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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책상 / 강영환
책상이 젖어 있다/ 꽃병이 넘어져 물이 쏟아진 것도 아닌데 흥건히 젖어 있다/ 누가 앉아 눈물을 흘리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책상이 눈물을 흘린 것일까/ 책상이 오래 전부터 가진 쓸쓸한 기분이/ 한꺼번에 울컥 쏟아져 책상은 젖어 있다/ 아이들은 꽃병에 꽃을 꽂지 않고/ 책상은 더 이상 소리내어 덤벙대지 않는다/ 책상에게 슬퍼하지 말라 일러도 소용없다/ 내가 가서 앉을 수 없는 책상은 더 이상 나의 것일 수 없다/ 배가 고픈 책상은 나의 경계 밖에서 쓸쓸하게 젖어 있다//
「녹토비전」 작품은 1984년 무크지 《지평 3》에 발표하였던 것을 보완하여,
1991년 시집 『쓸쓸한 책상』에 「아리랑 삼촌」으로 개제하여 실었다.
녹토비전 01 / 강영환
호랑이 발톱 가시나무가 둘러 쳐진 울안 잔디밭에 누워 삼촌은 동화책을 읽었다/ 울 밖에서 몇몇의 친구들이 손짓하여도 까딱하지 않고/ 돌아누워 바람이 실어 나르는 꽃향기에 젖어 났고/ 태양은 머리 위에서 막무가내로 뜨거움을 쏟으며 숨어야 할 그늘도 없이 한나절을 돌아갔다/ 곳곳마다 목말라 아우성인 사람들이 지내는 기우제 구름기둥이 둥실 떠가고 있었지만/ 그늘은 훨씬 울 밖을 벗어지나 갔다/ 호랑이 발톱 가시나무를 뚫고 사라진 친구들의 뒷통수/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길은 어느 곳으로도 뚫려 있었다/ 그런데도 까딱 않은 채 동화 속을 걸어가는 삼촌 나는 울타리에 묻은 마른 피를 보았다//
녹토비전 02 / 강영환
갖가지 꽃들이 울긋불긋 핀 꽃밭에서 삼촌은 잠들어 있었다/ 잠의 뿌리가 깊이 내려 벌떼들이 와서 흔들어도 깨지 않는/ 영산홍 영산홍의 가지 끝에 옆구리를 찔려도 소리하지 않고/ 개미떼가 그들의 잠을 조금씩 뜯어 나락의 끝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지만/ 삼촌은 발가락 끝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가시나무 그늘 하나가 꽃밭을 가리우고 섰을 때/ 명동이의 새총을 떠난 돌멩이가 붉은 꽃잎을 하늘에 뿌리면 서산너머 지는데도/ 삼촌은 일어날 줄 몰랐고 나는 영산홍 가지를 꺾어 삼촌의 옆구리를 힘차게 찔렀다//
녹토비전 03 / 강영환
삼촌은 종일 놀아 주었다/ 눈물이 핑 도는 서울 구경도 시켜 주고 등말도 태워 주었다/ 학교 가지 않는 날이 더 많은 새 봄에/ 삼촌은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닭쌈과 기마저/ 숨바꼭질을 가르쳐 주며 홀로 재미를 만끽하였다/ 나와 친구들은 삼촌의 고함소리에 더욱 신명이 나서/ 뛰고 달리고 치고 박고 찢고 부러뜨리고 쓰러지며 삼촌의 비위를 맞추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하는 학교놀이에 날이 저물고 달이 바뀌어 이윽고 학교 가게된 삼촌/ 삼촌이 떠난 학교는 다시 무기한 휴강하게 되었다/ 나는 삼촌이 얄미워 몰래 등 뒤로 숨어가 힘껏 밀어뜨렸지만/ 삼촌의 그림자는 끄떡도 않고 돌아보며 음흉한 이빨로 하얗게 웃어 보였다//
녹토비전 04 / 강영환
바람이 불었다/ 거리를 가로질러 동남쪽에서 힘차게 불어왔다/ 겨울 가지를 온통 흔들어 대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배격을 향하여 불어 갔다/ 삼촌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삼촌의 친구들이 함께 날아갔다/ 바람 따라 불타는 숲 속에서 삶들이 손을 들어 환호하였다/ 동남풍이 불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일어났다/ 거기에 서서 오래도록 기다리던 사람들의 입김에서 입김으로 바람은 옮겨 다니며 불을 놓았다/ 실 끊어진 명동이의 꼬리연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 거리거리마다/ 불 불 불 짚섭에 불을 놓고 염초에 불을 놓아라/ 소란스러이 움직이며 동남풍속세서 타는 불꽃 불꽃이 동남풍을 부를 때/ 나는 삼촌을 불 속으로 힘껏 떠밀어 넣었다//
녹토비전 05 / 강영환
