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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신용목 시인

부흐고비 2021. 12. 8. 08:16

신용목 시인
1974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작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노작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백석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등이 있다.

 

 




성내동 옷 수선집 유리문 안쪽 / 신용목
잉어의 등뼈처럼 휘어진/ 골목에선 햇살도 휜다 세월도 곱추가 되어/ 멀리 가기 어려웠기에/ 함석 담장 사이 낮은 유리/ 문을 단 바느질집이 앉아 있다/ 지구의 기울기가 햇살을 감고 떨어지는 저녁/ 간혹 아가씨들이 먼발치로/ 바라볼 때도 있었으나/ 유리 뒤의 어둠에 비춰 하얀/ 얼굴을 인화했을 뿐 모두가/ 종잇장이 되어 오르는 골목에서는/ 누구도 유리문 안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쩌다 새로 산 바짓단에/ 다리를 세우기 위해 오래된/ 동화책 표지 같은 문고리를 당기면/ 늙은 아내는 없고/ 실밥을 뱉어내는 사내가 양서류의 눈으로/ 잠시 마중할 뿐 엄지와 검지로/ 길이를 말하면 못 들은 척/ 아가미를 벌렁거릴 뿐 이내/ 사람의 바늘코에 입질을 단련시키기 위해/ 드르르르 말줄임표 같은 박음질을 한다/ 재봉틀 위에 놓은 두 개의 지느러미에서/ 꼿꼿하게 가늘어진 바늘/ 갈퀴를 확인하며/ 나오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유리문 안엔 물결이 있다/ 부력을 가진 실밥이 떠다니고/ 실밥을 먹고 사는 잉어가 숨어 있다/ 누구든 그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삶의 각질을 벗어들고/ 물고기처럼 휘어져야 한다 때로 바람에/ 신문지가 날아와 두드린다/ 해도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 자주 세월을 들이면/ 잉어의 비늘이 마를 것이므로/ 틀니를 꽉 다물고 버티는 유리가 있다/ 젖은 바지를 찾아오는 날에는/ 부레에 잠겨 있던 강물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추억을 건조시키지 않으려는 듯/ 헐은 날개를 기워주는/ 휘어진 골목 옆에는 바느질집이 있다/ 성내동 사람들은 모두/ 종이처럼 얇아져 있었으므로/ 아무도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어항 속에 형광등이 휘어지듯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휘어지는 걸음을 어쩌지 못한다//
*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아무 날의 도시 / 신용목
식당 간판에는 배고픔이 걸려 있다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어스름이 내렸다 거리는 환하게 불을 켰다/ 빈 내장처럼// 환하게 불 켜진 여관에서 잠들었다/ 뒷문으로 나오는 저녁// 내 머리 위로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지 궁금하다 더운밥이었을 때/ 처럼/ 방에 감긴 구불구불한 미로를 다 돌아/ 한 무더기 암호로 남는 몸// 동숭동 벤치에서 가방을 열며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내과술에 대해 생각한다/ 꺼낼 때마다 낡아 있는 노트와 가방의 소회시간에 대하여// 불빛의 내벽에서 분비되는 어둠의 위액들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나는/ 너를 잊었다 너를 잊고 따뜻한 한 무더기/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한 바닥씩 누운 배고픈 자들이 아득히 별과 별을/ 이어 그렸을 별자리 저 암초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거리는 환하게 어둠을 켰다 빈 내장처럼// 약국 간판에는 절망이 걸려 있다.//

별 / 신용목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이빨들, 뾰죽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罪가 나를 씻어주겠다//

구름 제조법 / 신용목
날씨에게도 집이 있어서,/ 부엌이 있고/ 어느 저녁엔 불을 지피고 밥을 안친다면, 그것은 올 나간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바람의 언손이 하는 일. 문밖에 갈색가죽을 덧댄 신발을 벗어놓고/ 젖은 발이 하는 일./ 그 발은 구름의 발,/ 비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생활은 또 불길 지나간 들판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것이어서,/ 바닥에 닿자마자 흰 연기를 지피며/ 지져진다./ 무엇일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지나간다는 것은. 입김의 흰 목덜미를 불며/ 난로를 켜고,/ 주전자에 받아 물을 올리고 조용히 구름을 만든다. 오늘은 흐림. 아니 비. 이렇게 불을 지피면 물속에 잠길 수도 있다. 물이 끓으면, 불 속을 헤엄칠 수도 있다./ 불을 끄면,/ 창밖으로 검은 돌고래떼가 느리게 지나가는/ 밤./ 무엇일까?/ 어떤 이별도 남아 있지 않은 인연에게/ 남은 것은./ 밤은 모든 거리를 지우고 모든 벽을 허물고 사람 옆에 사람을 눕혀 오로지 꿈속의 얼굴만/ 보여주는데,/ 물속에서 빗방울을 건져내기 위해서 끓고 있는 주전자처럼/ 누가 운다./ 주전자를 새까맣게 태우며 오는/ 비./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물의 얼룩을 끝까지 품고 있어서, 주전자는 수요일 오후의/ 분리수거장 부대 속으로 무심하게 던져진다.//

구름 그림자 / 신용목
태양이 밤낮 없이 작열한다 해도/ 바닥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림자/ 봄 비린 구름이 우금치 한낮을 훑어간다/ 가죽을 얻지 못해 몸이 자유로운 저 구름/ 몸을 얻지 못해 영혼이 자유로운 그림자/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가/ 사랑을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다//

바람은 개를 기르지 않는다 / 신용목
개 혓바닥이 맑게 닦은 개밥그릇에 햇살이 반짝/ 제 눈을 달아놓는다 한 되들이 개밥그릇// 마당을 지나간 바람은 백만 되 다시 백만 되// 누가 바람의 등에 개 문신을 새겼을까-/ 너무 많은 눈빛을 어슬렁거리느라 흘려보냈다// 개의 내장처럼 찌그러진 개밥그릇// 어제는 종일을 잠만 잤고 오늘은 허공을 컹컹 짖는다/ 오랫동안 구름이 지나가는 바람의 내장처럼// 잠잘 때마다 몸이 주리고 짖을 때마다 허공이 환하다/ 누가 바람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웠을까-/ 너무 많은 걸음을 땅을 파느라 심어버렸다// 몸 한쪽을 울 끝에 묶어놓고// 햇살을 잘게 빻는 빈 마당으로 서서 사립으로/ 열린 내장의 처음과 끝을 바라본다 컹컹// 개밥그릇에 반짝이는 허기는 다시 백만 되// 개는 바람에 짖지 않지만 바람은 개를 먹이지 않는다/ 개의 내장에는 바람 문신//

