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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유홍준 시인

부흐고비 2021. 11. 16. 09:08

유홍준 시인
1962년 경남 산청 생초면에서 출생. 1998년 <시와반시> 신인상에 ‘지평선을 밀다’ 등이 당선돼 등단. 시집으로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등이 있다. 젊은 시인상, 시작문학상, 이형기 문학상, 농어촌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청마문학상, 지리산지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에서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순천대 문예창작학과와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목기에 담긴 밥을 / 유홍준
목기에 담긴 밥을 먹을 때가 올 것이다/ 목기에 담긴 수육을 먹을 때가 올 것이다/ 목기에 담긴 생선에 젓가락을 갖다 댈 날이 올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왜 수저를/ 왼쪽에 갖다놓는 거야/ 향냄새가 밴 나물, 향냄새가 밴 과일/ 목기에 담긴 술을 마실 때가 올 것이다/ 목기에 담긴 떡을 뗄 때가 올 것이다/ 나도 알지 못하고 너도 알지 못하는/ 글자들이 잔뜩 새겨진 병풍 뒤에서 동태를 살필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저 과일이 먹고 싶은데/ 내 아이들은 자꾸/ 고기 위에 젓가락을 갖다 올려놓는 날이 올 것이다/ 두 자루의 촛불을 켜 놓고 내 아이들이 자꾸 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목기에 담긴 부침개에 젓가락을 갖다 댈 날이 올 것이다//

릴레이 / 유홍준
나는 뛴다 머리통을 들고 뛰어온 너에게 머리통을 받아들고 뛴다 이 둥근 바통을 누구에게 건네주어야 하나 아무도 없는 트랙을 뛴다 밥의 트랙 눈물의 트랙 한숨의 트랙 벗어나서는 안 되는 트랙을 나는 뛴다 머리통이 식기 전에 눈알이 굳기 전에 누구에게 이 골칫덩어리를 건네주어야 하나 나는 트랙을 이탈한다 흰 트랙으로부터 탈출한다 무단횡단을 한다 나는 이면도로를 거꾸로 뛰어간다 나는 젖이 큰 여자 젖이 퉁퉁 불어 있는 여자를 찾는다 머리통을 받아들고 앞섶을 풀어제치고 젖을 먹일 여자를 찾는다 트랙이 어느새 나를 쫓아와 있다//

유골遺骨 / 유홍준
당신의 집은/ 무덤과 가깝습니까/ 요즘은 무슨 약을 먹고 계십니까/ 무덤에서 무덤으로/ 산책을 하고 있습니까/ 저도 웅크리면 무덤, 무덤이 됩니까/ 무덤 위에 올라가 망(望)을 보았습니까/ 제상(祭床) 위에 밥을 차려놓고/ 먹습니까/ 저는 글을 쓰면 비문(碑文)만 씁니다/ 저는 글을 읽으면 축문(祝文)만 읽습니다/ 짐승을 수도 없이 죽인 사람의 눈빛, 그 눈빛으로 읽습니다/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을 수습하는 사람의 손길은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잘 꿰맞추는 사람이지요/ 그는 살 없이,/ 내장 없이, 눈 없이/ 사람을 완성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무덤 속 유골을 끄집어내어 맞추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맞추어놓은 유골/ 유골입니다//

포도나무 아버지 / 유홍준
얘야 올해는 가뭄 때문에 포도넝쿨이 엉망이구나 아버지 팔뚝 위의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내미신다 자아, 받아라 어서 이 불멸의 포도넝쿨을 이제 너에게 넘겨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아버지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내미신다 굵은 당신의 팔뚝에서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내미신다 굵은 당신의 팔뚝에서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한사코 내밀고 계신다 아버지의 핏줄을 받는다 나는 포도넝쿨처럼 지문이 얽히고 설킨 두 손바닥을 내밀어 아버지의 포도나무 묘목을 받는다 깊이, 구덩이를 파고 아버지의 핏줄을 포도밭에 옮겨 심는다 넝쿨마다 아버지의 심장이 주렁주렁 달리는 포도나무 가지마다 넓적한 아버지의 손바닥 이파리가 돋아나는 포도나무를 옮겨 심는다 아버지의 포도를 딴다 나는 상자마다 크고 검붉은 아버지의 포도를 따서 담는다 상자마다 가득가득 아버지의 벌렁거리는 심장을 담아 트럭에 싣고 시장에 내다 판다 얘야 내 포도를 네가 먹으니 즐겁구나 내 포도를 네가 팔아 새 옷을 사 입으니 보기 좋구나 아버지 껍질눈이 나를 바라보며 웃으신다 알맹이 발라먹고 뱉은, 아버지 껍질눈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계신다 생전의 할아버지 깊디깊은 눈 속을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어린것들이 달라붙어 포도를 먹는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할아버지 포도를 먹어치운다 알맹이만 발라먹고 뱉어버린 아버지 껍질눈이 여전히 웃고 계신다//

그리운 쇠스랑 / 유홍준
화가 난 아버지가 쇠스랑을 들고 어머니를 쫓아갔다 화가 난 눈썹이 보기 좋았다 1975년이었다 입동(立冬)이었다 내 그리운 쇠스랑…/ 마당 저쪽 두엄더미에서는 하연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무눈동자 / 유홍준
아버지도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도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나무속으로 수목장(樹木葬), 도대체 나무속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나뭇결이여 지나치도록 무엇을 오래, 하염없이 바라보면 눈동자에 옹이가 박힌다는 말!/ 내 시골집 기둥에는 그 말이 열 개나 박혀 있다//

 

아교 / 유홍준
내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하루도 아니고/ 연사흘 궂은비가 내리면/ 아버지는 선반 위의 아교를 내리고/ 불 피워 그것을 녹이셨네 세심하게/ 꼼꼼하게 느리게 낡은 런닝구 입고 마루 끝에 앉아/ 개다리소반 다리를 붙이셨다네/ 술 취해 돌아와 어머니랑 싸우다가/ 집어던진 개다리소반……/ 살점 떨어져나간 무릎이며 복사뼈며/ 어깻죽지를 감쪽같이 붙이시던 아버지, 감쪽같이/ 자신의 과오를 수습하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 내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세심하게 꼼꼼하게 개다리소반을 수리하시던/ 아교의 교주 아버지 보고 싶네/ 내 뿔테안경 내 플라스틱 명찰 붙여주시던/ 아버지 만나 나도 이제 개종을 하고 싶다 말하고 싶네/ 아버지의 아교도가 되어/ 추적추적 비가 오는 아교도의 주일날/ 정확히 무언지도 모를 나의 무언가를 감쪽같이 붙이고 싶네//