새가 새가 날아든다 왼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 중에는 검은 새 만수 문전에 까마귀// 삼촌은 새타령을 부르며 함께 휩쓸려/ 이리 밀리고 저리 쫓기며 카메라의 시선을 용케 벗어났다/ 몇몇의 얼굴 찍힌 친구들은 필름 속에서 달아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새타령만 남아 가을 하늘을 높이 높이 날아갔다/ 열을 지어 날아가는 철새 집집마다 그물을 치고 숯을 피웠다/ 어떤 집에서는 철조망을 치고 새떼가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며 군침을 삼켰다/ 사랑에서 얼굴 번쩍이는 잡새가 깃을 접고 함께 휩쓸려 이리 밀리고 저리 쫓겨다닐 때/ 목마른 삼촌은 친구들과 어울려 기러기처럼 한 밤 내 기역 니은을 회치며 줄이어 날아 다였고/ 나는 골목에 숨겨진 커다란 새장을 보았다//
녹토비전 06 / 강영환
광복동을 마구 달리는 삼촌을 보았다/ 찢겨진 내의를 걸치고 덧문을 두드리는 등 뒤로 노란 안개가 덮쳤다/ 누가 아는지 행방을 알 수 없는 친구들의 이름이 불리어지고/ 사람들은 견고한 입술로 술잔을 하나씩 비워 갔다/ 부동자세로 굳어진 광복동에서 웃고 있는 것은 혈색 짙은 마네킹의 입술뿐/ 회색 건물 모퉁이에서 엿보고 있는 병정인형의 눈빛이 아득한 벼랑 밑으로 떨어 졌다/ 차 없는 거리 사람도 다니지 않는 광복동은 신종의 전염병으로 굳게 닫혀져/ 파리새끼 모기새끼 한 마리 날지 않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나를 잊은 채 삼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녹토비전 07 / 강영환
길바닥에 누워 찬 이슬에 젖는 삼촌의 긴 얼굴을/ 밟고 가는 사람들의 등뒤에서 별빛과 달빛이 어른거렸다/ 혀 꼬부라진 목청을 높여 소리 높여 하늘을 삿대질하는 삼촌/ 삼촌의 모모위로 보이지 않는 이슬이 묽은 색으로 차츰 배어들었고/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 동안 하늘의 별과 달이 실날 같은 빛을 뽑아/ 삼촌의 몸 안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을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땅의 기운과 어울려 점점 식어 가는 삼촌의 체온을 뜨겁게 달구었다/ 담 밖을 향해 던져대던 건조한 체력/ 삼촌 곁에는 작은 돌멩이가 겹겹이쌓여 사람들의 혀끝에서 몇 번을 죽었지만/ 죽지 않는 삼촌은 속속들이 속사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혀 꼬부라진목청을 새벽까지 돋우고 있었다//
녹토비전 08 / 강영환
거울 속을 마구 달리며 골목골목으로 빠져나가는/ 도피 행각을 멈추고 갑자기 삼촌은 크게 웃었다/ 소리나지 않는 웃음이 거울 속에서 새었다/ 부서진 거리에서 사람들이 모여 자갈과 모래를 함께 다져 넣고/ 뜨거운 아스팔트를 들어부어 말끔한 포장도로를 남기듯/ 서슬 푸른 면도날을 밀며 미행하는 검은 그림자/ 키 큰 침묵의 사내들이 골목과 거리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고/ 언덕을 성큼 넘어가 숨어 버렸다/ 적막한 거리 돌멩이가 숨겨진 거리에서 삼촌은 친구들과 함께 달아났다/ 닫혀진 문 누구도 열어 주지 않았고/ 죄지은 여자를 향해 던질 돌멩이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막다른 골목에서/ 삼촌은 또 한번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도 그들은 미행하지 않았고 나는 삼촌의 거울을 깨뜨려 버렸다//
녹토비전 09 / 강영환
삼촌은 몸살로 자주 돌아 누었다/ 잠든 얼굴에는 구슬땀이 맺혀/ 바늘구멍으로 들어온 황소바람이 방안을 칭칭 감고 다닐 때/ 삼촌은 심한 기침을 하며 허공으로 손을 뻗어 바람을 움켜쥐었다/ 아득히 높은 천장 잡히지 않았고 잽싸게 손아귀를 벗어난 바람은/ 칼날 같은 차가움으로 더욱 목을 죄었다/ 유리창은 큰 그림자로 그늘이 져 밖은 내다보이지 않았다/ 야심한 거리를 다니느라 기진맥진한 삼촌이 깊은 잠에 빠지자/ 식구들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식구들 몰래 삼촌의 주머니에서 돌멩이 하나를 꺼내 삼촌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삼촌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돌멩이/ 나는 창 밖을 향해 힘껏 던져 넣었다 힘껏//
