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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성미 시인

부흐고비 2021. 12. 9. 09:00

이성미 시인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문학과사회》에 〈나는 쓴다〉 외 3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단에 나왔다. 김정환은 이성미의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의 해설 〈변형하는 정신과 상상하는 육체의 변증법〉에서 이성미를 최승자의 뒤를 잇는 시인의 대열에 포함시켰다. 시로여는세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칠 일이 지나고 오늘》 《다른 시간, 다른 배열》 등이 있다.

 




칠 일이 지나고 오늘 / 이성미
한 사람이 가자 이어달리기하듯 다른 사람이 왔다. 그는 가면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나는 파란 바통이 되어 …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칠 일이 지나고…// 오늘은 일곱 개의 태양이 뜬 날.// 오늘은 일곱 나라의 언어로 중얼거린다./ 나는 오늘의 입을 보고 있다./ 오늘은 주름치마를 입고/ 사장 좌판을 펼치듯 하루를 펼친다.// 오늘은 뜨거운 시간, 서늘한 시간, 밝은 시간…/ 각각 다른 길이와 온도를 가진다.// 나는 시계 소리를 듣고 있다./ 밤이 가까워질수록 오늘은 점점 더 느리게 간다.// 오늘은 뒤섞이고, 오늘은 돌기가 있고,/ 마주 보다가 몸이 멍청해진다.// 오늘 새벽의 공기는/ 하얀 스카프처럼 휘감으며 속삭였지./ 나를 사랑해도 좋아.//

납작한 아침 / 이성미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종이에서 오려진 것 같았어./ 하늘에 납작한 동그라미./ 태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빛의 기운. 빛나려는 의지./ 만질 수 없고 보이지 않고 느껴지는 것이라면/ 내 마음속에도 태양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흑점이./ 뒤에서 등을 떠미는 검은 그림자./ 앞에서 달려드는 태양의 폭발./ 납작한 종이 인형이 되어/ 내부가 사라지려고 한다면/ 바로 그때부터 나는 나로 존재하려는 의지./ 납작한 토스트에/ 납작한 칼로 잼을 발라 씹어 먹는/ 내 눈과 내 입과 내 손을 사용하여/ 기지개를 켜면서 보니/ 신문 종이에는 풍요로운 나무들의 죽음//

일요일 아침의 창문 / 이성미
일요일 아침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요일은 돌아오기 좋은 날. 일요일은 일주일마다 돌아오지./ 집 안에서 보는 밖은 뙤약볕. 그늘 없이 반짝이고 안은 그늘. 건축물은 뜨거워지지 않았지만 일요일이니까 그늘에 머리를 넣고. 낮잠을 자고 일요일은 밖에서 흘러간다. 뙤약볕 아래서. 일요일은 창문 크기만큼 네모나고./ 창밖을 보는 나는 헐렁하게 웃고. 일요일의 안쪽은 헐렁하니까. 하얀 빈칸이 가득한 새 원고지를 받은 아침처럼. 창밖이 눈부셔서 눈을 감고. 휘파람새가 내 귀가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휘파람을 불고./ 일요일은 일요일에 돌아오고 나는 일요일 아침에 집으로 돌아온다. 낮잠을 자는 동안/ 내가 낳지 않은 아이들이 일요일의 네모난 창문을 넘어 들어와서 나의 낮잠 속에. 손가락을 넣고 간지럼을 태우면 나는 창문을 넘어 슬리퍼를 신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아이들을 부르며 일요일로 돌아오고./ 아이들은 영원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일요일의 창밖이 고요해지고. 아이스크림이 다 녹고 나면. 맞아, 그랬지. 떠올리면서 일요일은 떠나고/ 뱀이 빠져나온 긴 초록 병의 입구처럼. 새로운 검은 병의 출구처럼./ 일요일은 다시 일요일 아침으로 돌아오지.//

크리스마스 아침 / 이성미
1/ 산타클로스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나쁜 아이에게도 고루 운명을 나눠주느라/ 어제 잠을 설친 것// 밤새 등잔을 켜고/ 이 집에서 기다렸다/ 선물 보따리에 혹시 남았을 운명을/ 문밖에는 새 한 마리 죽어 떨어져 있다// 2/ 새 꼬리를 주워 들고 부엌으로 와/ 늦은 아침을 준비했다// 그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부드러운 새의 가슴살을 뜯어 먹는다/ 길게 자란 흰 수염을/ 빨간 포도주로 적시며// 문득 구역질이 났다/ 내 손은 어디서 온지 모르는/ 새의 발가락을 닮았다//

뺄셈의 춤 / 이성미
뺄셈을 계속 하니 나만 남았어요./ 혼자 먹는 식탁./ 연필심처럼 뾰족해지는 저녁.// 옛날 고독한 왕이 식탁 위로 올라가 춤을 추었죠./구두를 따가닥거리면/ 많은 발이 있는 것 같았죠./ 식탁이 부서졌지만 계속해서 춤을. 단일한 밤이여,/ 단일한 공기여.// 밤에는 검푸른 고등어와 까치만 돌아다녀요./ 사과나무에 빨간 전구를 가득 켰어요./ 버찌를 먹고 까매진 이빨은 빼버릴래요.// 뺄셈. 마이너스 부호만 남을 때까지./ 뺄셈. 리듬이 태어날 때까지.// 달은 다시 나타나 나를 내려다 보았죠./ 하얀 밤도 풋사과도 없이/ 삼만 개의 밤을 건너가려고?// 뺄셈을 그만두면 잇몸이 근지러웠죠./ 고집스러운 뺄셈. 나를 뺄 때까지.// 고독해진 나는 자전거에 올라 바퀴를 돌렸어요. 미세한 오르막과 미세한 내리막이 다리로 전해질 때,/ 눈을 감고 달려./ 사람들의 말소리가 햇빛 속에서/ 부서져 귀를 스쳐갔어요./ 까만 개미들....../ 까만 이빨들......// 뺄셈의 춤을 느끼는 까만 밤에는 책을 읽었어요./ 까만 글자들이 방 안을 떠다니며 내게 물었죠./ 당신 어때요?// 나는 아직 흑백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밤을 끄덕끄덕 건너가보려고요.//

이상한 로맨스 1 / 이성미
일 년에 한 번 이들은 상봉한다// 광화문에서 여자의 머리칼이 나부끼면/ 산사의 풍경이 댕그랑거린다// 남자가 계곡에 서 있을 때/ 여자 머리맡에서 물소리가 난다// 잠이 축축해,/ 여자는 형광등을 켜고/ 젖은 시집을 다림질한다//

뒷모습 / 이성미
교문 앞에서 기다려도 너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를 짧게 깎고 기차를 타고 떠났기 때문에/ 다른 여자에게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뒷모습만 친숙했다/ 어느 날 네가 왔지만/ 너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잠깐 들리는 음악 / 이성미
방랑자가 꽃씨를 떨어뜨린 날 너는 태어났다고 해./ 그는 노래를 찾아 바다로 갔다고 해.// 검은 곳에서 더 검은 곳으로/ 별이 노란 선분을 그으며 지나갈 때// 네가 별이 떨어진 자리로 달려갔을 때/ 칠흑 같은 머리칼을 찰랑거렸을 때// 너의 음악이 되는 몸이 궁금해졌어./ 별똥이 별의 마지막 휘파람./ 쓸모 있는 별을 줍지 못했지만.// 우리는 다정하게 무관심했고/ 그래서 더 자랐어.// 그도 마지막에 휘파람을 분 것일까./ 네가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내부가 도토리묵처럼 되었을 때// 너는 몸통을 두드리면서 말했지./ 내 몸에서도 소리가 났으면 좋겠어.// 그는 바다로 갔지만/ 바다로 갔다가 돌아왔지만. 잠깐 머물렀다가/ 노란 선분을 그으며 별똥처럼......// 사라져가는 것들로/ 너는 음악을 만들고 있어.// 아주 잠깐 들리는 음악.// 우리가 들을 수 없을지도 몰라.//

