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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센 녀석이 온다 / 이삼우

부흐고비 2021. 10. 27. 08:44

햇살이 넘실거리는 주말 오후다. 소파에 상체를 파묻고 TV를 보면서 졸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의 컬러링이 절간 같은 집안의 정적을 깨뜨린다. 작은 며느리 전화다. 손자 녀석이 보채는 통에 할머니 집에 오겠단다. 작은 아들네는 우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안방 침대에서 주말 드라마를 보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아내도 손자가 온다는 전화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집 안 청소를 안 했는데….” 혼자 말하듯 웅얼웅얼한다. 당신이 청소하겠다는 의사표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옆이 있는 남편한테 부탁하는 것도 아닌 삼인칭 유체이탈 화법이다. 아내는 잠이 덜 깬 푸석한 얼굴로 거울을 보더니 안 돼! 하며 재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가 버린다.

노부부만 사는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비상이 걸린 것이다. 우리 집 부부가 미리 정해 둔 업무 분담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의전수칙’교본대로 각자 위치에서 주어진 임무를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 아내는 샤워장으로, 나는 미적댈 것 없이 청소 담당구역으로 향한다.

1단계는 먼지 제거 청소다. 평소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다이슨 청소기에 갓 구워낸 토스트처럼 따끈따끈한 배터리를 일발 장전하고 청소를 시작한다. 작동 스위치를 최강으로 올리고 큰방, 작은방, 더 작은방, 거실 순으로 돌린다. 청소기도 방 세 개까지는 신명이 나서 앵앵거리며 먼지를 빨아들이다가 꾀병이 도지는지, 힘이 부치는지 덜덜거리다 멈추어 선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배터리 방전을 예측할 수 없으니 아슬아슬하고 감질나서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놈은 시작은 늘 호기롭게 껍쩍대지만, 뒷심이 부족한 주인장을 닮았다는 생각에 혼자 웃다가 시치미를 뗀다.

창고에 비상대기 중인 한물간 청소기로 마무리할 즈음, 아내는 절묘한 타이밍에 샤워장에서 온기를 뿜으며 나온다. 부스스한 모습은 간 곳 없고 발그스레한 얼굴은 뽀송뽀송 빛이 난다. 물기 머금은 머릿결을 수건으로 싸매고 부엌으로 잽싸게 내닫는 걸 보니, 온갖 핑계를 대며 미루어 둔 설거지가 생각난 모양이다. “하루 전날이라도 연락하지. 이렇게 갑자기 오면 어쩌라고.” 구시렁대면서도 손주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떠 개수대에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저러다가 접시 한두 개는 이가 빠지지….

처음 한두 번은 손자 생각하는 아내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지만, 이렇게 대청소를 하는 이유가 반드시 손자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며느리한테 흐트러진 살림살이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시어머니의 야무진 속내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소변 겨우 가리는 아이에게 부엌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는 무슨 상관이 있담. 평소 사는 대로 보여주면 어디에 덧나는지.

2단계는 집 안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시간에 떠들다가 벌칙으로 복도 청소하던 추억을 떠올린다. 대걸레로 죽죽 밀어 후다닥 해치운다. 청소 잘하는 꿀팁을 경험상 알고 있다.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닦는 것보다 청소한 흔적을 여기저기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식탁 의자도 여러 개 빼놓고 화분도 옮겨놓는 등 부산을 떨고 물기가 자르르 흐르도록 닦아야 알뜰하게 청소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3단계는 안방과 거실 쪽 화장실 청소다. 바닥에다 세제를 뿌리고 타일 사이에 끼인 얼룩을 칫솔로 빡빡 밀어서 씻어낸다. 벽면과 거울에는 샤워기로 물을 뿌려 생생한 물증을 남긴다. 변기통 청소의 마무리는 샴푸와 린스를 듬뿍 투입한다. 환상적인 배합으로 변기에 거품이 부풀어 오르고 물을 내릴 때마다 상큼한 샴푸 향이 통통 튀어 오른다. 물론 아내가 이 사실을 알면 기겁할 일이다.

내 얼굴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신성한 노동의 대가는 거짓이 없는 모양이다. 아내도 부엌에서 안방 화장대로 옮겨 앉아 얼굴 마사지하기가 바쁘다. 그녀는 평소에는 속 터질 만큼 굼뜨지만, 손자가 오는 날은 전설의 복서 알리처럼, ‘벌처럼 쏘고,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세 살배기 손주 녀석이 할머니를 춤추게 하는 힘이 놀랍고 부럽기만 하다.

갈무리는 손걸레질이다. 내가 유일하게 손자를 생각하며 정성을 쏟는 청소 단계다. 손자의 고사리 같은 손이 닿을 곳은 매의 눈으로 먼지 한 톨 없이 털어내고 닦는다. 눈높이 가구랑 의자며 소파도 위생 거즈로 훔치고 알코올 티슈로 마무리한다. 장난감도 세척하고 드라이기로 말려서 보기 좋게 창틀 여백에 도열시킨다.

이때쯤이면 아내도 치장을 끝내고 거실을 나선다. 곱게 화장한 아내의 얼굴이 왠지 낯설어 보인다. 맨날 입던 월남치마 대신 우아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서는 청소한 구역을 돌아보며 내무사열을 취한다. “수고했네요. 얼렁뚱땅 잘하네….” 뒤끝을 흐리고 영혼 없는 칭찬을 한다. 고래가 사는 수정궁이 아니니 화끈하게 칭찬해주는 매뉴얼은 없는 모양이다.

나도 샤워를 하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청소하면서 입었던 불결한 옷으로 손자를 안을 수 없다는 위생 수칙에 따른 것이다. 내가 자랄 때는 흙도 주워 먹고 소금이 귀한 시절이라 용의검사 하는 날은 잔모래로 누런 이를 닦기도 했다. 어머니가 씹어 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고도 지금껏 탈 없이 잘 살아왔는데 요즘 애들은 유별나긴 하다. 더없이 깔끔을 떨지만 감기는 달고 산다.

드디어 며느리 일행이 출두할 시간이 다가왔다. 이 집안의 씨종자를 앞세워 개선장군처럼 입장할 것이다.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딩동! 딩동! 녀석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까치발로 초인종을 눌러 댄다. 문을 열어주자 무소불위 손자 시윤이가 며느리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서열 3위로 밀린 아들이 유아용품 가방을 들고 뒤따라 들어온다. 녀석이 할아버지와 마주치자마자 재첩같이 앙증맞은 눈을 반짝이며 느닷없이 총을 쏘아댄다.

“할부지, 빵! 빵!”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푹 앞으로 꼬꾸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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