녹토비전 10 / 강영환
자유자재로 개울을 건너다니는 나비를 쫓다 삼촌은 개울에 빠졌다/ 꺼꾸러져 허리 다친 삼촌이 깊은 개울의 어둠에 갇혀/ 더 깊은 수렁 속으로 침참해 갈 때/ 숲 속으로 깊이 사라져 버린 나비/ 나비가 사라진 울울한 산림 속에서 피맺힌 빛살이 돌아 나와/ 삼촌의 오금을 따갑게 찌르고 무참히 해꾸지 하며 엄습할 때/ 삼촌은 사람들을 향해 소리소리 질렀지만/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지나쳐 가는 눈먼 귀먼 벙어리들/ 터지고 깨어진 모습으로 삼촌이 향방 없이 달아날 때/ 수천 수만의 무리를 지어 삼촌의 머리위로 날아가는 형형색색의 나비 떼/ 무장한 나비 떼를 향해 나는 커다란 포충망을 휘둘러 댔다//
녹토비전 11 / 강영환
삼촌은 갈대 숲 사이로 노를 저어 갔다/ 갈대 숲에 숨어 있던 노을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갔고/ 흔들리는 물살을 가르며 노를 젖는 삼촌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솟아올랐다/ 멀리 벌판 쪽을 향한 시선 끝에서 사람들은 덧문을 내린 채 깊이 숨어 갔고/ 덧문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과 다투다 아우성을 갈대처럼 꺾이는 것을 보았다/ 자꾸만 흔들리는 이물과 고물이 붙들고 무수한 사람들이 지나간 거리를 가듯/ 꺾인 갈대 숲을 헤치며 나가는 삼촌의 배/ 새벽까지 갈대 숲에 숨어 있었고/ 나는 삼촌이 토한 돌멩이를 주워 강물 속에 자꾸만 던져 넣었다//
녹토비전 12 / 강영환
삼촌은 알몸으로 헤엄을 쳤다/ 깊은 곳으로 겁 없이 헤쳐 나갔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알몸에 부딪혀 옆으로 비켜가고/ 먹구름이 삼촌의 머리 위에서 그늘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목욕금지의 팻말이 있는 곳에는 오지 않았다/ 홀로 자맥질하며 물맛을 만끽하고 있는 삼촌의 등 뒤 먼 바다에서/ 으르렁거리며 부서지는 파도 갈대 숲의 전신이/ 갯물이 잠겨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물때가 덕지덕지 올라 청색이 된 알몸으로 삼촌은 오래도록 깊은 밤거리에서/ 사지를 휘저으며 헤엄을 쳤다//
녹토비전 13 / 강영환
삼촌은 강 언덕에 올랐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떼 잔디의 연초록이파리가/ 삼촌의 흰 운동화에 풀물을 묻히며 으깨어졌다/ 몇 번씩 뒤를 돌아다보아도 갈대잎 서걱이며 손 흔드는 소리뿐/ 모래 언덕을 지나오는 미행은 검은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꾸 바다로 실려 나가고 짠물이 도회의 골목마다 배여/ 깊이 배여 민물고기 한 마리 없이 거리는 비어 있었다/ 삼촌이 밤새워 건넌 강이 일 없은 듯 아침 햇살에 마취되어/ 수만 수억의 작은 심장을 팔딱거리며 흥분 속에 깨어나 바다로 떠밀려 가고/ 나는 삼촌의 흰 운동화를 벗겨 강물 속에 던져 넣었다//
녹토비전 14 / 강영환
삼촌은 마지막 힘으로 낮게 기었다/ 허리 잘린 강물이 갈대밭으로 쏠리고/ 갈대잎에 남은 노을을 털어 내며/ 표적을 향해 나는 눈과 귀 삼촌의 돌팔매질은/ 청둥오리의 그림자 발톱 께를 맞추고 강물 속에 갈아 앉았다/ 물거품으로 숨쉬며 떠오를 줄 모르는 명동이가/ 노을 끝에서 하얗게 웃었다/ 삼촌은 어둠 속에 눈을 잃고 내 소매를 이끌며 서쪽을 향하여 걸어갔다/ 거리에는 삼촌이 던진 무수한 돌멩이들이 갈아 앉아 낄낄대었고/ 나는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다 보았다//
녹토비전 15 / 강영환