뇌신* / 유홍준
아버지의 종교가 <아교>였다면/ 어머니가 믿는 신은 <뇌신>이었네/ <惱信> 혹은 <惱神>./ 머리가 빠개질듯 아파/ 일자무식 어머니는 그 <뇌신>을 믿었다네/ 어머니 제발 그 따위 사이비 신은 믿지 마세요!/ 울음을 터뜨리며 큰누나가 어머니의 광신을 말렸지만/ 그런 말 마라, 이 풍진 세상/ <뇌신>보다 강력한 어머니의 구세주는 없었네/ 그래도 내 고통 잊게 해주는건/ 오직 이 <뇌신>뿐이다/ 다시 또 어머니는 한 봉지/ <뇌신>의 領聖體를 받아먹고 聖水를 들이켰다네/ <아교>와 <뇌신>의 관계는 기독교와 이슬람 같은 것이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쟁은 끊이지 않고/ 성지같은 우리 집, 가재 도구들은 날마다 박살이 났네/ 오오 우리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처럼 자랐다네/ 내 머리엔 <뇌신>, 내 몸엔 <아교>……/ 두개의 종교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했네/ <아교>도 <뇌신>도 난 절대로 안 믿을거야!/ 어금니를 깨물며, 난背敎를 결심했고 무신론자가 되었다네/ 그나저나 이제는 다 거덜나고 말았지만,/ 내 아버지의 종교가 <아교>였다면/ 어머니가 믿던 신은 <뇌신>이었다네//
* 뇌신: 두통약

 

도화동 공터 / 유홍준
중풍을 앓던 아버지가 삐딱삐딱 가로질러 가던 공터 딛을 수 없는, 나는 딛지 못한 공터 어디에 뒀더라 옷이 되지 못한 보자기 같은 공터 누더기 누더기 기운 공터 헛젖이 달린 공터 헛배를 곯던 공터 우물의 그림자 길게 키우던 공터 전봇대에 매달린 보안등만이 목격한 공터 다 늦게 춤바람 난 어머니 야반도주하던 공터 뻑뻑 담배를 빨며 멀리 오색 카바레 불빛을 바라보던 공터 입맛이 씁쓸하던 공터 억장이 무너지던 공터 석 달도 못 채우고 돌아온 어머니 금세 옆집 야쿠르트 아줌마랑 수다를 떨던 공터 한심한 공터 빌어먹을 공터 중풍 앓던 아버지처럼 등짝이 삐딱한 공터 화장품 팔러 다니던 어머니처럼 낯짝이 얽은 공터 흉물의 공터 곰보딱지의 공터 카악 퉤, 가래침을 뱉고 떠나 온 공터 끝끝내 우리 집이 되지 못한 마포구 도화동 가든호텔 뒤의 그 언덕빼기의//

추석날 오후 / 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것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 오르는/ 깻잎파리처럼 부풀고 무슨 할말/ 그리 많은지 맞다 맞어,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거푸거푸 웃음을 날린다./ 말 안해도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구름 몇덩이 머물다 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한나절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 묶는,/ 이 얼마만의 기쁨......//


짐승에게도 욕을 / 유홍준
짐승에게도 욕을 한다/ 짐승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퍼붓는다 어머니는/ 혀가 빠질 놈의 짐승이고, 잡아먹을 놈의 짐승이고, 때려죽일 놈의 짐승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욕을 바가지로 퍼붓고 가축들에게 사료를 준다/ 바가지로 탁/ 대가리를 때리고/ 바가지로 탁 등골짝을 때리면서 준다/ 그러면 내 착한 아들처럼/ 어머니의 짐승들은/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처박고 후루룩후루룩 밥을 먹는다//

들깻잎을 묶으며 / 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을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맞다 맞어, 무슨 할말 그리 많은지/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해도 뻔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 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로 흰 구름 몇덩이 자나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

어머니 독에 갇혀 우시네 / 유홍준
어머니 커다란 독에 갇혀 우시네/ 엉덩이가 펑퍼짐한 어머니 텅 빈 독 속에 갇혀 우시네/ 또아리 틀고 들어앉아 우시네/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어머니/ 아랫배가 훌쭉한 어머니 배암으로 우시네/ 두꺼비로 우시네 마른 바람의 혓바닥으로 우시네/ 텅 텅 독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텅 텅 텅 텅 빈 독 두드리며 우시네 속절없이 먼 하늘 바라보며 우시네/ 일흔 살 어머니 두드리면 댕그랑 댕그랑 맑은 울음 울리는 빈 독 나, 손마디로 두드리며 묻네/ 간장 같은 된장 같은 어머니, 거기 계셔요//

어머니의 자궁을 보다 / 유홍준
일흔네살/ 어머니가 자궁을 들어냈다/ 수술용 장갑을 낀 젊은 의사가 냉면그릇 같은 데 담아들고 와서 보여주었다/ 마음이 참, 지랄 같았다/ 스텐그릇 안의/ 어머니의/ 계란, 자궁을 본다는 것/ 끼니 때가 되어/ 어머니 뉘어놓고 길 건너 추어탕집에 가서 한 그릇 밀어 넣었다/ 요때기마다 자궁 들어낸 여자들이 누워 있는 방으로 돌아와/ 등을 붙이면/ 따뜻하다 야근에/ 지쳐 녹아내리는 몸이여 /문득 어디 생리 중인 여자가 있어 울며 그녀와 살 섞고 싶다//

나는, 웃는다 / 유홍준
깜박, 눈을 붙였다 깼을 뿐인데 누가 내 머리를 파먹은 거야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누가 내 눈동자를 쪼아먹은 거야 수박덩어리처럼 누가 넝쿨에서 내 꼭지를 잘라낸 거야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다 숟가락으로 파먹다 만 뒤통수를 감추고 웃는다 이렇게 파먹힌 얼굴 이렇게 파먹힌 뒤통수로 이렇게 쪼아먹힌 눈 이렇게 갈라터진 흉터로 누가 내 뒤통수에 빨간 소독약 묻힌 솜뭉치를 쑤셔넣다 놔둔 거야 누가 내 웃음에 주삿바늘을 꽂아놓은 거야 누가 내 웃음에 링거 줄을 꽂고 포도당을 투약하는 거야 누가 바퀴 달린 이 침대를 밀며 달리는 거야 복도처럼 아득하게 웃는다 미닫이처럼 드르륵 웃는다 하얀 시트가 깔린 이 수술대 위에서 배를 잡고 웃는다 이 흉터 같은 입술 이렇게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흉터 같은 입술로, 누가// 흉터 위에 립스틱을 바르는 거야 누가 이 흉터끼리 뽀뽀를 시키는 거야//

저울의 귀환 / 유홍준
쇠고기 한 근을 샀다하얀 목장갑 낀 정육점 여자의 손이손에 익은 한 근의 무게를 베어 저울 위에 얹었다주검의 一部를 받아 안은저울바늘이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저울이내게 물었다 인간들의 약속이란 고작이 한 근의 무게가 모자란다고 보태거나 넘친다고 떼어내는 것?맞아 저 쪽 봉우리에서 더 먼 저쪽 봉우리로주먹만한 고깃덩어리들이 고단한 날개를 저어 날아가는 황혼녘국거리 쇠고기 한 근 담아 들고부스럭대는 비닐봉지 흔들며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면저울을 떨게 만든 이 한 뭉텅이 주검의 무게가왜 이렇게 가벼운가 문득저울대가 된 나의 팔이여모든 것을 들어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는빈 저울의 침묵이여 나는 제로에서 출발한 커다란 고깃덩어리주검을 다는 저울 위에 올라가 보고서야 겨우제 몸뚱어리 무게를 아는 백열 근 짜리四肢 덜렁거리는人肉//