모든 우산은 비의 것 / 신용목
비의 시체를 가득 실은 수레가 물 위에 쓰러져 있다 걸음을 멈추듯 사랑을 멈춘다// 가을에는/ 투명한 기린이 걸어다닌다// 비를 딴다// 내 몸에 꼭 맞는 시체를 가지기 위해 가끔 약을 삼킨다 아직은 아닌 것 같아 더 늙어야 해서/ 밥을 먹고/ 나와// 신호등 앞에서 기린의 행렬을 보고 있다/ 기다린다// 머리에서부터 조금씩 투명해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기다린다// 그때// 신호등이 바뀌고 야 벌써 시월이야! 앞질러 뛰어가는 소년의 목소리가/ 검은 우산을 벗어나/ 자유로 지나 가양대교 건너 노란 창문 너머 침대 위 한 방울 머리로 맺힐 때/ 시월// 비// 어느 장례식장 부의함 속으로 떨어지는/ 흰 봉투 같다// 두 번은 안 돼 한 번이니까/ 괜찮다/ 침묵의 수레 가득 실린 울음을 덜컹거리는 바퀴로 굴리고 가는 가을이니까/ 괜찮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건너편을 가지고 있으니까/ 간다// 그때// 기린의 무리 속에서 투명한 눈망울 하나가 천천히 목을 비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謨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노을 만 평 / 신용목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 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네//

사랑 / 신용목
빗방울이 빗소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촛불이 꺼지면 박수 소리가 들린다./ 누구나 한번쯤 창밖을 본다. 미처 챙기지 못한 우산 때문이라고 해도……/ 한명이, 왜 저러는 거야? 말하면, 거기 우산을 놓치고 서 있는 사람이 보이고/ 두명이, 세명이 창가로 간다.// 세개째,네개째 입김을 분다. 다시 한명이 접시를 두드리면, 술잔을 들기 위해 일제히 돌아서고……유리에,/ 내리는 비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싶습니다, 써놓은 한사람을 찾고 있다.// 모두가 자신이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모인 것일까.// 이제 창밖엔 아무도 없다.//

후라시 / 신용목
동그라미는 왼쪽으로 태어납니까/ 오른쪽으로 태어납니까// 왼쪽으로 태어난 동그라미의 고향은 오른쪽입니까 어디서부터/ 오른쪽은 시작됩니까// 동그라미를 그리는 자는 동그라미의 부모입니까 내가 그린 동그라미는 몇 개입니까// 나는 그들에게 죄인입니까// 왼쪽으로 걸어갔는데 왜 오른쪽에 도착합니까/ 왜 자꾸 동그라미를 그립니까/ 동그랗습니까// 동그랗습니까// 어둠을 뒤쫓던 후라시 불빛이 내 얼굴에 쏟아졌을 때/ 나는 유일한 동그라미 안에 갇혀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착취당하지/ 너는 혼자였고 나는 가난했어/ 무엇보다도 우린 젊어서// 온통 늙어가지// 그러나 어둠은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후라시를 켤 때마다 보란 듯이 불빛 그 바깥에 가 있었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나는 간신히 외치기 시작했어/ 비 내리는 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슬픔이 젊기 때문이다// 다음 날부터/ 태양은 구정물 통에 담긴 접시처럼 유일한 하늘에 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깨뜨릴 수 있는 동그라미와 깨뜨릴 수 없는 동그라미에 대해 생각했지만/ 우리가 만났던 밤은 아직 젊었고// 어떤 비도 슬픔을 씻기진 못하고// 너는 혼자였고 나는 가난했지// 동그라미 안으로 쓰윽 들어온 손이 내 턱을 추켜올렸을 때/ 내 얼굴은 이미 깨져 있었다//

중심을 쏘다 / 신용목
사수가 한쪽 눈을 감는 것은 과녁을 떠나는 그 영혼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어떤 형벌이 사수의 눈동자 속에/ 과녁의 동심원을 그렸을까// 한 입 어둠을 씹어먹는 허공의 아득한 중심에서// 정확히 자신의 죽음을 겨누어 떨어지는, 빗방울/ 우산은 방패가 아니었다// 바람 불 때마다 영혼의 부력으로 뒤집히는 중심의 테두리 그 팽팽한 시간 위에서// 빗물이 명중의 제 몸 잠시 허공에 흩어 놓을 때// 한 발의 생이 안개처럼 피어 오른다-그리하여 저편/ 영혼으로 과녁을 치는 무지개,// 중심을 산 너머에 숨겼으므로// 검은 부리로 넘어가는 새가 있다 구름 사이로// 누구를 겨누어 저 달은 오늘도, 눈꺼풀을 내려 촛점을 잡는 것일까 한쪽 눈을 감을 때마다 보이는// 둥글게 갇힌 자신의 영혼 그리고 / 영원히 외눈인 해와 달,//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

모래시계 / 신용목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우리 모두의 마술 / 신용목
삼성역을 나왔을 때/ 유리창은 계란 칸처럼 꼭 한 알씩 태양을 담았다가 해가 지면 가로등 아래 깨뜨린다./ 그러면 차례로 앉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싱싱해지는 것이 보인다.// 그들이 스스로 높이를 메워버린 후 인간은 겨우 추락하지 않고 걷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날개 때문에 지하철을 만들었다고……/ 삼성역 4번 출구 뒷골목을 걷다가 노란 가로등 아래를 지나며 울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눈을 감으면,/ 유리창에 비친 뺨을 벽에다 갈며 지하철이 지나간다. 땅속의 터널처럼, 밤이 보이지 않는 뒷골목이라면 가로등은 끝나지 않는 창문이라고……/ 냉장고 문을 닫아도 불이 켜져 있어서 환하게 얼어 있는 얼굴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 신용목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공원 벤치에/ 누워서 바라보면 구름의 수염 같은 나뭇잎들 누워서 바라보면/ 하얗게 떨어지는 별의 비듬들/ 누워서 바라보며/ 칼자루처럼/ 지붕에 꽂혀 있는 붉은 십자가와/ 한켠에 가시넝쿨로 모여앉아 장미 같은 담뱃불 뒤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어린 연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버려진 매트릭스에 붙은 수거용 스티커를 바라보며 한때의 푹신한 섹스를 추억하며/ 일 주일에 한 번씩 종량제 봉투를 꾹꾹 눌렀던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얼굴로/ 어느 저녁엔 시를 써볼까/ 어둠 속에서 자라는 환한 그림자를 밤의 기둥에 쿵쿵 머리로 박으며/ 방 없는 문을 달고 싶다고/ 벽 없는 창을 내고 싶다고/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오래 눕지도 못하는 공원 벤치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칠한 조립식 무지개처럼/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별이 진다 깨진 어둠으로 그어 밤은 상처로 벌어지고 여태 오지 않은 것들은 결국/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그대로인 기다림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너는 환하게 벌어진 밤의 상처를 열고 멀리 떠났으니까/ 나는 별들의 방울소리를 따 가슴 주머니에 넣었으니까/ 바람 불 때마다 방울소리 그러나/ 나는/ 비겁하니까//

