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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맨발의 가능성 / 이성미

부흐고비 2021. 12. 9. 09:00

나도 사물에 관해 쓰려고 했다. 사물을 하나씩 불러보고 있었는데, 내 눈앞에 여자의 맨발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느새 나는 혼자 우기고 있었다. 맨발도 사물이라고요! 그 점을 설득하겠어요!

집에 오면 양말을 벗고 맨발이 된다. 내가 사물이라고 우기는 맨발은 이 맨발이 아니다. 집 안에 있는 태평스러운 맨발이 아니라, 외출복처럼 구두 안에 들어가 있는 당당한 맨발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내가 처음 맨발에 구두를 신고 외출한 날은 스물두 살의 여름이었다. 스타킹을 신었을 때와 달리 구두는 맨발을 찰싹 감쌌다. 발이 점점 끈적끈적해졌다. 샌들이 아닌 구두 속에서 맨발은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왜 좋았을까. 하나를 뺐다는 게 좋았다. 격식이 헐거워지고 살짝 흠집이 난 느낌도 좋았다. 그것은 어떤 경계선을 밟고 서 있는 느낌과 비슷했다. 양말 하나 벗었을 뿐인데.

내 눈길은 자꾸 발등에 가닿았다. 발등의 색과 구두의 색은 잘 어울렸다. 구두가 무슨 색이었는지 궁금하다면 맨발로 구두를 신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맨발은 어느 색의 구두와도 잘 어울린다. 흰 구두에도 빨간 구두에도 검정 구두에도.

외출하기 전에 옷을 입고 거울 앞에 맨발로 서면 그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양말은 역시 맨발이라고 느낀다. 바짓단 아래 드러난 맨살의 발목과 발등. 맨발의 그 질감. 미세하게 달라지는 색깔. 어떤 양말도 그 색과 질감을 넘어설 수 없다. 발등의 색은 신발 모양에 따라 달라졌다. 햇볕에 그을린 부분과 신발 속에 오래 잠겨 있던 부분이 발등에 그려놓은 선. 맨발은 매일 신어도 단조롭지 않은 양말이다.

여름이 되면 맨발은 양말과 스타킹을 대체하며 양말로서의 가능성을 선보였다. 샌들을 신을 때도 꼬박꼬박 양말과 스타킹을 신어야 결례가 아니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차차 여름의 맨발에 너그러워졌다. 이제 여름이 아니어도 맨발은 구두와 운동화 위에서 다채로운 색과 질감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한다. 정장을 갖춰 입고 맨발에 하이힐을 신은 모습은 더 이상 파격도 아니고 결례도 아니다.

신발 속에서 당당해진 맨발은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가서도 떳떳하게 굴었다. 맨발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의 사회적․심리적 범위가 넓어졌다. 친구의 집에서 식당으로, 좀 더 불편한 자리로, 좀 더 격식 있는 자리로. 우리는 친구나 친척이 아닌 낯선 손님의 맨발을 종종 보게 되었고, 내가 어색한 손님으로 맨발을 보이고 앉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경우도 잦아졌다.

신발을 신기 전에 짐작해본다. 오늘 갈 곳은 맨발로 가도 괜찮은 자리인가. 애매할 때는 가방에 양말을 넣는다. 그리고 신발 속에는 맨발을 넣고 나간다. 나는 필요에 따라 맨발을 사용하거나 양말을 사용할 것이다. 가방에서 양말을 꺼내 신으면, 그때부터 맨발은 여분의 양말인 셈이다.

맨발이 집 밖에 있다고 해서 사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맨발은 집 안에 있는 것처럼 느슨하게 집 밖으로 나왔다. 이때 집 밖은 심리적으로 집 안 마루나 마당과 마찬가지이다. 슬리퍼를 끌고 동네 가게든 친구 집이든 나선 길. 그 뒤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어떤 맨발을 생각한다. 사물이 될 가능성이 사라진 맨발. 그 맨발은 진실을 드러내는 섬뜩한 신호이다. 불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아무런 대비 없이 찾아온다는 것. 우리는 일상이 계속되리라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은 무참히 배반당할 것이라는 점. 지금 내가 그 맨발의 주인이 아니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맨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라도 그 맨발이 될 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그 맨발의 주인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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