시큰한 무릎 관절을 꺾으며 삼촌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산등성을 타고 넘는 너른 억새밭 마른 억새를 밟고 지나가는 삼촌은/ 발목을 찌르는 아우성에 머리카락을 솟구쳤다/ 바싹 마른 아우성은 심장에 닿아 억새밭에 불 지피고 싶은 욕망을 불붙게 하였고/ 일년전이나 이틀전이나 밟으면 부러지는 부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억새 마른 억새 수많은 억새들이 엎드린 억새밭 그래도 뿌리는 살아 남아/ 봄에는 다시 억새밭을 이루리라 짐작한 삼촌은/ 그래도 억새가 부러질까봐 기를 쓰고 살금살금 기었지만/ 삼촌의 등뒤에서는 더 많은 억새가 부려져 저희끼리 신음 소리를 내었고/ 밸이 꼴린 나는 삼촌이 숨어 있는 꺾인 억새밭에다 불을 놓았다//
녹토비전 16 / 강영환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삼촌은 물을 자주 마셔 댔다/ 힐끔힐끔 뒤를 돌아다보며 숨이 목구멍에 차 올라도 끝끝내 돌아보며 누구일까/ 내막 속속들이 알고 고자질하며 막다른 골목에까지 밀어붙인 그는/ 그래 터럭도 많고 뼈대도 튼튼하여 쉽게 넘어지지 않고 잠입해 올 수 있는/ 그는 틀림없이 복면을 하고 있으리라/ 숲의 검은 그림자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쉬이 무너지지 않고 삼촌의 등뒤에서 흔들렸다/ 나무 그늘 아래 지친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삼촌의 몸 위로 스물 스물 기어오르는 송충이/ 삼촌 어깨 위에서 많은 털이 숭숭하게 돋은 뼈대 튼튼한 송충이 한 마리를 털어 내어/ 질끈 밟아 버렸을 때 나는 삼촌의 등뒤에서 웃고 있는 복면의 사내를 보았다//
녹토비전 17 / 강영환
속 깊은 숲 속에서 삼촌은 거칠게 숨을 돌이켰다/ 휴식도 없이 떠나야 할 길은 안개 속으로 보이지 않는다/ 삼촌의 발자국을 따라 붙이는 미행의 그림자는 지치지않고/ 질긴 목숨의 한 올 저편을 붙들고 어느덧 가랑잎이 되어/ 옷자락 끈에서 바스락거리기도 하고 물이 되어 물소리를 내며/ 기습을 노리기도 하고 눈 큰 다람쥐가 되어/ 나무 등걸 뒤에 쉽게 쉽게 넘보기도 하리라/ 문 밖에서나 문 안에서나 손쉽게 일행을 찾아 나서든가/ 아니면 스스로 들켜 버리든가 삼촌은 일행과 함께 배반의 불안을 안고/ 더 깊은 침엽수림 속으로 두텁게 무장해 갔다//
녹토비전 18 / 강영환
리을 자로 구부린 삼촌의 몸에서 한기가 배여 푸른빛이 비쳤다/ 오래도록 하늘의 순수한 별빛으로 밤을 이루어 새벽과 아침식탁을 준비하고/ 숲의 뛰어난 발성연습을 기다린 삼촌/ 삼촌은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와 무서움으로 소름이 솟아올랐다/ 산정에까지 이르러 울부짖음 소리는 메아리 쳤고/ 하늘에 가 닿은 인간의 울음소리/ 삼촌은 한 마리 사나운 짐승이 되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수신호를 띄어 보내며 발작을 일으켰다/ 산 속에서의 하룻밤이 비워져 갈 때/ 나는 커다란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녹토비전 19 / 강영환
산 속에서의 하루 밤은 춥고 사나웠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얕은 잠이 들고/ 산 속에는 잠들지 못하고 춤추는 늑대 삵괭이들의 발소리와/ 산악 사이로 한 꺼풀씩 벗겨지는 육신의 때를 실어 나르는 물소리/ 삼촌의 무디어진 이빨에도 날이 서고/ 맹수의 눈빛처럼 손발톱이 솟아올라 양팔과 장갑을 찢었다/ 삼촌은 갑자기 울부짖고 싶었다/ 포효하고 싶었다/ 숲 그늘 속에 숨어 엿듣는 눈동자들의 냄새나는 이웃들을 위해/ 이두박근을 솟구치며 달리고 싶었다/ 삼촌이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돌아누워 끙끙대고 있을 때/ 청동빛의 새가 날아올랐고/ 나는 피멍든 된똥을 누었다//
녹토비전 20 / 강영환
어느 집에서 취미로 기르는 닭이 울었다/ 삼촌은 고개를 동녘으로 돌리고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 울 수 있는 닭 울음을 잊어 먹지 않고/ 새벽을 알리는 닭이 남아 있을까/ 피멍든 울음소리는 잘못 울고 있는지/ 닭 모가지를 비틀며 웃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춥고 깊은 밤이 힘겹게 무너지고 서툰 울음일망정 아침이 왔다/ 닭이 울지 않더라도 오는 아침이지만/ 닭 울음으로 새벽은 더욱 새벽다워져/ 숲 그늘 하나까지 모두 지워갔고/ 남아서 울 수 잇는 닭을 향해/ 동녘으로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는 삼촌의 모가지/ 나는 힘껏 비틀어 버렸다//