물방울들의 귀가 / 이성미
비가 그치고 공기가 가벼워져. 내려오던 물들이 방향을 바꿔 하늘로 향하네.// 땅은 무덤처럼 물을 머금고 있다가, 조용히 두껑을 열어./ 산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라. 보이지 않는 굴뚝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사제라도 살고 있는 것처럼./ 개울에서 안개가, 오븐 속 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어.// 물방울들이 몸을 던져. 지상에서 공중으로. 지구 중심의 반대 방향으로. 우주를 향해.// 시작되었어. 떠오르는 물방울들의 파티. 붕붕거리는 물방울들의 허밍.// 바람은 물방울들을 실어 나르며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려./ 바람이 내 피부에 닿으면 물방울들의 둥그란 노래가 들려.// 비가 그치고 공기가 가벼워져. 물방울들은 속속 공기 속으로 귀가하네.// 나는 이름과 사람들의 발과 발의 티눈에 대해 적다가, 고개를 들고 창문을 연다. 영혼도 뒤도 없이,/ 물방울 같은 한 문장을 공중에 쓴다.//

추모합니다 / 이성미
나는 읽는다 너는 가고// 네가 남긴 책갈피에서/ 머리카락이/ 아침 국그릇에 떨어졌다// 호수처럼 국물이/ 출렁, 하더니// 곧 잠잠해졌다//

내일의 현관 / 이성미
곧 다시 올게. 네가 한 문장을 던지고 현관문을 닫았을 때 문 저편은/ 어제로 달려갔습니다.// 비눗방울을 타고 나는 둥둥. 내일로 둥둥./ 내일의 현관에 도착합니다.// 벤자민 화분이 있고/ 밝은 잎이 피어나고, 너의 신발이 없는 곳.// 나는 비누거품을 풍기며 바닥을 닦고 있어요./ 새하얘진 맨발로 나는/ 네 입술을 떠난 너의 말은/ 너를 기다립니다./ 너를 기다립니다.// 말이 축축해질 때까지./ 하얀 말이 되어가도록./ 내일의 밤에 서서 기다립니다./ 너의 문장을 배 속에 넣은/ 검은 우체통이 되어.//

그런 향기 / 이성미
너의 향기 맞지. 낮잠을 자려고 했어./ 빳빳하게 풀 먹인 옥양목이 부드러워져. 네가 왔어./ 나는 마음을 놓고 잠이 들어.// 정원에서 홍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강아지처럼 착해져./ 너는 따뜻한 눈송이처럼/ 차가운 말 위에 내려 앉아.// 네가 왔어. 나는 초록 물감이 되어/ 물속으로 풀어져./ 수영장 물 밖에 사람들의 매끈한 갈색 종아리가/ 일렁거려./ 사람들 머리에 흰 눈이/ 고깔모자처럼 얹혀 있어.// 물속에서도 너의 향기가 났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엄마가 오게 된다면.//

와요 / 이성미
월요일이 돌아오듯. 도돌이표가 붙은 노래를 부르며 와요.// 담장의 붉은 벽돌이 와르르 넘어지고, 하늘에 진눈깨비가 날리면, 한 시간 동안 공들여 발톱깎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요. 누가 보면 준비를 하는 줄 알겠지만요.// 증발하는 물처럼 몸이 줄어드는 시간. 어깨가 일어서고 어깨뼈를 따라 피가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 시간.// 사냥개가 발끝을 들고 고양이처럼 걸어와요. 발보다 코가 앞서 당도하는소리. 트럼펫을 불며 행진해 오는 날에도 이상하게 소리는 똑같은 크기로 들렸어요.// 처음 동물을 만나는 시간. 지는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 노란 손바닥을 창문에서 떼고. 집으로 숨어들어 집이 되는 시간. 벽으로 들어가 공기가 되는 시간. 눈은 커지고 문이 활짝!//

반복의 이유 / 이성미
나는 너를 반복한다. 너를 알 수 없을 때/ 너의 이름을./ 나는 언덕을 반복한다.// 반복하면 너는 민요처럼 단순해진다./ 반복하면 마음이 놓인다./ 만만해 보이고/ 알 것 같고/ 반복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법칙이 생길 것 같다. 게임처럼/ 너에게도 언덕에게도./ 반복하다 보면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복하면 리듬이 생긴다. 리듬은 기억하기 좋고/ 연약한 선을 고정시키다./ 고개와 어깨에 잘 붙고 발바닥과 손바닥과 친하고/ 리듬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 리듬은 주술같고/ 리듬이 된 것은/ 일이 어렵기 때문인데/ 리듬으로 두려움이 줄어들고/ 낯섦도 줄어든다./ 리듬은 폭력과 가깝고/ 노래와도 가까워서/ 리듬은 아름다운 노래가 되기도 한다.// 노래를 부르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 마치 형태가 있다는 듯이/ 손으로 부드럽게 쥐어서/ 너에게 줄 수 있을 것 같다./ 너에게서 건네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꽃잎과 바위와 나비와 어깨 / 이성미
어깨에 떨어지는 벚꽃잎이/ 바위가 되어 얹히는 날이다/ 그 바위를/ 나비로 만들어 날려보내려 애쓴다// 꽃잎 두 장을/ 하얀 나비로/ 착각하기가 그렇게 어려워/ 나는 자꾸 어깨가 멍이 든다//

지푸라기 / 이성미
오래 기다렸어요 너덜너덜해지는 동안/ 두 손을 앞에 모으고요// 돌무더기에 또 돌을 올리고 나서/ 나는 꽉 찬 만두 속 같았는데요// 지나갔어요/ 빠져나간 지푸라기들/ 수북이 쌓였습니다// 쌀밥을 지어 먹었구요/ 열은 내렸습니다// 까치가 나뭇가지 입에 물고/ 둥지로 날아올랐는데요/ 왜 이제야 보았을까요// 나무를 지나 나무까지/ 숫자를 세지 않는 연습을 합니다/ 참 조용한 해질녘입니다//

비 / 이성미
담장과 담장 사이/ 넝쿨과 넝쿨 사이/ 그의 어깨와 그녀의 어깨 사이// 뭐라 부를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비// 고개를 뒤로 꺾고 보는 날/ 첨탑 옆에는 무엇이 떠다니는지/ 전깃줄은 어디로 달려가는지// 발가락이 젖어 알게 되는 날/ 아스팔트 길 어디가 꺼져 있는지/ 진흙 땅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동안 잠자코 있었지/ 창문 밑엔 버려진 자동차/ 양철 지붕 위엔 미루나무// 안 가본 데로/ 비의 손가락을 따라다니는 날// 물웅덩이만 잠시 기억할 뿐/ 사라지는 세계//

