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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삼척으로 가는 길에 해발 720m의 높은 고개를 만난다. 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당하는 이 고개는 지명대로라면 ‘통리재’가 맞지만, 강원도 사람들은 똬리를 튼 뱀을 닮았다 하여 '때배이재'라 부른다. 삼척 도계리와 태백 통리를 오가던 영동선 열차가 높은 고도차로 한 번에 넘지 못해, 지그재그로 놓인 철로를 앞으로 뒤로 방향을 바꿔 올랐던 고개다.

누구는 삼척의 본 모습이 바다라지만 알 만한 사람들에게 삼척의 본모습은 산이다. 험하기 이를 데 없는 구불구불한 고갯길 정상에 차를 세우니 멀리 도시가 보인다. 벌써 수년째 산중 오지를 떠도는 내겐, 삼척은 험준한 산 아래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산언저리에 자리 잡은 시꺼먼 건물이 생경한 풍경을 연출한다. 삼척은 한때 ‘까막동네’로 불렸다. 검은 황금을 품고 젊은 사내들을 끌어 모으던 검은 청춘의 화려한 도시였다. 골목마다 ‘황금’을 캐기 위해 모여든 사내들로 왁자했고, 그들이 터를 잡고 가정을 꾸려 아이들 또한 왁자했다. 개도 지폐를 물고 다녔을 만큼 부유한 도시였다.

통리협곡에서 발원한 오십천 맑은 물은 깊은 산중을 굽이쳐 38번 국도와 이웃하며 도계를 적신다. 탄광지대인 도계면을 지나면서 오십천은 검게 변한 얼굴을 하고 동해로 빠져나간다.


통리재를 내려가 도계면 흥전리로 향했다. ‘검은 황금’, ‘어둠의 도시’, 시꺼먼 먼지가 삶의 시곳곳에 들러붙은 도시는, 그간 만났던 다른 도시들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몇 장의 사진으로 남겨보지만, 그늘 짙은 이 풍경이 꺼져가는 우리 삶 곳곳의 모습 같아 마음이 아리다

시꺼먼 공장 건물이 하천을 따라 쭉 이어지고, 공장에서 흘러나온 물은 하천을 검게 물들였다. 검으면 모두 ‘더럽다’, ‘탁하다’로 낙인찍던 관념들이 여기서만큼은 더럽거나 탁하지 않은, 검은 투명으로 읽힌다.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레일이 놓였다. 통행 차단 신호도 없이 길 한가운데 레일을 설치한 것은, 자동차나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탄광 앞 길목에서 빨간 모자를 눌러쓴 촌로 한 분이 길을 막았다. 모자에 쓰인 ‘산불감시원’이라는 글자가 반갑다. 얼른 차에서 내려 공손히 절터에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무사통과다. 산간 오지에서 촌로들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귀한 존재이므로, 나는 그분들의 말을 최대한 귀담아 듣는다.

“어르신, 절터까지 얼마나 되는지요? 많이 먼가요?”

“한, 두세 마장馬丈 족히 되지 싶소. 쭉 올라가면 되는데…, 길이 몹시 험하고 가팔라서 우째 갈려고…. 남자들도 힘들어해. 그러니 운전에 자신 없으면 여기 차를 두고 걸어 가슈.”

두세 마장…, 대략 1km. 정확히 거기에 있기만 하다면야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넌지시 절터에 관해 물었다.

“나는 까막눈이라 공부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다오.”

촌로가 수줍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친다.

얼핏 보아 그리 험하지 않은 길 같아 차를 몰았다. 폭이 점점 좁아지고 조금씩 가팔라지기는 했어도 오를 만했다.

산기슭에 외딴집이 보인다. 나무를 쪼개 덧댄 전형적인 너와집이다. 인기척은 없고 겨울바람만 드나든다. 문짝이 바람에 한없이 열리고 닫힌다. 음산하고 스산한 기운이 차 안까지 스며든다. 어디선가 도깨비가 ‘툭’ 튀어나와 심술로 해코지를 할 것만 같다.

