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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정석 시인

부흐고비 2021. 11. 17. 08:28

김정석 시인
전남 해남 출생.

2004년 『모던포엠』으로 등단.

시집으로 『별빛 체인점』,  『내가 나를 노려보는 동안』 등이 있다.

광양제철 재직.

 

 


 


소화기 / 김정석
단 한 번의 불길을 위해/ 터지도록 제 몸에 압력을 채우고/ 사는 소화기, 당신// 또 헛방이다// 제대로 한번 쏘아보지도 못하고/ 실금실금 빠져나가는 압력처럼// 이 웃음/ 이 세월/ 당신// 소화기 하나 들고 거기 벌서라/ 내가 불 지를 때까지//

전디다 / 김정석
'견디다' 하면 머리가 하얘지는데/ '전디다' 하면 가슴까지 뻐근해져서/ '전디다'라는 말이 좋다// 볼트와 너트가 입 앙 다물고 상대를 전디듯/ 바이러스가 어지럽힌 세월을 전디고/ 세월이 빠져나가는 나를 전디고// 당신을 전디고//

저물녘 당신 / 김정석
제철소에서/ 뻘겋게 타는 쇳덩이만 보면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다 가고// 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당신이 떠났다는 소문이 찾아오고/ 뻘겋게 뻘겋게 타는 쇳덩이만 보면서/ 납작하게 두드려 패면서/ 단단해져라/ 부디 단단해져라// 패면서/ 물 뿌리면서/ 이놈아/ 이놈아/ 울컥울컥 피 쏟을 것 같은 오후도// 가버리고// 덜컥// 저물녘//

하현 / 김정석
당신이 내게 했던 그 많은 거짓말이/ 다 피었습니다// 무더기무더기 말을 쌓아놓고/ 돌맹이로 돌맹이 내리치듯// 바람은/ 꽃으로 꽃을 내리칩니다// 하룻밤에 수백 번 그대에게 날아갑니다/ 차마 오라는 기별은 못 하고/ 손톱을 짧게 자릅니다/ 벗나무는 더 벗을 옷이 없습니다//

초승달 / 김정석
소아병동에서/ 마지막일 것 같은 숨을/ 내쉬는 아이// 쪽창에 초승달이 떠서 같이 간다// 갈수록 더 깊고 먼 밤일 뿐인데/ 안 가본 길이라/ 서럽기만 한/ 초저녁 여덟 시 오 분/ 누이의 눈썹 버려진/ 세면대에서/ 흐흐 웃고 있는/ 그림자//

제련 / 김정석
때릴수록 제 몸이 더 멍드는 게 쇳덩이다/ 식힐수록 제 몸이 달아오르는 게/ 사랑이다// 천 도로 달군 쇠가/ 초속 이십 미터로 달린다/ 빨갛게 달굴 때는 언제고/ 너무 달아올랐다고 두둘겨 패며 물을 뿌린다// 단단해져라/ 질겨져라/ 그대 만날 몸을 만들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여름도 겨울도 여기는/ 천 도 언저리,// 살다가 그게 그거다 싶어지면/ 여기 와서 보는 거다/ 여기서 멈춰야겠다 싶으면/ 확부어/ 쇠로 굳혀 버리는 거다//

하길이 / 김정석
사는 게 뭐라고/ 마누라 바람나서 떠나고 그런 한국이 싫다고 애들 다 외/ 국으로 가버리고 기댈 데가 중졸 학력, 잔는 일 밖에 없어// 낮에도 밤에도/ 용접기로// 지지고 볶고 붙이고 밀고 자르고// 그때 말야 자네 아파 이승에 누워있을 때 했던 말 생각나/ 형 사는 게 참 허망하네요/ 나는 못 해봤는데/ 형은 한 번 해보소// 뭘?// 바람이나 한 번 펴보소/ 나는 나 좋아하는 여자랑 딱 하룻밤만 자고 갔으면 소원/ 이 없겠소//