붉은 태반 / 유홍준
양수를 뒤집어쓴 송아지 갓 태어난 송아지가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머릿수건을 쓴 어머니 걸레를 든 어머니가 갓 태어난 몸뚱어리를 닦아주고 양낫을 든 아버지 기분이 좋은 아버지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스윽스윽 소의 태를 잘라 소에게 던져주고 찔끔, 새끼를 낳은 소 눈물을 흘리던 소가 우걱우걱 제가 낳은 태를 제가 씹어 삼키고 지푸라기 묻은 태반(胎盤)을 씹어 삼키고 어머니는 황급히 아궁이에 불을 넣고 소의 태반 붉은 소의 태반을 씻어 안치고 구수한 냄새가 올라오는 쟁반 구수한 고기냄새가 올라오는 쟁반을 들고 오고 오후의 마루 햇살 노란 오후의 마루 끝에 앉아 어머니와 아버지와 나는 기름진 것 기름지고 구수한 것을 소금에 찍고 산사태 났던 앞산 언덕배기 새끼 내지른 궁뎅이 처럼 움푹 꺼진 앞산 언덕배기에 태반처럼 붉은 복사꽃이 피어오르고//

운동장을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 유홍준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사람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다/ 제 삶이 어떤 건지 미리 한번 중간 점검해보는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 서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흙먼지를 오지게 한번 뒤집어써보는 사람이다 어디 피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마치 고문당하는 사람이고 마치 숙청당하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이렇게 홀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이다//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스스로 고개를 꺾는 것이다// 그림자 중에 가장 긴 그림자는/ 운동장에 드리운 그림자다//

혈서 / 유홍준
누가 내 얼굴에 자꾸/ 혈서를 쓰려고 해요// 폐쇄병동 서부기 씨가 속삭여준 말이다// 이 말을 갖고/ 두어 달/ 나는 세상의 얼굴을 살핀다// (일용직 노동자의 얼굴엔 일용직 노동자의 혈서가/ 백화점 점원의 얼굴엔 백화점 점원의 혈서가 쓰여 있다)// 얼굴에 혈서가 쓰인 사람들이/ 저 문으로 들어가고/ 저 문으로 나가고// 하루 종일/ 나는 수백 개의 얼굴, 수백 권의 혈서를 읽는다// 누가 내 얼굴에/ 자꾸/ 혈서를 쓰려고 한다//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저녁 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은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자루 이야기 / 유홍준
아버지,어머니자루를끌고다녔지,너덜너덜옆구리터진어머니자루,아버지패대기치던어머니자루,줄줄눈물이새던어머니자루,길바닥에주저앉아터진옆구리를움켜쥐던어머니자루, 어린내가아버지바지가랑이를잡고매달리자놔둬라,놔둬라머리카락을쓸던어머니자루,입술에피가나던어머니자루,눈탱이가퍼렇던어머니자루,고구마로만배를채우던어머니자루,몰래들어내던참깨자루나를꼭끌어안고죽어버리자던자루,넝마같이덕지덕지덧댄자루,장터에서못본척외면한자루,꾸깃꾸깃자궁에서돈을꺼내던자루,자루에서태어난,나는자루를까마득히잊고사는자루,자루가무언지도모르는자루를낳은자루//

흉터 속의 새 /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줄까 새야/ 꺼내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세탁소 / 유홍준
人皮를 빽빽이 걸어놓은 세탁소// 이건 네 거죽이고/ 저건 네 마누라 거죽이야 얇디얇은/ 비닐커버로 둘러씌워진 거죽마다 명찰을 달아놓은 세탁소// 다리미질에 지친 세탁소 남자 계단에 나와 담배를 피는데/ 똥누는 폼으로 쪼그리고 앉아/ 사타구니 볼록하니 튀어나온 불알 두 쪽,// 누가 너무 올라붙는 옷은 입지 말라고 했지?// 창문 열려진/ 세탁소에 온 동네 거죽들이 흔들거린다/ 805호 여자 806호 남자 허리를 휘감고 있다// 내복처럼/ 살갗에 너무 올라붙는 사람은/ 왜 입지 말라고 했지?// 담뱃불에 지져진 구멍 때우려/ 나, 허름한 내 거죽 들고 세탁소 간다//

아직 더 먼 길을 / 유홍준
얼어죽은 여자를 본다// 붉은 입과/ 다 감지 못한 눈동자에 허연 얼음이 박혀 있다// 그녀의 입에서/ 자욱한 안개가 흘러 나온다// 오직 맨발만이/ 아직 더 먼길을 가겠다는 듯이/ 댓잎처럼 새파랗게 살아있다//

펌퍼 / 유홍준
열다섯 살,/ 식어빠진 수제비를 퍼먹었다// 봄날이었다/ 한낮이었다/ 빈집이었다// 한 바가지 물을 목울대에 퍼 담고 펌퍼를 자아댔다 우리 집 펌퍼는 왜 이리 자꾸 물이 빠지는 거냐 어머니 푸념이 떠 올랐다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어서어서 고장 나 버려라 이깟 생, 갓 수음을 배운 나는 거칠게 거칠게 펌퍼를 자아댔다// 살점을 모두 뜯어 수제비 끓여놓고/ 집 나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봄밤이었다/ 달빛이었다/ 헛짓이었다/ 펌퍼 탓이었다//

가족사진 / 유홍준
아버지 내게 화분을 들리고 벌을 세운다 이놈의 새끼 화분을 내리면 죽을 줄 알아라 두 눈을 부라린다 내 머리위의 화분에 어머니 조루를 들고 물을 뿌린다 나는 챙이 커다란 화분모자 벗을 수 없는, 벗겨지지 않는 화분모자를 쓴다 바람앞에 턱끈을 매는 모자처럼 화분속의 뿌리가 내 얼굴을 옭아맨다 나는 푸른 화분모자를 쓰고 결혼을 한다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넝쿨을 뚝 뚝 분지른다 넝쿨을 잘라 새 화분에다 심는다 새 화분을 아내의 머리 위에 씌운다 두 아이의 머리 위에도 덮어 씌운다 우리는 화분을 쓰고 사진관에 간다 자 웃어요 화분들, 찰칵 사진사가 셔터를 누른다//

사진관 의자 / 유홍준
참 이상한 곳에 놓여진 의자군,/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기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졸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창 밖/ 지나가는 차 바라보지 않네/ 참 적막한 곳에 놓여진 의자/ 외톨박이 의자군, 오늘도/ 혼자뿐인 의자 단 한 번도/ 엉덩이가 따뜻해져 본 적 없는 의자/ 누구랑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하나, 얘기를 듣나/ 오늘도 검은 커튼 뒤에 앉아/ 혼잣말만 하는 의자/ 독백의 의자 그래도/ 단정한 의자군, 진짜보다 예쁜/ 가짜 꽃바구니 두어 개/ 제 곁에 가져다 놓고 누구는/ 이 의자 한 가운데에 앉아/ 돌사진, 독사진을 찍고/ 누구는 졸업사진, 영정사진을 찍고/ 나는 또 새 이력서에 붙일/ 굳은 표정의 증명사진 몇 장/ 시선이 없는 내 청춘의/ 무표정 몇 장을 남기네//