이런 빈집을 두어 채 지나 한참을 오르니 갈림길이다. 직진과 우회하는 길, 그 가운데서 적잖이 당황한다. 쭉 올라가라던 어르신의 말대로 직진을 할까 하다가도 우회하는 길이 더 넓은 걸 보니 이 길인 것도 같다. 다시 내려가서 물어보자니 차를 돌릴 공간도 없다. 난감하다. 차에서 내려 한참 갈림길 가운데서 고민했다. ‘휴, 벌써 얼마나 높이 올라온 것인지…, 낮은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 있었다.

삼척시청에 연락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오른쪽 길이라고 했다. 쭉 올라가면 비닐하우스 한 동이 있을 것이고, 그대로 더 올라가면 농가가 한 채가 있을 거라 했다. 농가 뒤로 가파른 밭이 보이면, 밭을 가로지르라는 안내까지 덧붙였다. 12시 반, 점심시간인데도 세세히 응대를 해 준 것과, 급하면 언제라도 연락하라는 말에 따뜻함이 묻어났다. 20여 분 후, 잘 찾아갔는지 확인 전화까지 걸려 왔다. 낯선 오지에서 느끼는 전화 너머의 친절함이 한없이 고마웠다.

급경사 길을 오르니, 거짓말처럼 비닐하우스가 나타났다. 길은 끝나지 않았으나 운전은 멈춰야 했다. 벌써 몇 번째 바퀴가 헛돌았다.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세가 고도를 말해 주었다. 오금이 저렸다. 차를 이용해 더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을 담보한 미친 짓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카메라와 휴대전화만 챙겨 길을 나섰다. 오지의 시린 바람이 볼을 후려쳤다. 눈이 시리고 눈물이 났다. 오르면 오를수록 눈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하늘이 가까워졌다. 네댓 발자국 오르고 멈춰서 숨을 골랐다. 얼굴이 땅에 붙을 듯 가팔랐다. 반복의 연속이다 한겨울인데도 땀이 났다.

주변은 온통 산머루와 오미자 밭이다. 한 500여 m쯤 올랐을까 하늘 아래 농가 한 채가 나타났다. 그림 같다. 이런 오지에서도 사람의 흔적을 만나니 한없이 반갑다. 깨끗하게 정리된 마당과 가지런히 놓인 작업용 신발 두어 켤레가 주인의 단정한 손길을 대신했다.

인기척이 없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 같다. 한겨울, 산간벽지에서 만난 빈집에서 전해지는 반가움과 섭섭함이란 이런 것일까. 누구라도 달려나와 반겨주리라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 내 생각과 맞아떨어지는 이 서늘하고도 차가운 풍경이, 사람을 멀리하고자 떠나 온 내 본성을 정확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농가 뒤로 펼쳐진 밭을 유심히 살폈다. 능선 하나가 온통 밭이다. 대체 어디란 말인가. 밭 한가운데로 줄지어 찍힌 발자국들은, 화석처럼 꽁꽁 언 채 겨울을 나고 있었다. 선명한 사람의 흔적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몹시 갈구하던 것을 찾았을 때 전해지는 전율은, 오늘처럼 등골마저 오싹하게 했다. 발자국을 따라 밭을 가로지르는 동안 바람은 사방에서 날뛰었다. 로프에 의지해 위태롭게 암벽을 오르는 사람처럼, 바람막이 하나 없이 가파른 능선을 나는 혈혈단신으로 오르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고개를 드니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옆으로 나란히 이어진 돌담 같은 석축이었다. 석축은 자연 바위를 시작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큰 돌과 작은 돌을 고르게 끼워 쌓았다. 성곽을 쌓은 듯 거대했다. 이런 벽지에 이토록 웅대하게 쌓은 석축이라니, 다시 한번 놀랐다.

석축에 올랐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양쪽 능선을 따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히 너른 평지도 그러했지만, 수많은 그루터기가 평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광경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뜯긴 굵은 뿌리와 선명한 나이테를 보이며 ‘나 아직 살아 있다오.’ 하며 아우성치는 것만 같았다. 이들 하나하나에 어떤 사연이 얽혀 있을 것만 같은 묘한 감정이 옴짝달싹할 수 없게 했다.