집의 형식 / 이성미
코끼리의 발이 간다. 예보를 넘어가는 폭설처럼. 전쟁의 여신처럼. 코끼리의 발은 언제나 가고 있다./ 코끼리의 발이 집을 지나가면서 불평한다. 더 무자비해지고 싶어. 비켜줄래?// 거미의 입이 주술을 왼다. 거미는 먼저 꿈을 꾸고 입을 움직인다./ 너의 집에서 살고 싶어. 너의 왕처럼. 너의 벽지처럼.// 폭풍이 모래 언덕을 따끈따끈하게 옮겨 놓을 때, 나의 집이 나를 두고 무화과 낯선 동산으로 날아가려할 때.// 나는 모래의 집을 지킨다. 매일 거미줄을 걷어내고/ 코끼리가 부서뜨린 계단을 고친다. 가끔 차표를 사고/ 아침에 버리지만./ 상냥한 노래는 부르지 않을래./ 폭풍에게 정면을 내주지 않을래.// 코끼리를 막을 힘이 나에겐 없지. 코끼리의 발이 코끼리의 것이 아니 것처럼./ 거미는 나를 쫓아낼 수 없지. 거미의 말을 거미가 모르는 것처럼.// 거미는 줄을 치면서 거미의 얼굴을 지나간다. 나는 모래의 집을 지키면서 나의 얼굴을 지나간다./ 코끼리의 발은 간다. 코끼리의 발을 막을 힘이 누구에게도 없다.//

형식 / 이성미
형식을 내놔.//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거북이는 어려서부터 늙어 있는 것 같구나. 오래 생각하고 느리게 움직였다.// 이게 다야. 내놓을 형식이 없어서 미안. 나는 형식도 못 만들고 죽을 것 같다./ 죽을 수는 없을 거야. 죽을 때도 형식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죽은 척했다.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와서 울다 갔다. 그건 형식이 아니었지만./ 내 죽음이 가짜라서 숨어 있었다. 기다려요, 진짜 슬프게 해줄테니.// 진짜로 죽기 위해 형식을 생각한다. 손에 희고 가벼운 봉투를 들고. 생각하다 말다, 다시 생각하기로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더 벌어졌다. 여기서 체조를 해야겠구나. 팔을 뻗고 다리를 움츠리면서 다음에 올 문장을 기다렸다. 넓어진 그 곳으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흔들렸다. 바람은 오로지 형식이구나. 붉은 잎이 떨어졌다. 커피콩이 향기가 되었다.// 바람은 커튼. 바람은 붉은 잎. 바람은 커피……// 옆에서 걷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너 안 죽었어?/ 다행이다. 내가 죽어야 하거든. 형식을 돌려줘. 주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나는 손에 희고 가벼운 봉투를 들고 다녔지. 어느 날 그것은 빈 봉투 같았고 그래서 버렸지.// 미안해야 하지만 화가 났다. 절망해야 하지만 화가 났다. 우리에겐 형식이 없으니까.// 문장과 문장 사이가 더 멀어진다. 여기서 산책을 해야겠구나. 마음은 뭉개지고 마음은 밟히고. 단일해진다. 형식이 없으니까.// 나는 봉투가 없는 사람이 되었어. 다음 문장을 써줄 사람을 기다렸다. 내가 쓸 수 없는 것은 아무도 써주지 않았다. 다음 문장을 써야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구나.// 아침에 눈을 뜨면서 형식을 써버렸다. 형식은 첫 번째고 마지막이니까. 아침을 겨우 시작하고 나면 여긴 아무것도 없구나. 오늘도 죽을 수 없겠다.//

단일한 겨울 / 이성미
내일은 서리가 내렸지 서리 내릴 때가 좋았네 낮은 높고 이른 아침은 희게 깔렸고/ 계절은 섞이는 내일/ 내일이 좋았지// 단일한 겨울이 끝났다/ 단일한 겨울이 부서져서 하얀 알갱이/ 흰가루가 들판에 내렸다/ 햇빛이 흰 가루를 정성껏 덥힌다// 하얀 입김을 뿜어내자마자/ 눈앞에서 얼어버리는 추위가 있다고 한다// 내가 뱉은 말이 공기 속에서 하얀 글자로 얼어붙어버렸다/ 희고 차가운 글자를 읽었고/ 만졌고/ 그래야겠네// 북쪽보다 더 먼/ 극지보다 더 먼/ 검고 파란 공기가 딱딱하게/ 얼굴에 부딪히는 곳을/ 마지막 망명지로 적어둔다//

파랑 / 이성미
옷장을 열면/ 파란 바다, 파란 하늘, 인디고블루, 프러시안블루, 해지기 전의 파랑, 해 진 후의 파랑, 해 뜨기 전의 파랑, 검은 파랑, 두꺼운 파랑, 연한 파랑, 수줍은 파랑, 아 파랑, 오 파랑, 온갖 파랑이// 파란 물결이 넘실거리며 방에 파란빛을 쏟아낸다. 파랑 뒤에는 파랑의 그림자. 검은 파랑 위에는 파란 밤들.// 나는 파랑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흰색과 녹색을 좋아한다.// 파랑이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어제 알았다. 옷장에는 파랑 옷이 가득하고, 저 파랑들. 오 파랑들.// 파랑 옷을 버리려면 파랑이 아닌 옷이 필요하다. 나는 파랑 옷을 증거처럼 입고 옷가게로 간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파랑. 파랑은 예쁘다. 나는 터키블루 옷을 산다.// 나는 파랑이 어울리지 않는다. 파랑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옷장에는 파랑 옷이 가득하다.//

스토리텔러 / 이성미
너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 비극적 감정에 젖는다./ 욕조에 몸을 담그듯.// 네가 이야기 속에 나를 구겨 넣는다./ 얼굴과 목소리가 희미해져서 나는/ 네가 준 이름표를 달고, 답이 결정된 질문에 답한다./ 네가 정해준 배역을 연기한다.// 이 이야기 밖에는/ 내가 두고 온/ 모래알같이 작은 얼굴들.// 그 얼굴들을 지키러/ 너의 이야기에서 나가야겠다.// 나의 벽돌, 나의 지붕,/ 나의 과자, 나의 머리칼이 없어도.// 내 손으로 만드는 이야기. 나의 형식./ 나의 단어. 나의 노래. 나의 숨결.// 너의 이야기 속을 너는/ 나의 이야기 속을 나는 걸어간다./ 가끔 마주친다, 새벽 안개 낀 건널목./ 낯선 사람을 잠시 보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건널목을 건넌다, 반대 방향으로.//

휴가지 사람들 / 이성미
사람들이 달려온다, 탬버린을 흔들며./ 그들은 잘 웃고, 아이들에게 너그럽다. 그건 여름에 대한 예의.// 사람들은 느릿느릿 걷는다, 우아한 우주인처럼./ 머리 대신 풍선을 달고/ 그림자의 팔다리를 길게 늘인다./ 가게 주인은 까맣게 탄 얼굴과 반짝이는 눈.// 내일 그는 퇴직을 앞둔 풀처럼 시들고, 일 년 내내 얼굴을 비워둔다./ 도시 사람들은 장전해둔 권총이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밤의 발톱이 두꺼워진다./ 밤은 집을 서둘러 접어버린다.// 사람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문을 연다./ 방문을 열고 자동차 문을 열고/ 사무실과 가게 문을 연다./ 저녁엔 산책을 하고/ 너무 많은 발가락을 똑, 똑, 부러뜨리다가 달력을 보며 잠든다.//