녹토비저 21 / 강영환
삼촌의 사지는 비틀리며 꼬였다/ 마지막 힘을 뻗어 풀잎을 움켜쥐었으나/ 섬유질도 없는 풀잎은 저항 없이 뜯겼고/ 뭉치고 뭉쳐진 삼촌의 근육은 나무등걸처럼/ 땅위에 팽개쳐져 파르르 떨며 무너졌다/ 멀리서 휘파람새가 휘파람을 불었다/ 무슨 신호를 들은 듯 삼촌은 꿈틀거리며 동쪽으로 몸을 틀었다// 동쪽은 아무 데도 없었다/ 뜯겨진 풀잎이 산산이 흩어지며/ 비워진 도시는 다시 눈먼 귀먼 벙어리들로 가득 찼다/ 그들을 향해 삼촌은 자꾸만 휘파람을 불었고/ 나는 진혼 나팔 높이 불었다//
녹토비전 22 / 강영환
삼촌은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수척한 얼굴로 손을 들어 소리질렀지만/ 사람들의 무표정한 발걸음을 돌리게 할 수는 없었다/ 새끼줄에 가로막혀 접근할 수 없어/ 구경꾼이 된 사람들이 가늘게 숨을 몰아 쉬었고/ 복면한 몇몇의 사내가 다가와 최루탄 같은 하얀 연기를 내어 뿜으며/ 삼촌의 가택에 연막소독을 하였다/ 삼촌의 모습은 보였다 안보였다 끝내는 종적을 감췄고/ 심한 기침소리와 단말마 같은 외마디 비명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나는 보았다 삼촌이 갇힌 울타리 속에서/ 삼촌의 하나님이 눈물 흘리며 뒷모습으로 작아져 가다 함께 질식사하는 것을/ 삼촌은 끝내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한 모습으로 격리되었다//
녹토비전 23 / 강영환
거꾸로 서 있는 삼촌은 하늘을 바다라 하였고 땅을 먹구름이라 하였다/ 가끔씩 시고 맵고 짠맛들이 피부를 할켜 가고 온몸을 파고들었다/ 삼촌은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져 열에 자주 받혔다/ 세상이 누렇게 탈색되어 회색연기 속으로 기울어지고/ 전쟁놀이 속으로 모두들 불려가 새떼를 겨냥하는 친구들의 날카로운 눈/ 딱딱하고 흔들리지 않는 큰 키로 넓은 가슴팍에 무운을 번쩍이는 친구들/ 큰손으로 점차 더 큰 무기들을 손에 넣고/ 비만해진 친구들의 변모된 모습 삼촌은 눈을 감았다/ 새떼가 엄동설한을 피해 남으로 가버린 뒤에도/ 새장 속을 겨냥하는 날카로운 눈/ 삼촌은 오래도록 친구들의 가늠자 위에 물구나무 서 있었다//
녹토비전 24 / 강영환
삼촌을 잠 못 들게 하는 것은 흐린 날 삭신처럼 아려 오며 일어서는 비듬만은 아니다/ 백일해 기침으로 고통 속에 돌아누우며 우는 아이 때문은 아니다/ 곤혹스럽고 당혹한 내장의 쓰라린 뒤틀림 때문은 아니다/ 창밖에 어둠을 적시는 비가 내린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젊은 나이로 갈대숲을 꺾어 제치며/ 청둥오리를 향해 돌 팔매질 하던 친구들은 다들 깊은 잠이 들었을까/ 여지껏 어느 깊은 밀림 속을 지나며/ 비에 젖고 더 깊은 침엽수림 속으로 몸을 할키우면서 지친 다리로 가고 있을까/ 친구들은 삼촌의 뜨거운 맥박이 점차 비소리에 지워져 가는 깊은 밤을 느낄 수 있을까/ 삼촌이 잠 못 드는 것은 몇 마리 모기새끼 같은 것은 아니다/ 살갗을 파고드는 차단된 희미한 불빛 때문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녹토비전 25 / 강영환
지그시 눈을 감고 삼촌은 피리를 불었다/ 구멍마다 숨겨진 음계를 밟으며 슬픔과 고독 사이를 넘나들었다/ 높은 담 밖에서 듣는 피리소리/ 삼촌의 죽은 친구의 귓가에까지 닿아 잠을 깨우고/ 함께 줄에 매달려 흔들리는 사람들이 병신춤을 추었다/ 허리 꺾고 꼬부라져 뒤뚱거리며 피리장단에 맞춰/ 거리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뒤통수/ 분노와 사랑을 싣고 멀리까지 가느다랗게 퍼져 가는 피리 소리는/ 부서진 유리창너머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넘쳐 나게 하였고/ 밤낮 없이 구곡 간장을 도려내며 가늘고 길게 전래되어 갔다/ 큰집 마당에는 여지껏 피리장단에 맞춰 쉬지 않고 몸을 비트는 그림자들이 낄낄대었고/ 나는 몇 번씩이나 높은 담장을 올려 다 보았다//
녹토비전 26 / 강영환