의자 위의 흰 눈 / 유홍준
간밤에/ 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 가장 멀고먼 우주로부터 내려와 피곤한 눈 같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 창문에 매달려 한 나절,/ 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의 흰 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가야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한다고/ 햇살이 퍼지자/ 멀고먼 곳에서 온 흰 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 가는 것/ 붙잡을 수 없었다//

직접의 세계 -2011년 5월 개양(開陽) 언저리에서 / 유홍준
요즈음의 내 취미는 온갖 꽃을 따 차를 만들고/ 온갖 나무를 깎아 무엇을 만드는 일,// 내 손으로 직접// 물고기를 잡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내 발로 직접 어디를 가고 내 눈으로 직접// 무엇을 본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직접 귀신을 만나는 무당들에게 물어봐/ 직접은 무모하고/ 위험해// 직접은 힘들고 고달픈 거야/ 간접은 편안하고 안락한 거야// 직접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시인이 되고 교사가 돼?// 간접은 지루하고 하품이 나/ 직접이 재밌고// 직접이 즐거워/ 내 피부로 직접 저 햇살 받는 행복!// 내 귀로 직접 저 물소리 듣는 기쁨!//

차력사 / 유홍준
돌을 주면/ 돌을// 깼다// 쇠를 주면 쇠를 깼다// 울면서 깼다 울면서 깼다 소리치면서 깼다// 휘발유를 주면 휘발유를/ 삼켰다// 숟가락을 주면 숟가락을 삼켰다// 나는 이 세상에 깨러 온 사람, 조일 수 있을 만큼 허리띠를 졸라맸다// 사랑도 깼다/ 사람도 깼다// 돌 많은 강가에 나가 나는/ 깨고/ 또 깼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 유홍준
이 아스팔트 밑에 거북이 산다/ 분명하다 갑골의 등짝처럼 딱딱한 이 길바닥이/ 저렇게 쩍쩍 금이 간 것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공사 탓이/ 아니다 짧고 뭉툭한 발목에 질끈 힘을 주고/ 끙차, 아스팔트 속의 거북이 등짝을 밀어올렸기 때문// 확실하다 초과적재한 저 화물차의 중량 탓이/ 아니다 저 균열, 거북의 등을 보라/ 이 비루먹은 길들을 다 갈아엎을 심산으로/ 해안이 가까운 남해나 거제/ 해남이나 진도의 캄캄한 밤에/ 아스팔트 속으로 제 대가리를 밀어넣었을 거북!/ 이 망할놈의 나라 도로 곳곳을/ 오늘도 롤러를 단 공사용 차량이 다진다/ 갈라 터진 길바닥에 새 아스콘을 붓고 다진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압사를 당한다//

슬하 / 유홍준
고인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고인의 슬하에는/ 고인이 있나 저녁이 있나/ 저녁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저 외로운/ 지붕의 슬하에는/ 말더듬이가 있나 절름발이가 있나/ 저 어미새의 슬하에는/ 수컷이 있나 암컷이 있나/ 가만히/ 돌을 두드리며 묻는 밤이여/ 가만히 차가운 쇠붙이에 살을 대며 묻는 밤이여/ 이 차가운 쇠붙이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차가운 이슬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어긋난/ 뼈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물렁한 살의 슬하에는 구더기, 구더기, 구더기가 살고 있나//

사북 / 유홍준
영월 지나 정선 지나 태백 긴 골짜기 사북사북 간다 사북사북 눈 온다 死北死北 死北死北…···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하염없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

사람을 쬐다 /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 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이과두주二鍋頭酒* / 유홍준
희뿌연 산/ 언덕에는 흰 눈이 내리고요/ 얼어 죽을까봐 얼어 죽을까봐/ 나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요/ 동치미 국물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슬픈 이과두주 마시는 밤/ 또 무슨 헛것을 보았는지 저 새카만 개새끼는 짖구요/ 저 하얀 들판에는 검은 새들이 내리고요/ 저 하얀 들판에는 검은 새들이 내리고요/ 짬뽕국물도 없이/ 시뻘건/ 후회도 없이/ 내리는 눈발 사이로 흘러가는 푸른 달 틈으로/ 적막하고 나하고 마주 앉아/ 이과두주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 독한 것을 담아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도 독한 것이 담기는 밤//
* 이과두주二鍋頭酒: 두 번 솥에서 걸렀다고 해서 지어진 술 이름.

여름 / 유홍준
노모가 흘린 밥 한 덩어리/ 노모가 흘린 밥풀떼기 한 덩이에/ 검은 파리떼가 꼬여 있다/ 이제 더이상, 아무 할 일도 없는/ 앉은뱅이 노모가 초록색 파리채를 들고/ 탁 탁 검은 파리를 파리를 때려잡고 있다 배때기째로 짓뭉개고 있다/ 여기저기 검버섯이 핀 노모의 얼굴에도 파리떼가 잔뜩/ 아랫배가 볼록한 저 사진 속 아프리카 소년도 마찬가지/ 파리에겐 그저 한 덩어리 밥,/ 노모가 흘린 한 덩어리 밥과 같다/ 눈곱 잔뜩 낀 눈가에 파리떼가 달라붙어도 쫓을 줄을 모른다 제 뺨을 제가 때릴 줄조차 모른다/ 햇살 따가운 슬레이트지붕이 무너진다/ 낡고도 가벼운 그림자가 마당 가득 무너진다/ 다 늙은 노모가 걸레 한 쪽을 까뒤집어/ 눈가를 닦는다 걸레로 입가를 닦는다//

소설(小雪) / 유홍준
하늘에서도/ 빗자루로 쓸 수 있는 것이 내려서 좋다/ 동글동글 손으로 뭉칠 수 있는 것이 내려서 기쁘다/ 잠시겠으나/ 그늘 쪽 어깨에만 눈을 얹고 있는 구층석탑처럼/ 묵묵히 서 있고 싶다/ 이 겨울은// 창호지같이 얇은 서러움으로 죽(竹)을 칠까 붉고 푸른// 깃발처럼 펄럭여볼까 아니야 아니야 울타리쪽으로 밀어붙여놓은 눈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 없어지는 것이나 바라보아야겠다//

구름에 달 가듯이 / 유홍준
저녁 일곱시 반엔 모두들 약을 먹어요 환자복을 입은 백 명의 환자들이…… 약이, 없는 자는 없어요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자는 없어요 폐쇄병동 밖 캄캄한 밤하늘은 밤새 노란 달이라는 알약 한 알이면 족해요 그러나 우리는 한 움큼을 먹어야 해요 하늘보다 더 많이 먹고 별들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해요 우리들의 목구멍을 넘어간 알약들은 밤새 구름에 달 가듯이 갈 거예요 차갑고 축축한 은하수를 지나 어둡고 칙칙한 내장을 지나 쓸쓸하고 비참한 복도를 지나 부르르부르르 어깻죽지를 떨며// 우리들의 알약은/ 구름에 달 가듯이, 구름에 달…… 가듯이//