만학晩學 / 김정석
팔 남매 낳아 기르다 보니/ 늘 부족했던 먹거리/ 어머니는 사는 게 나아졌어도/ 사과 한 알 당신 입에 못 넣다가/ 한쪽이 썩을 무렵에야 드셨습니다// 사과 몇 박스는 살 돈 정도는 번다고 말해도어머니는 웃기만 했습니다어머니가 야속했습니다// 올해는 청개구리처럼 성한 과일 대신/ 떨이 사과 한 봉지를 들고/ 성묘를 갔습니다// 산소 앞에 놓인 모난 과일은/ 뒹굴던 내 어릴 적 모습이었습니다/ 한입 가득 어머니를 베어 물었습니다/ 시고 달았습니다//

살구나무 / 김정석
땡땡/ 끝종은/ 운동장으로 아이들을 쏟아낸다/ 빈자리 곰살맞게 졸던/ 봄 햇살 깜짝 놀라 비낀다// 나이 들어 품은 연심이 주책없다고/ 그래도 몰래 푸른 물 끌어당기던/ 교문 옆 늙은 살구나무/ 이때다 싶어/ 연홍의 꽃불 펑펑 터트린다/ 터진 꽃가루 타고 아이들 웃음/ 담을 넘어 도망간다/ 공부하기 싫어서 더 멀리 도망간다/ 햇살이 바퀴를 굴리며 숨가뿌게 쫓아간다// 정년 일 년 남은 담임 선생님/ 낡은 교실 창에 기대어/ 햇살에 묻은 졸음 툭툭 털어내며/ 살구나무가 된 듯 괜스레 우쭐거린다/ 봄이 황톳빛 운동장 가득 환하게 웃고 있다//

수국 / 김정석
내일까지 기다리기는 어렵다고 한다/ 빚내서라도 입금하겠다고 한다// 몸의 붉은 색 다 꺼내지 못하고/ 수국이// 졌다.//

탱자꽃 / 김정석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사금파리에서 튕겨 나온 햇살// 고개를 들어/ 고개를 들어/ 말해// 탱자꽃 환한 울타리 따라/ 그 애가 왔다//

메꽃 / 김정석
다리 잃은 누이가/ 블럭담 아래 씨를 뿌렸다/ 여름 한 철 잘 자란 메꽃이/ 누이에게 담장 밖 풍경을 보여준다// 메꽃이 오르는 하늘을/ 잠자리 떼가 다리미질 한다/ 하늘이 파랗게 퍼진다// 잠자리가 누이의 마음을 물어다 하늘에 뿌린다/ 점점이/ 흩어진 꽃씨가/ 명년 봄에는/ 연보라 빛으로 담 밖에서도 곱게 피겠다/ 누이의 얼굴을 세상에게도 보여 주겠다//

진달래꽃 / 김정석
시인이여/ 밤새워 목구멍에서 피나도록/ 그렇게 슬퍼함이 하도 깊어/ 먼 후일 또 먼 훗날/ 아쉬운 것들을 달래며/ 그리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못 잊고 아직 못 다 한 것들이/ 피맺혀 슬픈 것들이 많아/ 그리 꽃불을 지펴 번지고 있는가// 시인이여/ 예전 미처 모르고 있던/ 그 아쉬운 것들이/ 예전 미처 몰라서/ 생각하기에 그 안타까운 것들이/ 멍울에 맺혀/ 봄날마다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사랑하는 가슴마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고이 묻어/ 언뜻 생각나는 것들이 그리워서/ 산 등성이에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아쉬운 것이 많지만/ 그 못 잊는 가슴마다/ 진달래가 피듯/ 말없이 문득 피어나리라//

꽃문 / 김정석
꽃 다 졌다고 사람들 돌아가는데/ 다 늦게 꽃 보러 왔다// 뻐꾸기 울음을 따라가면 돌아올 수 없다던/ 누이야, 서러운/ 울음 속에 손을 밀어 넣는다// 배곯아 떠난 아이들 수십은 묻혔을/ 그늘지고 물 나는 거기/ 기억을 밟아가며 찔레꽃이 피었다.// 수조에 물이 차듯 발목부터 차오르는 울음이/ 몸을 지난다/ 뼈가 진저리를 친다// 지는 꽃의 숨을 만져준다/ 꽃을 가득 신고/ 휘청 휘청 봄이 간다// 꽃상여 문이 열린다//