삼촌은 헐벗은 몸을 구부리고 씨앗을 숨겼다/ 모래밭이나 자갈밭이라도 은근과 끈기를 간직하고/ 튼튼한 뿌리를 깊이 뻗어 가는 씨앗/ 하늘을 덮은 먹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침엽수를 따라 자꾸 자꾸 솟구쳤다/ 오랜 이전부터 알 수 없는 씨앗이 숨겨져 오든 숨긴 씨앗이/ 미래에 자라 튼튼한 벽을 무너뜨리고 바위틈을 갈라뜨리 듯/ 벽 속에 숨겨져 있어도 매일 뚝딱거리며 만든 창/ 삼촌의 구부린 몸 위로 아침이슬이 내렸다/ 사람들이 벗은 몸을 구부리고 이웃과 어울려 엉키고 설킨 채 자는 잠,/ 잠을 깨우고 하늘을 덮은 먹장구름을 뚫고/ 삼촌의 씨앗이 저만치서 솟구쳤다/ 그것도 모르는 삼촌은 가진 것 없이 쉬지 않고 자꾸만 씨앗을 숨겼고/ 나는 숨어서 솟아오르는 씨앗을 터뜨리며 낄낄 웃었다//
녹토비전 27 / 강영환
삼촌이 악몽에서 돌아온 거리/ 실성한 사람들이 모여 실성한 사람 이야기를 하였다/ 서로 의 얼굴을 만지며 웃음 지을 때/ 학자들의 턱에 나는 수염 마른 수염은 구만리 정립되지 않은 학설로 구겨졌다/ 여름에는 여름이야기 겨울에는 겨울이야기/ 배 고플 때 밥 먹고 밤에 잠드는 작고 하찮은 일들/ 실성한 사람들의 낮 이야기는 이설로 깎이어/ 거리에서 그들끼리 모여 송곳니 날카로운 기생충을 기르고/ 한편에서는 잘 복종하는 개들을 키웠다/ 돌아온 삼촌은 개를 몰고 한가운데를 달렸다/ 실성한 사람들이 모여 돌을 던져대는 거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다니다 터지고 깨진 모습으로 개 줄만 움켜쥐고 쓰러진 삼촌/ 나는 삼촌의 턱에 숭숭히숭하게 돋은 수염을 보았다//
녹토비전 28 / 강영환
사람들이 한쪽으로 어깨가 기울어져/ 자신의 위치를 지키느라 굳게 잡은 손 비좁은 출근 버스에서/ 천장을 가로지른 막대에 얽히고 뒤섞인 채/ 빈틈없이 매달린 큰손과 작은 손들 정말 소름끼쳤다/ 키작은 삼촌은 옆 사람들 사이에 어깨가 끼여 몹시 아파도/ 스스로 측은한 생각이 들어 참아 견뎌 내고 있을 때/ 갑자기 멈춰서는 도시형버스/ 사람들이 앞쪽으로 쏠렸고/ 삼촌은 사람들 틈새의 빈 허공 속으로 끝없이 빨려 내려가 바닥 없는 바닥 위에 쓰러진/ 퇴근 시간 어깨가 기울어진 사람들의 참으로 무표정한 밑 얼굴을 훔쳐보며/ 웃고 있는 삼촌의 음흉한 웃음에/ 나는 또 한번 소름끼쳐 그만 눈을 감고 삼촌의 얼굴을 지워 버렸다//
녹토비전 29 / 강영환
사르비아 꽃밭에서 삼촌은 맴을 돌았다/ 책이 달아나고 칼보다 강한 펜은 더 멀리 꽃잎이 옷자락에 스쳐/ 서쪽 하늘로 떨어지듯 소용돌이 바람에 실려 꽃밭을 떠나 갔다/ 꽃밭은 온통 소용돌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눈치껏 빠져 나온 나를 잊은 채 삼촌은 자꾸만 돌고 돌았다/ 삼촌은 돌았다 맴에 취한 눈동자 속에서 사람들이 함께 돌았다/ 삼촌의 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끝없이 맴을 도는 꽃밭에서/ 돌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만/ 사르비아 꽃잎은 떨어져도 여전히 붉게 타올랐고/ 어둠이 가신 새벽녘에도 삼촌의 맴은 끝나지 않고 돌았다/ 나는 삼촌의 책과 펜을 주워 더 멀리 던져 버렸다//
녹토비전 30 / 강영환
삼촌은 눈을 떴다/ 혼곤히 젖어 오는 아랫도리를 붙들고/ 이리 궁글고 저리 궁그는 개똥밭은 차갑고 쓸쓸하였다/ 잠 못 이룬 몇 날 밤을 지나온 지금 엎드려 몸 낮춘 삼촌의 등 뒤/ 높은 곳에서는 천둥 번개가 살아 있었다/ 무엇이 그것들을 살아 있게 하는지/ 지나온 숲 침엽수림의 바늘이 두터운 옷을 찔러/ 더 깊이 상처 입은 속살 한 방울의 피도 남지 않았다/ 돌아보면 늘 불구가 된 언어들만 질펀하게 널려/ 거친 행각의 일면을 감추고 있지만/ 말문 닫은 삼촌은 아침이면 맨손체조로 몸을 풀었다/ 일어나야지 새로운 힘으로/ 야무지게 다문 입술 속 빛나는 삼촌의 송곳니를 보았다//
녹토비전 31 / 강영환
거리 곳곳에서 돌멩이가 날고/ 매운 연기가 사람들을 눈 못 뜨게 할 때/ 삼촌은 골목길에 숨어 변신을 꿈꾸었다/ 눈 속에 감추었던 불꽃이 손에 쥐어졌고/ 모가지에 감겼던 넥타이가 풀어져 깃발이 되었다/ 새가 되어 나를까 사라졌던 새들이 다들 돌아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간다/ 회심의 거리를 질러가는 삼촌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삼촌을 뒤따르는 수많은 새들/ 함성과 분노가 넘쳐 하나의 허상이 무너지고/ 새가 된 삼촌은 자꾸만 높이 날아 올랐다/ 그 때 나는 보았다/ 명동이가 새총을 꺼내어 하늘을 향해 높이 겨누고 있는 것을/ 밤이 되어도 끝내지 않았다//
