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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영환 시인(2-1)

부흐고비 2021. 11. 18. 08:17

강영환 시인
1951년 경남 산청 출생.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중의 꽃」으로 등단. 1979년 《현대문학》 시 추천완료(필명:강산청),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남해」 당선. 저서는 시집으로 『붉은 색들』, 『술과 함께』 『칼잠』, 『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 『쓸쓸한 책상』, 『이웃 속으로』, 『황인종의 시내버스』, 『눈물』, 『뒷강물』, 『푸른 짝사랑에 들다』, 『집을 버리다』, 『산복도로』, 『울 밖 낮은 기침소리』 등과 『현대시』, 씨디롬 『블랙커피』, 지리산 연작시집 『불무장등』, 『벽소령』, 『그리운 치밭목』이 있다. 시조집으로 『북창을 열고』, 『남해』, 『모자아래』 등과 산문집 『술을 만나고 싶다』가 있다. 이주홍 문학상, 부산작가상. 하동문학작품상, 부산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부산민예총회장 역임. 한국작가회의, 그림나무, 얼토시 회원. <열린시> 동인, 계간 《시와소금》 자문위원.

 



다시 지리산을 간다 / 강영환
살빛을 초록으로 변색시키고/ 뼛속에 물도 흐르게 하고/ 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다시 지리산을 간다// 내 가는 지리산에는/ 내 나무도 있고/ 내 바위도 있다/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샘도 있다/ 모질게 심어 둔 내 길 위에서다// 능선으로/ 계곡으로/ 주능으로/ 봉우리마다/ 거친 숨결을 갖다 심었다// 산이 불러서 간다/ 산이 꼬집어서 간다/ 산이 간지럼 멕여서 간다/ 지리산은 거대한 갈증이어서/ 가는 이유를 찾아서 간다// 가슴팍에서 불쑥 솟아나/ 눈에다 녹내장을 들여놓는 산/ 소화불량으로 가스를 채워 놓는 산/ 안달이 나 벼랑길을/ 몇 번이나 굴러야 낫는 골병들// 물을 건너고/ 숲 그늘을 지나고/ 너드렁을 지나/ 바위를 타고 간다// 비를 맞고 간다/ 눈보라를 안고 간다/ 바람을 쓰고 간다/ 땡볕을 이고 간다/ 달빛과 별빛과 구름과 함께/ 어둠 속에 어둠이 되어 가고/ 빛 속에 빛이 되어 간다// 지리산은 나의 종교/ 이유도 없이 나는/ 지리산을 간다/ 지리산에 들어서 다시/ 지리산을 간다// 지리산을 다녀오면/ 말은 새소리가 되고/ 살에서 숲향이 묻어난다/ 뼈 속에서 물소리도 샘솟고/ 늑대 우는 소리도 난다// 지리산을 위무하기 위해/ 혹은 위무 받기 위해/ 지리산을 살다간 사람들을 위해/ 지리산에 살러오는 사람을 위해/ 끝없이 지리산을 간다// 내가 고사목이 되는 시간이 그리워/ 다시 지리산을 간다//

저무는 산 / 강영환
저무는 산에 누워 있었네/ 별빛도 보이지 않고 물소리도 끊어진 산등성이에 무거운 발로 누워 있었네/ 더 걷지 않아도 산은 내 곁에 남아 있었고 둘이 아니라도 그립지가 않았네/ 풀도 나무도 돌도 곁에 서있었네/ 그들은 서서 잠들고 아직도 산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불빛을 안고 가고 있었네/ 어디까지 가서 멈춰 설 지는 산도 알지 못하네/ 물이 어디에서 그 몸을 바꾸는지 알 수 없듯 저무는 산에 들면 무엇을 알 필요가 없네/ 몸을 스치고 가는 풀벌레 노래가 나를 더 깊이 잠들게 할지라도 나는 돌아보지 않네/ 산이 내 안에 누워 있으므로//

불일폭포 가는 길 / 강영환
모자처럼 폭염을 눌러쓰고 상불재를 넘었다/ 비틀거리던 길이 목마를 때쯤 거기/ 바위 아래 솟구치는 가냘픈 물줄기를 만나/ 시원하게 목 추기고 가는 길에/ 한 몸이 되었다고 따라 나선 물소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내려서다가/ 불일평전 다 와 가는 길목에서 헤어졌다// 섭섭한 것이 어디 이별뿐이었을까/ 너는 천길 벼랑 끝을 향해/ 떨어지기 위해 달려가고 나는/ 떨어지는 너를 보러 굽이, 구비 서둘러/ 벼랑 끝을 돌아서 갔다 우리는 서로/ 막다른 길에서 다시 만났다// 멋모르는 나는 발끝을 세우고 걸었지만/흐를수록 힘이 세어지던 너는 그동안/ 떨어져 내릴 것을 준비해왔다 아아,/ 어쩌면 비명으로 떨어지고 있는 너를/ 오금 저리는 전율로 바라봐야 하다니/ 내 부서지는 몸에 먼저 눈을 감고 말았다//

시인의 가슴 / 강영환
시인의 가슴은 노을이 비우고 간 술잔이다/ 물들어 떠나는 이름들 위에 뿌리기 위해/ 남치도록 붉은 감로주를 빈 잔에 채운다/ 풀잎이나 나뭇잎, 강물이 내는 숨소리를 듣는다/ 그러다 할 일없이 그냥 이별 곁에 앉아서 시인은/ 풀잎 끝에 흔들리다 가는 바람 속에다/ 불꽃을 일으키던 잉걸불을 비워내고 비워낸다//

운하는 가라 강으로 살고 싶다 / 강영환

운문사 사라암에는 쌀이 고여나는 굴이 있어/ 늘 퍼내는 만큼 쌓여 걱정 않고 살았는데/ 어느 날 욕심 많은 보살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 굴을 넓혔더니/ 쌀은커녕 물도 나지 않게 되었다/ 이 땅에는 젖이 흐르는 강이 있어/ 대대손손 꿀맛으로 농사짓고 살았는데/ 어느 해 욕심 많은 이들이 달려들어/ 배를 띄워 산을 넘기려고 파헤쳤더니/ 꿀은커녕 흙탕물이 쏟아져 마을을 쓸었다// 집이 물에 잠기고 가축이 떠내려갔다/ 아무리 배가 고픈 아이일지라도/ 제 어미젖을 갈라 한꺼번에 마시려고/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람선이나 띄우려고 강을 도륙해 버렸을까?/ 운하는 가라 강으로 고스란히 살고 싶다/ 품 안에 붕어 버들치 헤엄치게 하고/ 기슭에 춤추는 갈대숲이 새를 불러/ 노을에도 빛나는 강물 안고 흐르고 싶다/ 시인의 마음속에 한 줄 시로 남고 싶다//

물방울 틈새 / 강영환
추녀 끝에 고드름이 키가 크는 밤이다/ 얼지 않도록 틀어 놓은 수도꼭지/ 한 방울씩 많이도 아니 흐르게 할 때/ 차름차름 파문 지으며 떨어지는 물방울/ 대야에 넘쳐 흐르는 깊은 밤이다/ 고된 추위에도 얼지 않는 눈물방울이 되어/ 시방 불면인 네게로 방울져 간다/ 가서 그대 뿌리를 적시면/ 그대는 마른 가지 끝에다 꽃을 열고/ 활짝 핀 가슴으로 구름 위를 떠간다/ 젖은 발자국에 피가 돌고/ 따순 손등에도 싹이 튼다 그때 내게로 오라/ 넘치지도 막히지도 않는 물방울 틈새/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운다/ 차가운 네 가슴에서 뜨거운 내 가슴에게/ 차름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은/ 불면 밖에서도 얼지 않는 사랑이다//