인공수정 / 유홍준
겨드랑이까지 오는 긴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애액 대신 비눗물을 묻히고/ 수의사가/ 어딘지 음탕하고 쓸쓸해 보이는 수의사가/ 꼬리 밑 음부 속으로 긴 팔 하나를 전부 밀어넣는다//나는 본다 멍청하고 슬픈 소의 눈망울을/ 더러운 똥 무더기와/ 이글거리는 태양과/ 꿈쩍도 않고/ 성기가 된 수의사의 팔 하나를 묵묵히 다 받아내는 소의 눈망울을// 넓적다리와 넓적다리 사이에/ 가랑이 사이에/ 빵빵하게/ 공기를 집어넣은 것 같은/ 소의 유방에 넷, 생긴 게 꼭 무슨 고무장갑 손가락 같은 젖꼭지가 넷// 귀때기에 플라스틱 번호표가 꽂혀 있는 소는/ 이제 소끼리 접붙이지 않는다/ 더 굵고 더 기다란 인간의 팔하고만 붙는다//

저수지는 웃는다 / 유홍준
저수지에 간다/ 밤이 되면 붕어가 주둥이로/ 보름달을 툭 툭 밀며 노는 저수지에 간다// 요즈음의 내 낙은/ 저수지 둑에 오래 앉아 있는 것/ 아무 돌멩이나 하나 주워 멀리 던져보는 것// 돌을 던져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는 저수지의 웃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긴긴 한숨을 내뱉어 보는 것// 알겠다 저수지는/ 돌을 던져 괴롭혀도 웃는다 일평생 물로 웃기만 한다/ 생전에 후련하게 터지기는 글러먹은 둑, 내 가슴팍도 웃는다//

북천 / 유홍준
구름 같은 까마귀떼 저 하늘을 쪼았다 뱉는다 하늘밖/ 에 더 뜯어먹을 게 없는// 눈뜨지 마라 파먹을라 동안거에 들어간 하늘의 얼굴이/ 산비탈처럼 말랐다 두 볼에 골짜기가 패었다 하늘 눈(目)/ 에서 피가 흐른다 서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린다// 주둥이마다 피를 묻힌 까마귀들이 앞산 넘어간다 금방,/ 캄캄해진다//

북천 -까마귀 / 유홍준
어제 앉은 데 오늘 앉아 있다/ 지푸라기가 흩어져 있고 바람이 날아다니고/ 계속해서/ 무얼 더 먹을 게 있는지,/ 새카만 놈이 새카만 놈을 엎치락뒤치락 쫓아내며 쪼고 있다/ 전봇대는 일렬로 늘어서 있고 차들은 휑하니 지나가고/ 내용도 없이/ 나는 어제 걸었던 들길을 걸어 나간다/ 사랑도 없이 싸움도 없이, 까마귀야 너처럼 까만 외투를 입은 나는 오늘 하루를 보낸다/ 원인도 없이 내용도 없이 저 들길 끝까지 갔다가 온다//

북천 -계명지(鷄鳴池) / 유홍준
닭 울음을/ ​운다는 저수지가 있어 북천에/ ​나는 그 저수지 둑 위에 서서 일렁거리는 물비늘을 들여다보네/ ​작은 돌멩이 두 개를 주워 힘껏 던져본다네/ ​닭 울음을 운다는/ ​저수지가 있어/ ​북천에/ ​어린 딸의 손을 움켜쥐고/ ​그 저수지 속으로 걸어 들어간 여자가 있어/ ​저수지는 푸르고 저수지는 깊고 저수지는 내가 아무리 돌을 던져도 꿈쩍도 않는 저수지/ ​사람의 얼굴을 물거울에 비추면 붉은 닭이 어른거린다네 그 닭 자꾸만 저를 잡으라고 유혹한다네/ ​닭 울음을 운다는 저수지가 있어/ ​북천에/ ​나는 오늘도 그 저수지 한 바퀴를 돌며 생각하네/ ​죽어도 죽지 않고 저 저수지 바닥에 살고 있는/ ​북천의 닭//

손 / 유홍준
사람이 만지면/ 새는 그 알을 품지 않는다// 내 사는 집 뒤란 화살나무에 지은 새집 속 새알 만져보고 알았다 남의 여자 탐하는 것보다/ 더 큰 부정이 있다는 거, 그걸 알았다// 더 이상 어미가 품지 않아/ 썩어가는/ 알이여// 강에서 잡은 물고기들도 그랬다// 내 손이 닿으면 뜨거워/ 부정이 타/ 비실비실 죽어갔다 허옇게 배를 까뒤집고 부패해갔다//

짚을 만졌던 느낌 / 유홍준
짚을 만졌던 느낌은/ 뱀을 만졌던 느낌과는 달라서/ 차갑지가 않지 매끄럽지가 않지 꺼끌꺼끌하고 까칠까칠하지// 나를 낳고 동생을 낳고/ 아버지 대문간에 금줄을 칠 때, 그 새끼를 꼬든 느낌은 어떠했을까/ 낫으로 발바닥을 깎아도/ 꿈쩍도 않던 소는, 달구지를 끌던 옛날 옛적 소는/ 짚으로 만든 그 신발을 신었을 때 감촉이 또 어떠했을까// 짚을 만졌던 느낌은/ 옷이나 책이나 그릇을 만졌던 느낌과는 달라서 한참을 달라서/ 옜다, 너도 한번 꼬아보아라/ 아직 어린 나에게도 짚 한 단이 던져졌을 때/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나의 손바닥은 그것을 싹싹 비벼 꼬았네/ 요만큼 새끼줄을 꼬면/ 꼬리처럼 엉덩이 뒤로 밀어내며/ 동그랗게 사리던 새끼줄의 즐거움을 알았다네// 짚을 만졌던 느낌은/ 여자의 몸을 만졌던 느낌과는 달라서/ 꺼끌꺼끌하고 까칠까칠하고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좋아한다네// 자주 밤길을 오갔던 나는/ 짚단에 불을 붙이면 어느 만큼 갈 수 있는지 그것까지를 다 알고 있다네// 겉은 꺼끌꺼끌하고 까칠까칠한 짚의 느낌을/ 속불은 발갛고 재는 유난히 더 검은 짚의 육체를//

직방直放 / 유홍준
아아 이 두통 지금/ 나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 필요하다// 그렇다 얼마나 간절히 직방을 원했던지/ 오늘 낮에 나는 하마터면 자동차 핸들을 꺾지 않아/ 직방으로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했다// 직방으로 骨로 갈 뻔했다// 오, 직방으로// 다가오는 연애, 쏟아져 내리는/ 눈물, 폭포// 안다, 미친 자만이 직방으로 뛰어간다// 십오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날린 直放人처럼/ 바닥 밑의 바닥, 과녁 뒤의 과녁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는// 이렇게 40년 동안을 뛰어내리고 있는 나는//