밤 / 신용목
검은 사내가 내 목을 잘라 보자기에 담아 간다 낡은 보자기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나는 구멍으로 먼 마을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날 연인들이 마을에 떨어진 보자기를 주워 구멍으로 검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꼭 한발씩 내 머리를 나눠 딛고서//

이슬람 사원 / 신용목
오후의 모든 빛이, 잠시, 여기에 눕는다. 잘못 든/ 길이 열어준 마지막을 나는 동굴의 끝을 밟듯/ 하얗게 조각나는 망막에 담아야 했다. 이 낯선/ 시간 속에 사막이 있고 강이 흘러 긴긴 모래바람을/ 지나 범람의 유적을 따라가면, 우주로 가고 싶은/ 종족이 살고 있어 육십 개의 손가락을 달고/ 낮 밤 없이 별을 셈해 유난히 눈자위가 희어진/ 사람들, 붉은 가죽을 두른 검은 영혼들 속에서/ 나는 사라센의 슬픔을 보았다. 살라트의 울림이/ 대리석 위를 미끄러질 때 뜻도 모르게 찍혀 있는/ 문자 속에서 내 이름을 읽고 휘청거렸다./ 신이 지은 땅이 신이 가진 부력을 배반했으므로/ 결국 우주로 가지 못한 자들, 오십 개의 손가락을/ 잘리고 남은 열 개로 기둥을 세웠다. 이 오랜/ 엎드림이 있는 한 범람은 강의 수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바람은 사막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사원은 수많은 손가락을 묻었으리라. 여전히/ 눈자위가 희어, 잘못 든 길에는 늑골을 펴서/ 닿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 다만 야윈 종족을/ 휘감고 종소리 우주를 넓혀갈 때 나는 낯선 몸체를/ 닮은, 저 기둥으로 인해, 땅의 공기가 가벼워지고/ 우주는 저토록 멀리 있었다.//

강물의 몸을 만지며 / 신용목
그만큼의 부질없음을 받아들인다./ 물살 여린 강에는/ 하루내 산 그림자가 스며 흘렀고/ 가으내 낙엽이 몸을 뉘었다./ 소리 없이 깊어지는 세상의 수평 위로/ 비늘 돋는 저녁./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려다 지친 낚시꾼들은/ 휴일의 여유를 배낭 속에 챙겨 넣고 하나 둘/ 뒤꿈치를 감추려 애를 썼다./ 얼굴 흰 가시내가 있어 사랑했었다./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걸음/ 노을처럼 붉히며 일어났을 때,/ 기억의 어두운 하늘마다 빛나는 별들/ 강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산주름 주름을 다 돌아내리고도/ 채우지 못한 것이 많아 강물은/ 모두에게 가장 깊은 곳을 허락했다./ 허리를 굽혀 손을 씻는 남자의 등줄기처럼/ 많은 것들 떠나보내고 나면/ 쉽게 휘어져 돌아설 수도 있는 것일까./ 사랑했던 가시내는 얼굴이 희어/ 물 고인 손금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무 그늘을 포갠 산그늘 짙어지고/ 땅 위 모든 그늘을 포개어오는 어둠,/ 모두들 뒷모습을 적시며 떠나고/ 바람만이 색 잃은 물 위에/ 지네의 발자국을 남겼다./ 그렇게 부질없이 안아온 많은 계절을/ 단 한 번 제 몸에 가두지 못하고/ 겨울이면 얼어붙고 말,/ 강물엔/ 저녁내 노을이 발을 담갔고/ 한밤내 별들이 막대처럼 꽃힐 것이다//

강이 얼었다 / 신용목
강이 얼었다, 물에 붙들린 배/ 강이 얼었다, 배에 붙들린 물// 기구하게 흘러온 강이 기구하게 까놓은 알, 강이 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껍질이 되는 일// 서로가 서로에게 생알이 되는 일,// 시절이 바람의 깃을 모아 오래 품는다 강이 얼고/ 강이 슨 알에는 봉합 자국이 없다 사람을 만들고 마지막에 봉합한 배꼽 같은 곳, 언 강에 돌을 던진다// 날개를 감춘 새가 알 하나로 날아가 얼음에/ 쩡, 돌로 앉는다―강의 배꼽// 날 풀리면// 비늘을 감춘 물고기가 알로 헤엄쳐 바닥에/ 툭, 돌로 앉는다―강의 배꼽// 매구 치는 해마다 논밭 가는 봄마다 한 판 큰 경사겠다/ 쩌억 껍질 깨고 새 흐름 낳는 일// 쩌억 껍질 깨고 새 배 띄우는 일,// 잘린 탯줄처럼 햇살 한 자락 강가에 버려져 있다// 강이 얼었다, 죽어 먼 길 갈 늙은 아비가 살아 먼 길 갈 자식의 손을 꼭 쥐어주듯이/꼭 쥐는 순간 한 생을 다 알 듯이// 물에 붙들린 배, 배에 붙들린 물//

틈 / 신용목
바람은 먼 곳에서 태어나는 줄 알았다 태풍의 진로를 거스르는 적도의 안개 낀 바다나 계곡의 경사를 단숨에 내리치는 물보라의 폭포/ 혹은 사막의 천정, 그 적막의 장엄/ 아랫목에 죽은 당신을 누이고 윗목까지 밀려나 방문 틈에 코를 대고 잔 날 알았다/ 달 뜬 밖은 감잎 한 장도 박힌 듯 멈춘 수묵의 밤 소지 한 장도 밀어넣지 못할 문 틈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고 고 고 좁은 틈에서 달빛과 섞이느라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육체의 틈 혹은 마음의 금/ 그 날부터 한 길 복판에서 간절한 이름 크게 한 번 외쳐보지도 못한 몸에서도 쿵쿵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나와 나 아닌 것 삶과 삶 아닌 것이 섞이느라 명치끝이 가늘게//

오래된 북 / 신용목
북은 온몸이 입이다 남의 가죽을 빌려 짓고도 봉해진 입, 갇힌 말이 둥둥 앞뒤로 꿰맨 틀 속을 돈다 쳐야만 열리는 입, 아픔으로만 살아 있는 것들이 있다, 둥둥둥둥 발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소리 같기도 한 요동이 고이고 고여 맑아진, 오래된 북의 안쪽에는 짚을 수 없는 허방이 있다 찢어봐도, 성대를 찾을 수 없다 번역할 수 없는 언어로 이승의 내막을 아파하다 사라질 뿐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 수 없다, 두 번의 수술 끝에 그는 호흡기를 달고 누웠다 심장소리가 둥둥 좌우로 꿰맨 몸속을 돈다 눈물로만 말하는 입 제 가죽을 찢어 열고도 스스로 봉한 입, 그는 온몸이 북이다 가끔 나는 북채가 되어 그의 옆에 눕는다//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 / 신용목
오동은 음계를 지나고 나, 죽어 비로소 소리를 얻는다/ 먼 도시의 강가 외진 정각에서 가야금 한 소절을 만나기 위해/ 고향 우물터 오동나무 밑에서 나는 바람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 달빛이 우물을 짚느라 노독을 얻을 때,/ 오동나무 밭은 가지가 허공에 흩어놓은 한 점 수묵화를 보았다/ 명주실 열두 현에는 몇가닥의 별빛이 묶여 있는가/ 가야금 소리를 들은 것은 정각이 선 먼 도시의 강가,/ 바람이 목을 놓고 울음을 풀어준 곳/ 우물이 발을 풀고 달빛을 놓아준 곳//

