해가며 이웃과 내 삶이 발아한 모종을 심어 가꾸었더니 어느새 글밭이 그득하다. 비어있는 원고지를 하나하나 메꾸며 자주 들락거리는 사이 하나의 문장이 완성되고, 어느덧 다양한 문단이 엮였다. 이제야 여러 편의 글이 제대로 모양새를 갖추었다.

내 손이 바쁘다. 더러는 따옴표로 땅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을 소리 소문 없이 지워버리며 방해하는 벌레들을 잡아야 하고 말줄임표로 드문드문 박아둔 콩이 말문을 트고 제대로 된 단어를 쏟아 놓을 때까지 비둘기도 쫒아야 한다.

고추밭이랑은 만연체다. 일곱 줄이나 되지만 마침표는커녕 쉼표하나 없다. 곁가지로 뻗으려는 고추 옆 순은 눈에 띄는 대로 따버려야 원 줄기가 튼실하다. 주제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제법 튼실한 걸 보니 제대로 자리 잡는 한 여름이면 행간에서 숨을 헐떡이며 읽어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강풍에 허리라도 꺾일까봐 지지대를 네댓 번이나 치고 보니 오선지에 몸을 기댄 것 같다. 그 옆에는 조악하게 급조해 꿰어 맞춘 꽈리고추가 낮게 엎드려 있지만 괜찮다.

오늘도 호미를 들고 나선다. 봄이 멀찌감치 꽁무니를 빼버린 후라 나의 글밭 짓기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다. 곧추 떨어지는 햇볕을 피해 산 그림자 내려앉을 때까지 기다리며 건입맛만 다시다 돌아오기도 한다.

나는 간결체를 좋아한다. 반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곳의 오이, 가지는 내가 자주 들여다보는 글이다. 간결한 소주제들은 짧지만 숨은 의미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 손바닥 수필이다. 걸쳐둔 대나무를 야무지게 움켜잡은 덩굴손으로 논리에 맞는 뒷받침 문장을 쓰느라 줄기를 늘려간다. 입맛당기는 열매를 곧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다. 손가락만한 오이들이 많이도 달렸다. 장마철도 아닌데 오이 밭이 써내려가는 문장력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한다.

꽃도 대궁도 열매도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인 가지는 잠언이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문체로 이루어진 가지에 다시 한 번 눈길을 보낸다. 볼펜만한 꽃다지가 달랑달랑 매달려있다. 채 커지도 않은 것들을 생으로 우걱우걱 씹어 삼키던 배고팠던 날들의 은유다. 유년의 그때처럼 입맛을 다시게 하지만 제대로 된 느낌표하나 만들어 보려 한다.

현학적이지 않고 별다른 수사 없이 수수한 하얀 꽃을 살며시 숨겨둔 감자두둑은 근육질이 장난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곧 튼실한 알맹이를 내어 놓겠다. 내가 지은 것이지만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상추 쑥갓, 단배추 치커리는 열거해 있고, 보름 간격의 시차를 두고 심은 옥수숫대는 점강법으로 바람 불면 차례대로 팔을 흔든다. 이즈음엔 대파의 강건하고 꿋꿋한 대궁이 감탄사 하나 뽑는다. 미끈하게 빠진 대궁 끝의 소보록한 씨 주머니는 벌써 내년을 기약하며 도타워져 간다. 양배추는 겹받침 단어를 꽃이라 우기는 듯 하고 손바닥만 해진 토란잎은 하트모양 우산 같지 않느냐며 직접 비유를 읊는다.

어떤 것이든 잡고 일어서려는 오이와 더덕 줄기의 조막손을 놓지 않으려 말뚝을 박고 줄을 쳐 올려준다. 바닥을 기다보면 물크러지거나 상처를 입어 온전하지 못하고 다른 식물을 옭아매 죽게 한다. 글자만으로 자립이 어려우면 내 손을 거쳐 새롭게 타고 오를 지지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조사하나 잘못 쓰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문장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잡문도 눈에 띈다. 개망초는 기세도 등등하게 한 문장 전체를 장악할 듯 뿌리를 내린다. 쑥부쟁이와 명아주는 주제도 모르고 키를 키운다.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보리 몇 톨도 떨어진 모양이다. 벌써 누렇게 익은 보리 서너 포기가 도라지 곁에서 까칠한 거스러미를 빳빳이 치켜세우며 뽐낸다. 아무리 영양가 있는 곡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면 잡풀에 불과하다. 명문구도 주제와 상관없으면 가차 없이 뽑아내야 한다.

