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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바로 앞에 있는 스탕기어 선생님의 정원에는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난다. 이른 봄에 빨간 꽃망울을 맺는 매화나무로부터 왕관처럼 생긴 노란 화관을 가진 수선화, 싸리비를 연상하게 하는 초록색 대궁이에 마치 노랑나비가 날개를 접고 풀잎에 앉은 듯 샛노란 꽃잎이 위로 촘촘히 올라가며 박혀있는 긴스터 (Ginster), 살짝 스치기만 해도 상큼한 냄새가 손안에 가득 묻어나는 향료로 쓰이는 튀미안 (Thymian),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진 남불 해안의 보라색 꽃밭을 떠오르게 하는 라뵌델 (Lavendel)…… ‘ 여신의 머리를 빗는 빗처럼 생겼다 해서 ‚비너스의 빗‘ (Venuskamm)이라 불리는 앙증맞게 생긴 귀여운 풀은 사전을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파리지옥풀’이란 무서운 이름이 붙어있다.

매끈하게 가꾸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름 있는 꽃과 나무, 이름 없는 수많은 꽃과 풀들이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며 서로 어울려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자연의 한 조각은 정말 아름답다.

며칠 전 정원에서 마주친 스탕기어 선생님은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여러 가지 풀들을 자세히 소개해 주셨다. 구멍마다 이끼류가 자리를 잡고서는 자그마하고 예쁜 꽃들을 피우고 있는 잔디밭의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매끈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울퉁불퉁한 바위는 놀랍게도 비석이라고 한다. 이 돌을 갈면 그 매끈한 비석이 되는데, 20Km가량 떨어진 딜렌부륵 (Dillenburg)에서 운반해 왔다고 한다. 건조한 돌담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제비꽃처럼 생긴 보라색 꽃을 피워 올리는 꽃은 그가 몇 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정원에 소용되는 퇴비를 삭히는 두엄더미를 지나면 곤충을 잡아먹는 이 정원의 유일한 식충식물이 있다.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 이 지방에서 많이 자란다는 잔잔하고 하얀 별처럼 생긴 꽃무리 속에 숨듯이 서 있는 이 풀은, 손님들이 찾을 때마다 스탕기어씨의 자랑거리가 되는 식물이다.

“당신의 정원은 진귀한 보석으로 가득 찬 보물 상자 같아요.”

그의 정원에 매혹되어 내가 감탄사를 발하자, 5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은발인 스탕기어씨의 안경 속의 눈이 가늘어지며,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가 피어난다.

하루를 행복하기를 원하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일 년을 행복하기를 원하면 아름다운 아내를 얻고, 평생을 행복하기를 원하면 정원사가 되라는 중국의 속담이 있다. 때로는 학생들과 때로는 그의 아이들과 그러나 대부분은 혼자서, 주중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낡은 청바지 작업복에 장화를 신고 거름을 나르거나 웃자란 풀을 베어내며 늘 정원을 손질하는 이 남자의 얼굴은 언제 보아도 평화롭다. 그가 여름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벤진 냄새를 풍기는 낡은 기계로 정원의 잔디를 깎아 놓으면, 나는 가끔 마른풀을 잔디밭에서 걷어내어 두엄더미에 옮겨놓는 일로 그를 도와준다.

내가 스탕기어씨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우리 집과 아니 Anni와 마라벨라 Marabella가 풀을 뜯고 있는 말 목장 사이에 있는 이 초지는, 스탕기어씨의 개인소유가 아니다. 지금은 빌른스도르프의 김나지움이 있는 자리에 원래는 레알슐레와 하웊트슐레가 있었는데, 이 정원은 그 학교 학생들의 실습지였다 한다. 그래서 아래쪽의 길게 가로로 누운 스탕기어씨가 감자를 심는 밭의 위쪽으로는 열 개가량의 각자의 가장자리를 두른 자그마한 밭들이 세로로 누워있다. 이 학교가 이웃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자 학생들이 실습지로 사용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생물 교사인 스탕기어 선생님이 여전히 이 정원을 관리하신다. 그는 가끔 이곳에서 학생들과 야외 수업을 하거나, 특활반 학생들과 새로 만든 울타리에 페인트칠을 하기도 하며, 일 년에 한 번씩 날씨 화창한 어느 여름날 오후에 동료 교사들과 파티를 연다. 이번 여름에 ‘빌른스도르프시 하웊트슐레 학교정원(Schulgarten der Hauptschule Wilnsdorf)’이라는 이름을 정원 입구의 문 위에 아치 모양으로 새로 내 건 이 땅의 주인은 빌른스도르프 시이다.