칼이 있는 잔치 / 신용목
칼이 정곡을 찌르자 붉은 여울이 생겨났다 일생 속으로만 돌았을 길을,/ 남은 박동이 몸밖으로 퍼내고 있다/ 주민들의 칼에// 돼지는,/ 덩어리진 몸을 풀어놓는다 능선을 넘어온 가죽과 설키다 만 산나물 풀뿌리와,/ 허공에 찔러놓은 비명 한 자루// 칼은 속맛을 안다 그러나 칼이 지나고 나면 모든 속은 겉이 된다 오로지 처음이 마지막인/ 그대가 지나간 길// 옹벽 너머, 파헤쳐진 붉은 황토가 여울처럼 부려져 있다 가장 캄캄한 곳을 택하여/ 환하게 지나가는,// 아픔은 상처를 두 번 통과하지 않는다 상처가 또 하나/ 아픈 몸으로 일어서는/ 거기,// 돼지가죽에 찍힌 파란 글씨의 낙인처럼, 새로 뚫는 길가에/ 붉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위태로운 지주대 그 끝에서 펄럭이며// 그믐의, 흰 칼이 지나가는 중천으로 대낮이 검은 피를 뿌리며/ 사지를 풀어놓을 때/ 대책 없이 날아오르는 공사판의 흙먼지들// 돼지는 주민들의 가죽에 담겨 걸어갈 것이고 주민들은 돼지의 가죽처럼 어디론가 흩어질 것이다//

격발된 봄 / 신용목
나는 격발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나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폭발하지 않았다// 꽁무니에 바람 구멍을 달고/ 달아나는 풍선// 나의 방향엔 전방이 없다 끝없이 멀어지는 후방이 있을 뿐// 아무 구석에 쓰러져 한때 몸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한때 화약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봄의 전방엔 방향이 없다 끝없이 다가오는 허방이 있을 뿐// 어느 것도 봄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봄이 볕의 풍선을 뒤집어쓰고 달려가고 있다// 살찐 표적들이 웃고 있다//

敵國적국의 가을 / 신용목
나무마다 붉은 심장이 내걸린다, 저 맹세들/ 어떤 역모가 해마다 반란의 풍속을 되살리는가 허공을 파지로 구기며 진격하는 북국의 나팔소리// 바람의 오랜 섭정에 나는 부역의 무리가 되어버렸다 도망하라 화를 피해 그러나/ 살갗을 벗기며 저무는 황혼의 저녁// 붕대로 풀어지는 구름의 거적과 벌겋게 나뒹구는 태양의 해골바가지// 모든 문자가 추억처럼 타올랐으므로 한 장 한 장 시절이 실연을 흔들며 투항하는 시간의 유적지에서/ 연기의 문장으로 원군을 청하는 늦은 후회여// 계절의 부장품은 기다림이다 반란의 나팔소리가 허공을 디디며 번져가는 파지의 밤/ 구겨진 산과 구겨진 강과 구겨진 채// 날이 밝으면 빈 나뭇가지에 낮달이 반지처럼 끼워져 있을 것이다 도망하라 화를 피해 그러나// 나무마다 붉은 심장이 뛰고 있다, 저 맹세에/ 내 눈물도 역모의 증거임을 안다 돌아가지 못할 길에서 진압 당할 마음이 돌멩이처럼 떨어져내릴 것을//

화분 / 신용목
어느 날 화분이 배달되었다// 나에게도/ 땅이 생겼다 부드러운/ 흙, 나는/ 저기에 묻힐 것이다// 화원 앞을 지나다 보면 유리창 너머/ 관짝들이 황홀하게 놓여 있다 아름다운 봉분처럼 자라는 나무들, 꽃들// 스무 평의 적막에도 햇살과 바람이 흠모하듯 스며와/ 지금은 저기에 양란이 꽃을 피우고 등 구부린 시간이 신혼처럼 살고 있다// 내 무덤은 향기로울 것이다/ 먼 나라의 춤을 푸는 나비처럼은 아니지만, 언젠가 꽃이 진 허공, 그 맑은 높이에 나는/ 내 영혼을 띄워둘 것이다// 저 둥긂을 안고 기다리면 아프지 않게 늙을 수 있겠다/ 수치를 꽃대처럼 비우고 나면/ 거친 그리움도 이제는 자연사할 수 있겠다, 있겠다// 어느 날,/ 술 취한 발이 화분을 깨뜨리고 갔다//

산수유 / 신용목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이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 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햇살에 걸려 잔 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文書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대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을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은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

꽃의 빙의 / 신용목
꽃이 허공에서 작두를 탄다// 바람은 꽃의 법당이었다// 봄 논 활대로 휘는 물살 법석에 저녁의 시위가 팽팽하다 몸 바꾸는 흰 꽃, 붉은 꽃// 오래 잊은 이의 품새를 닮았다/ 이승에 풀린 이승의 법계// 저 춤사위 어디쯤, 촛대를 꽂고 판을 벌이고 싶다/ 징을 쳐주고 싶다// 지구는 밤낮을 섞으며 돈다 배냇적 수술칼에 잘려난 버들치의 울음을 들려다오!/ 이승으로 열린 저승의 입// 기름불에 쫓기는 고라니의 비명을 전해다오!/ 이승으로 열린 저승의 귀,// 낮밤을 섞어 꽃물 지는 노을이/ 오래 잊은 이의 낯빛을 닮아서// 무논에 비친 애장터 가막골이 휘는 물살에 한 법 한 법을 흔들어 매는 저녁/ 개구리가 폴짝, 가막골을 넘는다// 가막골 흰 꽃 건너 붉은 꽃//

민들레 / 신용목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 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 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목련꽃 지는 골목 / 신용목
빵 봉지 날리는 골목을 지나왔다/ 누가 알맹이만 먹고 버렸을까 알맹이를 담고, 껍질이 된 누구!/ 봉지를 찢고 빵을 먹었다, 내 몸 빵 봉지가 되어/ 환하도록 골목을 쓸려다녔다/ (목련나무 빈 둥치에 걸려 넘어지다 재개발 담장 붉은 글씨에 찔려 뒤집히다)// 빵빵하게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몸 어딘가 쭉 찢어져/ 아이가 발로 차고 지나갔다 쥐가 뒤집어쓰고 달아났다/ 누가 봄을 여기다 찢어버렸다 먼지 바닥에 하얗게 쏟아져 걸음걸음 구르는,/ 누가 봄을 다 먹어치웠다// 먹어치워, 봄의 껍데기가 되었다/ 봉지가 되었다// 바람이 나의 봉지였다 ― 바람은, 몸 어딘가 툭 터져 있는 허공!/ 빵 봉지 날리는 골목을 지나왔다//