셜록 홈즈 중고 가게 / 이성미
셜록 홈즈는 의기소침하게 노년을 보냈지./ 기술을 살려 예술을 해볼까. 어느 날 여생에 대해 생각하다가./ 셜록 홈즈 중고 가게를 열었어.// 처음 한 작업은/ 탈모로 고생하는 개에게 고양이의 털을 이식하기./ 홈즈는 고객에게 단서를 달았대./ 개는 더듬더듬 걷게 될 것입니다.// 내일 할 일은 햇볕을 쬔 모래알을 밤하늘에 뿌려놓기./ 손끝으로 별을 보게 하고 싶어요. 고객은 딸을 위해서라고 울먹거렸대./ 내일 밤은 까끌까끌 깊어갈 것입니다.// 명함 뒷면에는 이렇게 적었지./ 똑같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홈즈는 고양이처럼 골목을 돌아다니며 재료를 찾아다니지./ 말레비치 가족이 버린 정사각형./ 몬드리안 가족이 버린 직사각형./ 각이 안 맞아 버린 것에서 더 나은 도형이 나오는 법.// 늦은 밤에 가난한 예술가 루팡이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지. 작품에 서명을 할까, 말까.// 홈즈는 중얼거렸어./ 공동 저수지에서 콩나물은 자라고./ 지하수에 파이프를 대고 각자 수도꼭지를 틀지.// 홈즈는 마을회관에 모인 노인들에게 물어본대./ 루팡이 좋아, 홈즈가 좋아?//

망명지 / 이성미
부엌에서 베란다로 나갔다 북쪽이다 흙이 가만히 있고 마른다 흙이 흐르고 북쪽이다/ 서늘하고 시원하고 춥고/ 중심보다// 우리는 원형으로 모여 있다 안을 보고 눈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숙였다 등이 추웠다/ 등을 돌려 바깥을 보고 눈을 감았다 등이 따뜻해졌다// 펭귄들이 둘러서서 추위를 넘어간다// 우리는 뒤뚱뒤뚱 걷다가 넘어졌다// 넘어지는 건/ 어제도 넘어졌던 것/ 그때도 넘어졌던 것// 넘어지다 보면 나는 배가 이렇게 차갑다// 넘어지려고 일어나는 건가/ 일어나려고 넘어지는 건가// 등을 돌리고 달리고 있었다// 엄마 캥거루/ 캥캥 주머니에 넣어둔다고/ 제가 안 자랄까요// 뛰어내렸습니다//

걷는다 빛났다 / 이성미
걸었습니다. 무엇이? 라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왼발을 보며 오른발을, 오른발을 보며 왼발을 번갈아서 보고 있습니다. 누가? 라고 묻지 않고// 걷는 일/ 걷는다는 생각 없이/ 걷는 일// 빛났다/ 가끔/ 빛나는 걸 까먹지 않고 빛나는 것이 있구나/ 그럴 때/ 웃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열었다// 손가락/ 흰 콩/ 부등식// 딱따구리/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리면 좋겠어//

손가락과 흰 콩 / 이성미
시를 써보고 있다 약속을 했고/ 태양이 시간으로 펄쩍 건너갔으므로/ 크고 긴 철제 아치 다리 밑에/ 그늘진 벌레들처럼/ 검은 글자들을 적고 단어들을 적고 모으고/ 있다// 너무 많은 단어들을 잃어버렸다/ 아름답구나/ 라는 말은 더는 못 쓸 것 같다/ 이런 말/ 이상하구나/ 이런 말// 몸이 출렁이는 물주머니가 된 것 같다/ 달릴 때는 모르지 (달린다)/ 글을 쓰려고 하면/ 물 컵이 넘친 것처럼 물이 쏟아진다// 쏟아지지 않으려면 주문처럼 뜻 없이/ 손가락과 흰 콩/ 젓가락과 손톱// 어제의 시가 죽고/ 그 자리에 오늘의 시가 쓰여지고/ 다시 죽고/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 죽은 것 같다// 움직이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고// 비유를 보면 머릿속이 투명해졌다 몸 안에 흰 피가 퍼졌다/ 빗방울이 맺힌 흰 거미줄을 보는/ 그런 날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 죽었으니/ 해 지기 전의 저녁을 기다린다/ 나는 그곳으로 갈 거야//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주머니에 구멍이 나서/ 열쇠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약속 / 이성미
사과나무가 있다 사과는 열리지 않았지만 사과나무의 약속처럼 있다/ 사과꽃이 보였다 사과꽃 향기가 났다. 사과꽃이 아직 피지 않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사과꽃의 색, 사과꽃의 향기, 사과의 형태/ 사과나무가 꽃이 없이 사과도 없이 죽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는 사과나무 옆에/ 붉은 벽돌집이 있지 사과를 기다리는 동안/ 사과꽃이 손을 흔들며 떨어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내가 죽을 수도 있어/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느 날은 물도 공기도 수평선도 흰색이라서/ 여기저기 수평선을 그어보았다//

견딜 수 없는, 견디고 있는 / 이성미
바위를 떠메고 있는 흙덩이와 같이/ 찬 바닥을 굴러다니는 낙엽과 같이/ 태평양을 건너는 황사의 먼 여행길과 같이/ 폭풍에 지붕이 날아간 집과 같이/ 가랑비에 찢어진 꽃잎과 같이/ 나는 너무 멀리 뻗어 있는 팔과 다리//

붉은 / 이성미
붉은 글자 위로/ 눈 내립니다// 소리내어/ 읽어보던/ 목소리도/ 눈 맞습니다// 서성대던 마음이/ 입 안에 갇혔습니다//

눈밭 / 이성미
그리고 모든 것이/ 녹았다// 나의 흰 가슴에/ 구두 자국// 뒤뜰에는/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좁은 길이/ 새로 났다/ 밤새 자란 흰머리// 눈이 녹아 흐르는 계곡/ 물소리를 들으러 가는 아침//

봄이 오면 / 이성미
보도블록 틈새로/ 새 이파리가// 너의 발바닥을 뚫고/ 머리 꼭대기 위로 자라났다//

 

네가 꿈꾸는 것은 / 이성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 바람은 달려가고 연인들은 헤어지고/ 빌딩은 자라난다/ 송아지는 태어나고/ 늙은 개는 숨을 거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찻잔에 물이 잔잔하고/ 네 앞에 시 한 편이 완성되어 있을 때//

선인장 / 이성미
땀구멍마다 바늘이 자라나/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았다// 사막으로 가/ 혼자 서 있었다//

이것도 로맨스 / 이성미
여자는 정성껏 권총을 닦는다/ 매일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건/ 코끝 은은한 피 냄새 때문// 어제처럼 다투었다/ 화가 난 남자가/ 여자의 어깨 너머 강과 산이 내다보이는/ 문을 거칠게 닫아버린다 바로 직전// 여자는 납작하게 몸을 접어/ 얇은 종잇장처럼//

일식 / 이성미
검은 숲 속을 달음질치며/ 노란 눈을 번득이던 너는/ 태양과 암흑의 자식// 동쪽에서 그가 왔다// 그는 네가 살던 숲을 베어버렸다/ 너는 도망쳐 숲을 다시 세웠다/ 너는 북극으로 가 얼음집을 짓고 숨었다/ 그는 봄바람을 불어 녹여버렸다// 그가 너를 독수리처럼 낚아채/ 하얀 빛 속으로/ 집어던졌다//