초여름 사래긴 글밭은 때로 감동일 때도 있지만 허탈할 때도 있다. 겨우 일궈놓은 튼실한 작품들을 한 순간에 잃을 때가 있다. 컴퓨터에 저장해둔 글들을 다 날렸을 때처럼. 벌레들의 습격을 받거나 이유 없이 풀썩 주저앉는 것들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내 팔뚝처럼 굵직하게 자라던 토마토나무가 새들새들하더니 통째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 막 조롱조롱 달리기 시작한 토마토가 투두둑 멍이든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땅심이 든든하지 못한 것도 내 탓이다. 그런 땐 정말이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싶다.

밭을 들락거리다보면 사유가 깊어진다. 뿌린 것 없이 거두려는 욕심은 내려놓는다. 끊임없이 불쑥불쑥 자라나는 잡생각은 수시로 걷어낸다. 다른 생명 있는 것들과 나누어야만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자주자주 들여다보아야 감동을 주는 온전한 알곡만으로 이룬 한 권의 책이 비로소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얼마나 알찬 열매를 거둘 것인가는 흘린 땀방울에 비례하리라. 강풍에 뿌리조차 뽑혀 넘어질 새라 층층이 줄을 치고 병이라도 걸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날도 보내고, 목이 타들어가는 가뭄에는 먼 길 돌아 물통을 들어 날라야 가능한 일이다. 곡진한 마음만큼 벌 나비도 도와주고 햇살과 바람이 쓰다듬어 주어야 마침표 하나 찍을 수 있다.

내가 짓는 문장에는 진한 화장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향내는 없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로 무장한 표독한 내용도 심지 않으려 한다. 그저 묵묵히 순리대로 받아들이려는 농부의 심성을 닮았으면 한다. 과장의 몸짓보다는 부끄러워 잎 속에 웃음조차 숨긴 듯 보일 듯 말 듯한 하얀 꽃이 대부분인 내 글밭이다. 감자 꽃과 고추 꽃이 그렇다. 잎사귀 젖혀 살펴보면 두불 콩 꽃도 하얗고 조그만 모빌처럼 달랑거린다. 기껏 멋을 부린다는 것이 오이꽃 같은 노랑이다. 치렁치렁 수사를 걸치지 않는 솔직담백한 민낯이다. 남이 보아주어도 괜찮고 또 나만의 만족이라도 상관 없다.

내가 가꾸고자 한 주제들은 잘 심겼는가. 돈도 되지 않는 푸성귀가 대부분이지만 그냥저냥 만족하며 살아간다. 만만찮은 삶에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먹고 사는 일에 관여 한다는 것이다.

아직 설익은 풋것들에 얼굴을 파묻고 읽어내노라면 어느새 내 삶에도 씨 주머니로 남을 심지 굳은 대궁하나 솟을 것 같아 경건해진다.

초록으로 넘실대는 사래긴 밭을 가꾸다 보면 제대로 된 농부가 될까. 열심히 짓다 보면 온전한 글쟁이가 될까. 이 밭에서 나고 자라 우화를 이루었다는 듯 배추흰나비 한 쌍이 우아한 몸짓으로 주변을 날다 사라진다. 나도 저 나비처럼 내 글이 날개를 달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견뎌 보리라. 푸른 책장을 휘리릭 넘기며 바람이 맞장구를 쳐주는 초여름이다.


2002년한국수필 신인상, 제1회 경남 젊은 작가상, 경남문학 우수 작품집상, 순리 문학상,

2020 아르코 문학 창작기금 선정.

수필집 :‘단디 해라이~’,‘비린구멍’,‘경남문학’,‘선수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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