금낭화 / 강영환
보고 싶다 만날 수 없는 시간들/ 뿌리로 다지고 다져서/ 가슴 주머니에 저축해 둔 그리움이/ 꽃봉오리로 솟아 터지거든/ 터져서 붉은 핏물 뚝뚝 흘러내리거든/ 날 불러주오 그대 서늘한 눈썹 끝에/ 방울방울 먹빛 시간들이 뭉쳐져서/ 눈곱으로 툭 떨어져 발등 찍거든/ 날 찾아 주오 젖은 발이 부르터서/ 기우뚱거리는 몸이 타오르거든/ 타서 재가 되거든 나를 불러 주오/ 화석이 된 굳은 피가 흐르도록/ 흘러서 그대 가슴주머니에 고이도록/ 내 구름을 깨워 주오//

편지함 / 강영환
편지를 받을 수 없는 속쓰림은 길었다/ 빈 봉투로 우편함이 가득 차서/ 도달하지 못한 편지가/ 어디를 떠돌다 늦게 왔을까/ 폐허가 된 얼굴을 보았다 어제부터/ 누가 엿보고 있는 비워 둔 방에서/ 묵은 가지를 떠난 벚꽃잎 한 장/ 흔히 쉽게 날아든 후/ 멧비둘기 한 바퀴 그냥 돌아나갔다/ 낮아진 하늘이 몰래 들어왔다가/ 낙서인 듯 빨간 연서를 남겨 놓고/ 저물 무렵에 혼자 강을 건너갔다/ 검은 눈이 빠진 허공은/ 교차하는 수천 얼굴로 가득 차고/ 배고픈 편지함은 입을 벌린 채/ 상처 깊은 못 자국에 잠들지 못한다//

청사포 편지 / 강영환
바다를 외면하고 살아 온 그대/ 손으로 바다를 움켜 쥘 수야 있나/ 쉴새없이 거품 이는 해변 기슭 자투리/ 그저 빨가벗고 뛰어 들던 여울목 거기쯤/ 석양 노을로 잠잠해지거든 그 바다/ 하얀 봉투에 채곡 채곡 접어 넣은 뒤/ 날 잊고 졸아든 그대 마음 밭에/ 속달우편으로 애써 발송하거니// 밝은 눈에서 잊혀진 흑백사진처럼/ 혹여 밀쳐지더라도 상관없으니/ 먼 훗날 그대 창에 닿거든/ 부글부글 끓는 내 속이거니 하게나/ 아직은 소리하지 않는 푸른색으로 남아/ 높이 걸려 있는 하늘쯤으로 아득히/ 그렇게 추억하게나 그대//

동거를 위하여 / 강영환
풀을 뽑으러 뜰에 나섰다/ 잡풀이 까맣게 떤다/ 뿌리까지 지우기 위해 호미를 거머 쥐고/ 풀 앞에 쪼그려 앉는다/ 전쟁하는 일이 그리 쉬울까/ 풀은 힘이 세다 나도 그렇다/ 새로 뿌리내리는 띠풀과는 화해가 힘들다/ 잔디에 터를 잡는 일에/ 반성하지 않고 덤벼드는 풀들에게/ 마당 한 켠 내어 주고/ 힘든 동거를 간청해 볼 수밖에//

차 한잔 사이 / 강영환
내가 강이라 했을 때 그녀는 개울이라 한다/ 산이라 했을 때 언덕이라고 한다/ 사소한 견해에 미묘한 차이를 내세워/ 밝다고 했을 때 어둡다고 한다/ 열렸다고 했을 때 닫혔다고 한다/ 드디어는/ 정면으로 반대의견을 표사한다/ 나는 한겹 두터운 옷을 더 껴입고/ 고정관념 속으로 철저히 걸어간다// 그녀는 자주 흔들렸다 그녀가/ 곤충이라고 했을 때 나는 벌레라고 하였다/ 시간이라고 했을 때 세월이라고 하였다/ 큰 견해에 미묘한 차이를 내세워/ 그녀는 신경 곤두 세웠다/ 짧다고 했을 때 길다고 한다/ 넓다고 했을 때 좁다고 한다/ 드디어는/ 고정관념 속으로 철저하게 걸어간다/ 그녀는 한 꺼플씩 벗어 알몸이 되고 그녀는//

뗏목 / 강영환
내 떠나고 나면 그리우리라/ 함께 타던 뗏목에서 손 흔들고 내려/ 사라지는 모습 보면 당장은/ 아니 그리울지라도/ 그대 또 다른 강가에서 서성거릴 때쯤이면/ 내가 그리워지리라// 그대 얼마지 아니하여/ 잔 글씨는 보이지 않게 되고/ 흐린날 삭식이 쑤셔옴을 경험하리라/ 그때 그대 강언덕에 닿아/ 이별의 그리움을 뼈에 새기리라/ 내가 그리워 잠들지 못하리라// 그때는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푸른 강물의 넓이를 헤아려 보고/ 그리움의 깊이를 들여다보아라/ 그대 그리움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리라/ 내가 그리워지리라//

동쪽바다 / 강영환
바람 부는 날이면 동쪽바다에 간다/ 울부짖으며 뒤집히는 바다/ 파도는 원시로부터 달려 와/ 발정 난 숫컷처럼 뭍을 할킨다/ 낮은 방파제로는 가로 막을 수가 없다/ 해벽을 타고 솟구쳐 오르는 몸부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안으로만 다독이던 쓰린 속이/ 들소 떼처럼 방파제에 몰려 와/ 광야에 오래 잠들었던 성질머리를 풀어낸다/ 속 깊이 끓어올라 터져 오르는 파도가/ 서서 달려오거니 달려와서 속풀이 하거니/ 견고한 앙가슴 때리며 부려대는 앙탈/ 속이 시원해지는 동쪽바다/ 들끓는 햇살은 물 끝에서 온다 늘/ 가슴은 바람 부는 날이 기다려진다//

바닷가에 누워 / 강영환
나는 포박 당한 채 누워 있었다/ 나를 눕힌 것은 햇살이었다/ 모래사장에 숨은 갯내음이 알몸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범했다/ 나는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잃었다/ 몸을 궁굴려 그에게서 떨어지려 해도/ 그는 어느새 나를 배 위에 올려놓고는 흔들어댔다/ 약간의 멀미가 나의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먼 곳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대답했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하고/ 제 갈 길로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하늘에는 하얀 뭉게 구름이 오르가슴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끌 수 없는 정염이 나의 몸을 놓아주지 않는다//

몰입, 경부선 / 강영환
1/ 지하철에 버림받은 내가 경부선을 타고 내려간다/ 금속 부딪히는 연속 음으로 먼저 살이 흩어지고 뼈가 해체된다/ 그렇게 철교를 지나고 터널을 통과하면 나는 빠르게 경부선에 빠진다/ 눈썹 하나 까딱 않고 헐벗은 나무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것을 보며 추풍령을 지난다/ 내 눈에는 헐벗은 나무만 보이는지 영동을 지날 때에는 뒤틀린 시커먼 바위만 눈에 띄는지/ 그리고 옥천을 지날 때는 얼어붙은 금강상류 희끗희끗 날리던 눈발 어디로 가지 못하는/ 그것들이 그늘에 몰려 있는 것만 보이는지/ 나는 경부선에 깊이 빠진다// 2/ 작은 입술 꼬무락거리며 세상을 들이마시는 새끼 연어가 거슬러 돌아 올 길을 가듯/ 그렇게 경부선을 간다면 얼마나 좋으냐/ 바닥이 하얀 강을 결코 돌아오지 못할 물로 한번 흘러가면 그 뿐/ 그렇게 한번 더 경부선을 절망하면서도 경부선을 떠나지 못한다/ 아래로 깊이 침잠해 갈수록 어둑살이 낀 차창에 하얗게 담겨지는 얼굴/ 그 위로 경부선이 살아 있다//