 

금 / 이성미
금을 그어놓고 금 밖으로 나왔다/ 꽃밭은 안에 있었다/ 돌 고르는 남자 흰 젖을 흘리던 여자/ 물뿌리개와 삽을 내던지고/ 돌아오라 주문을 외웠다/ 늙은 무녀가 조그만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발가락을 찔렀다/ 나 대신 나비 한 마리/ 팔랑거리며 금 안으로 날아들어갔다// 금 밖에는 눈보라가 쳤다/ 나는 양말 코를 빨갛게 적시며/ 북극을 향해 걸어갔다/ 흰 수염이 나무에 널려 있고/ 순록의 눈이 맑은 곳// 금 위에 나비가 내려앉았다//

허무 / 이성미
이 냄새는 익숙하다// 수상 스키장/ 봄날 컴컴한 지하 술집/ 모텔 앞에서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아픈 발로 춤을 추는 곳/ 너무 나른해/ 쉴 수 없는 이곳//

기차를 놓친 사람들 / 이성미
조금 늦게 온 사람들/ 조금 일찍 와/ 화장실에 간 사람들/ 너무 일찍 와/ 기다리다 잠든 사람들/ 너무 늦게/ 너무 빨리/ 다른 기차에 탄 사람들//

보슬비 / 이성미
내려오는 중일까 올라가는 중일까// 땅에서 하늘까지/ 투명한 날실처럼/ 실뱀들이 꼿꼿이 서서// 올라가는 중일까 내려오는 중일까//

비밀 / 이성미
몰래 벌어지는 일들에서/ 설탕 묻은 장난감 냄새가 난다/ 태엽 인형의 벨소리/ 끊어질듯 이어지고/ 등 뒤에선/ 낮은 북소리// 모두가 잠자는 밤에/ 자라는 숲/ 저물녘 피는 진홍색 분꽃/ 어딘가 묻혀 있을/ 버섯의 냄새// 말이 내뱉어지는 순간/ 물투명 유리창에 금이 간다/ 마술이 끝나고/ 다락문이 열릴 때 펼쳐지는/ 먼지 앉은 내부//

단단한 뼈가 되어 잠들다 / 이성미
물고기의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뼈가 되었으면 강바닥으로 내려가면/ 페인트가 벗겨진 목선이 있어/ 갑판에 드러누웠으면/ 살진 물고기가 흐르고/ 그 위로 하늘이 어른거리면서/ 빗소리와 나무 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으면//

방문 / 이성미
평생을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 바람 속을 걸어 그의 방으로 갔다/ 문에 얌전히 자물쇠가 걸려 있다/ 쾅. 쾅. 쾅. 쾅. 쾅./ 잠에서 깬 그가 문을 열어준다/ 늙어버린 얼굴로/ 귀에 시든 꽃을 꽂고/ 눈동자엔 붉게 해가 지고 있었다/ 꽃에게 인사하고/ 돌아서 왔다//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 이성미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발부리를 톡톡 차면서/ 이미 알고 있는 답/ 자꾸 묻는다//

입을 다물다 / 이성미
어디서 올까 그녀의 향기/ 몸 안에 양귀비꽃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어쩌다 입을 여는데/ 꽃잎들이 풀풀 날아와/ 그녀와 나 사이를 떠다닌다// 이것도 아름답지만/ 오래도록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래서 나는 그 옆에 머물고//

빈둥거리다가 / 이성미
뜨거운 사막에/ 북극곰의 발톱을 떨어뜨리고// 새벽 지붕 위에 올라가/ 검은 장막을 펼친다// 숲 속 나뭇가지에/ 물고기 뼈가 걸려 있고// 우물에서 날마다/ 흰 깃털의 어린 새가 날아오른다// 바닷속에/ 산맥을 풍덩 빠뜨리고// 정오의 모래사장에 누워/ 오렌지색 달을 본다// 휘둥그레진/ 거대한 눈동자 밑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밤// 나의 실수요 꿈이고 힘이니/ 용서하시고/ 종종 말을 잘못 뱉게 하소서//

나는 쓴다 / 이성미
물고기의 싱싱한 시체를/ 잎사귀에서 물방울이 증발한 흔적을/ 증기를 내뿜는/ 화물기차의 검은 몸체를// 수챗구멍에 엉켜 잇는/ 늙은 남녀의 잿빛 머리카락을/ 쓰레기차에/ 내려앉은 환한 눈더미를/ 보도블록 틈/ 손가락만한 물웅덩이에/ 고인 달을// 선호하는 콤플렉스의 목록을 작성하며/ 병원 수세식 변기 속/ 물에서 꼬물거리는 벌레 같은// 서른다섯/ 죽기엔 너무 늦었고/ 내년 가을에도/ 황금빛 이파리들이 조용히 떨어질 것이므로//

송아지의 밤 / 이성미
1/ 밤의 부드러운 막 속으로/ 발을 집어넣고 걸었습니다. 송아지가 잠들어 있는 곳을 향해서.// 어깨가 기울어지고/ 종아리는 서툴게 나를 따라옵니다./ 모르는 곳으로부터 와서 모르는 곳으로 가는/ 유성처럼 자동차 불빛.// 발가락들이 축축한 버섯이 되어 땅으로 녹아듭니다./ 발바닥 밑에 파란 제비꽃이 앉아 있겠지요.// 더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몸을 버리고/ 머리가 애드벌룬처럼 떠오르려 하니까요./ 그런 자세로 구름을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머리와 관계없이 몸은 팽창할 수 있습니다./ 습기와 교류하고,/ 낯선 물기를 탐구하느라 내보내지 않는다면요.// 그 팽창 속에/ 밤은 있지만 송아지가 없어요./ 그래서 더 걸었습니다.// 두루마리 문서처럼 옆으로 옆으로 밤이 펼쳐집니다./ 검은 문서에 자동차 소리가 날카로운 흠집을 냅니다.// 드디어 길이 빛을 끕니다. 눈을 감으면 똑똑해집니다./ 깜깜할 때 나타나는 검은 풀 : 풀이라는 길이의 습기./ 어둑할 때 돌아다니는 희미한 돌 : 돌이라는 형태의 단단함.// 송아지의 부드러운 근육에 뺨을 댑니다./ 나는 잠이 듭니다.// 2/ 일어나 햇빛을 받으며, 백 만년 만에 손톱을 깎습니다./ 태양이 뜨겁게 사랑해주는 곳./ 햇살의 알갱이가 꼭 칭얼대는 오르골 소리 같은/ 서쪽의 방./ 이곳은 너의 심장 속입니다.//

고요한 밤 / 이성미
대기는/ 몸속을 느리게 흐르는/ 피와 온도가 똑같다/ 그 속에 잠겨 있는 밤// 별들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나뭇잎은/ 하나하나/ 공중에 핀으로 박혀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산들 불었다/ 나무는/ 각 세포의 방/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흩어져 있던/ 힘을 모두 끌어모아/ 이파리 하나를 일 센티쯤 흔들었다// 세상은/ 커다란 몸짓으로 뛰어가면서/ 고함을 친다//