우리가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스탕기어씨는 몇 달을 걸려서 정원의 한 자락을 보도를 까는 조그만 사각 돌들을 사용해서 바닥을 깔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학생들과 함께 만든 이 바닥은, 그냥 대충 만들지 않고, 흰색과 회색의 돌을 섞어서 기구의 부풀어 오른 풍선 모양을 정교하게 짜 넣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생활 속의 예술이랄까? 벌써 시작한 지가 일 년도 넘은 스탕기어씨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이 돌을 깐 자리 옆쪽 정원의 가장자리에다 저장고를 짓는 일이다.

엄청나게 큰 하수관을 연상시키는 앞뒤가 터진 둥근 시멘트를 몇 개 길게 붙이고는 흙을 덮고, 돌담을 쌓고, 전깃불을 켤 수 있는 장치를 하고, 두껍고 매끈한 나무로 손수 튼실한 문까지 짜 붙여 놓았다.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전선을 가설하는 대신 조그마한 태양열전판을 만들었다. 천정과 벽은 원시시대의 동굴벽화를 닮은 사냥하는 벽화로 장식하고, 들어가면 벌써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 저장고가 제대로 구실을 하자면 아직도 위쪽으로 1m가 넘게 두꺼운 지붕이 쌓아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지붕을 덮는데 사용되는 재료는 벽돌 조각이나 흙 등이 뒤섞인 건축물 쓰레기(!)라고 한다. 건축물 쓰레기를 버려서 자연을 오염되게 하지 않고 재활용하는 방법을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인 것이다. 땅을 파거나 공사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장비들은 건축회사들이 지원하고, 건축회사들은 수시로 건축물 쓰레기들을 트럭으로 가득 싣고 와서는 이 저장고 위에다 버린다.

빌른스도르프 시가 몇 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는 양로원이 우리 집 뒤쪽으로 들어서면, 이 정원에 잔디 위로 잔잔한 보도블록을 깔아 산책로를 만들 것이고, 그리고 이 정원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한 산책코스가 될 것이라고 스탕기어 씨가 얘기해 주신다. 5월말에 이 프로젝트의 진척상황을 시장과 시의 유지들에게 보여주기로 계획되어 있다는 스탕기어씨가, 학생들과 마무리 손질을 하는지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외침이 열어놓은 창을 통해 가득 들어온다.