꽃들의 귀가 / 신용목
관이 이동한다 땅을 덮은 아스팔트를 따라/ 둥근 바퀴를 달린다/ 어디에 닿아도 무덤이므로//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다 풀잎도 지기 전에/ 먼저 뿌리를 태운다/ 어디를 가도 화장터이므로// 모든 행성은 천국을 향해 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누구도 태어난 곳에서 죽지 못한다)// 나는 버스 안에 있다/ 이 별에서 왜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역을 맡았을까/ 사각의 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지 못했다// 나는 시간의 부장품이다/ 삶이 녹슬고 있다//

모래상자에 꽃 한 송이 / 신용목
사각의 방에는 외미닫이 창문이 달려 있고 밤낮을 보아도 풍경의 모서리는 모두 네 개/ 날마다 벽지 속에서 길을 잃는 바람이 있다 꽃 단 상여가 고개를 넘는 것은 흔한 일,/ 건기의 무늬가 덜컹거리며 계절을 넘어가고// 밤낮을 돌아도 계절의 모서리는 모두 네 개// 중력은 가장 긴 못으로 나를 바닥에 박아버렸다? 이것이 고행의 형식이라면 우리는 어쩔수없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다// 중천을 그으며 형광등은 마른 모래를 쏟아낸다 꽃 핀 사내가 길을 잃는 것은 흔한 일,/ 사막 가운데 모래산이 생겨났다 사라질 때// 그 모래시계에 맞춰 우주가 회전하리니/ 모든 무늬는 기록이다 해와 달의 지문인 바람이 몸의 문서에 찍어놓은 얼굴로 누워// 이 生과의 계약이 오래 아프리라는 것// 밤낮을 살아도 묘혈의 모서리는 모두 네 개,/ 커튼 사이로 어제는 찢어진 치맛자락을 펄럭거리고 창을 열면 한꺼번에 오늘이 쏟아져 들어왔다//

옥수수 대궁 속으로 / 신용목
뒤안을 돌아보는 정오, 어머니 묻어둔 몇 점 곡알이 어느덧 옥수수로 처마의 키를 잽니다. 서성이던 마음이 시절을 타느라 고향의 한때 귀 나간 그림처럼 걸려 있는데, 구렁이도 참새도 떠난 이곳에 한낮의 볕이 내려와 순하게 덧칠을 합니다. 이 하루 한세월쯤 그저 보내도 좋을 곡식들, 흙 속에 무엇을 두고 와서, 몸 밖으로 쿡쿡 열매을 밀어내고 옷수수 늙은 수염을 몸빼처럼 펄럭입니다. 그 펄럭임의 대궁 속, 대처를 돌아온 자식이 세월도 바람도 아닌 그 깊은 속을 보고 싶어 까칠한 마디 슬며시 쥐었을 때, 나는 그만 대궁마다 가득한 어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상을 차린 어머니가 마당까지 나서 때 잊은 막내를 불렀지만, 나는 이미 어머니 캄캄한 몸 속에서, 간간이 늙은 음성이 어머니를 빠져나가 햇살에 머리를 받고 스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과 고르는 밤 / 신용목
희디흰 손으로/ 사과를 고르는 여자 오늘 밤/ 아이를 가지리/ 사과 속살같은 애가 서리// 청과물상회 앞에 놓인 과일들을/ 백열등 흰 깃털이 내려와 품어주고 있다/ 품어 늦도록 부화하고 있다// 벽에 세워진 리어카 허연/ 배를 드러내고/ 헛되이 돌려보는 바퀴처럼// 겨울밤 언뜻 눈에 들어온 청과물상회 앞에/ 그만그만한 무게로 놓여 있다// 제 몸으로 무덤을 삼는 영혼들이/ 무덤을 껴입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나이스 운동화 / 신용목
외발의 사내가 강둑을 걷고 있다/ 흙을 딛는 왼발과// 둑을 짚는 목발이/ 서로를 밀며 나아갈 때 그 사이 허공을 딛는 오른발은/ 중심의 무거운 추// 앞뒤로 흔들며 수차를 밟는 저녁이 어둠 속으로 강물을 길어낸다/ 제 몸을 다 헐면 남게 되는 발자국// 목발에도 신발을 신겨주고 싶다// 열여덟부터 나의 뒤축은 왼쪽만 닳아 하교의 저녁마다 강둑/ 시멘트에 오른쪽 뒤축을 갈았네// 세워보면 앞뒤로 흔들리던 신발// 왼발을 갈 수는 없었으므로/ 갈려나간 얼굴의 석양 앞에서/ 나는 오른쪽 신발 가득 강물을 퍼와 마른 허공에 뿌렸네// 한 발자국 어둠이 헐리지 않도록/ 앞뒤로 흔들며 수차를 밟는 저녁// 외발의 사내가 강둑을 걷고 있다 땅 위에 새기는 왼쪽 발자국과/ 바람에 새기는 오른쪽 발자국// 어둠은 강물이라는 신발을 신고 있다/ 강둑이라는 목발과//

오 초의 기술 / 신용목
그의 침대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 누워서 달려가는 오 초 뒤의 세상―꿈의 어디쯤에서 생시를 더듬을 때/ 깨어나 돌아보는 오 초 전의 세상,// 바퀴는 우연을 통과한다 진행하는 기술 정지하는 기술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기술// 잠의 문이여, 오 초 뒤의 저택은 백 년 전의 저녁과 닮았고/ 오 초 전의 현관은 백 년 뒤의 아침을/ 바퀴 달린 침대가 통과하고// 잠의 문에 달린 자물쇠처럼/ 백 년이 열리고 닫히는 기술// 바퀴는 도는데 어느 순간 구른다 서로 반대로 도는 톱니의 맞물림,/ 지구가 식탁인 지렁이처럼/ 지구가 무덤인 사람들에게// 회전하는 것들이 던지는 농담―꿈과 생시가 응급실 침대처럼 교차한다 잠이 들 때 깜빡 잠을 깰 때// 오 초 동안 연습되는 살인의 기술/ 어차피 몸은 바람의 미래이거나 모래의 과거이거나/ 바람이 모래를 감고 소용돌이치거나 그 저택이거나//