안경 / 유홍준
이런/ 너는 두 다리를/ 귀에다 걸치고 있구나 아직/ 한 번도 어디를 걸어가 본 적이 없는 다리여/ 그러나 가야할 곳의 풍경을 다 알아서 지겨운 다리여/ 그렇구나 눈(目)의 발은/ 귀에다 걸치는 것/ 깊고 어두운 네 귓속/ 귀머거리 벌레 한 마리가/ 발이란 발을 모두 끌어 모으고 웅크리고 있구나/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보고 듣는다는 것의 고역이여/ 얼마나 허우적거렸기에 너는/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법을 배웠을까/ 콧등 훌쩍이는 이 터무니없는 생각들/ 콧등 아래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이 형편없는 나의/ 眼目들//

반달 / 유홍준
또 야근인가, 상평공단 굴뚝 위의 저 반달 천날만날 그 옷이 그 옷인 저 반달 검은 작업복 반달 낡은 주전자 들고 느릿느릿 물 뜨러 갔다오는, 동서산업 경비아저씨 같은 반달 이제는 별 쓸모 없는 눈칫밥, 장기근속자 같은 반달 피부병 걸린 반달 아끼고 또 아껴 겨우 몇 푼 모아놓으면, 먹구름 같은 우환이 찾아와 홀라당 앗아가는 반달 썩을 놈의 세상, 이러나 저러니 안 되는 놈은 안 되는 반달 산업재해 입은 반달 그래도 고단할 땐 한숨이라도 되게 한 번 몰아 쉬는 게 힘이지 아암, 아암 오늘도 반대가리짜리* 야간잔업 나가는 반달 아무 생각 없이 떴다가 지는 반달 상평공단 굴뚝 위의 저 반달// 이제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해버린 늙은 근로자 같은 반달//
*반대가리짜리: 하루 여덟 시간 근무의 절반인 네 시간 잔업을 근로자들은 이렇게 부른다.

깊은 발자국 / 유홍준
봄가뭄 보름에 그만/ 물 가둬놓은 못자리, 논바닥이 때글때글 말랐다/ 못자리 만든다고 내 맨발이 딛고 다닌 발자국 옴폭한 곳에/ 올챙이 새끼들이/ 오골오골 말라죽었다/ 아! 내 몸뚱어리 무게를 싣고 다녔던 발자국 속이/ 저 올챙이들의 生死가 걸린/ 궁지였다니,/ 울음으로 밤 하나 새워보지도 못한 저것들이/ 떡잎 같은 발꿈치 여린 울대 더 이상 적시지 못하고/ 죽어 갔다니,/ 봄가뭄 보름 끝에 기어이/ 후드득 비가 듣는다 금방, 깊은 발자국 속을 채운다/ 반갑다 어미개구리 哭소리....../ 봄가뭄 보름이 저 울대 저렇듯 맑게 단련시켜 놓다니,/ 바람 자는 내일 아침이면 무논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백로처럼/ 죽음이 지나간 물 속의 내 발자국/ 물끄러미 들여다 볼 수 있겠다/ 무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백로가/ 내 발자국 속의 주검 집어 올려 삼키는 것, 볼 수 있겠다//

해변의 발자국 / 유홍준
얼마나 무거운 남자가 지나갔는지/ 발자국이, 항문처럼/ 깊다// 모래 괄약근이 발자국을 죄고 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 똥구멍처럼, 오므려져 있다// 바다가 긴 혓바닥을 내밀고/ 그 남자의/ 괄약근을 핥는다// 누가 바닥에 갈매기 문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지나갔을까?// 나는 익사자의 운동화를 툭, 걷어찬다/ 갈매기가 기겁을 하고 날아오른다//

자반고등어 / 유홍준
얼마나 뒤집혔는지/ 눈알이 빠져 달아나고 없다/ 뱃속에 한 웅큼, 소금을 털어넣고/ 썩어빠진 송판 위에 누워 있다/ 방구석에 시체를 자빠뜨려놓고/ 죽은 지 오래된 생선 썩기 전에 팔러 나온/ 저 여자, 얼마나 뒤집혔는지/ 비늘, 다 벗겨지고 없다//

유리창 위의 × / 유홍준
신축빌라 출입구, 투명한 유리창에/ 붉은 페인트칠, ×字 몇 개가/ 커다랗게 그어져 있다// 저 시뻘건 ×로 존재하는 유리!/ 마스크 쓰고 묵비권/ 행사하는 것 같다// 아직 아무도 입주하지 않은 저 빌라/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는/ 봅합일까/ 개복의 흔적일까// 깨뜨리지 마라 조심하라 저 유리창에/ 시뻘겋게 그어놓은 ×字 같은/ 세상의 법칙들// 십자가보다 더 붉은 ×字 그려진 유리창에/ 구름 몇 조각이 어른거린다 푸른/ 이파리들이 어른거린다// 수건 눌러쓴 늙은 여자가 신나 묻힌 걸레로/ 구름과 나뭇잎과 ×를/ 싹 싹 지우고 있다//

푸른 도장 / 유홍준
두눈 때꾼해지는 야근을 마치고/ 공단 식당, 허름한 방석위에 앉아 받는/ 희멀건 밀양돼지국밥/ 한 그릇// 이렇게 싱겁고 이렇게 희멀건 삶엔/ 소금이라도 더 치고 맵고 짠 다대기라도 더 풀어 넣어야지/ 암! 암! 누군가 우스개를 하면/ 그래 맞다 맞어/ 빈창자에 소주부터 한 잔 붓고 건져 올리는 국밥 속 고깃덩어리 한 점// 이 것 봐,/ 내가 만든 제품에/ 그대가 찍어준 합격 도장처럼// 여기, 푸른 도장 압인이 찍혀진 내 숟가락 위의 비곗덩어리 하나!//

주석 없이 / 유홍준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린 나를 이해해 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살구 / 유홍준
저수지 밑/ 축사에 수의사가 온다/ 어린 돌배기 송아지에게 다가가 앞발을 묶고/ 뒷발을 묶고 자빠뜨려 고환을 찾아낸다/ 어린 송아지 어린 송아지 돌배기 송아지/ 고환을 잃어버리는 송아지가 짧게 지르는 비명을 나는 듣는다// 서둘러 수의사는 떠나고 저수지 밑/ 축사 주인은 어린 송아지의 고환을 뒤꼍 살구나무 아래 묻는다/ 풋살구만한 고환이다​/ 여물지 않은 고환이다/ 봄이 오면 살구나무, 울음처럼 애틋한 꽃을 피울 것이다/ 조그만 열매들을 다닥다닥 ​맺을 것이다// 어린 송아지 고환처럼/ 조그만 살구​//

행운목 / 유홍준
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 행운은- 고작/ 한 뼘 길이라는 생각// 누군가 이제는 아주 끝장이라고// 한 그루 삶의/ 밑동이며 가지를 잘라 내던졌을 때/ 행운은 거기에서 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거라는 생각/ 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걸/ 발견하는 거라는 생각/ 그리하여 울며 울며 그 나무를 다시 삶의 둑에 옮겨 심는 거라는 생각// 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 행운은- 집집마다/ 수반 위에 올려놓은 토막이라는 생각//