4월초에 씨를 뿌려놓은 상추가 그사이 제법 자랐다. 오종종하니 고개를 내밀고 빽빽이 서 있는 녹색과 적색이 어우러진 잎사귀들이 너무 예쁘다. 작년에 나는 거리가 멀어져서 학생들이 가꿀 수 없게 된 실습지 두 자락을 스탕기어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한 자락에는 상추와 파, 파슬리를 심고, 다른 한 자락에는 스탕기어씨로부터 얻은 딸기 풀을 심었다. 우리 어머니의 텃밭처럼 넓지는 않지만, 나는 이제 이 텃밭에서 내가 손수 키운 신선한 푸성귀를 여름 내내 식탁에 올릴 수 있다. 이제 하얀 꽃이 올망졸망 달린 딸기는 6 월 한 달 동안 한별이의 좋은 간식이 될 것이다. 옆집 디아나와 케빈의 어머니는 마늘, 당근, 대를 세우고 그물을 씌운 토마토, 양파 등을 솜씨 좋게 줄을 지어 심어놓았다. 상추 농사가 끝난 뒤 작년 가을에 씨를 뿌렸던 배추와 무는 그때에 비가 오지 않아서 싹이 나지 않아, 가을이 끝날 때쯤 달팽이가 갉아먹어서 얼마 남지 않은 배추 한 포기와, 둘레를 묶어 주었더니 통통하게 살이 오른 커다란 배추 세 포기를 수확할 수 있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을 때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간다. 내가 정원을 한 바퀴 돌며 풀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아이는 공사장 주위를 돌아다니며 쌓아놓은 모래를 가지고 놀거나 물장난을 친다. 지난여름 한별이의 생일잔치를 열던 날, 나는 보물찾기 놀이를 계획했다. 앙증맞은 자물쇠까지 달린 나무상자에 아이들의 숫자대로 선물을 싸서 넣고, 정원의 비를 가리는 오두막집의 나무의자 밑에 숨겨 놓았다. 보물을 찾아가는 길은, 집 뒤의 산책로를 따라서 테니스장을 지나고, 김나지움의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긴스터가 무리를 지어 피어있는 산책로를 내려와서 정원으로 들어가도록, 노란 종이 리본을 나뭇가지 군데군데에다 묶어 놓았다. 여섯 명의 사내아이들은 신이 나서 함성을 질러대며 보물을 찾으러 뛰어나갔다. 한별이의 친구 모리츠는 잠시 후, “걸을 수 없어. 너가 안아 줘.” 했다며, 보물을 찾아서 신이나 하며 돌아온 아이들보다, 모리츠를 안고 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애들을 데리고 나간 남편의 얼굴이 더 빨개져 있었다.

6월이 오면 스탕기어씨의 정원을 환하게 빛나게 하는 꽃이 핀다. 이름하여 양귀비 꽃. 봄이면 온 잔디밭을 노랗게 물들이며 피는 민들레처럼 흔하지는 않지만, 깎지 않아서 웃자란 풀이 많은 넓은 초지나 철로 변을 따라 무리 지어 피는 이 꽃은 그 빛깔로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린다. 즙에서 아편을 얻는, 꽃잎도 작고 색깔도 희미하여 볼품이 없는 진짜 양귀비에 비해, 이 선정적으로 아름다운 ‘개양귀비’는, 마치 여인네들이 여럿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있는 것처럼 무리를 지어 핀다하여, 독일말로는 ‘수다장이 양귀비(Klatschmohn)’라 불린다. 언뜻 보면, 이렇게 가느다란 대궁이가 어떻게 꽃을 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약한 회색과 초록이 섞인 풀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바깥쪽에 두 장, 안쪽에 두 장의 꽃잎이 서로를 감싸 안듯이 어우러져 피어나는 이 꽃의 불타는 붉은 색은 주위의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린다. 마치 진한 갈색과 검은색의 부드러운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꽃잎의 안쪽 판이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 내비치는 붉은 꽃잎을 더욱 선명하게 돋보이게 한다. 선홍색보다는 진하고 흑장미보다는 한결 연한, 태양의 뜨거움을 연상하게 하는 이 아름다운 붉은 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정원의 다른 꽃들은 모두 그 빛깔을 잃어버리고, 오직 양귀비만이 존재하듯 그 태양의 불타는 빛을 발한다. 자연이 아닌 그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 색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자연의 바탕 위에 인간의 노력이 가해져 만들어진 또 하나의 멋진 창작품! 내가 온 마음으로 느끼고, 냄새 맡고, 즐기고, 사랑하는 이 자연의 한 조각은,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이 자연을 창조할 때에 아주 기분 좋은 시간에 만드셨나’ 보다.


천복자: 수필집 《장미의 월요일 클립의 일요일》

          2012 재외동포재단 제11회 '재외 동포문학상' 수필부문 입선, PEN문학 해외동포창작문학상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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