차가운 달 / 강영환
별을 삼킨 달이 홀로 만삭이다/ 어둔 하늘에 멀건 낯바닥 걸어두고/ 꿈틀대는 능파의 수작을 본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청상의 산녀는/ 뱁실령 베고 누워 발을 뻗으니/ 광활한 우주도 몸을 맡겨 수줍고/ 몸매 드러낸 남부능이 몸을 꼬아/ 대성골 지친 허공이 침상을 낮춘다// 그대 결코 잠들지 못하리라 누운 자리/ 등뼈 결리는 돌을 뽑아 마음에 쌓으니/ 칠선봉 일곱 봉우리가 구름 위에 뜨고/ 지나는 차가운 바람도 기가 세다/ 시린 이 드러낸 얼굴 푸르러 푸르러/ 섬진강 모래 벌 가는 달빛은/ 마음에다 서늘한 발자국을 찍어/ 못 다한 말씀을 걸어갔다//

강변 아파트 / 강영환
그대는 보았는가/ 흐르고 싶은 물의 꿈이 모여/ 강변에 말목으로 우뚝우뚝 서 있는 것을/ 밤낮으로 흐르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인 사랑이 다져져 튼튼한 못으로/ 한 곳에 박혀있는 아우성// 말없이 흐르는 산등성이의/ 유려한 선율을 따르지 못하고/ 견고한 성채 속으로 한 발 한 발/ 가슴이 여린 사람들을 불러모아/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그대 순종의 땅에 세우는 거역의 불빛/ 산이 부서지고 바다가 흔들려서/ 더 좁아진 빈 터, 흐르고 싶은 물의 꿈이/ 다시 우뚝우뚝 떠오르는 것을 그대/ 보았는가//

담배 피우는 남자 / 강영환
길모퉁이/ 밖이 내다보이는 유리창 안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남자/ 백년 동안 불을 빨아 당기고 있다/ 재로 떨어진 천년이 바람에 흩어지고/ 남자는 유리창이 있기 훨씬 전부터 거기 있었다/ 불과 함께 재와 함께 길모퉁이가 생기기 전부터 거기/ 아침잠이 덜 깬 눈빛으로 손을 더듬어/ 빨간 순수를 잠재우지 않았다// 네 빛이 동공에 스며 세상을 열고/ 네 색이 입술에 번져 유혹을 낳을 때까지/ 연기는 사랑하는 것들까지 감싸고/ 길모퉁이 밖이 내다보이는 유리창 안에/ 남자를 앉힌다/ 유리창 안으로 뻗어 가는 길이 있다//

높은 구름 / 강영환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고/ 나는 하늘로 떠오른다/ 떠오르고 싶은 나날들/ 보드라운 새털구름이 몸에 닿아/ 잔잔한 이름이 투명하게 깔린 하늘에는/ 작은 돌부리 하나 보이지 않는다// 평화로운 구름평선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삐에로는 공중제비를 넘으며 넘으면서도/ 턱 뼈 부러진 눈물을 지우지 못했는지/ 제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는지/ 배부른 모습으로 연신 울고 있다// 내 가면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적들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나의 몸은 가벼워졌다/ 분장을 지우고도 나는/ 높은 구름이 되어 바다로/ 밀려나고 있는 내가 보였다//

블랙커피 / 강영환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뽑는다/ 나는 커피의 비밀을 안다/ 커피는 밤새워 에티오피아에서 달려 와/ 자판기 속에 숨어 있었다// 동전 몇 개를 집어넣고 기다리지만/ 자판기에서는 에티오피아가 쏟아져 내린다/ 굶주린 검은 소녀의 큰 눈과/ 검은 갈비뼈를 드러낸 노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종이컵에 채워지는 동안 텁텁한/ 내 입맛은 시방 기근의 아프리카다// 다시 한 잔의 블랙커피를 뽑아 들고/ 미스 리의 미모를 칭찬하며/ 가보지 않은 나라 에티오피아의 눈물을/ 진한 독약으로 풀어 넣는다//

밥 / 강영환
사막을 걸어서 횡단하는 밥을 보았다/ 가는 허리로 모래바람을 견디며/ 숨은 수렁으로 깊이 빠지는 발을/ 힘겹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절실하게 뛰는/ 견고한 슬픔// 뒤에서 누가 불러도 돌아보거나/ 멈칫거리지 않는 모습이 하얗게 바래어져/ 점점 사막이 되어 가는 밥, 가끔은/ 옆자리 가시 돋은 선인장을 훔쳐보면서/ 압력밥솥에서 새어나오는 비명을 생각하는지/ 모래언덕 신기루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야윈 손가락이 집어든 젓가락 사이로/ 밥은 슬슬 빠져나가거나/ 건조한 입술 사이로 몇 낱/ 실오라기 빛살로 흩어져 사라진다/ 햇빛 내리쬐는 식솔들의 식탁 위에서/ 켕기지 않은 식욕을 탐하면서 걸어간다// 굶주림에 손발 떨리던 강물은 멀리/ 사막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새로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잠에 든다//

책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 강영환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책꽂이의 책들을 바래게 한다/ 햇살 아래 바래지 않는 책은 없다/ 열려진 책이거나 전혀/ 열려지지 않는 책이거나 햇살은/ 상관하지 않고 그것들을 조금씩 앗아간다// 유리창으로 들어온 어둠이/ 책꽂이의 책들을 덮을 때에도 책은/ 어두워지거나 갑갑해하지 않는다/ 책을 열던 주름 투성이 손이 세상을 뜬 뒤에도/ 말없는 침묵으로 자리를 지키던 책들/ 책은 아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책꽂이에 가만히 꽂혀 있어도/ 손 때 묻어 너덜너덜 헤어져도 결코/ 기다림의 모습을 끝내지 않는다/ 책꽂이의 책들은 어쩌면/ 유리창으로 들어 온 햇살을 바래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 어쩌면//

X세대 사랑 / 강영환
밤늦은 시간/ 지하철을 타고 가는 한 쌍 젊은 남녀가/ 문짝에 기대어 선 내 곁에서/ 수작을 벌인다 부끄러움 한 쪽 없이// 여/ 이대로 그냥 가버릴까/ 남/ 우리 집에 가면 방이 크다/ 여/ 쑥스러워서 어떻게 가니/ 남/ 너는 내방에서 자고/ 나는 엄마 방에서 자던가 아니면/ 동생하고 같이 자던가 하면 돼/ 여/ 난 안 할거야/ 남/ 그럼 헤어져서 집에 가지/ 여/ 우리 기차 타고 어디 갈까/ 남/ 어디?/ 여/ 내일 아침에 일찍 올 수 있는 곳으로/ 남/ 그런 데가 어딘데/ 여/ 밀양이나 대구 같은데/ 남/ 집에서 걱정 안 하겠니/ 여/ 한 번만 야단 맞으면 끝나는 걸 뭐/ 남/ 그걸 말이라고 해/ 여/ 서울 애들은 그렇게 많이 한다는데/ 남/ 네가 서울 애니/ -- 지하철은 부산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여/ 우리 어떡할 거야/ 남/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지/ 여/ 거기가 어딘데 응?/ 남/ 나도 모르겠어// 그들은 어디로 가서 어디까지 갔을까//

비누 세우기 / 강영환
편편하게 눕고 싶은 비누를 세우기 위해/ 물 묻은 손이어도/ 조심스럽게 비누를 쥐고/ 비누곽을 향해 팔을 뻗는다/ 비누를 세워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느 틈엔가 물이 되어/ 비누곽을 몰래 빠져나가고 만다/ 세워도 자꾸만 쓰러지는 비누를/ 세우기 위해 허릴 굽힌다// 거품을 물고 달아나기만 하던/ 비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적당하게 밀고 당기는 거리가/ 우리 사이에 필요하듯 달아나는/ 비누를 옆으로 세워 두기 위해/ 마른손을 비비며 다가선다/ 그러나 너는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나의 손끝을 희롱한다//

