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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향일암의 달 / 권대웅

부흐고비 2021. 10. 9. 05:00

스무 살 적. 내 꿈은 이 땅 대한민국, 코리아에서 멀리 떠나거나 머리를 깎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전두환이 싫었고 취직이 안 되는 이 나라가 미웠고 떠나간 사랑이 너무 슬펐다.

남쪽으로 가고 싶었다. 지구 최남단 끝 우수아이아, 그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다. 등 뒤로 지구가 아닌, 인간들이 살고 있지 않은 저 바다 너머 미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다가 등대불이 켜질 무렵 부둣가 술집으로 가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술집 여자와 탱고를 추며 취하고 싶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오!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가도 가도 끝없는 남미 들판을 달리는 트럭 운전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외로워지면 문득 떠나간 사랑이 그리워지면 트럭에서 내려 고국을 향해 오줌을 깔기고 감자를 먹이고 싶었다. 스무 살 적, 남루한 꿈.

거기에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왔을까. 바다가 보고 싶었다. 봄바람이 펄렁 불어 와 늑골 깊이 잠들었던 비루한 꿈들을 들출 때마다 선뜻 바랑을 매고 또 떠나고 싶었다. 해남 땅 끝 마을 건너 보길도로 향하다가 문득 동백이 보고 싶어졌다. 눈물처럼 후드득 진다는 선운사 동백이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동백 말이다.

여수 오동도의 동백은 조금 작위적이다.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길에 피는 관광의 동백은 그 꽃잎이 움츠려져 있다.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인간을 향해 있다. 이제 막 동백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다가 오백 년된 동백나무 2천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돌산도 향일암이 떠올랐다.

버스를 타고 돌산대교를 지나 굽이굽이 높은 암자로 가는 길에 보이는 숱한 돌산갓김치의 간판들. 암자에 이르자 돌산갓김치처럼 쌉싸름하고 찬 봄바람들이 그 찬불의 혀로 나무들을 문지르며 동백을 소생시키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어떻게 이 섬까지 들어와서 높은 암자에서 절을 건립하고 수행을 했을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원효. 무덤가 근처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잠결에 옆에 있는 물을 달게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니 그것이 해골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했다는 그 원효대사가 이곳까지 와 수행을 하고 창건한 절이 바로 향일암이다.

장관이었다. 향일암에서 내려다보이는 여수 바다의 파란 빛깔을 받으며 빨간 동백이 피어나고 있었다. 향일암 대웅전에서 불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웅전 마당으로 피어오르는 오백년 동백꽃과 멀리 햇빛에 반사되어 수없이 반짝거리는 바다 물결들 그 눈부심들이 더 불경다웠다. 화엄(華嚴) 같았다.

아! 저 여자 좀 봐! 동백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스무 살 적 나를 버렸던 여자가 양 손에 빨간 갓김치를 묻히고 있는 아낙 같은 동백. 붉은 치마를 입고 나온 저 펑퍼짐한 궁뎅이 좀 봐! 동백이 된 그 여자를 보다가 불현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라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말이 떠올랐다.

우연(偶然), 우연히. 불교에서는 이 우연조차도 이미 무수한 구슬로 이어진 그물 즉 인드로망이라 말한다. 스스로 살아가며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연결된 연기법(緣起法) 우주 본래부터 존재하는 법칙이라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만나게 된 것, 사랑, 부부, 아이, 이혼, 영원한 우정일 것 같던 어렸을 적 친구와의 멀어짐, 직장, 성공과 실패, 벌어들임, 태어남과 죽음까지...

문득 여기서 불멸이 존재하는 것 같다. 밀란 쿤델라가 말한 그 불멸 말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지만 그 우연의 투자자는 이미 그물망으로 연기된 우주라는 것을 나는 믿고 싶다. 그래서 우리 생은 불멸이라는 것을. 당신과의 사랑은 불멸이라는 것을.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 그리고 이곳 향일암이 해수관음상을 모시는 전국 4대 관음 기도처 중의 한 곳이란다.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바라본다(觀)'라는 의미에서의 '관음 (觀音)'이야말로 한 단어로 된 시다. 능엄경(楞嚴經)에 의하면 잠을 자면서도 해조음 즉 파도소리에 집중을 하고 있으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귀로 소리를 들어서 깨달음을 얻는 경지를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 하고 그렇게 도를 얻어 깨달은 보살이 관음보살이라고 한다.

향일암. 오백 년 전에 살던 동백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스무 살 적에도 왔고 2015년 봄에도 또다시 왔다. 그 동백을 보다가 깨달았다. 아니 뉘우쳤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이 싫다. 저 광대한 우주 앞에 하찮은 인간이 깨달아보아야 무엇을 깨닫겠는가. 오직 뉘우치고 뉘우칠 뿐이다) 꽃도 사랑도 우연이라는 것. 이생마저도 우연이라는 것. 그래서 또다시 만날 그 불멸의 우연 앞에 늘 겸허해야 한다는 것.

해를 향해 있다는 향일암은 그래서 해돋이의 명소라고 한다. 새해가 되면 수많은 인간들이 몰려와 해를 바라보며 소원을 빈단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해를 보러 올 때를 비껴 달을 본다는 것. 이 얼마나 근사한가. 바다 위에 뜬 달. 천 개의 거북이가 등에 천 개의 달을 이고 바다로 간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그 천 개의 달 아래 천 개의 동백꽃이 피었다. 누가 동백을 붉다고 하였는가. 동백의 붉은 잎과 잎 속의 노란 수술과 달빛에 섞인 동백은, 아! 동백꽃은 분홍이었다.

지구 최남단 끝으로 가 바다를 바라보고 살거나 깊고 높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승이 되는 둘 중의 우연 중 하나가 이루어졌다면 나는 어쩌면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검푸른 밤바다에 반사되는 달빛에 섞인 동백이 온통 분홍, 분홍으로 만발한 것을 보며 나는 밤마다 울었으리라.

향일암 일주문 108개의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내 마음 속에 멋대로 향일암을 '향월암'이라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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