삐라의 나라 / 신용목
귀순은 없다/ 왼손으로만 바람과 악수하는 나무들/ 군중 속에/ 수천 장의 박수 소리// 버스 창이 연발로 햇빛을 투척하고 지나가면/ 왜 나무를 가로수라 부르는지 안다// 좌판 노인이 마는 국밥 속으로/ 가을이 왔다/ 두 장 천 원의 신발 깔창과 세 통 천 원의 대일밴드/ 가격은 낙엽을 닮았다/ 우수수수// 목에 걸린 꽃다발과 손 흔드는 환호의 나라/ 자주 꿈을 꾼다/ 보는 곳마다 팔랑개비가 돌고/ 만국기여 한 장씩 떼어내며/ 온다 오지 않는다 온다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들이 어귀마다 신발 깔창처럼/ 잠들어 있다 대일밴드처럼/ 국밥 위에 툭/ 내려앉는 낙엽처럼 초청강연 플래카드가/ 공원 하늘에// 오래 꿈을 꾼다 있지도 않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 가로수가 오른손 가득 햇빛을 들자/ 수천 마리 새들이 하나씩 종을 물고 날아올랐다/ 동쪽 하늘에/ 환한 불빛을 달고// 비행기가 나타났다//

우연한 서수序數 / 신용목
아버지의 세 번째 친자이고 어머니의 구 번째 義子이다 꼭 같은 서수일 필요는 없다 나에게 세 번째인 그녀와 그녀에게 두 번째인 나처럼, 신호등의 순서와 버스의 차례를 보도블록 칸칸으로 밟으며// 서점에서는 고객이고 고지서에는 체납자,/ 자정에는 애인이 된다// 사번출구 앞 웨이터 유재석의 명함은 몇 장째일까 꼭 같은 呼稱일 필요는 없다 두 번째로 간판이 바뀐 순대국집에서 아득하게 떠는 첫 술과 마지막 술의 국물처럼// 한 옥타브 높은 파 음계의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파 음의 십육분음표로 앉아 오선지 다섯 칸이 다 차도록 술을 마신다 누군가의 첫날이고 누군가의 끝날이며 나의 일만이천오백이십오일째 날, 어떤 이별에게는 일백구십사 일째 영원한 부재의 하루이다// 나는 형제들 중 다섯 번째 孤兒이다.//

공터의 달리기 / 신용목
오늘은 당신 마음을 말아쥐고 계주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 눈사람이 두 번째 눈사람에게 두 번째 눈사람이 세 번째 눈사람에게. 결승점을 통과하면 쓰러져 엉엉 울겠습니다. 서로 키를 바꾸며 서로 표정을 바꾸며 서로 그림자를 바꾸며. 오늘 당신 마음은 따사합니다―달궈진 불판처럼. 오늘 당신 마음은 붉습니다―불판의 고기처럼. 한 점 불덩어리를 삼키고 죽음이 살찌는 한낮. 뜨거워 뜨거워 뜨겁게 달리겠습니다. 기꺼이 먼 석양 붉은 물살이 되겠습니다. 그러고도 오직, 여백인 나.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다 돌고 나면 겨울은 공터만 남겠지요. 트로피처럼 바닥에 놓인 검은 모자와//

침묵은 길지 않았다 / 신용목
그녀는 너무 멀리 왔다/ 돌아 갈 수 없다/ 바퀴의 제단에 뿌려진 붉은 피!/ 아스팔트가 성스럽게 받아내고 있다 살갗속에/ 단단한 슬픔이 흩어져 환호성치고 있다/ 이른 아침, 그녀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성단의 첫 참배자였던 자신의 손에 쓰레기봉투가 들려져 있기 때문이다/ 서둘러 의식이 시작되고/ 경광등 불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잠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이 지닌 마지막 습성이 그들을 그 자리에 서 있게 했다/ 얼마후, 군중을 헤치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한눈에도 그가 급작스런 의식의 제사장임을 알 수 있었지만/ 그는 너무 늦게 왔다/ 그녀는 멀리 갔고/ 쫓아가기엔 변심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지만 그가 주저 앉아 입을 열었을 때 세상의 모든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내는 소리는/ 물 속에서 키웠던 욕정이 허물어지면서 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녀를 향한 마지막 발기처럼 붉게 부푼 얼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간의 빈 수레가/ 원을 그리며 돌고, 우주의 한 골짜기가 그렇게 무너졌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바퀴들은 다시 소리를 내며 구르기 시작했고/ 불안한 사람들은 또 다른 성단을 찾아 떠났다//

새들의 페루 / 신용목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저녁에 / 신용목
사선(斜線)으로 떨어지는 저녁, 옆구리에 볕의 장대를 걸치고/ 새가 운다/ 저녁 하늘은, 어둠을 가둔 볕의 철창/ 저녁 새소리는,/ 허공에 무수히 매달린 자물통을 따느라/ 열쇠꾸러미 짤랑대는 소리/ 저녁 감나무에, 장대높이로 넘어가는 달//

그 저녁이 지나간다 / 신용목
바람이 가로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산발의 여자가 남자의 멱살을 흔드는 것처럼 버스로 지나가는 신촌 하늘에 노을이 쇠가죽처럼 걸려 있다 그을린 집들을 빠져나온 연기가 해꼬리에 선선히 몸을 주는 가을 남자는 노란 윗도리 꼼짝 않고 서 있는데 남자를 치다 쓰러진 늙은 여자여 제풀에 손 놓고 한 세월 울고 있다 우두두두 길 위로 떨어지는 은행알들 터져 또 여식처럼 캄캄한 골목 불빛 뒤로 사라지고 객지에서 속살처럼 불거지고 누구도 사연을 묻지 않는다 노란잎을 바라보는 눈망울을 버스는 어디론가 실어 나르고 아무도 말리지 않는 이 가을 노을이 싸움처럼 번지는 건너편 차창으로 장의차 한 대 지나간다 그 저녁이 지나간다//

형틀 숭배 / 신용목
이 마을엔 처형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어 높은 옥탑마다 형틀을 꽂고 찬양의 공력을 공중에 띄운다/ 형틀 붉은 형광의 꼬리를 잡아끄는 바람,/ 십자의 그림자가 깔리는 아침마다 잘린 발소리가 바지에 검은 때로 올라앉았다/ 기도의 통성이 젖은 무늬로 땅을 덮는 날들/ 나는 까치발을 하고 옥상을 오르내리지만/ 그림자만 이따금 옥탑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아무리 못을 박아도 밤은 구멍나질 않았고/ 형틀에 감기는 바람만 서쪽하늘에 붉은 피로 굳어가는 저녁, 어떤 처형으로라도, 오래전 당신이/ 이곳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를 물었던 것처럼/ 내가 이곳에 버려진 이유를 묻고 싶었다, 재개발 연립 옥상에 널린 빨래가 흰 바짓가랑이를 힘차게 놀리며 바람 속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혀의 해안 / 신용목
저녁이 발을 헛디딘 곳 - 지팡이를 빚으러 가야 하네/ 물은 왜목의 좁은 해협을 지나며 어촌 불빛에 묽은 뺨을 건넨다/ 누가 제 혀를 잘라 서쪽하늘 붉게 기웠는가/ 섬 산 능선 늦바람에 감기는 고백도 되지 못하고 죽어서야 입 벌리는 조개들, 무슨 말을 삼키려다 속을 태웠는가/ 석양에 넘어진 저녁 - 지팡이를 건네러 가야 하네//