지붕 위의 참새 / 강영환
삼십 년 전 나주평야에서 참새 한 마리를 보았다/ 참새는 멀리까지 날아갔다/ 꽁무니가 아득하도록 멀리 멀리/ 오늘은 부산포 초량 산복도로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며/ 참새만한 소리로 짹짹거리는 참새를 보았다/ 멀리까지 날아 온 참새는/ 도랑 가에다 집을 짓고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몇 마리 새끼를 쳤다// 환장할 일에 미쳐 숨도 제대로 못 가누고/ 조그만 집들 사이로 꼬부라져 사라지는 골목길/ 지나는 아이들이 떨군 빵 부스러기에 길들여져/ 날개 한번 힘껏 펼쳐보지 못하고/ 낮은 두발로 기어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가에 지은 집은 항시/ 조그만 비에도 보따리 꾸리게 하지만/ 어디 멀리 해주평야나 만주벌판/ 벼 익는 들판 그리워한 적 있었던가//

나는 죽어도 / 강영환
애들아 나는 별은 되지 않을 거야/ 사람들이 꿈꾸며 좋아하는 별은/ 어둠의 등살에 조금씩 여위어/ 별똥별로 지는 밤을 맞이하고 말 거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잠 못 든 갈매기도 날아오르고/ 님 여윈 구절초도 포르르 지는/ 반짝거리는 슬픔 느끼기도 하겠지만/ 슬픔이 많은 별 나는/ 가슴이 아파 별은 되지 않을 거야// 그러나 밤하늘엔 맑은 별이 있어서/ 슬픔도 삼키고/ 검은 하늘에 떠 있기도 하지/ 꿈 많은 아이들이 올려다 볼 때마다/ 푸른빛으로 깜박거리며/ 아름다운 얘기 뿌려 주기도 하지 애들아/ 너희는 별을 꿈꾸어도 좋아/ 끝없이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해도/ 별은 푸르게 아름답지 그래/ 그래도 나는//

나는 별이 되지 못한다 / 강영환
나는 별이 되지 못한다/ 반짝이는 거울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어둠 속에 그냥 묻히고 만다// 작은 꿈마저도 싹트지 못하는 허허벌판/ 하늘을 올려다보는 개망초꽃/ 높이 올라갈 날개도 갖지 못했다/ 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달만 쳐다본다// 떠날 때는 표표히 그냥 표표히/ 타오르던 불꽃 스러지듯 그렇게/ 그러나 재도 남김없이/ 숲길을 걸어가는 그대 뒷모습// 나는 그대 바라보는 별이 되지 못한다/ 그대가 보아주는 별이 되지 못한다/ 눈물 부서진 하늘에서는//

일몰 앞에서는 누구나 / 강영환
누구나 한 번쯤 바라보지 않았으랴/ 누구에게나 해는 지고 내게도 그렇듯/ 지는 해를 안고 언덕을 넘어간다// 순식간에 결정되어버린 떠남 앞에/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향을 피우고 묵념을 올려도/ 내게는 떠난 슬픔보다 남은 슬픔이/ 더 견고해 질 뿐 이 낡은 도시에서는/ 떨어지는 해가 어둠을 남긴다// 산천초목이 먼저 고요히 잠들 때/ 깊이를 알 수 없는 잠 속으로/ 한 번 숨이 끊어지면 깨어나지 않을/ 그것은 실로 엄숙한 침묵// 아쉬움이나 통곡으로도 닿지 못할/ 싸늘하게 식은 욕망을/ 안타깝게도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누구나 한 번쯤 바라보지 않았으랴//

입동 지나서 / 강영환
바다에 다 이른 강물처럼/ 별은 망가지고 있었다/ 영롱하게 반짝이던 눈빛은 희미해지고/ 날카로운 모서리도 닳아 이제는/ 소리하지 않은 톱니가 되었다// 벌판에는 돌아누운 밤이 많아/ 지상의 꽃들은 피지 않고 목마른/ 은하수 흐르지 않는다/ 바위틈을 거칠게 용솟음치던 강물/ 이 땅 가을처럼 잎을 떨구고// 아침은 어느덧 벌판을 지나서/ 시린 무릎으로 저물어 가느니/ 바다에 다 이른 저녁 노을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먼 산 그리매에 말없이 잦아든다// 잎을 떨구어 버린 하늘로/ 넓어져 간다 그것은/ 용서를 터득한 바다/ 삼켜도 배부르지 않는 서늘한/ 그대 입술//

왕릉에서 / 강영환
하늘 푸르고 깊은 셋째 일요일/ 햇살 많이 내리는 왕릉에 사람들이 놀러 와/ 파릇한 풀밭에 앉아 점심을 나눠 먹고/ 죽은 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흥미 없는 두 살배기 아이는/ 엄마가 한눈 파는 사이/ 왕릉으로 자박자박 걸어간다/ 막힘 없이 흔들리며 가는 걸음이/ 위태롭기는 해도 넘어지지 않는다// 왕릉은 거대한 침묵 속에서/ 아이를 향해 한 걸음도 다가서지 않고/ 둥두렸한 죽음을 보여 준다/ 알지 못하는 아이는 무덤을 향하여/ 한 걸음씩 쉼 없이 나아간다// 아침나절은 이내 저물어/ 무덤 근처에서 빛나는 전 생애가/ 왕이 아니라도 붉게 물들고/ 물든 등뒤에 어둠이 걸린다/ 왕이 된 아이는 돌아오지 않고//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 강영환
정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이 가 닿는 끝에 너는 서있다/ 잠시 후 너는 쓰러지고/ 나는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다시 방아쇠를 당기는 일/ 너는 총알이 가 닿는 끝에 서 있는 일/ 잠시 후에도 너는 쓰러지고// 다시 네 뒤통수를 향해 정 조준/ 끝없이 일 저지르는 일 말고는/ 사랑은 흥미가 없다/ 정 조준 아니라도 당기고 싶은//

노점상인 / 강영환
사람을 피하려다/ 걸쳐놓은 지게 작대기에 발이 걸려/ 지게와 함께 넘어졌다/ 참외가 쏟아져 깨어져 구르는/ 소란스런 자갈치 길바닥은 늘 젖어서/ 지게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옆에 있던 함지박 아주머니도/ 좌판 할머니도 어디로 숨어갔는지/ 쏟아진 참외 끌어 모으고 있을 때/ 사람들은 나를 피해 갔다/ 단속원 아닌 나를 자꾸만 피해 갔다//

방귀를 뀌며 / 강영환
싸늘한 발자국들만 엎어져 있는 거리/ 매운 최루가스 밀어내고/ 파란 담배연기가 자리를 튼다/ 폐부 깊은 곳으로부터 누가, 간직할 수 없는/ 싸늘하게 물든 연기를 내어 뿜었나/ <네가 그랬어!왜 그랬어?>// 손가락질 받은 사람이 기겁을 한다/ <더럽게!, 담배도 마음대로 못 피워>/ 머리 짧은 청년이 횅하니 지난다// 매캐한 담배냄새 몰아 내고 방귀를 뀐다/ 폐부 깊은 곳으로부터 내가, 참을 수 없는/ 내가 육교를 오르면서 내뱉은 방귀/ 사람들이 안색을 찡그리며 외면한다/ 거절 못해 한 잔 두 잔 하던 술이/ 위장을 버려 놓더니, 그래/ 의사는 그저 신경성이라고만 매도하고/ 나는 그걸 믿고 신경 쓰지 않고 마구/ 지하도를 내려가면서/ 거리의 비릿한 냄새 밀어내기/ <더럽게!, 방귀도 마음대로 못 뀌어>// 그 후로 나는 그들로부터 떠나 왔어//

