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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말은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신세가 처량해 결심을 바꿨다. 나는 한평생 입으로 다 삼켰다. 평생 일해도 남는 게 없는 인생처럼 남은 건 없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도 날개를 달았고 고속철은 거짓말처럼 몇 초 단위로 과거를 만들어 낸다. 선풍기는 소음 없고 회전 날개도 없이 냉각 미풍만 일으킨다. 컴퓨터는 아예 며칠 사이로 바뀐다.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것과 같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러는데, 기본 골조나 메가톤급 진동 소리나 제어 기능은 고리짝 시절 그대로면서 시근 버근 요란만 떠는 거 있다. 바닥만 쎄빠지게 기어 다니는 팔자로 태어난 나, 청소기다. 어금니가 뽀사지도록 변화란 변화는 모조리 휙 빨아들여 마셔버릴까 생각 중이다. 한번 눌러앉았다면 자리를 고수하고 웬만하면 이사도 가지 않고 직장도 옮기지 않는 곗놀이 하는 여편네나 다방 얼굴마담 말하자면 ‘아줌마리언’이랄까. 기氣가 입으로 올라가 악다구니만 이만저만 쎄다. 포커의 Q(마담)나 미스터로 통칭하는 K(킹) 같은 박력이다.

인간들은 나를 내연녀 취급한다. 안방이나 거실에 두지 않고 그냥저냥 윗방이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이나 창고에 비비 틀어 처박아 두었다가 아쉬울 때만 꺼내어 쓴다. 몸이 구 척이나 됨직하니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나 어쩐다나. 한마디로 필요는 하지만, 간수하기 성가시다는 거다. 그러면서 초란이 같은 컴퓨터는 받들어엇 총!이다. 행여 바이러스 먹을까 봐 비위를 맞추고 애면글면한다. 먹을 거 없어 바이러스를 먹는감? 뺨따귀 한대 얻어맞기에 십상이다. 나는 비위가 상해 허파가 터지려고 한다. 컴퓨터 그년, 허리는 모르긴 몰라도 한 아름하고도 반은 실히 될 거다. 얼굴은 떡판만 하여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한심스럽다. 당최 이해할 수 없다. 인간들은 컴퓨터라면 곰보도 이쁘고 주근깨투성이도 이뻐서 책상 위에 모셔놓는다. 컴퓨터는 필요 이상으로 얼굴에 희망이라는 것을 번들번들 칠해 가지고 아는 척은 혼자 다 한다. 본처라도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운다. 꼴값이란 말이 있다.

나는 마룻바닥에 꼬꾸라져 자다가도 시동만 걸면 몸을 착 엎드리어 꿩 기듯 긴다. 두 개의 동그라미를 왁다글왁다글 굴리며 사슴처럼 날렵하고 탄탄해 뵈는 몸집으로 안 살림을 곧잘 휘어 나간다. 주정뱅이 이빨 가는 소리 같은 괴성을 지르긴 해도 그건 한 줌 먼지도 남기지 않으려고 빨아들이는 복식호흡 소리다. 현대인은 못 먹고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좋아한다. 흠이 있다면 머리가 멍청해 죽이 끓는지 밥이 넘는지 주인님 사생활에 관해 통 모른다. 남의 빚 얻어 쓰는데 뒤 도장 눌러 주는 백여시 같은 컴퓨터보다는 낫지 않는가? 내가 본처라는 증명은 또 있다. 컴퓨터는 회사나 피시방에 가면 빌려 쓸 수 있지만, 나는 빌려 쓰기엔 좀 뭐하다. 내 것이어야만 한다.

어찌 된 일인지 내 운명은 인간들과 삼각관계다. 나로 인해 정이월 대독 터지는 육박전이 이 집 저 집 예비되어 있다. 남편은 집에서 소주나 홀짝대며 허송세월하고 부인이 돈 벌러 나가는 가정이었다. 밤늦게 돌아온 부인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서 나를 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분풀이 저 화풀이 한데 얹어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뚝심 좋은 남자도 여자 입심은 못 당하는 법이다. 폭력으로 나오는 수밖에. 북한 김정은이가 코너에 몰렸다면 핵 가지고 깐족대는 것과 같은 심보다. 튀어 오르는 고무 뿔처럼 일어나 코를 벌름벌름 넘싯 거리다 소매를 훌훌 걷어붙이더니만 북통만 한 내 배를 발로 툭툭 찬다. 나를 번쩍 들어 바닥에 팍 패대기를 친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머리통이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말해 보시라. 내가 무슨 죄가 있어 반죽음 매를 맞아야 하는 건지. 시방도 생각하면 분하고 괘씸하다. 인간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못하지만, 나는 안다. 이미 그들의 관계는 어긋난 지 오래라는 것을. 나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는 것을. 인간은 나이가 들어도 남을 속여먹는 순발력 하나는 녹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지내시나요?’ 영화 <러브레터> 속 이츠키가 빈 벌판을 향해 물었던 말이다. 봄날 산벚꽃이 연한 커피 물을 들여놓듯이 여름날 소낙비가 쫙쫙 내리듯이 가을날 강물 소리가 늑골을 스치듯이 겨울날 진눈깨비가 창문을 때리듯이 꼭 만나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그는 명 털이 뽀송뽀송한 시절부터 내 주인 아줌씨와 죽이 맞았다. 성격이 갖고 취향이 비슷하고 지킬 것은 세상 무너져도 지키는 사이였다. 주인 아줌씨 집에 초대받아 오던 날 닝글닝글 웃기부터 하더니 박스 하나를 턱 내려놓았다. 주인 아줌씨는 근사한 집을 지었고 그는 축하 선물을 가지고 왔다. 노란색 몸통에 앙증맞게 엉덩이가 떡 벌어진 독일산 청소기 바로 나다. 주인 아줌씨는 독일제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날 밤 두 여자는 페치카 옆에서 잔에 포도주만 채웠다. 뭐랄까, 이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는 생生의 한가운데였다. 갚을 길 없는 부채를 안은 채 제3국으로 종적을 감추려고 준비 중이었다. 돈을 최우선으로 두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세계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쎄에웽 쎄에웽 쎄에웽 나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 머리로는 평생 고민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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