화장花葬 / 김정석
희디 흰 배꽃은 지는데/ 어쩌라고 국어사전을 뒤척이고 싶어지는 것이냐/ 화장(火葬)이란 말 대신/ 화장(花葬)이란 말이 자꾸 쓰고 싶어지는 것이냐/ 꽃불이 뒤 몸에 옮겨 붙어야 잉걸불이 되는 것처럼/ 그전에는/ 그냥 花葬이라 말하자// 저년/ 미쳤지/ 그리 하얀 소복을 입고/ 저리 아무데나 분분히 날리다니/ 제 몸에 활활거리는 꽃불의 열기 어쩌라고// 몰래 지켜보는/ 花葬//

안녕, 크로네 / 김정석
여기 북유럽 그린란드/ 여름이 깊어/ 해가 지는 듯 마는 듯 다시 뜨는 날에는/ 봉투에다 슬픔 10크로네쯤 넣어/ 당신에게 보냅니다// 북해, 자궁 같은 바다// 해는 떨어지면서 버니어 캘리퍼스를 들이댑니다/ 사랑이든 외로움이든 0.1밀리미터로/ 측정합니다// 가끔 절망의 거리도/ 사랑으로 오측정합니다/ 사랑으로 갔다 절망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안녕, 크로네// 해는 졌는데/ 반대 방향에서 금방 떠오릅니다/ 잊히겠지요, 순식간에//

초록절벽에 서면 / 김정석
백운산 휴양림에 들어서면/ 만장(萬丈)이 넘는 초록 절벽이다/ 비장한 결심도 없는데// 숨이 턱 막히고/ 저절로 발끝이 모아진다// 한 솥이면 도시를 절절 끓게 하던/ 땡볕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볕들의 블랙홀/ 초록 잎새마다/ 햇빛 시체가 눈부시다// 바람이 스윽 비질하고 지나가면/ 살아남은 햇빛 몇 알 후드둑 떨어진다/ 풀이 푸른 팔을 뻗어/ 허겁지겁 먹는다// 돌연 소나기 한 줄기 몰려온다/ 점자 읽듯/ 숲을 읽어가는/ 수만 개의 손/ 마음을 죄다 읽힌 나무들이 부르르 떤다//

강경에서 만난 웃음 / 김정석
강경 젓갈 시장, 어리굴젓을 팔던 여자/ 젓갈통들 나란히 좁은 사이를 지나다/ 엉덩이가 서로 닿아 둘 다 웃었는데/ 그 겸연쩍은 웃음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웃음도 충청도에서 태어나면/ 느리게 물무늬처럼 퍼지나 봅니다/ 한 웃음이 끝나고/ 그 웃음의 끝을 지우기도 전에/ 새 웃음이 태어나는 얼굴/ 어리굴젓, 명란젓, 새우젓처럼/ 오래 묵혀도 상하지 않는 삼투압 웃음/ 그냥 하는 인사에도 젓갈처럼 정이 감겨와서/ 이 맛 저 맛 볼 것도 없이/ 웃음맛 하나만으로 젓갈 두 통 사들고 왔답니다/ 어쩌고 저쩌고 수작을 할 처녀 총각도 아니지만/ 오는 길 내내 마음이 설레설레 일어서기도 하고/ 품고 온 웃음이며 말들이 삭아가는지/ 내 몸에서도/ 강바람에 곰삭은 젓갈 냄새가 났습니다/ 또 오라는 인사는 못 듣고 왔어도/ 강경에 가면 아무래도 젓갈부터 사러갈 것 같습니다//

스윙 재즈 / 김정석
복숭아는 나비의 입술을 훔친다. 나비는 묽고 붉은 향기에 속아준다./ 다 붉어지지도 못하고 울어볼 틈도 없이 맨드라미가 이 앙다물고 버티다 고개를 떨군다./ 백 킬로미터 밖에 사는 당신의 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더니 거기는 꽃이 피었다고 한다./ 왼 뺨에서 오른 뺨으로 햇볕이 옮겨앉는 동안 당신은 하이힐을 손에 들고 간다./ 사과가 반쯤 붉어지고 반쯤 푸른 상태다./ 늦게 온 비를 너에게 돌려보낸다./ 같이 살던 개가 집을 나갔다. 담쟁이덩굴이 자꾸 품을 파고드는 꿈을 꾸었다.//