공단노을 / 강영환
노을이 안개를 뚫고 내 살갗에 닿는다/ 안개의 칙칙하고 뿌연 속살이/ 휴일 낮동안 나를 감금하고/ 나는 밤 그림자를 밟고 출근한다/ 볼 연지와 입술 연지를 칠하고/ 눈화장을 짙게 하면/ 밤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거울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낮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해고 근로자의 이름을 부른다/ 모두들 외면하고 스쳐 지나가지만/ 낯익은 얼굴도 하나 둘 보인다/ 마른 풀잎이 부서지며 소리할 뿐/ 붉은 머리띠는 풀어져 버려진 생리대 같은데/ 낯익은 얼굴이 돌아와/ 생리일 속에서 잠이 든다/ 고단하였으리 내 그대를 품으면/ 그대 몸에서 울며 터지는 노을/ 눈물이 나를 적신다//

이름을 쓸 때는 / 강영환
이름을 쓸 때는 세워서 쓰세요/ 꼿꼿하게 홀로 서서/ 굽은 허리의 맨살이 봉지/ 어둔 골목길에서 폭행 당하지 않도록/ 힘있게 눌러 쓰세요/ 이력서 위에 쓴 그대 이름이 풀 죽어/ 정말의 지렁이처럼 기어다닌다면/ 기어이 밟히고서야 꿈틀거릴 수밖에// 애초부터 그대/ 이름을 쓸 때는 쇠망치로 두드려/ 천년이고 만년이고 굽히지 않는 바위에/ 꼿꼿하게 세워/ 이름 혼자서도 온갖 박해를 견뎌 내도록/ 오오, 이글거리는 불꽃에 달구어서/ 오랜 담근질 속에다 세워/ 눈이 불거지도록 그대/ 그대를 눌러 쓰세요//

시력검사 / 강영환
이것이 보입니까?/ 먼 산 두 개가 겹쳐 이어져/ 경치는 참 아름답습니다만/ 좋아요 이 정도의 빛으로는/ ㄹ도 ㄷ으로 ㅎ도 ㅊ으로/ 보이기 일숩니다 좋아요 다음// 캄캄합니다 앞이 전혀/ 좋아요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예요/ 보이는 것이 비정상이예요 지독한/ 안개 속에서는 보려고 하면 더 나빠져요/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 많이도 낡았군 당신은 틀렸어/ 돌연변이의 수정체를 가졌어 다음/ 적당한 시간은 좋아요/ 순서가 뒤바뀌어도 흐르니까/ 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 구겨 넣고/ 도세요 돌아요 뱅글뱅글/ 돌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요 제발/ 안개가 걷혀도 불투명한 빛/ 이 상태로는 검사 불능이예요/ 좋아요 그럼 아예 돌아 버리세요 다음// 주군가 햇살을 분질러 버렸어요/ 가세요 떠나가세요 재빨리 빨리/ 이제는 숨어 있는 산이 보이고/ 아이들도 아이들로/ 여자들도 여자들로/ 차츰차츰 확대되어 보여요/ 미쳤군 미쳐버렸어 좋아요 다음// 리을/ 아닙니다/ 지읒/ 아닙니다/ 안보여도 보이는 난시의 빛/ 뽑아버리세요 눈/ 좋아요 다음//

난시 / 강영환
그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벽도 없이 사방으로 열려 있어 마음속에다 거울을 숨겨 가졌다/ 거울 안에서 웃고 있는 얼굴 뒤에 또 다른 눈이 나를 본다/ 눈 뒤에 눈, 그는 나와 눈 맞추기를 원한다 간절히/ 그러나 내 눈은 배가 고프고 내 난시는 사물을 겹겹이 돌아앉게 한다/ 머물러 있지 못하는 물기둥이 모세혈관을 타고 빠져나가고 마른 눈동자가 눈 뒤에 숨어 갔다/ 거울 앞에 서서 몸단장하는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는 눈이 빨갛게 물들어 갈 때/ 도시는 밝게 치장한 입술로 일어섰다/ 그 방에는 거울을 달지 않는다//

막걸리 두통 / 강영환
정성들여 만든 과월호 잡지들을/ 책장에서 솎아내 고물상으로 가져갔다./ 700권이 넘는 책을 470킬로그램 폐 종이로 넘겼다/ 잡지 세권 값도 못되는 값을 쳐서/ 빈손에 겨우 받아 들었다/ 책은 헌책방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단다/ 먹걸리 두 통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막걸리보다 더 위안을 주지 못하는 책들/ 잘 가라 재생휴지로 다시 태어나거나/ 종이박스로 몸을 바꾸어/ 막걸리를 바꿔 먹는 일이 생기더라도/ 조금은 가슴이 덜 아프게 살다 가라고/ 바닥깊이 앙금으로 남은 그늘을/ 막걸리로 씻어내는 밤은 어둡고 길다//

 

변신 1 / 강영환
중앙동에는 플라타나스 우거진 길이 없다/ 숨차게 달려가 멈춰 서서 뒤돌아보던 길은 포장마차가 불빛을 켜고 기다리고 서 있을 뿐/ 낮게 엎드려 보도블럭을 깨뜨리던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가 어디에 닿았는지/ 창살에 가리워진 앙다문 입술과 잽싸게 달아나던 유리창 속 하얀 얼굴은/ 새벽녘 산업도로를 질주해 가는 화물차처럼 꼬리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낯 선 플라타나스 잎 진 가지 사이 아쉬운 것이 어디 그것뿐이랴// 중앙동에는 친구가 없다/ 텅 빈 사무실 높은 그 자리에 시계는 말없이 저녁나절을 가르키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져 가는 것인지/ 빈 노을이 중앙동을 점거한다 이제 곧 어둠이 들 것이다/ 중앙동에도 바라다 보이는 부산항에도 먹은 것 없이 비틀거리는 건물과/ 사귄 것 없이 동무하는 네온 불빛이 바람을 타고 또 변신을 꿈꾼다/ 내가 가서 알아보지 못하는 중앙동처럼 몇 년 후 플라타나스 우거진 길이/ 길게 낮은 건물 사이로 살아나겠지 그 때까지/ 그 때까지 나는 살아야겠다//

변신 2 / 강영환
내 왼쪽 얼굴은 다른 쪽과 다르다/ 그 누군가가 교묘한 속임수로 다른 얼굴을 이어 붙였는지/ 거울을 볼 때마다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 어느 쪽이 나의 얼굴일까 아침 노을로 타는 오른쪽일까/ 눈물 아롱거리는 저녁 노을 어린 왼쪽이 그대 사로잡는 내 모습일까/ 내 얼굴에는 아침과 저녁이 함께 있고 밀물과 썰물이 함께 있다/ 그것을 느낌으로 알 뿐/ 들여다볼수록 거울은 깊어만 가고 두 얼굴을 일치시키려 해도/ 익숙하지 않은 웃음에 일그러지는 얼굴이 서로 편한 곳으로 늘어져 간다/ 세월의 무늬가 얼굴에 그려질 때 나는 두 얼굴의 정체를 눈치 채고/ 조금씩 낡은 쓸개를 빼내어 무표정 속으로 숨어 간다/ 그 누군가가 혹은 두 얼굴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변신 3 / 강영환
아스팔트 길 위에 떨어진 사진 한 장이 비에 젖고 있다/ 눈이 큰 여인의 붉은 입술이 촉촉하게 말을 한다/ 어디에서 날아와 바닥에 붙여졌는지/ 그리고 누구의 발에 밟혔는지 가슴에는 얼룩이 졌다/ 조금 더 나은 모습을 위해 살짝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웃음을 훔쳐보지 않는다/ 저녁나절에도 그 자리에서 여전히 물기에 젖어 저물고/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스팔트 위의 여자/ 색이 바래져 바람에 실려 구석진 곳으로 가서 눈을 감는다/ 입이 큰 여인 아무 말도 흘려 보내지 않는다/ 밤이 그녀를 감추기 전 까지는 노래를 다문다//