버드나무집 女子 / 유홍준
버드나무 같다고 했다 어탕국수집 그 여자, 아무데나 푹 꽂아놓아도 사는 버드나무 같다고…… 노을강변에 솥을 걸고 어탕국수를 끓이는 여자를, 김이 올라와서 눈이 매워서 고개를 반쯤 뒤로 빼고 시래기를 휘젓는 여자를, 그릇그릇 매운탕을 퍼담는 여자를, 애 하나를 들쳐업은 여자를// 아무데나 픽 꽂아놓아도 사는/ 버드나무 같다고/ 검은 승용차를 몰고 온 사내들은/ 버드나무를 잘 아는 물고기를 잘 아는 단골처럼/ 여기저기를 살피고 그 여자의 뒤태를 훔치고/ 입안에 든 민물고기 뼈 몇점을/ 상 모서리에 뱉어내곤 했다// 버드나무, 같다고 했다//

복숭아 밭에서 온 여자 / 유홍준
새벽열차가 복숭아밭을 지난다 단물 빠진 껌을 씹으며 여자 하나가 올라탄다 화사하다 싸구려 비닐구두를 구겨 신고 있다 털퍼덕, 허벅지 위에 비닐가방을 올려놓고 빨간 손끝으로 떽떽 검은 풍선껌을 불고 있다 복숭아, 복숭아 냄새가 난다 저 여자 이내 잠이 들어 군복 입은 사내 어깨에 머리를 처박는다 생면부지 사내의 어깨 빌려 멀고도 먼 꿈을 꾼다 새벽기차표를 끊을 때 군복 입은 사내 곁엔 젊은 여자를 앉히는 이상한 역무원이 있다 몸 섞지 않고도 부부가 되어 종점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다 퉤, 껌을 뱉듯 아침이 온다 두루마리 비닐같은 아침햇살이 복숭아밭을 덮는다 깨울 수도 없을 만치 깊이 잠든 싸구려 원피스 볼따구니에 밝고 환하고 고운 햇살 한 움큼이 어룽거리고 있다//

검은 관 위의 흰 백합 / 유홍준
저것은 죽음을 불러내는 트럼펫 어디를 눌러야 할지 저것은 눌러야 할 피스톤이 없다 그런데도 저것은 있는 대로 목구멍을 열어 젖히고 소리가 나지 않는 비명을 지른다 저것은 트럼펫 주둥이다 나는 조곡을 연주했다 누가 저것을 주검에게 바쳤나, 검은 상복을 입고 하얀 장갑을 끼고 나는 검은 관 위의 흰 백합 트럼펫을 불렀다//

모란 / 유홍준
고향 흙을 담아/ 꽃을 심는다// 고향 흙은 푸슬푸슬하다/ 고향 흙은 자꾸만 어딘가로 가려고 한다// 내 고향 흙은 마사토, 아무리 뭉쳐도 뭉쳐지지가 않는다// 일평생 뭉쳐도/ 내 마음은/ 도대체 뭉쳐지지를 않는다// 어떤 꽃을 심어도 내 고향 흙은 붉은 꽃만을 피운다//

할미꽃 / 유홍준
안감이 꼭 저런 옷이 있었다/ 안감이 꼭 저렇게 붉은 옷만을 즐겨 입던 사람이 있었다/ 일흔일곱 살 죽산댁이었다 우리 할머니였다 돌아가신 지 꼭 십 년 됐다/ 할머니 무덤가에 앉아 바라보는/ 앞산마루 바라보며/ 생각해보는……// 봄날의 안감은 또 얼마나 따뜻한 것이냐//

자전거 체인에 관한 기억 / 유홍준
눈이 없는 사람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모르는 개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일치감치 부모의 눈알을 후벼 먹은 후레자식들이 휘파람을 불며 모여 들었다 제멋대로 각목이 쟁여져 있었다 훔쳐온 자전거가 벌겋게 썩어가고 있었다 개만도 못한 자식들이 자전거 체인을 벗겨 흉기를 만들고 있었다 담배를 돌려 피우며 팔뚝을 지지고 있었다 비린내가 풍겼다 고기는 팔고 비린내만 달고 온 어머니,돈에도 비린내가 난다 돈에도 비린내가 나 빠지지 않는 사람냄새에 진절머리 쳤다 눈 없는 아버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손목에 체인을 감아쥐고 무엇을 후려치고 싶은 시절이 흘러가고 있었다//

베개 / 유홍준
지푸라기가 든 베개를 베고 잤다/ 베개를 던지며 놀았다 지푸라기가 튀어나왔다/ 지푸라기처럼 푸석한 아이였다 가벼운 아이었다 쓸모/ 없는/ 아이였다 머리가 아팠다 늘 6교시를 다 채우지 못했다/ 뒈져버려, 아버지 목침을 던졌다/ 아버지 목침이 내 머리를 깼다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베개가 늘 젖었다/ 젖은 베개를 그냥 농속에 집어넣었다 싫었다/ 베개 위에 얼룩꽃이 자랐다/ 어머니 메밀이 든 베개를 만들어 주신다/ 참숯이 든 베개를 사 오신다/ 가설무대 약장수가 파는 바이오 磁力베개를 사 오신다/ 아직도 뒷골이 아프냐 큰애야/ 제 윗도리를 벗어 둘둘 말고 자는 인부처럼/ 잠이 달아야 한다 큰애야 뭐라 해도 베갯속은/ 잘 말린 人肉이 최고라더라 큰애야/ 머리 아픈 건 말 할 수 있지만 가슴 아픈 건 말 할 수 없어요/ 어머니,/ 허벅지 베어낸 살을 말려 내 베개 지으신다/ 어머니 또 내 베개 지으신다//

하지 무렵 / 유홍준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정지문 앞에 서서/ 수건을 벗어 펑펑 자신을 때리며 먼지를 털었다// 그 소리가 좋았다/ 나는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먼지를 털고 끓여주시는 국밥이 좋았다// 점심때는 늘 뒷산 멧비둘기가 구구 구구 목을 놓아 울었다/ 마당 가득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텃밭 가득 감자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바닥이 서늘한 마룻바닥에 앉아/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서럽고 가난하고 뜨거운 국밥을 퍼먹었다// 검불 냄새가 나는 수건이었다// 펑펑 자신을 때리며 먼지를 털던 수건이었다// 구구 구구 목을 놓아 울던 수건이었다//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은 수건이었다// 어머니가 벗어 놓으면 꼼짝도 않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수건이었다//

용접공의 눈 / 유홍준
여섯 살이었다/ 꽃이 좋아 꽃이 예뻐 장독대 옆 맨드라미 꽃밭에 가서 놀았다/ 볏 붉은 맨드라미 잡고 흔들어댔다/ 눈이 부셔/ 눈이 아파/ 자꾸만 눈을 비비고 눈을 비볐다/ 밤 꼴깍 지새우고 병원에 갔다/ 돋보기 쓴 의사 양반 눈 크게 뜨고/ 내 눈 속에서 티끌만 한 맨드라미 씨를 찾아냈다/ 부빈 맨드라미 씨/ 밤새 부빈 맨드라미 씨/ 벌써 하얗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했다/ 내 눈 속에 빨간 꽃을 피우고 있다고 했다/ 어떤 꽃은 한번 피면 평생 지지 않는다고 했다//