녹토비전 32 / 강영환
얼굴 가린 삼촌은 새떼들을 데리고 땅 밑으로 스며갔다/ 방울방울 맺히는 지하수에 몸 젖으며/ 이 세상 어디로도 통한다는 지하통로에 서서/ 달려가는 전동차의 고동을 들었다/ 한 가닥 전선에 목매달고 있는 수천 수많은 시민들의 무표정을 싣고/ 전동차의 몸뚱어리는 꿈틀거렸다/ 22,000볼트의 고압전류가 삼촌의 몸 속으로 흘렀다/ 땅 밑은 어둠이 지배하는 어둠 속에 묻혔다/ 전동차는 눈빛을 잃고 길게 누워 잃어버린 자신을 찾은 승객들의 아우성을 들었다/ 새들은 지상으로 떠나 훨훨 날아갔고/ 언덕 위에서 젖은 알몸을 말리고 있는 삼촌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남아/ 견고한 어둠이 되어 갔다//
녹토비전 33 / 강영환
흉칙한 몰골을 한 말들이 서로 만나고 있었다/ 아비규환으로 서로 헐뜯고 자빠지는 말들은/ 저희끼리 공중에서 또는 지하에서 가느다란 실을 타고/ 음흉한 미래를 꿈꾸었다/ 제각기 세련된 연결고리로 묶여 놀아나는 현장으로 삼촌이 몸을 낮췄다/ 얼굴에 회칠을 하고 입을 굳게 다문 삼촌은 절단기가 되어 사지가 삐걱였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드나드는 껍데기 말들이 부르르 치를 떨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공중의 말이 잠들어 있을 때/ 거대한 침묵의 덩어리가 삼촌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더 말이 많아졌다//
녹토비전 34 / 강영환
막강한 물이 삼촌을 불렀다/ 수심 깊이 자맥질하여 물맛을 만끽하는 삼촌이 점차 물이 되어 갔다/ 바닥은 보이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물결은/ 세상의 소용돌이를 세차게 만들어 내었다/ 푸른 물은 삼촌의 알몸을 감싸고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욕정의 말목/ 삼촌은 수심 깊은 곳에 꽝꽝 두드려 박았다/ 갇혔던 물이 세상 밖으로 흘러 나갔다/ 옷과 신발과 가재도구가 젖었고 모든 수세식이 문을 닫았다/ 상수도와 하수구 사이에서 마비되는 것은 제한급수만이 아니었다/ 막강한 물이 거리로 숲 속으로 강물 속으로 마구 뻗어 나갔다/ 물이 되어 도시를 빠져나간 삼촌은 신발을 고쳐 신으며 껄껄껄 웃었다/ 삼촌의 몸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녹토비전 35 / 강영환
밤이 되자 삼촌은 벌건 불빛으로 사방 팔방에서 타올랐다/ 하나의 견고한 강철덩어리와 대적하는/ 삼촌의 불빛은 초라하고 눈물겨웠지만/ 작은 바람에도 심한 몸부림에도 쿨럭였다/ 구경꾼들이 하나 둘 불빛 속으로 투신해 갔다/ 떠났던 삼촌의 새떼들이 모여와 함께 불빛 속으로 투신해 갔다/ 붉은 혀를 널름대는 배암이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을 놓았다/ 그때마다 동포들이 치를 떨면서 박수를 쳤고/ 물과 불과 어둠과 빛이 함께하는 삼촌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열세개의 줄이 그어진 손바닥에서 횃불이 맘껏 타올랐다//
녹토비전 36 / 강영환
이튿날 아침 고요한 잠으로부터 돌아온 삼촌은/ 새하얀 얼굴로 새로 맬 넥타이를 고르며 미소 지었다/ 세상은 안개 속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끙끙 앓는 소리로 시커멓게 돌아누워 있었다/ 삼촌은 식솔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더 많은 아침을 먹었다/ 꽉 막힌 세상 밖으로 천천히 출근하는 삼촌은 휘파람으로 애인을 불렀다/ 짜증 섞인 투정이 가슴을 마구 두드렸지만 삼촌의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진 못하였다/ 침엽수림 속에서 밤을 지샌 사람들은 변함없이 사랑을 나누었고/ 견고한 어둠은 걷히지 않은 채 삼촌의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었다//
녹토비전 37 / 강영환