변신 4 / 강영환
수혈이 끝나지 않은 병실에서 창백한 노간주나무가 혼자 누워 있다/ 여름 물난리에 남은 흔적을 지우지 못한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높은 산이 허수아비를 닮아 있다// 한 여름은 길가에 앉아 땀을 훔쳐 갔다/ 나뭇잎들은 그늘을 만들지 않았고 밤에 잠든 바람은 깨어나지 않았다/ 여름 터널은 많은 사상자를 가지고 가을 노을을 붉게 물들였다// 물 한 컵 먹고 싸늘한 냉기로 무장한다/ 겨울을 건너가기 위해 미끄러지는 연습을 마무리한다/ 허벅지 근육을 긴장시키면서 언덕 하나를 넘어 갔다//

변신 5 / 강영환
어둠 속에서 헤엄쳐 보았지만 부딪히는 것은 이마였다/ 상처 나는 것은 벼랑 끝이 아니라 이마였다/ 꿈틀거리는 욕정을 뿜어내면서 가슴에 털이 생기고 이마는 달라져 갔다/ 껍질을 벗기 전에는 짐승이었다/ 이빨을 갈고 손톱을 기르고 그러다가 나는 새가 되었다//

입에 풀칠하는 일 / 강영환
한 달에 십만 원이나 준대/ 통근버스도 있고 그렇지/ 의료보험도 된다는데/ 8시 반에 산복도로로 버스가 지나간대/ 애들 밥 멕여 보내놓고 치우고 가도 충분해/ 오후엔 여섯시 반이야/ 저녁이 늦어질란가 그러나/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뭐 별로/ 돈은 작지만 공사장 막일하는 것 보담 낫지 암/ 고무신 공장에서 하는 일이 별다를까/ 뭐라 카드라 아, 그 그래 고무신 입에/ 풀칠하는 일이라 카드라/ 할라면 하고 말라면 말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나, 간다 잘있어 연락해// "……"//

포장마차 / 강영환
낮게 불이 켜지는 도시가 좋다/ 해가 지고 빌딩에 불이 꺼지면 가슴에 낮은 불을 켜고 은밀한 곳으로 잦아든다/ 바람이 떠난 도시, 슬픔은 투명한 풍경을 비춰 준다/ 은은한 불빛 향기가 멀리 새어 나가면 때묻고 상처받은 구두가 휘장을 젖히고 들어선다/ 서로 입술을 나누는 잔이 아름답다/ 언제 그렇게 둘러 모여 눈을 바라보며 잔을 부딪히고 말을 맞추어 본 적이 있었던가/ 빈 잔에다 강과 바다를 담는다 나무를 담고 새를 담는다/ 산을 담는다 그렇게 나를 담는다 그림자가 잔을 든다//

분신 / 강영환
도로 점용 허가를 받지 않고 포장마차 영업을 해 온 상인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구청 철거반원이 몰려들었을 때 박영근씨는 몸에다 휘발유를 뿌렸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항거였다/ 철거반원과 상인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소란 틈새에서 누군가가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휩싸 안고 이 광경을 목격한 상인들이 흥분했다/ 그리고는 과격해졌다/ 돌멩이가 나르고 철거반원들의 쇠파이프가 연약한 포장마차를 부셨다/ 그는 불을 마시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숨졌다/ 단계적인 철거를 한다고 협의했는데/ 그들은 왜 갑자기 들이 닥쳤으며 그는 왜 기름을 몸에 끼얹었을까/ 왜 그래야만 했는가 그리고 누가 그에게 불을 붙였을까/ 남겨진 슬픔이 재가되어 떨어졌다/ 장난처럼 보이는 세상 가운데 심각한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우리 동네 이발사 / 강영환
굽이쳐 돌아가는 산복도로에 어둠이 깔리면/ 이용원을 알리는 회전등에 불을 켰다/ 누가 손님으로 올 것인지 기다리지 않지만/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초저녁 적막을 털어 내듯/ 수건으로 의자나 서랍장을 털어 냈다/ 미세한 먼지는 눈을 기시며/ 옷장이나 의자 팔걸이에 어느 틈에 자리하고/ 한순간 틈을 봐 주인행세를 하곤 했다/ 거울 속에서 단정하게 놓인 가위나 빗, 면도칼이/ 묵은 손때로 숨을 쉬었다/ 빛나는 날로 머리를 손질하고 싶은 날이다//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남편 곁에서/ 그의 아내가 면도를 해 갔다/ 그들 부부는 이용원에서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 이제 중년을 넘어서는 고개에서/ 아침부터 가위를 놓는 저녁까지 함께 하는 것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여느 작은 손님이 왔을 때에도 정성을 다하여 일을 하였다/ 허리도 아프고 목덜미도 욱신거리지만/ 한 번도 짜증을 내 본 적이 없는 아내 곁에서/ 손놀림이 늘 가벼웠다/ 짜증 낸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요금을 지불하고 돌아서 나가는 손님을 취조하듯/ 어김없이 불러 세워 놓고 손을 벗어나 용케 살아 삐죽하게 솟아오른 가닥을/ 가위로 골라 가며 허밍을 했다/ 귀담아 듣지 않으면 모를 작은 노래/ 그 집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면 한없이 넓은 부산항이 바라다 보인다//

구부러진 골목 –산복도로 76 / 강영환
눈 선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살았다/ 바다도 더 많이 찾아와 주고/ 진하게 놀다가는 별이 있는 하늘동네/ 갈라섰다 다시 만나는 사람 일처럼/ 만났다 갈라지는 것이 골목이 할 일이다/ 오르막은 하늘로 가는 길을 내어 놓고/ 곧장 가서 짠한 바닷길을 숨겨놓아/ 가끔은 외로워 보일 때도 있다/ 고깃배 타는 신랑을 물 끝으로 보낸 뒤/ 식당일로 밤늦게 귀가하는 기장댁/ 길 끝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고/ 아랫동네에서 사업하다 부도 만난 박씨가/ 막다른 골목 셋방에 몸 부지해 살았다/ 왼 길에는 항운노조 간부를 들먹이다 힘에 겨워/ 스스로 생을 포기한 이씨가 남긴/ 어린 두 아이가 아버지도 없이 떠돌았다// 사람 하나 겨우 빠져 나가는 샛골목은/ 어찌 보면 질러가는 길 같으면서도/ 몇 번을 아프게 굽이쳐 돌고 난 뒤에야/ 처음 길과 만났다 늙은 골목은/ 갈라졌다 다시 만나는 일로 환해지지만/ 담벽에 해를 그린 아이들이 떠난 뒤/ 구부정해지는 줄도 모르고 허허대며/ 숨어간 뒤에는 걸핏하면 나오지 않았다//

골목 수퍼 -산복도로 195 / 강영환
콧구멍만 한 가게 간판이/ 골목 수퍼다/ 주차장도 없어서/ 거대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주인 할머니도 키가 작고/ 출입문도 외짝이어서 교차가 안 된다/ 진열된 물품도 한두 개가 고작이다/ 없는 품목이 더 흔하다/ 동네 사람들은 수퍼에 들러/ 마켓을 잃어버리고 나오지만/ 크지 않아도/ 그들 가슴에는 언제나 숨 쉬는 수퍼다//

