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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향수라는 병 / 권재술

부흐고비 2021. 11. 3. 08:53

경상북도 영해가 나의 고향이지만, 영해에서 보낸 세월은 고등학교 시절까지다. 그러니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십여 년, 미국에서 4년, 나머지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보냈다. 청주에서 보낸 세월이 5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하면 충청북도 청주가 아니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청주가 고향이 아니라고 해서 정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청주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창을 열면 청주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는 이름조차 충청도스러운 무심천(無心川)이 청주의 도심을 가로질러 흘러와서는 내 아파트 뒤쪽에서 미호천을 만나 멀리 금강으로 흘러가고, 동쪽에는 우암산(牛巖山)이 우뚝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피반령이 병풍처럼 청주를 둘러싸고 있고, 서쪽으로는 어머니 젖가슴 같이 나지막한 부모산(父母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내 아파트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있었던 한국교원대학교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타향의 풍경이 아니라 내 피부와 같은 살가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저 멀리 형제봉에서 발원하여 한골과 나랏골을 지나 구불구불 동해로 흘러가는 내 고향의 송천강, 집 뒤에 있는 수석처럼 아름다운 상대산, 멀리 남쪽의 고래산과 길게 뻗은 서쪽의 등운산과 칠보산, 그리고 대진에서 병곡으로 이어지는 동해의 만경창파를 앞에 두고 펼쳐진 고래불 해수욕장처럼, 청주의 풍경들도 나에게는 추억이 실핏줄처럼 내 가슴속에 스며있는 풍경들이다.

청주는 많이 서운할 것이다. 고향보다 더 오랜 세월 나를 보듬어 주었건만 아직도 고향이 되지 못하고 타향으로 대접받아야 하니 말이다. 고향이 무엇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내 고향 관어대에는 살지도 않는 집까지 지어놓았다. 하지만 고향보다 더 오래 살아온 청주에는 달랑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가 전부다. 땅 한 평도 없다. 아마 이 아파트도 내가 죽으면 자식들이 팔아 없애버릴 것이다. 청주가 내 고향이었어도 이렇게 했을까?

원래 고향인 영해에도 내 땅은 한 평도 없었다. 아버님께서 “너는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니 가장 많이 물려준 것이다.” 하시며 한 평도 물려 주시지 않으셨다. 당연한 말씀이다. 사실, 우리 여러 형제 중에서 대학은 고사하고 고등학교까지 간 것도 나뿐이다. 그러니 내가 가장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고향에 가면 내 소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몹시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동네의 한 폐가를 사고, 주변의 땅도 사서 집을 지었다. 주변에서는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살지도 않는 집을 짓는다고 말이다.

나 자신도 나의 이 행동을 설명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욱 말이 안 된다. 돈이 썩어 빠졌다고들 한다. 내가 그렇게 썩어 빠질 만한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랬을까?

사람의 행동은 계획과 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도 알지 못하는 내적인 어떤 충동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기 전에 이미 자기도 알지 못하는 어떤 내적 충동이 있기 마련이다. 의식적인 생각은 바꿀 수도 있고 억제할 수도 있지만, 무의식 속에 있는 생각은 바꿀 수도 없고 억제할 수도 없다. 내가 고향에 집을 지으려는 충동도 나의 무의식 속에서 발원한 것이어서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왜 나의 무의식 속에는 그런 충동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오직 하나 ‘고향’이라는 것뿐이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철새들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그 먼 곳을 갔다가도 다시 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 연어 같은 물고기도 태평양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다. 미주 대륙의 모나크나비(Monarch butterfly)라고 불리는 나비는 멕시코만에서 시작하여 캐나다를 거쳐서 다시 멕시코만으로 돌아오기까지 자그마치 4대에 걸친 여행을 한다고 한다. 멕시코만으로 다시 돌아온 나비는 그곳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자기의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자기의 고향이 아닌 조상의 고향으로 말이다. 인간도 하지 못할 일을 미물인 곤충이 하다니! 기억이란 이렇게 대를 물려 유전되는 것인가?

과학자들은 동물의 이 귀소본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왜, 어떤 방법으로 정확히 자기 고향인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귀소본능은 동물이 가지고 있는 매우 특이한 행동이다. 이런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서 이런 본능을 가진 동물이 더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밤과 낮이 주기적으로 변하는 것은 물론, 계절도 변한다. 어떤 계절은 살기 좋고, 어떤 계절은 생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귀소본능은 어떤 면에서 생존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찾는 단순한 행동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존보다 더 절박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향이라는 관념도 이러한 절박한 생존본능에서 생긴 것은 아닐까?

내 고향 관어대, 이곳 타향인 청주보다 크게 더 나을 것도 없다. 산 시간으로 따지면 청주가 훨씬 길다. 청주가 내 인생의 대부분을 먹여 살려 준 곳이다. 그래도 내 고향은 청주가 아니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다. 고향은 살지 않아도 살고 있는 곳이다. 고향은 떠나도 떠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그런가? 청주도 그리운 곳이지만 내 고향 관어대에 대한 그리움과는 결이 다른 그리움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왜 이렇게 특별한 것일까? 모나크나비가 멕시코만으로 돌아오는 것도 이 같은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알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 수는 없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돌보다 단단하게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박혀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오늘도 고향에 와서 마당과 담장에 난 풀을 뽑으며, 이해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향수라는 나의 병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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