식물의 밤 / 이성미
딱딱한 모자 속에 전구를 켜고/ 누가 밤보다 더 어두운 방으로 숨어드나.// 비는 폭포처럼 퍼붓고 아가씨는 머리칼이 젖어 빗속을 달려가는데./ 꽃잎은 으깨지고 줄기는 휘어지는데./ 누가 이렇게 어려운 식물을 키우고 있나.// 아침은 단호하게 시작된다. 덜어져 잿빛 바닥에 깔린 꽃잎 위로,/ 배낭을 지고 걷는 자의 검은 머리통에서도.// 빌딩의 불빛은 위로 자라고 초록빛 넝쿨은 옆으로 뻗어가는데.// 누가 밤새 두 손을 모으고 잠을 부르나.// 하얀 이빨이 닳아가는데. 손끝이 까슬까슬한데.// 까만 깨처럼 흩어지는데. 쓸어 모아도 손가락 사이/ 로 흘러버리는데.// 누가 부러진 허리를 세우며 피리를 부나./ 달에게 말을 건네나.// 솜망치로 사다리를 두드리며,/ 누가 그림자를 밟아 지우고 있나.//

밤의 서랍 / 이성미
기차 창밖으로 밤의 나무들이 지나간다. 밤과/ 밤 속의 낮이 지나간다./ 밤 속의 낮 속의 밤에/ 밤의 서랍이 스르륵 열립니다.// 서랍 속에는/ 너 말고/ 다른 사람./ 깨진 장난감 조각처럼/ 주워 모은 말들. 부서진 말들.// 서랍 속에 있는/ 책을 펼치면/ 책장에 끼워둔 은행잎처럼 너는 우수수 떨어진다,/ 악보에서 떨어지는 음표들처럼./ 이제 너는 너 말고/ 다른 사람./ 허리를 구부려 나는 줍는다./ 너의 까만 발톱.구부러진 발톱.// 나는 장난감과 음표들과 발톱으로 이루어진/ 노래를 띄엄띄엄 부른다./ 책을 넣고, 서랍 속에/ 너 말고 다른 사람.// 너는 넓은 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혼자 튀어나와 있던 서랍이/ 책상 속으로 쑥 들어가듯이.//

밤길 / 이성미
감기약을 먹으라니까/ 조카가 서럽게 운다// 야간행군에 지친/ 어린 보병의 의문처럼// 다른 숲으로 날아가다/ 총에 맞아 떨어지는/ 새의 의문처럼// 등잔불을 꺼뜨리지 않고/ 들고 가야 하는/ 시린 손의 의문처럼//

오후와 나 / 이성미
오후와 함께 희미해졌어요 내가/ 조금씩/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태양도 함께/ 다른 시간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도 함께// 너를 희미하게 하려 했는데요 그러다고 오후 속으로 들어가 희미해졌어요 내가/ 너는 간절히 믿었겠죠 내가 없다고/ 나는 투명해졌어요 비로소 오후와 함께// 의자에 얹힌 엉덩이와 의자가/ 의자의 다리와 나의 다리가/ 나의 얼굴과 그 옆이 뭉개집니다// 너는 오후를 통과합니다 네가/ 오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통과합니다/ 나는 팔을 뻗어/ 너의 몸속 그늘진 내장에 손을 댑니다/ 너의 불투명한 몸이/ 더 투명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네가 도시 끝을 향해 떠납니다 네가 멀어지면서 하얀 그물처럼 투명해질 때/ 물고기처럼 나는/ 천천히 오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태양과 바람을 느끼는/ 불투명한 덩어리로 돌아왔습니다// 네가 투명해지는 몸을 못 견디고 돌아왔을 때/ 오후도 나도 끝났어요/ 어느 세계로 가까이 갈지 결정하지 못하고 너는 다시 떠났어요// 갑자기 오후가 끝났으므로/ 나는 너를 쉽게 잊었어요//

그림자를 줄이는 방식 / 이성미
개가 사나워진 건 강아지가 눈을 뜰 때부터./ 엄마 팔이 길어진 건 아이의 몸통을 친친, 둘러야 하니까./ 그것에 대해 쓰는 건,// 나에게도 강아지가 있기 때문이고, 강아지와 엄마 팔이 궁금해서./ 그것을 지워주기 위해서./ 엄마 팔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팔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되는 것.// 한 발을 들고 한 발로 서서 강아지에 대해/ 명상을 해./ 그가 그림자를 늘려가는 동안,/ 그림자의 층수와 가격을 자랑하고 그림자의 영토를 주장하는 동안,// 그림자에 발을 담그고 나는 생각해./ 그림자를 줄이는 방식./ 그것에 끌리는 이유.// 그림자가 커지면 그림자에게 뒤덮일 거야. 그림자가 없으면 나도 없어질 거야./ 나는 사라질 건데/ 그림자가 남는 건 이상해.// 그림자는 달콤하고/ 그림자는 장마전선.// 비스듬히 서서 생각하고 있어. 작은 그림자의 고집./ 그림자의 밝은 태도./ 내가 그림자를 얼마나 덮는지 코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초록뱀의 꼬리가 사라지고 사흘 또는 일주일 / 이성미
초록뱀이 사라지고 나서 당신은 잠을 잤고.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사흘 후 깨어나 청소를 했어.// 초록뱀은 길어. 초록뱀의 꼬리도 길어. 꼬리 뒤에는 꼬리가 또 있지./ 초록뱀의 꼬리가 사라져도 초록뱀을 따라가지 않는/ 꼬리의 꼬리.// 수건에 매달린 끈적한 물방울. 마룻바닥에 찍힌 무거운 발자국./ 공기에 초록뱀의 한숨이 떠다니는/ 초록뱀의 꼬리가 사라지고 나서 사흘 또는 일주일 동안.// 테이블 위를 떠도는 동그라미. 둥근 커피잔에 담긴 모음들./ 초록뱀이 알이라도 낳은 것처럼 동그라미들이 사라지지 않아./ 너의 많은 신발에서 가장 느린 신발처럼.// 초록뱀에게 전화를 한들 초록뱀은 모른대./ 내 꼬리는 가져왔어. 난 그저 어제를 오래 생각하고 있을 뿐./ 행운의 편지를 부치고 나면 그때부터/ 편지가 자기 힘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듯.// 당신이 동그라미가 되기도 하는 사흘 또는 일주일./ 당신은 오래 청소를 하고./ 초록뱀의 꼬리가 사라지고. 꼬리의 꼬리도 사라지고 나서.// 어느 날 초록뱀의 머리보다 빠른/ 머리의 머리가 더듬이처럼 와서 당신 집을 더듬어./ 걱정하며. 두근거리며./ 초록뱀의 머리가 인사하기 사흘 또는 일주일 전부터.//

