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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누룽지의 시간 / 허창옥

부흐고비 2021. 12. 22. 08:38

누룽지를 만들고 있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는데 오늘따라 간도 물도 맞지 않아서 짜고 텁텁했다. 불현듯 눌은밥이 생각났다. 눌은밥은 아주 오래된 부엌과 가마솥, 여인과 아이가 있는 정경 속에서 고소한 향기와 함께 떠올랐다. 그것은 아득해서 너무나 아득해서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의 흐릿한 빛깔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궁이의 불을 낮추어 밥에 뜸을 들기를 기다린다. 여인은 나무주걱으로 식구들의 밥을 펐다. 사랑방으로 건넌방으로 밥상이 들어가면, 솥바닥에 눌어붙은 밥에 물을 둘러서 숭늉을 만든다. 뜨끈뜨끈한 숭늉을 떠낸 후에 솥에 남은 눌은밥을 사발에 퍼서 묵은 김치와 소반에 올린다. “엄마 나 눌은밥!” 아이는 콧등에 땀을 송알송알 맺으면서 야무지게 먹는다. 그 맛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나이든 여인이 문득 그 눌은밥을 생각했다.

이제 밥을 지어도 눋지 않는다. 만들어야지. 라면의 뒷맛이 느끼해서 커피를 마시다가, 흐릿한 흑백시대에 태어나서 총천연색 시대를 살다가 마침내 디지털시대에 진입하게 된 여인이 인터넷 검색을 한다. 속이 몹시 불편할 땐 더러 누룽지탕을 먹기도 했는데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거나 마트에서 산 것이었다. 누룽지에 물을 부어 끓이니 탕이다. “프라이팬에 밥을 골고루 잘 편 다음 중불로 3분 약불로 7분 앞뒤 같은 방법으로.” 검색한 내용이다.

그렇게 할밖에. 쌀과 찹쌀, 납작보리와 현미를 골고루 섞어서 밥을 짓는다. 밥을 큰 대접에 퍼서 식힌다. 적당량을 프라이팬에 반반하게 편다. 휴대폰으로 중불, 약불 시간을 체크한다. 뒤집기를 하고 노릇노릇한 누룽지를 들어내고 다음 판을 올린다. 여러 판을 해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아서 작정을 하고 식탁에 앉는다. 조지 윈스턴의 앨범 December를 들으면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을 읽는다. 윈스턴은 한 바퀴를 돌아서 처음 곡으로 돌아오고, 책은 이미 여러 날 읽던 것이어서 브엔디아 가문의 끔직한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막바지에 와 있다.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곧 태어날 것 같다. 평화로운 누룽지의 시간과 들을 때마다 반하는 윈스턴의 연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심각하게 어두운 작품이지만 읽던 것이어서 그대로 읽는다. 시집이나 수필집을 펴드는 게 어울리겠지만 일부러 그러고 싶지는 않다.

누릇누릇, 그럴듯한 태깔과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둥근 누룽지판이 여섯 개 여덟 개 쟁반에 쌓인다. 얼마나 오래 먹겠다고 몇 시간 째 이러고 있다. 음악은 안드레아 보첼리로 바뀌고 책은 접었다.

토요일이라 퇴근을 일찍 했다. 손쉽게 해먹은 점심이 먼 그리움을 불러왔고 마침 시간이 비어있었다. 창밖 세상도 소란스럽고 내 안의 소리도 시끄러웠다. 세계는 그러니까 인류는 그 이름도 찬란한 코로나 때문에 집단우울증에 빠져있다. 나가도 들어와도 편치가 않다. 일 년을 훌쩍 넘기고도 그러고 있으니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어졌다. 빨고 말리기 좋은, 자주 세탁해도 그다지 상하지 않는 옷들만 돌려 입으며 쳇바퀴처럼 출근하고 퇴근하다가 주말이 되면 윙윙 세탁기를 돌린다.

쟁반 위에 쌓인 누룽지를 한참 바라본다. 부숴서 지퍼팩에 담는 일은 미루고 바라보는 시간을 즐긴다. 평화롭다. 고요하다. 시간과 공간이 다 그러하다. 소소한 불안과 큰 근심이 사라진 듯하다. 밖에 내리는 어둠이 창을 넘어와 거실에 번진다. 안드레아 보첼리의 목소리는 매력적이고 거룩하기까지 하다. 그 목소리 들을 때마다 참 감사하다.

라면 맛을 탓한 건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영상이 문득 그 시간에 떠올랐고 젊은 여인이었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와 누룽지와 나의 시간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어리광 같은 것이다. 그래, 응석이었다. 속상하고 불안하고 아픈, 안팎의 모든 일들을 어머니께 일러바치고 싶었다. 어머니가 등을 톡톡 두드려주면 속울음이 그칠 것도 같았다.

마스크 안에서 불안하고 몹시 불편한, 거의 전쟁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잘한 기쁨과 커다란 감사와 분에 넘치게 평화로운 시간은 있었다. 오늘 누룽지의 시간도 그러하다.



허창옥 수필가 1990년 월간에세이 등단. 수필집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길』, 『먼 곳 또는 섬』, 『새』, 『감감무소식』, 산문집 『국화꽃 피다』, 『그날부터』, 수필선집 『세월』,『섣달그믐밤』. 한국수필문학상, 김규련수필문학상, 대구문학상, 약사문학상 수상. 대구수필가협회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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