누구나 길을 잃는다 / 강영환
산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숲이 얼마나 짙은 얼굴로 덮여 사는지/ 바다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파도가 얼마나 높은 물결로 출렁이고 있는지/ 사람 앞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표정을 바꾸는 생각으로 얼마나 자주 흔들리고 있는지/ 길 위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는 누구나 길을 잃는다/ 사람을 잃어본 길은 안다/ 걸어온 길은 사람을 잃지 않고 기억해주지만/ 사람은 길을 너무 많이 만들어/ 제 걸어온 길을 잃는다//

눈물은 슬픔이 아니다 / 강영환
그녀 가슴을 엿 본 적이 있다 지금 한창 나이/ 봉긋하게 솟은 꽃다운 입술이 내게 말하려는 눈물을 보았다/ 그녀 가슴 못내 참았던 그 여린 눈빛 속에 그렁거리며 들어앉은 사랑이/ 어찌 총총 사라진 이 땅의 풀잎 이름들만 그리워했겠는가/ 아직도 두려움에 떨며 그늘만 골라 밟아 가는 떠돌이새의 움추러든 날개를 그리워하고/ 얼어붙은 강기슭에 처음으로 가기 시작한 금을 그리워하고/ 작은 울음에도 들쳐업고 동네 어귀를 돌아오던 반벙어리 사촌 언니를 그리워하고/ 오, 그래 살 고운 눈매로 그윽이 바라 보아주던 아버지 숱 많은 머리카락,/ 지울 수 없는 기억의 터널을 걸어서 오는 아침이슬을 밟고 가는 여전한 노래 소리/ 아직은 타지 못한 불꽃 아래 숯검댕이로 남아 불을 기다리고 있느니 그대 보았는가/ 나는 그녀의 여린 가슴을 밟고 지나가던 군화 발자국소리를 지금도 듣고 있다 환청처럼 내내/ 그러나 그녀 가슴에는 오월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고/ 어깨를 걸고 더 넓은 바다로 나서는 풋풋한 남정네들의 함성이 박혀 있느니/ 그래 눈물은 슬픔이 아니다//

이제는 / 강영환
이제는 '이제는'이란 말을 쓰지 않기로 한다/ '이제는'이라고 하는 순간 앞이 막막해지고 길을 다 온 듯 유리창이 저물기 때문이다/ 천길 낭떠러지 끝에 서서 '이제는'이라고 마음속으로 읊조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큰 막막함이 앞에 가로 놓여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아직 남은 숲에 희미한 길이 나있고 그 길을 걸으며 다시 '이제는'이라고 말해 보라/ 그러면 후들거리는 아랫도리에 뿌리 내려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오월의 아기들 / 강영환
슬쩍 햇빛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아기가 잠결에 송곳니로 몰래몰래 웃었다/ 풀이파리가 달짝지근한 맛으로 흔들린다/ 간지럼타는 산들이 오줌을 눈다/ 물소리는 멀리까지 수줍움을 나른다/ 돌아누운 아내가 깔깔거리며 웃다가 아기의 잠을 깨웠다// 아기가 햇빛 속으로 걸어간다/ 누이도 따라 걸어간다/ 햇빛 속에서는 아무도 울지 않는다/ 나무잎들이 한꺼번에 바람소리로 환호한다/ 밝은 밖은 어머니 젖냄새로 가득 찬다/ 젖을 뗀 아기들이 모여있다/ 어둠 속으로 슬쩍 손을 넣어봐도 묻어나는 것은 깔깔거리는 하얀 빛 뿐//

신발 한 짝이 3 / 강영환
누가 바닷가에다 벗어놓고 지나갔는지/ 파도가 한 번씩 신었다 가곤 하는 신발 한 짝에/ 어스름 녘 맑은 섬 빛이 가득 고여/ 바다로 짙은 눈썹을 떠나 보내고 있다/ 썰물로 떠났다가 밀물로 드는 바다,/ 그리움의 끝은 보이지 않고/ 섬 기슭에 있던 조그마한 집 한 채 어디로 흘러갔는지/ 밤이면 깜박이던 불빛 보이지 않는다/ 가까운 해안도시 색주집에 앉아/ 가슴에 맺힌 바다를 노래로 풀어내는지/ 풀어내어도 남아 있는 섬이 있는지 바다는 밤새 출렁였다/ 뭍으로 가고 싶은 신발 한 짝에/ 넘치는 물결을 퍼낼 수는 없는가/ 그리운 섬을 지난 뒤에도 다시 그리운 섬이 있었다//

눈 / 강영환
눈이 내린다/ 가까이 앉은 산과 산 사이 이마 서로 맞댄 채 눈을 서로 들여다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내린다/ 계곡을 더 깊게 하는 바람을 잠재우고 바람이 지어내던 소리 끊어진 거기로 눈이 내린다/ 낮은 지붕 높은 지붕 가리지 않고// 아침이면 눈부신 슬픔으로 남는 눈은 간밤에 어둠과 몸 섞으며 깊이 빠진 나락 때문일까/ 어수선한 이부자리를 말끔히 덮고 죽은 듯이 꼼짝 않는다/ 어둠에 짓눌려 떠난 처녀성은 차라리 물들일 수 없는 순백,/ 어둠이 가슴을 쓰다듬고 지나간 뒤 더욱 창백하다 그렇다// 그렇다 일몰과 일출 사이 눈이 내린다/ 어둠 위에 홀로 내린다 어둠 뒤에도 어둠 앞에도 눈이 내린다/ 어둠 옆에도 내린다 끊임없이 내려도 어둠은 지워지지 않는다/ 내려서 쌓여도 어둠은 발돋움해서 눈 위에 우뚝 선다/ 어둠의 바닥에는 쓰러진 눈만 가득하다/ 어둠은 눈을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