권태로운 육체 / 신용목
소래 뻘밭 비스듬한 포장집에서 꽃게를 삶았다/ 앞치마의 주인네가 엉거주춤 게의 앞뒤를 잘랐다// 붉은 살 속에 흰 뼈를 감추고 간 나는/ 붉은 뼈 속에 흰 살을 숨긴 게를 본다// 그렇게 안방에서 내일 죽을지 모를 아이의 눈동자를 보았다/ 카메라에 배고픈 양손을 내미는 반세기 전 아버지를 보았다// 칠면초 갯내를 만졌던 바람은 내 척추를 찌르지 못해, 빙그르르 포장을 두드리고 간다/ 가도 낯빛만 붉혔을 뿐// 태양을 겨누어 일제히 솟구치는 원주민의 창처럼 서 있는 노을처럼/ 뼈마디 꺼내놓고 붉도록 맞서본 적이 없다// 뒤집어 입은 외투처럼 자족의 美에 취했으므로/ 내 몸은 오랫동안 치욕을 사육해왔다, 발버둥을 버린 갑각류의 몸// 마음으로 결박한 영혼의 유배지// 낡은 철교 위를 걷듯 쇠 부딪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상처였으니 몸에 난 수술자국, 그 위로 기차를 달리고 싶다// 서둘러 협궤의 저녁을 통과하고 싶었다//

울고 있는 여자 / 신용목
봄 오는 놀이터 누운 의자에/ 한 여자가 우는데// 그냥 물린 아침상 흰빛 밥알처럼/ 묽은 그늘을 입고/ 갓 지은 소복으로 놓였구나// 온몸 상여가 되어 광목필 지전처럼 떨리는데/ 마음의 장지를 찾아 먼 데 마음이 숨겨둔 길 가는 걸음에// 나무는 나무대로 아픔이 많아 저 가지들을 내고/ 마음은 마음대로 새로이 무수의 길들이 생겨나// 간두의 끝을 딛고 선 슬픈 애인이/ 물에 집니다/ 얼굴이 남긴 갈래의 길을 따라 시절의 깊이를 파고 파되/ 끝내는 닿지 못할 죽음의 등으로 물이 찹니다// 차되 기어이 넘치지도 못할/ 바람도 손 놓은 허량한 한 날 묘지의 공원에 소풍 온 마음/ 주소 없는 걸음 되어// 어디 목은쌀 눅는 산간에나 들어 잠이나 청하면 연잎/ 처럼 젖은 마음도 탈상의 기억을 돌아 끄덕끄덕 낡은 집/ 사립 안으로 그러나 봄볕에 늙으며// 울고 있는 여자 내 저 여자//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 / 신용목
물이 신고 가는 물의 신발과 물 위에 찍힌 물의 발자국,/ 물에 업힌 물과 물에 안긴 물/ 물의 바닥인 붉은 포장과 물의 바깥인 포장 아래서// 국수를 만다// 허기가 허연 김의 몸을 입고 피어오르는 사발 속에는/ 빗물의 흰머리인 국숫발,/ 젓가락마다 어떤 노동이 매달리는가//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저편을 기다리는/ 궁동의 버스 종점// 비가 내린다,/ 목숨의 감옥에서 그리움이 긁어내리는 허공의 손톱자국!/ 비가 고인다,// 궁동의 버스종점/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이편을 말아먹는,// 추억이 허연 면의 가닥으로 감겨오르는 사발 속에는/ 마음의 흰머리인 빗발들,/ 젓가락마다 누구의 이름이 건져지는가// 국수를 만다// 얼굴에 떠오르는 얼굴의 잔상과 얼굴에 남은 얼굴의/ 그림자, 얼굴에 잠긴 얼굴과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들/ 얼굴의 바닥인 마음과 얼굴의 바깥인 기억 속에서//

맹아이며 농아인 -유월 용산 / 신용목
맹인이며 농아인 사람은 점자를 읽으며 음악을 이해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적의와는 연대 같은 것- 잊고 싶은 일에만 이름을 써넣는 오랜 습관이 있다// (이천구년 유월의 밤이 지나가고 있다)/ 죽음에게 죽음을 묻지 마라 모든 죽음이 순교가 될 때까지// 성지는 순례자를 환영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사람을 묻지 마라 모든 순교가 일상이 될 때까지/ (이천구년 유월의 낮이 지나가고 있다)// 밤하늘은 매일매일 페이지가 찢어지는 거대한 점자책이다 내가 음악을 이해하는 일은 적의와의 연대 같은 것- 잊고 싶은 이름들을 모두 습관처럼 눈 멀고 귀 먹는다//

낮달 보는 사람 / 신용목
기계 소리가 들리는 봄날의 공장 뜰/ 황갈색 모자에 고개 눌린 노인이/ 담배 한 대 물고 나와 낮달을 본다/ 자신의 해골을 너무 자주 들여다본 사람/ 피워 올리는 족족 담배 연기는/ 낮달이 된다/ 새가 하늘을 가위질하며 간다//

우물 / 신용목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다//

허공에서 감자를 캐다 / 신용목
해의 알, 눈 감을 때만/ 보이는 검은 알/ 붉은 줄기에 달린 감자,/ 캐러 간다/ 눈 뜨면 불타는 감자밭/ (아이들이 허공에 대고/ 감자를 먹이고)/ 눈 뜨면 환하게/ 재가 되는 감자밭,/ 눈 감고 간다/ 죽은 친구를 불러 간다/ 잠든 애인을 깨워 간다/ 바람 이파리 바람 이파리/ 볕 쨍한 대낮 공원,/ 목숨이 호미 같다/ 내일은 비/ 호미날처럼 꽂히는/ 비, 감자알 같은/ 가슴팍을 내리치리라//

어둠에 들키다 / 신용목
숲속에 집을 짓던 때도 있었나 집 속에 숲을 만든 공원에서 어둠 속에 불을 켜던 때도 있었나 불빛 속에 어둠을 모신 화단 앞의 기다림 먼 가등이 제 발을 뻗어 그 끝 연자귀 붉은 꽃잎 위에 간신히 흔들릴 때 꽃잎의 붉은 볼을 순하게만 더듬는 내 눈을 희번덕, 발광하는 눈동자가 깨물었다 연한 살 꽃잎도 상처를 품고 피나 불 없이도 빛을 내는 눈동자처럼 상처 겉에 살을 입혀 세운 몸 등진 자리마다 뭉텅이씩 어둠은 또 어둠끼리 한몸으로 사나 캄캄한 짐승은 내 안의 어둠까지 불러내며 눈 사이 간격을 좁히는데 먼 빛을 가리고 선 나도 연자귀도 어둠의 가죽, 한몸의 짐승으로 사는 눈동자는 또 얼마나 많나 어둠속의 당신과 나처럼 어둠의 깃털을 달고 어둠 밖을 바라보는 캄캄한 맹수들//