사월 / 김정석
막 초경을 했을까 하는/ 큰 딸아이 냄새 같은 것을/ 바람은 들길에 깔았다// 찔러 보렴/ 들찔레 덤불에 굴러보는/ 산 다람쥐 등에/ 가시 대신 풀 비린내가 박혔다// 웃지 마라/ 너도 사월에는/ 뒤 가슴에 풀 비린내만 가득 박아내는/ 풋사랑이었지 않은가//

아리송한 봄날 / 김정석
단풍나무 노간주나무 상수리나무 등어리 마다/ 옹알이하는 아기잎들/ 처음 보는 햇살을/ 만져보고 빨아보고 툭툭 건드려 보는 초봄/ 여류 시인 일행과/ 산골 뉘 집을 방문할 때의 일이었다/ 남 여 구분된 재래식 화장실에 나란히 들어 엉거주춤 앉아서/ 볼일 보려던 참에/ 옆 방에 먼저 든 여류 시인의 소리가/ 화음을 타지 못하고 자꾸 끊어지는데/ 덩달아 오줌 줄기 틀어막고/ 숨도 못 쉬고 있는데/ 그런 나를 산 다람쥐 녀석 얕잡아 보고/ 얼래 얼래 얼추 얼추 약을 올리는 바람에/ 아랫배 힘이 자꾸 풀어지려는데/ 쏟아지는 꽃눈이야/ 그 녀석인들 감당하기 쉬우랴/ 잠시 방심한 걸음걸이가/ 우당탕 헛간 문짝 서너 개를 건드려 주고/ 요 때다 싶어/ 양쪽에서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소리/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 수야 없지만/ 나비처럼 가볍게 앞마당으로 나온 여류 시인/ 꽃 사태에 마음 무너지며/ '워매 이쁜 거...'/ 그 발자국 찍힌 자리를 되밟으며/ 시향에 취해서 꽃 향에 취해서/ 나도 '워매 이쁜 거....'/ 숨길 것 숨겨주고 보일 것만 보여주던/ 그 아리송한 봄날//

당신의 만유인력 / 김정석
옆에 있으면 좋다 당신이어도 되고 의자여도 된다 거기를 우연히 지나는 고양이 한 마리여도 되고 폭탄이 터지면 서 꽃이 피어도 된다// 별이 한 발짝 옆 당신별에게 가기 위해서 걸음마를 한다 걸음마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해야 가능하다 거리를 계산 하고 거리에서 거리가 지워질 때까지 간절하게 몸을 기울인다 사이와 사이에는 중력이 존재한다 서로를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힘을 한쪽으로 슬쩍 기울게 하는 것은 만유인력이고 한 걸음의 시작이다.// 별은 서로 뒤척거리면서 잠자리를 바꾸는데 그것도 한 걸음이다 별을 만나고 생각하고 다른 별로 한 걸음 떼면 거기도 별이고 당신이다.// 한 걸음의 크기는 모두 다르다 지구의 일억 년을 한 걸음으로 계산하는 별도 있다 오늘은 한 걸음에서 시작되고 사이는 한 걸음으로 정의된다 별과 별 사이가 일억 광년이어도 한 걸음이고 마음과 마음 사이가 백 년이어도 한 걸음이다 마음이 어디로 옮겨 앉았는지 알 필요 없다 한 걸음 안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프로그래밍 컨트롤러 / 김정석
프로그래밍 컨트롤러는 수천 개/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절벽이다// 백만 마리의 펭귄이 제 짝을 찾아가듯/ 백만 마리의 박쥐가 제 새끼를 찾아가듯/ 0과 1만 읽고 목표 지점을 찾아간다// 1이면 가고/ 0이면 멈춰라// 사람이 알려주는 것은/ 규칙뿐,/ 주는 먹이는 5밀리암페어 전류가 전부다// 일 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너는 폐회로 안을 빙빙 돌아다닌다/ 실핏줄처럼 엉킨 길을 찾아낸다/ 수만 개의 이름을 부른다/ 수만 개의 물음을 돌려보낸다// 못 찾을 것도/ 못 갈 곳도 없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음 앞에서는/ 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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