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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춘몽 / 이형수

부흐고비 2021. 12. 3. 09:01

빈 마당에 외로운 백구는 아래턱을 괴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절하게 그리워한 사람은 늘 곁을 지켰던 신성일, 본명은 강신영이다. 노년 10년을 같이 보낸 영천시 괴연동 성일 가에는 가을이 깊었다. 그는 대구 반촌인 인교동 청기와 외갓집에서 태어났지만, 영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외할머니댁의 한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그도 한옥을 짓고 살았다.

 대목수인 삼척 한국 전통 가옥학교 이진섭 교수가 기역자형으로 만든 작품이다. 오대산 월정사 부근의 직경 35센티 금강송을 36개 세우고 지붕은 청기와 팔작지붕을 얹었다. 처마 선은 날렵하고 힘이 넘쳐 보였다. 집은 사는 사람의 기운을 닮은 듯 멋이 넘치고 강건해 보였다. 

누마루에 누웠다. 옛날 산채가 많이 나고 약재를 채취했다는 채약산을 바라본다. 동으로 애향산과 남동쪽으로는 금오산이 걸쳐 있다. 그도 한때 이곳에 누워 저 에워싼 산들을 바라보았으리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가을볕, 가을바람과 함께 시간도 멈춘 듯, 세상의 번잡함을 다 잊은 듯 고요하다.

 누마루 가운데에는 지인이 쓴 듯한 반야심경이 걸렸다. 반야심경은 공 사상이며 공사상인 중도의 입장에서 아니 불(不)과 없을 무(無)자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온갖 망상과 분별이 끊겨 양극단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완성을 설한 경이다. 크고 넓은 반야계 여러 경전의 핵심을 뽑아 응축한 경으로 온갖 분별이 소멸된 상태에서 설한‘중도사상의 찬가'이다.

 성일가 마당에 자신이 묻힐 묘터를 정하고 삶을 정리하려던 강신영의 마음은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경계를 넘어 생즉시사(生卽是死) 사즉시생의 경계를 때로는 애즉시오(愛卽是惡) 오죽시애를 넘나들며 고난한 삶과 적멸의 죽음을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초월했을 것 같았다.

 누마루 앞마당이 경사가 심해 석축을 쌓았다. 석축 가운데  붙여진 ‘춘몽' 영화 포스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춘몽의 주인공으로 연기한 배우 강신영은 한국 영화 500여 편에 출연하는 기록을 남겼다. 가장 인기 있는 남자 배우였지만 영덕중학교 시절 익힌 영덕 사투리가 심해 영화평론가들에게서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다. 1930년대 독일에 유행했던 표현주의 기법이 강했던 ‘춘몽'은 유현목 감독의 70분짜리 흑백영화였다. 최초로 '외설죄'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었지만 단순히 토속적인 애로물이 아니라 꿈이라는 가정하에 우리들의 의식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그 무의식의 과정을 탐구하여 의식을 추적하는 영화였다고 말한다. 

1960년대 문화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 영화, 표현주의 경향의 기법으로 인간의 원형과 심층 심리의 표현을 실험적인 자세로 다루었던 영화. 일정한 스토리 구조는 없이 의식의 흐름에 집중했던 영화다.

유 감독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2여년을 지난 후 타계했다. 지난 50년간 담배를 많이 흡연하여 쓰러진 것 같다며 생전의 그가 말했다. 담배를 많이 피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덤덤하게 말했다. 그 당시 필름값이 너무 비싸서 그걸 아끼느라 엔지(NG)에도 오케이 사인을 내곤 했는데 그게 가슴 아파서 돌아서면 담배를 피우곤 했다고. 1960년대 한국 영화사의 어려움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면서도 영화사의 가운데 기둥으로 서 있었던 감독.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도 나는 바람둥이가 아니고 로맨티스트 라고 이야기했던 배우 강신성일. 그렇게 감독도 배우도 떠나고 영화 포스트지만 바람결에 나부낀다. 주인이 생을 마감하는 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던 풍산개 백구가 또 먼 산을 바라본다.

누마루 쪽에서 나타난 노랑나비 한 마리가 ‘춘몽’의 포스터를 지나 ‘배우의 신화 신성일 여기 잠들다'라고 씌어진 묘석으로 가을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노랑 날갯짓의 흔적이 백구가 바라보는 먼 산 쪽으로 가물가물해진다. 

아! 인생이란 덧없는 가을날의 춘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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