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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 윤영

부흐고비 2021. 10. 27. 05:22

꽃잎 빨아 쓰듯 젖은 날 많은 당신이 싫었습니다. 거름 자리마다 붉은 달리아 꽃을 심어놓고, 태풍에 쓰러진 꽃대나 묶어주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울에 봉숭아가 흰 꽃을 피웠다고 ‘참하다, 참하다.’ 말씀하시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햇살 들지 않는 부엌 찬장 옆에 노란 감국 꽂아놓고 ‘곱다, 곱다’ 말씀하시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차디찬 골방에 비틀린 가시선인장 들여놓고, 천 쪼가리 칭칭 동여 매주고 ‘봄날까지 잘 견뎌야 하느니라.’라던 당신의 읊조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창고 문을 열어보면 수북하게 쌓인 거라고는 비료 포대나 나일론 끈 따위가 전부였습니다.

부뚜막에 꽝꽝 얼어붙은 행주, 뜨거운 물에 녹여보면 해진 런닝구 쪼가리였습니다. 겨울밤 윗목에 먹다 남은 거라고는 벌레 먹은 사과나 얼굴통만 한 고구마가 전부였습니다. 배추 한 포기에 목숨 걸어 속은 김치가 되고, 겉잎은 시래기가 되고 뿌리는 알뜰살뜰 입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식들이 버린 운동화도 슬리퍼도 안성맞춤으로 신고 다닌 전천후 같던 당신이 싫었습니다. 자식들이 먹다 둔 밥덩이도, 국물에 물컹물컹 담긴 밥알도 먹어 치우던 당신이 싫었습니다. 자식들이 속을 썩인 날이면 남새밭에 쪼그려 앉아 눈물 따위나 훔치던 당신이 싫었습니다.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느라 바빠 소원해지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던 당신이 싫었습니다.

읍내 오일장 다녀온 날이면 ‘볼그리한 블라우스 곱다만…’ 되씹던 말이 청승스러웠습니다. 기와집 일 도와주러 다녀온 날이면 ‘말간 안어른 모셔가 결이 좋아 보이더라.’라던 혼잣말이 청승스러웠습니다. 파마하러 미용실 다녀온 날이면 ‘읍내 대천댁은 비싼 보약 먹은 효험이 보이더라. 둘째 딸이 철철이 보내주는 갑더라.’라며 허공에 퍼붓는 혼잣말이 청승스러웠습니다. 들깨 빻으려 간 방앗간 다녀온 날이면 ‘나랏골 누구네 집 막내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의사가 됐다 카더리.’ 한마디 던지며 아궁이에 불 지피던 모습이 청승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걸어간 길을 독경하며 가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베란다에는 무당집처럼 형형색색의 국화를 사다 놓고 좋아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주방 창에는 온갖 마른 꽃잎을 놓고 ‘이쁘다’를 연발합니다. 죽어가는 마삭줄에 지지대를 세워주며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봄날에 보자며 기도를 합니다. 식탁엔 단풍잎도 담아놓고 누런 강아지풀도 꽂아둡니다.

박스마다 마트 비닐봉지와 스티로폼 상자와 꽃다발의 철끈을 모으고 있지요. 해진 수건은 바구니마다 쌓아 두었다가 마른행주로 둔갑시킵니다. 시든 사과도 무른 딸기도 주스로 둔갑시킵니다. 벌레 먹은 배추 잎은 가을 햇살에 자잘하게 말려 시래기를 만들기도 하지요.

자식들이 유행 지났다며 버린 운동화는 아침저녁으로 나의 조깅화가 된지 오래입니다. 자식들이 먹다 만 햄 조각이나 볶음밥에 어느새 김치를 걸쳐 내 입으로 퍼 넣습니다. 자식들이 저 혼자 자란 듯 큰소리칠 때 욕조에 들어앉아 물소리에 빗대어 울었습니다. 자식들이 결혼기념일도 생일도 잊고 다니는 날에는 섭섭함에 목젖까지 아팠습니다.

백화점 쇼핑 때 봐 둔 원피스는 걸쳐보지도 못하고 가격표만 만지작거리다 세일 기간에 와야지 다짐하는 내가 청승맞아 보입니다. 잘 나가는 선배가 ‘이 밍크 오천만 원짜리야. 이 옷 어때?’라던 모습에 부러움 반, 허허로움 반으로 한풀 꺾여 있는 내가 청승맞아 보입니다. 자랄 때 애만 먹이던 친구의 아들내외가 사업이 잘 되어 돈이 마구 굴러 들어온다는 말에 괜스레 심드렁한 내가 청승맞아 보입니다. 고교 시절 지지리 공부와 담을 쌓았던 친구에 자식이 일류 대학에 수시로 붙었다는 말에 가슴 ‘쏴’한 내 모습이 청승맞아 보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도 참 싫습니다. 지는 꽃에 때를 물어본다고 그 꽃이 왜 지는지를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이야기들이 허리춤까지 차오릅니다. 왜 이리 따순 데 말리고 있는 감말랭이처럼 달달하게 그리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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