치킨 조립공 / 유홍준
나는야 평생 조립공/ 통닭을 시켜 먹을 때마다 치킨 퍼즐을 맞춰본다네/ 이 부품들은 정품인지 아닌지,/ 날개를 세고 다리를 세고 조각조각 몸통을 세어본다네/ 누구보다 완벽하게 조립할 수 있어 나는/ 평생 조립공/ 볼트와/ 너트만 있으면/ 조각조각 튀긴 저 통닭도 조립할 수 있고/ 대가리도 없고 발목도 없는/ 저 닭도 구구구구/ 깃털도 없고 내장도 없는 저 닭도 퍼더더덕/ 거대한 전광판 위로 날아오르게 할 수 있어/ 나는야 평생 조립공/ 저 자동차도 내가 조립했고 저 스마트폰도 내가 조립했고/ 저 에어컨도 내가 조립했다네/ 심지어는 저 아이들까지도 내가/ 통닭보다 못한 내가, 닭다리보다 못한/ 내가, 치킨 조립공이//

식육 코너 앞에서 / 유홍준
XX백화점/ 저 식육 코너의 젊은 남자는/ 말이 없다 표정이 없다 돼지머리처럼 핏기 없이/ 하얗게 면도를 한 얼굴,/ 저 무표정은 온종일 칼자루를 움켜쥔 채/ 원하는 만큼 제 살점을 끊어 담아준다/ 뱃속을 모조리 긁어낸 몸통에서/ 뭉텅, 뭉텅, 살덩어리를 떼어내고 또 떼어낸다/ 머리도 발도 없는 몸뚱어리에서 떨어져나오는/ 저 한 덩어리 고기,/ 갈고리에 꿰인 저 돼지는/ 네 개의 발을 중심으로 잘리어져 걸렸고/ 그대는 4부로 나누어 시집을 엮었다/ 아아 저 네 토막 밖/ 머릿고기처럼/ 납작하고 납작하게 눌려서라도/ 말하고 싶다 핏물이 스며나오는 책갈피/ 넘길 때마다 핏물이 묻어나오는 시집을 묶어/ 팔고 싶다 서점이 아닌 저 식육 코너에서 무표정하게/ 핏기 없이//

모래밥 먹는 사람 / 유홍준
저기 저 공사장 모랫더미에/ 삽 한 자루가/ 푹,// 꽂혀 있다 제삿밥 위에 꽂아 놓은 숟가락처럼 푹,//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느라 지친/ 귀신처럼 늙은 인부가 그 앞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무도 저 저승밥 앞에 절할 사람 없고/ 아무도 저 시멘트라는 독한 양념 비벼 대신 먹어줄 사람 없다// 모래밥도 먹어야 할 사람이 먹는다/ 모래밥도 먹어본 사람만이 먹는다// 늙은 인부 홀로 저 모래밥 다 비벼 먹고 저승길 간다//

흰 종이라는 유령 / 유홍준
흰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눈이 쉬/ 나빠진다, 시력이 쉬 간다// 흰것- 유령처럼 흰 것을 너무 많이 보고 살았기 때문// 그러므로 무색무미무취/ 제지공들의/ 삶은/ 무늬가 없다, 그림자가 없다, 화면도 자막도 없는 스크린이다// 묻는다, 누가 홀로 극장도 아닌 공장에 앉아/ 날이면 날마다/ 여덟 시간씩/ 화면도 자막도 소리도 없는 무無의 스크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겠는가// 그대가 만약/ 온통 흰 빛 뿐인 세상을 흰 열차를 타고 지나가게 된다면?/ 무료하고 지겨워라, 이내 눈을 감고 잠이나 청하겠지// 그러나 밥은 무서운 것이기에,/ 오늘도 제지공들은 지친 몸을 일으켜 출근을 한다, 종이를 만든다/ 이렇게 점점 더/ 근시가 되어 가는데도// 두 눈에 백태 낀 제지공들은 흰 것만 바라보고 산다, 흰 유령만 바라보고 산다//

우울의 왕 / 유홍준
저수지는 우울해 저수지는 우울하고 답답해서 물안개를 피워 올리고 수양버들을 드리워// 궁뎅이가 착 달라붙는/ 추리닝을 입고/ 엉덩이와 팔꿈치를 있는 대로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저수지를 도는 사람은 흥, 다이어트 좋아하시네! 알고 보니 저이는 약을 먹는 환자/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몇 개가 산다네// 돌지 마라 돌지 마 돌지 마라 돌지 마//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은 왼종일/ 담뱃불을 붙이고 온몸에 비늘 달린 것을 기다린다네// 저수지는 우울해서 둘레를 만들고/ 저수지는 우울해서 깊이를 만들었네// 저수지는 둑에 홀로 앉아/ 수면을 바라보는 저 노인은 이마에 물결무늬 주름을 드리운 우울의 왕이라네//

보따리 부인의 사랑 / 유홍준
너희에게 '보봐리' 부인이 있다면 우리에겐 보따리 부인이 있다 이것들아// 보따리 가득 곡물들을 이고 나가 생필품으로 바꿔오던 그 옛날 여자들의 굳센 모가지를 아느냐// 바리바리 자식에게 줄 참깨며 검정콩이며 이것저것들을 보따리에 싸서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촌로들의 굳센 손마디를 아느냐// 그이들의 서러운 살냄새를 아느냐 이것들아// 너희에게 핸드백이 있다면 우리에겐 보따리가 있다// 질끈, 동여매야 완성되는// 이 나라 보따리 부인들의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의 힘!//

중국집 오토바이의 행동반경에 관하여 / 유홍준
오늘은 장사 잘되기로 소문난 우리 동네/ 중국집 오토바이의/ 행동반경에 대하여 생각한다// 배달횟수가 아니라 행동반경에 대하여!// 누가 아이를 키워/ 중국집 오토바이를 타게 하고 싶으랴// 누가 아이를 키워 제 동네만 뺑뺑 돌게 하고 싶으랴// (하루에도 수백 번, 제 동네를 도는 아이는/ 결국/ 정신이 돌 수밖에 없다는 속설……)// 그러나 오토바이는 멋있고/ 자장면은 맛있고/ 저 중국집 오토바이가 없다면 안돼/ 나는 저 중국집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마다 꽁무니를 바라봐// 행동반경이 좁다는 것은 뱅뱅뱅뱅뱅 돌아야한다는 말/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야한다는 말// 책 몰라 여행 몰라 취미 몰라/ 그런 건 다 몰라/ 오늘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우리 동네 오토바이//

다족류 이야기 / 유홍준
너는 아예/ 신발이 없다// 발이 많으면 어느 신발에 신을 신어야할지 헷갈리기 때문// 신발이란/ 고작/ 두 발 짐승이나 신는 것이기 때문// 거추장스럽다고/ 사는 것도/ 신발도 모두 다 거추장스럽다고// 지네야 그리마야 다족류들아 이렇게 발 많은 네기// 지옥이든 천당이든 어기여차 어기여차 …… 가지 못할 곳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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