오래 닫아둔 창 / 신용목
방도 때로는 무덤이어서 사람이 들어가 세월을 죽여 미라를 만든다// 골목을 세워 혼자 누운 방/ 아침 해가 건너편 벽에 창문만 한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환한 저 사각의 무늬를 건너// 세상을 안내하겠다는 것인가 아이들 뛰는 소리 웃음 소리 아득히 노는 소리 그러나// 오로지 그녀를 통과하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녀의 몸에 남은 지문에 검거되어 영원한 유배지에서 다시 부모가 되어야 한다// 몇 번의 바람이 문을 두드리고 지나갔지만/ 햇살이 방바닥을 타고 다시 창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일어나질 못했다/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곳으로 열려 있는 추억처럼// 어떠한 발굴도 뒤늦은 일인 것을/ 낮에 뜨는 흰 달이 모든 무덤을 지고 망각을 향해 건너가는 캄캄한 세상의 내부에서// 언제쯤 내가 만든 미라가 발견될지 모른다// 창문 너머 불타는 가을 산/ 그 계곡과 계곡 사이에 솥을 걸고 싶다 바람의 솥 안에 눈송이처럼 그득한 밥을 나의 잠은 다 비우리라//

거미줄 / 신용목
아무리 들여다봐도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세월은 잠들면 九天에 가 닿는다/ 그 잠을 깨우러 가는 길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많이 향하고/ 길 너머를 아는 자 남아 지도를 만든다// 끌린 듯 멈춰 설 때가 있다/ 햇살 사방으로 번져 그 끝이 멀고, 걸음이 엉켜 뿌리가 마르듯 내 몸을 공중에 달아놓을 때/ 바람이 그곳에서 통째로 쓰러져도 나는/ 그 많은 길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작은 것들 날아와 길 잃고 퍼덕일 때, 발이 긴 짐승/ 성큼 마지막 길을 가르쳐주는// 나는 너무 큰 짐승으로 태어났다//

해변 / 신용목
해변에서/ 읽던 책을 덮어두고/ 죽어 있는 돌과 살아 있는 돌을/ 골랐다/ 젊음이 유행하던 계절이었다/ 누가 지은 집일까, 구름은 자주 배관이 터지는 집/ 바닥을 파보겠다고 얼굴을 때리는 비/ 뛰어와/ 다시 책을 펼쳤을 때/ 등장인물들은 다 짐을 챙겨 떠나고 없었다//

유령들의 물놀이처럼 / 신용목
밤은 먼 하구에서부터 대지의 터진 강물을 달빛의 바늘로 가늘게 뜨고 있다// 유령들의 물놀이처럼 바람// 자자/ 왜 생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잘 보이는가// 자자/ 생각의 입이 터져 노래를 부르는 노래방 간판이 꺼진다//

꼭지점 / 신용목
태풍이 해안을 지나가고 있다고 했다. 선풍기가 돌아가는 곳에서 날씨의 모양을 상상했다.// 소라를 닮은 여름.// 둥글게 몸을 말고 자신에게로 향하다 보면, 점점 뾰족해지다가 뾰족한 끝에서 어느 순간 사라질 것이다. 선풍기 뭉게구름 선풍기 뭉게구름, 아무 뜻 없이 선풍기 앞에서 뭉게구름을 떠올리다가 선풍기뭉게구름선풍기뭉게구름, 중얼거린 일조차 잊은 채 밥때를 맞는 것처럼,// 구름은 제가 구름으로 불리는 걸 몰라서 비를 내린다.// 물이 끓는 소리는 물에 찔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열어보면, 터져서 냄비 속에 담겨 있는 중얼거림처럼,// 오늘 찌개는 좀 짜다./ 물을 더 부을까?// 화상병동 문 앞에 꽂혀 있던 이름을 주머니에 넣고 왔다. 선풍기에 대고 아아아아, 하면 펼쳐지는 해안처럼,// 여름은 제가 여름으로 불리는 걸 몰라서 가을이 된다.//

우리 / 신용목
“다시는 별을 쳐다보지 마.”/ 우주로 낭비되는 슬픔이 싫다. 자꾸만 쏟아지면 텅 비게/ 될 행성에서, 텅 빈 구름만 나뒹구는 행성에서// 천천히 해를 따라 걸으며 늙어가는 무리가 있다면,// 별빛에 찔리는 밤이 있고/ 이 행성의 푸른 공에서 절망이 바람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일그러진 채 굴러가는 뭔가가 있다면,// 그게 우리일까?// 눈보라의 미래, 물의 숲, 혼자 도착한 아침과 꿈의 정거장인/ 삶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가능한지 물어보는 슬픔으로// 우리는 있어서,// “다시는 별을 쳐다보지 마.”/ 그 말로 인해 다시 쳐다보는 밤하늘을 우리의 절망은/ 죽을 때까지 걷도록 선고받았다.// 끝없이 별빛에 찔리며 일그러진 뒤에도 굴러가는 달처럼.//

울음을 다 써버린 몸처럼 / 신용목
우리 모두를 가지고도 한번도 우리에게 오지 않은// 기다림처럼,// 비가 오다가// 어느 순간 신호등이 바뀌듯, 한발짝씩 누군가의 이름을/ 옮겨놓으며// 오래 걷다가 멈추듯,/ 비가 오다가// 미안해.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그래서 눈을 먼저 보낸다.//

지나가나, 지나가지 않는 / 신용목
이 시간이면 모든 그림자들이 뚜벅뚜벅 동쪽으로 걸어가/ 한꺼번에 떨어져 죽습니다. 아름다운 광경이죠. 그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 몸에서 끝없이 천사들이 달려나와/ 지상의 빛 아래서 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나의 시선과 나의 목소리와 거리의 쇼윈도에도 끝없이 나타나는 그들 말입니다./ 오랫동안 생각했죠. 깜빡일 때마다 눈에서 잘려나간 시선이/ 바람에 돌돌 말리며 풍경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거나,/ 검은 소떼를 끌고 돌아오는 내 그림자를 맞이하는 밤의 창가에서… 목소리는 또 어떻구요./ 투명한 나뭇잎처럼 바스라져 흩날리는 목소리에게도 내세가 있을까? 아,/ 메아리라면,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겠지요.// 갑자기 쇼윈도에 불이 들어올 때,// 마네킹은 꼭 언젠가 살아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아니,/ 끝없이 살해되고 있는지도 모르죠. 밤새 사랑했지만,// 아침이 오고 또 하루가 저뭅니다. 이 시간이면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환해지는 거리에서 태어났던 것들이/ 태어나고 죽었던 것들이 죽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꺼번에/ 깜깜해지는 거리처럼, 사랑하는 순간에 태어난 천사에게만/ 윤회가 허락될 리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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