삼촌은 낮이건 밤이건 수시로 껍질을 벗었다/ 눈속임 속으로 두건을 쓰고 걸어갔다/ 젊은 추종자들이 맹목적으로 손발이 되어/ 이 곳 저 곳 곳곳마다에서 참신한 노동을 저질렀다/ 세간의 혓바닥은 돌처럼 굳어 가라앉고/ 무수한 젊은이들이 가슴의 붉은 심장을 꺼내어 들고/ 빌딩 속으로 거리로 산으로 벌판으로 빛을 밝히며 다녔다/ 맹종자는 어디에서든 살아 있어 동에 번쩍 서에 불쑥 남에 훨훨 북에 씽씽/ 기울어진 마당을 마구 흔들었다 사람들의 몸이 흔들리고/ 의자도 흔들리고 침상도 물도 밤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녹토비전 38 / 강영환
해가 뜬 사람들의 거리가 흔들렸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마당이 기우뚱하며 반대쪽으로 쏠렸고/ 흔들림에 놀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렸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만났다/ 철이 아버지 순이 엄마 한열이 친구 이웃집 총각 모두 만날 수 있는 거리/ 순간적으로 한 젊은이가 혈서를 쓰고 거기에 불을 붙였다/ 불은 순식간에 번져 젊은이의 몸을 삼켰다/ 거리 위의 이웃은 숨쉬지 않고 몸을 사르는 아름다운 불꽃을 목격하였다/ 그것은 차라리 타오르는 한 떨기 꽃송이/ 이름하여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내달리는 종교였다/ 범접할 수 없는 청년의 시신 곁에서 삼촌이 울부짖었다/ 한마디 숫기 어린 짐승처럼 피를 토하며 청년의 검은 시신을 껴안았다//
녹토비전 39 / 강영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서히 움직였다/ 그것은 거대한 물결의 본류처럼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힘있게 세상의 뿌리를 적시기 시작하였다/ 청년의 시신을 어깨에 맨 삼촌이 노래 불렀다/ 노래가 하늘로 퍼져갔다/ 종철이도 한열이도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지하에서 솟구쳐 오른 맑은 물이 도심지에 넘쳐 빌딩 발목을 적시고/ 사르비아 꽃밭도 적시고 추악한 하수구의 온갖 찌꺼기와 오물을 쓸어가 버렸다/ 온갖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거대한 물결의 본류를 유유히 헤엄쳐 흐르는/ 삼촌의 눈가에 반짝이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봄이 오고 있는 것일까//
녹토비전 40 / 강영환
밤이 되자 모든 쥐들이 죽었다/ 고요한 벌판에 아름다운 빛이 켜지고/ 삼촌은 낮은 곳에 엎드려 마루바닥의 체온을 느끼며 숨을 몰아 쉬었다/ 크고 작은 별빛들이 가슴 안으로 파고들며/ 뜨거운 돌개바람을 몰아다 주었다/ 삼촌의 가슴에 밝고 따뜻한 꽃이 피었다/ 향기가 천리를 가는 꽃보다 더 많은 웃음이 새 거리에 피어나고/ 집집마다 내건 깃발이 춤을 추었다/ 그것들은 서로 얼싸안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었고 그러기에 되찾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라고 부러진 갈대는 마른 잎을 서걱이며/ 목마른 외침을 계속해대고 있었다//
녹토비전 41 / 강영환
그것은 하나의 신기루였다/ 사람들은 물거품처럼 제자리로 돌아갔고/ 다시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이 불 붙지도 않았고/ 망각의 늪 속에서 쉽게 식어져 갔다/ 삼촌은 몸부림으로 아우성쳤지만/ 소리는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차가운 땅바닥에/ 홀소리는 홀소리대로/ 닿소리는 닿소리대로/ 제멋대로 흩어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다/ 이웃들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 한 개씩 뚫어/ 더 이상 바람을 타지 않았을 때/ 삼촌의 이빨 사이로 간직되는/ 따뜻한 사랑의 새벽/ 나는 삼촌의 가슴에 돋는 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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