직각 / 이성미
숲에서 너는 드러눕고 나는 서 있는 사람이 된다. 나무가 눕고 너구리가 눕고 햇살이 눕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하늘이 길쭉해진다. 헝클어진 공기 속에 나는 서 있고, 너는 깊은 바닷속으로 내려가 심해어와 눈이나 납작하게 맞춘다. 누운 숲은 어쩌라고./ 나는 가만히 듣는 사람. 저녁 공기가 나무의 몸을 따라 내려오며 차가워지고 무거워지는 소리에 귀를 열어둔다. 귀로 밤공기가 들어오도록. 밤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신비한 눈동자를 뜰 때까지./ 하지만 오늘은 네가 있다. 오늘은 너를 따라다니면서 너를 깨우고 숲을 깨운다./ 네가 아는 얼굴들과 단어들…… 먼지 낀 선물 가게 진열장에 늘어놓고 너는 누워 있다. 너에게 묻는다. 밤은 어디에 있지. 너는 나른한 팔을 들어 집히는 대로 꺼내 놓는다./ 네가 부스스 일어나면 그제야 나는 눕는다. 귀는 땅에 가까이 간다. 땅에 묻혀 있는 밤의 숨소리를 엿들으려고./ 우리는 같은 모서리를 나눠 가진다.//

직육면체 / 이성미
7월 24일에 노트를 펴고 9월 24일이라고 적었다. 7월은 시를 쓰기 좋은 때는 아니지. 잠깐 생각했는데 두 달 후에 깨어난 건 아니겠지. 손이 연필을 움직이는 동안, 9월이라고 적힌 흑연 글씨를 알아보고 눈을 깜빡이기까지, 7월 24일이 아니고 9월 24일이 아닌 그 순간// 그 순간, 나는 물고기 식당의 9월 이사에 대해 생각했다. 9월의 물고기 식당에는 물고기가 없고 요리사가 없고 직육면체가 있겠지. 여섯 개의 면이 사라진, 물고기 식당이었던 직 육면체, 회오리바람에 공중으로 떠오르는 투명한 직육면체, 그것과 함께 멀어져 가는// 7월의 물고기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지. 맵고 짜서 기침이 났지. 밤에 요리사는 물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갔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검은 물이 돌돌돌 흐르며 달빛에 반짝였지. 작은 물고기가 투명한 줄 끝에서 파닥파닥 반짝였지.// 9월의 요리사는 상자에 돌과 식물을 담아 내게 주었다. 돌은 초록빛 이빨을 드러내고 침묵했다. 트럭의 짐짝 틈에서 그는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아스파라거스 상자를 내려다보며 다른 직육면체를 생각했다.// 이사를 가서 사라진 사람들을 점점 자주 본다. 나는 7월에 있고, 9월의 물고기 식당과 가까워진다.//

부등식 / 이성미
열려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물고기라면, 물에 떨어진 지푸라기라면,/ 댐의 수문으로 쏟아져 나가는 물살이 있고, 떠밀려 하류로 하류로 하류로, 방향이 있습니다. 흐름은// 위에서 아래도, 나는 옆에서 옆으로.// 활짝 웃었 습니다. 흘렀습니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무엇이라 부르든지. 마구 흘러갔던 것입니다. 물고기와 지푸라기처럼, 나 → 너// 너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너는 사과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나 < 너// 부등식이 된 사정을 몰라서 나는 불편해집니다. 등식이 되면// 세상이 정전된 것처럼 침묵에 잠깁니까. 움직임이 정지합니까. 낯선 바다에 가면, 간다 고 등식이 될까요.// 부등식을 넘어 등식이 되는 것.// 나는 조금 닫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조금 더 닫았습니다. 더 좁게, 등식이 되는 것.// 내가 닫고 나자 네가 열었습니다. 무엇이 내게 흘러왔습니다. 불편한 나 > 너// 열리고 닫힙니다. 흘러가고 흘러 들어 옵니다. 등식은 없습니까.// 같이 열리는 세계는 우리에게 열리지 않는 것일까.// 부등식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등식을 넘어서는 부등식은 없습니까.// 희미한 부등식으로 너를 조용히 염려하면 안 되겠습니까.//

일요일 오후 네 시 / 이성미
찻물이 끓는점에서 와글와글 떠들다가, 느린 속도로 차가워지고/ 끝없이 울리던 전하벨 소리가 잘려 나가고. 멀리서 손목 하나가 힘없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아이는 까만 눈물을 닦으며, 비어 있는 엄마 손을 잡고/ 내일의 바람이 목덜미에 닿은 듯해 흠칫 놀라니, 일요일 오후 네 시에./ 오늘의 문짝에 바싹 귀를 붙이고 있는. 내일 아침의 공기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들어오겠지. 지금 문짝은 오로지 팽팽하게 버티는 데 몰두해 있고./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흩어지고./ 우리는 뜨거워지기 위해 더 뜨거워지기 위해, 찬물을 뿌려 시작점을 영도로 낮추지./ 저녁을 먹을 때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어머, 오늘은 금요일인걸요!//

돌멩이라는 이름 -돌멩이에게 / 이성미
돌멩이가 돌멩이 밖으로 굴러 나갈 때/ 그가 돌멩이! 부르니/ 돌멩이는 떨어뜨렸다/돌멩이답지 않은 것들을// 너의 이름을 부르자. 그 자리에 꽃가루처럼 떨어지는 것들/ 너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너//그래서 돌멩이의 이름을 지우는 일/ 꽃을 꽃밭에 숨겨두듯이// 그래서 돌멩이를 지키는 일/ 이름을 불면/ 손에 쥐고 싶어지는 마음에 대하여/ 이름에 대답하면/ 위험에 빠지는 일에 대하여// 그의 손에서, 돌멩이는 너무 뜨거워지고 너무 차가워지고/ 작은 심장을 멈출 테니// 어쩔 수 없이 돌멩이! 부르고 나면/ 내가 한 짓을 고백해야지/ 이름을 불러, 돌멩이의 서늘한 숨결에 손수건을 덮은 일/ 이름을 불러, 너의 분홍빛 맨발에 양말을 신겨준 일// 다시 돌멩이가 돌멩이 밖으로 굴러 나가면/ 나는 잠시 생각해야지/ 돌멩이의 일생에 대해/ 돌멩이가 아니던 밤과, 더 이상 돌멩이기를 그치는 순간에 대해//

거짓말에 대한 거짓말 / 이성미
1/ 혀에 닿지 않으면 요리는 존재하지 않았던 음식./ 그에 대해 아무 말이 없어서, 그는 사라지는 중이다.// 2/ 십 년이 되었는데, 너는 어젯밤에 거짓말을 처음 보고 소리쳤다. 나가!/ 오늘 태어나 뒤뚱거리는 늙은 오리처럼/ 어린 거짓말.// 3/ 거짓말은 부드럽고 거짓말은 조용하다./ 향기 없이 살아 있다.// 4/ 어제는 사랑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잘못했다고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5/ 앵두를 믿는 한 순간. 혀에 닿은, 시고 닥닥한 앵두/ 씨앗./ 앵두에 속는/ 오래된 시간.// 6/ 네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어서,/ 거짓말은 꽃 무더기 속에서 꽃으로 태어난다.// 7/ 꽃향기는 가볍게 떠올라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거짓말은 언제라도 땅에 착륙한다, 위태로운 자세로.//