그녀 떠난 빈자리 / 강영환
기다려도 지하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그녀가 갔다/ 그녀 떠난 빈자리가 억새 밭이 된 것을/ 억새 꽃잎이 대지를 하얗게 덮을 때 처음 알았다/ 돌이킬 수 없는 백발만 남아 초토의 땅을 흔들어 댄다/ 나뭇잎이 한꺼번에 강을 이루는 길모퉁이에 바람이 살아있다/ 떡갈나무는 떡갈나무대로 플라타나스는 플라타나스대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그녀 떠난 빈자리를 어떻게 알았는지/ 그걸 채우기 위해 초토의 내 가슴에 빨갛게 물든 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별줍기 / 강영환
(주) 대봉(부산직할시 사하구 신평동 499), 신발제조업체(대표 조우준, 45세) 3층 건물 옥상에서 이 회사 재봉과 미싱공 권미경 씨가 자신의 왼팔에 볼펜으로 유서를 써놓고 만원권 지폐 2장을 날린 뒤 투신, 30미터 아래 땅바닥에 떨어져 그 자리서 숨졌다. 권씨는 82년 부산 동주여중 야간부 재학중 생활전선에 나갔다. 다음은 그의 왼팔에 쓰여진 유서이다// (1992. 12.7, 부산일보)//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닌 미경이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속에 묻어 주오/ 그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權美卿(22, 부산시 서구 아미동 산 19)//
벽이 기울어져 있었지/ 회색으로 칠해진 벽이 어깨가 기울어져/ 좁은 골목길은 더욱 좁게 보이고/ 거기에는 별이 있었지/ 골목길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푸르고 푸른 별/ 아직은 맑게 빛나고 있는 별/ 모닥불 같이 따뜻하기만 한 별/ 손 잡으면 눈물 글썽이는 별/ 가을 들판에 목이 메인 미경이/ 그리고 순남이, 정식이의 굳센 별/ 기울어진 벽 모서리에서 다 줍는다/ 창녕 두메에서 가져 온 보리별/ 함안 벌판에서 가져 온 참깨 별/ 하동 긴 숲에서 반짝이던 콩별/ 누가 와서 거두어 가 주기를 바라는 별/ 가슴 설레이던 별은 떨어져/ 차츰 혈색을 잃어가고/ 별을 놓아버린 빈 손/ 슬픈 눈을 감은 별/ 눈물 가득한 별을 가슴에 묻는다//
「오빠도 비관 자살」/ 열악한 근무 조건과 인간적 푸대접을 참다못해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절규하며 공장 옥상에서 투신 자살한 여성 노동자의 오빠가 동생의 비참한 죽음을 괴로워해 오다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11일 오후 6시 30분께 부산 西歐 峨嵋동 2가 天馬山 중턱에서 權洪奇씨(28, 무직, 서구 아미동 산 19)가 5m 높이의 나뭇가지에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徐모군(15, 초장중 3년)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권씨의 어머니 朴英愛씨(48)에 따르면 숨진 권씨는 지난 91년 12월 6일 여동생 미경씨(당시 22세)가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하며 팔뚝에 유서를 쓴 뒤 자신이 근무하던 부산 沙下구 新平동 신발제조업체 (주)大鳳 3층 공장 건물 옥상에서 투신 자살하자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동생이 그렇게 비참하게 갔는데 내가 살면 무엇하느냐며 심하게 비관해 왔다는 것이다. <부산일보, 1993년 3월 12일 금요일. 23면)//
꿈이 있다고 누가 말했을까/ 이 거리에 또는 저 벌판에/ 누가 꿈을 남겨 두기나 했는가/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쉬고 있는 공구와 연장들만 땅속 깊이/ 뿌리 박고 서서/ 거리의 눈물, 벌판의 손 시려움/ 홀로 막고 있다/ 나는 그것이 눈물인 줄 몰랐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쯤으로/ 똑같은 느낌으로 받아 들여 졌을 때/ 오누이가 남기고 간 눈물이/ 돌투성이 거대 도시에 새겨 넣고 있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푸른 십자가인 줄/ 정말로 알지 못했다/ 가슴 열리지 않는 사람들이/ 고인돌로 서있는 거리에서/ 하수구로 그냥 흘러 가버리는 눈물을/ 나는 눈물인줄 몰랐다/ 내가 비석이 되어 서 있는 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다/ 내가 흘린 눈물이 한 뼘/ 흘러갈 땅이 없으므로//

버스 안의 누군가가 혀를 찬다 / 강영환
중늙은이가 버스에 올라 두리번거린다/ 안장 있는 젊은이 곁에 다가가 선다/ 젊은이는 미안한 듯 창 밖을 본다/ 버스는 출발하고 망설이던 중늙은이가/ [이봐 젊은이 너는 네 애비도 없냐]/ 시비조로 젊은이를 다그친다/ [미안합니다 몸이 좀 불편해서요]/ 쯔쯔쯔, 버스 안의 누군가가 혀를 찼다/ [요새 젊은 것들이란 경노사상이 엉망이야/ 꼭 에비, 에미없이 태어난 놈들 같애/ 즈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야/ 세상도 빌어먹을 세상이 되었어/ 도대체 학교에서는 무엇들을 가르치는지/ 늙으면 다 죽어야 해/ 이놈의 세상 늙으면 서러워]/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 젊은이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애써 창 밖으로 시선을 피하며/ 아픈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더 지날 때까지/ 중늙은이는 젊은이 옆에 붙어 서서/ [네 에미 애비가 너를 어떻게 공부 시켰는지/ 속께나 썩었겠구나]/ 점점 더 심한 비아냥거림은 계속 되고/ 젊은이는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 된다/ 몇 정거장을 더 가서/ 젊은이가 하차 벨을 누른다/ 그러고도 일어서지 못하고 앉아 있는데/ 늙은이는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버스가 정거장에 정차하였을 때/ 젊은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간다/ 다물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입이 쯔 쯔 쯔/ 버스 안의 누군가가 혀를 찼다/ 오 하느님,/ 젊은이는 왼쪽 다리가 짧아/ 심한 절룩거림으로 겨우 내리고 있는 걸/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음주운전 / 강영환
나를 믿고 타는 손님이 있다니/ 우습다 나는 지금 몹시 지쳐 있고/ 눈은 풀려 갈 곳을 잃었다/ 내가 차를 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혈중 농도 짙은 알콜의 붉은 혓바닥/ 나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데/ 타는 손님들은 밝은 웃음으로/ 내게 인사를 한다 우습다 죽음으로/ 차를 몰아가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까/ 도로는 길 밖으로 뻗어가고/ 차선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차는 날아간다 엿가락 속으로/ 더 큰 구멍 속으로 빨려 들 듯이/ 이승의 눈동자들이 떨고 있다/ 보라, 안전벨트 매는 소리가 들리고/ 손잡이를 움켜 쥔 손들이 떨린다/ 얼굴을 감싸쥐고 기도하는 이의/ 발바닥이 땀에 절어/ 웃음소리를 찾을 수가 없다/ 애초부터 나를 믿은 게 잘못이다/ 나는 일어 설 수 없는 절망감으로/ 이 땅에서 마지막 핸들을 잡고 있다/ 그런데 나를 믿고 타는 손님이 있다니/ 우습다 우습다//

봄 뜰 / 강영환
창을 열고 오랜 기다림으로 흥건히 젖은 가슴을 던져 넣는다/ 빛이 가로질러 가는 마당가에는 벌써 바다가 들어 와/ 수많은 출렁임과 하얗게 입다물던 거품들을 죽이고 다소곳이 앉아 있다/ 빛이 이룬 바다를 달려가는 바람이 창을 넘어 내게로 온다/ 바다는 엄마 냄새가 난다/ 흙냄새 같기도 하고 젖내 같기도 한 잠이 내린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쑥부쟁이, 민들레, 질경이풀이 가슴에서 돋는다/ 부풀대로 부푼 가슴을 거둬들이지 못한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나는 까치소리로 운다 / 강영환
가슴에 까치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알이었을 때부터 품어온 까치는 껍질을 깨고 나온 뒤/ 가슴에 쌓인 응어리만 쪼아먹고 컸는지 울어도 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밝은 날에는 눈을 뜨고 날개를 펴서 나르는 연습을 했다/ 다 자란 까치를 날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서부터 잠도 오지 않았고/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파란 하늘/ 어릴 때 만났던 하늘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까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날카로운 부리로 가슴을 쪼아댔다/ 가슴은 커다란 멍으로 망가져 가고 종내에는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내보내려해도 까치는 나가지 않았다/ 죽을 것만 같았다// 땅 속에 내린 관 위에 흙덩이를 떨어뜨리고 돌아서면서 올려다 본 하늘/ 아아 이 세상 무엇보다도 깊고 넓은 하늘이 거기 있었다/ 그때였다/ 가슴속에서 나래짓하며 힘차게 날아오르는 까치/ 눈물 속으로 나는 혼절해 버렸다/ 까치가 날아 가버린 가슴, 나는 까치소리로 울었다/ 그날 이후부터 다시 까치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길 안의 사랑 / 강영환
꽃 피고 바람 부는 봄이 오면/ 그대 외로움을 느끼리라// 햇살은 푸른 나무잎 사이로 반짝이고/ 새들이 작은 날개짓으로 속삭입니다/ 지금은 그대 웃으면서 돌아서 갈지라도/ 잎 지는 가을이면/ 이 겨울이 다 가고 나면/ 앙상한 나무가지 사이로 달빛이 흔들리고/ 얼어붙은 바람소리 창가에 기울 때// 내 손짓을 느끼리라/ 눈물 고인 눈짓을 느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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