십일월에는 / 이성미
노란 손목을 가진 아이가 노란 길을 골랐다. 얼굴이 붉은 아이는 붉은 길을 골랐다./ 푸른 손자국이 있는 앙는 버티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이는 떠나고, 어떤 이는 남는다.// 우리는 서로 오해할 시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코웃음을 친다.// 그리고 더 이상 쓸쓸해지지 않으려고/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가서, 누군가와 함께 사는 꿈을 꾼다.// 십일월은 마른 강물처럼 느리게 흐른다./ 십일월은 강물 위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진다.// 십일월이 오기 전에 수첩을 펴고 나는/ 적었다. 푸른 물감이 공기 속으로 풀어지던 날에 대해. 형태는 푸른 천막 아래 그늘에./ 포근한 담요 같던/ 거대한 안개가 우리를 덮고 있던 날에 대해.// 싸늘한 화로 앞에서 펴본 수첩에는/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다.// 믿음에는 눈이 없고 입이 없다. 십일월에는,/ 그런 믿음이 필요하다./ 들판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세게의 문을 연다./ 보이는 것은/ 떨어지고/ 허물어지고/ 부서진다. 땅에 묻히거나/ 불투명한 지하실로 들어간다.// 십일월에는 동그란 입과 짧은 손가락이 필요하다./ 아이가 손가락을 쳐들면서/ 모두가 입 다물고 있는 일에 대해 물을 때/ 지혜보다 강하고/ 노래보다 아름다운 것.// 십일월은 한 손으로/ 글자가 적힌 페이지를 뜯어낸다./ 십일월은 다른 손으로/ 반복해서 창문을 그린다.// 창문 뒤에서 창문이 열리고/ 창문 옆에서 창문이 투명해질 때까지.//

호른과 기차 / 이성미
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퇴장한 무대에 남겨진/ 의자 같고./ 의자 위에 두고 산/ 호른 같고.// 너의 슬픔은 검은 산처럼 깊고/ 늙은 소녀의 머리카락처럼 길다./ 머리카락이 발까지 자라 흐르는 물.// 너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몰라서 나는 너의 말을 듣고 있다./ 토끼처럼 귀가 자라도록 들었지만/ 너의 슬픔은 손톱 반달만큼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귀도 슬프겠구나.// 너는 네가 메고 태어난 낡은 가방이 슬프고/ 가방 안에 든 우윳빛 털실 뭉치가 포근해서 슬프고/ 낡은 가방을 멘 너를 슬퍼하는 눈길 때문에 또 슬프다.// 퍼덕거리는 물고기들을/ 양동이에 퍼 담았지만, 물이 없어 금세 죽어버렸다./ 너는 목소리를/ 차가운 보도블록 바닥에 떨어뜨렸다.// 네가 부르는 노래는 눈 덮인 하얀 철로./ 나는 기차에 너를 싣고 달린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기 위해서/ 밤으로 난 철로 위를.// 기차는 터널로 들어간다./ 짐승들은 터널에서 맘껏 운다./ 너는 자격이 있다.// 철로 옆에서 아이들이 작은 손을 흔든다./ 내게 저런 작은 손이 있어/ 양동이에 하얀 눈을 담아서 너에게 주었으면./ 이빨을 드러내고 웃을 만큼 충분한 눈을.//

未安미안 / 이성미
이곳의 일들은 끝날 것이다./ 인간이 많아지면.// 말린 꽃잎 가루처럼 부스러지겠지. 점점이 떨어지고 날리겠지.// 덩어리의 경계는 폐곡선인가요. 수만 개의 문이 달린 윤곽선인가요.// 인간 쪽으로/ 오늘 한 걸음 걸었습니다, 달팽이처럼.// 개의 식욕과/ 날개의 감정에 대해 생각합니다.//

부분과 연결 / 이성미
공무원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 저 말은 대사예요 진실이 아니라고요, 라고 말하려고 연극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니에요 연극을 깨러 무대에 뛰어들었어요, 라는 대사를 외치며 나도 연극이 되었다/ 나는 돌의 몸이 되었다가/ 까마귀처럼 울었다가/ 희미한 경고음이었다가/ 분노라는 이름이 붙은 침묵이 되었다// 그리고는 들었다 음의 길이가 질서 있게 배열되어/ 머릿속에 가로세로 선이 그어지며/ 정돈이 되었다. 아, 시원해 그리그*와 그리드**/ 이지 않는 사각형// 새로운 질서가/ 힘의 새로운 배열이 필요함// 늦은 낮잠에 들었다/ 바람 소리에 깨어 꿈을 나오는 나에게// 꿈 안에서 삼각형이 외쳤다/ 저는 방향이 제일 어렵습니다// 늦은 태풍이 지나갔다/ 나무의 인사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열매// 열매는 햇살과 바람을 담고 떨어져 뒹굴었다// 손에서 손으로 붉고 작고 단단한 안부가 필요함//
* 그리그(1843~1907): 노르웨이 작곡자이자 피아노 연주자.
** 그리드: 격자.

우체국에 가려면 / 이성미
오늘도 우체국에 가지 않았다./ 하루는 눈이 내렸고 하루는 아팠다. 하루는 늦잠에서 깨어 우체국이 너무 멀다 는 생각을 했다.// 우체국 대신 철물점에 가서 파이프를 샀다. 하루에 하나씩. 하루는 파이프로 피리를 불었고 하루는 파이프를 이어 긴 피리를 만들었다. 하루는 이러다가 파이프로 오르간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봉투에 적는 주소가 하루마다 길어졌다. 한 글자 더/한 줄 더/번호가 더/주소가 길어져서 봉투를 더 주문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터널을 통과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가 우체국까지, 투명한 길을 그었다. 어제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 오늘 우체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곳에는 우체국이 없다. 또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우체국은 내게서 더 먼 쪽으로, 하루만큼 더 먼쪽으로, 내가 하루에 걷는 길의 길이만큼 더.// 우체국은 멀어졌다. 또 파이프를 사게 되었다. 이렇게 길고 기이한 피리를 불어도 될까. 부르튼 입술로 피리를 불어도 될까. 바람이 파이프 속으로 들어가 긴 바람이 되어 나올 수 있을까. 피노키오의 코는 부러지지 않던데.// 검은 말들을 오늘 밤 책에 뿌렸다. 책 위로/봉투 위로/검은 글자들 위로/밤이 내려앉았다.//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밤늦게 눈이 내렸다. 길 위로 들판 위로/지붕 위로/눈이 하얗게 내려서. 검은 밤을 덮으며 눈이 하얗게 내려서. 길은 사라지고, 사라진 길은 있고 우체국은 새하얘졌다.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좀더 멀리.//

사과에 대해 쓰기 / 이성미
9월의 첫날이 오면 과일에 대해 글을 써야지.// 맛있고 빨간 사과는 백설공주를 위해 남겨두고, 계모가 손대기 전의 사과에 대해.// 사과가 익기 전에, 과즙이 흘러나오기 전에. 하얀 이빨이 사과에 박히기 전에. 사과에 대한 글 을 끝내야지.// 모든 시과 말고, 천천히 익어가는 느린 사과에 대해, 익기 전에 떨어져 뒹구는 사과에 대해.// 더 맛있어지고 더 커지는 사과 말고, 높고 단일한 사과 말고, 가을의 기울어진 햇빛 아래에서.// 사과가 되려 했지만. 사과가 되지 못한 사과의 경우에 대해 쓰고, 제목을 사과라고 붙여야지.// 사과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 대해 써야 지. 나무를 받치는 파이프도, 파이프 옆의 사과향기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사과를 매달고 있는 나무가 쓰러지기 전에.// 모자를 쓴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오기 전에, 노래에 맞춰, 장갑 낀 손을 일제히 들어올리기 전에.// 사과 에 대한 글을 쓰다가 그만 두어야지. 사과가 사과가 아닌 것이 되기 전에. 쓰다가 거기서 멈춰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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