대단한 절터다. 이런 높은 골짜기에 기와를 올리고, 불사를 벌이려면 엄청난 손길과 밑천이 필요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험지에 이처럼 엄청난 일을 벌였을까. 몇 차례 발굴조사에도 아직 절 이름이나 창건 시기, 창건자가 누구인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아직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깜깜한 절터일 뿐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왕이 임명하는 불교 최고 통솔자인 국통國統이 머물렀던 절로 보기도 한다. 삼척 향토지인 『척주지陟州誌』에는 ‘頓覺寺自楡峴北入壑十里돈각사자유현북입학십리’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느릅재인 ‘유현’에서 북쪽으로 심유한 골짜기 10리를 가 면 ‘돈각사’라는 절이 있다는 뜻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유현’이 도계 와 태백 사이에 표시되어 있고, 이 지역 사람들이 아직도 이 고개를 느릅재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 절터가 돈각사 터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발굴된 유물도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형태를 갖추었다. 청동관 2점은 경주 황룡사지 출토품과 형태와 크기가 흡사하고, 암막새와 가릉빈가문양의 수막새는 당시 신라왕궁 건축에서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수준 높은 유물이다. 학계에서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장인匠人을 파견하여 절을 지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국통國統’이 새겨진 비편과,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법당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금동번幡이 국내 최초로 출토되었고, 승려가 반드시 몸에 지녀야 할 18가지 물품 중 하나인 청동정병靑銅淨甁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절터 외곽엔 기와가 쌓여 있다. 얼마나 많은지 여러 개의 더미를 이루었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기와에는 연꽃을 비롯한 여러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러나 이것 외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발굴을 중단한 체, 덮개를 덮어 놓아 절터는 동안거에 든 듯 고요하다. 탑재와 석등재, 각종 석재가 숲에 산재해 있었다는데, 더 일찍 오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그루터기를 보니 겨울이 한없이 시리다. 이 많은 나무를 꼭 베어야만 했을까, 힘차게, 때로는 여리게 땅속을 뻗어가던 뿌리는 이제 스스로 생장점을 꺾어 고사할 채비를 한다. 나는 엎드려 뿌리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죽지 않았다. 다른 곳에 옮겨 심을 수는 없을까. 그때 뿌리가 움켜쥔 흙 속에 기와 조각 여러 개가 보였다. ‘아!’ 뿌리가 꼭 끌어안은 유구들을 세상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나무는 희생되고 있었다.

바람이 모질게 불었다. 절터 뒤 숲에서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이 소리를 낸다. 청정한 자연의 독경 소리다. 잠시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끝없는 독경 소리에 눈을 감는다. 새들이 지저귀고 거칠 것 없는 겨울 햇살이 마구 떨어져 내린다. 해발 700m에서 내려다보이는 남쪽 먼 산이 한없이 아래다.

언 땅이 햇살에 녹고, 젖은 골짜기를 널어 말리는 산들의 풍경이 너그럽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살아가는 짐승들이 절터를 서성이다 인기척에 놀라 숲으로 달아난다. 나는 한참 그렇게 앉아 볕을 쬔다. 사라졌던 새끼 고라니가 다시 내려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숲을 뒤지며 제 할 일을 한다. 그렇게 나와 고라니는 가까운 듯 먼 듯 서로를 의식한 채 각자의 시간을 즐긴다. 산중 깊은 침묵이 주는 귀한 인연이다.

‘절터’라는 말을 되뇐다. 이 두 글자엔 왠지 모를 쓸쓸함과 스산함이 스며있다. 비워진 곳에서 느끼는 이 차분함과 고즈넉함을 감히 ‘아름다움’이라 표현해도 좋을까. 과거를 거슬러 먼 어느 시절, 이곳에 머물렀을 국통도 나처럼 이곳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셨겠지. 나처럼 그저 저 풍경이 좋았을까. 나처럼 그저 저 새끼 고라니를 의식하며 세상의 평안을 염원했을까.

천천히 길을 내려간다. 봄이 산머리에 내려앉았다. 한낮이 되니 얼었던 땅이 녹아 질퍽하다. 신발에 엉겨 붙은 진흙이 한 짐이다. 이것을 여기 그대로 두고 가야 하는데 도무지 떨어지질 않는다.

치닫는 내리막길을 감당하지 못해 걸음이 속도를 낸다. 길이 굽어 도는 곳곳에 아찔한 천길 벼랑이다. 차를 중턱에 두고 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올라갈 때 보았던 너와집 앞을 서성인다. 폐사의 길을 걷고 있는지, 제법 바람에 삐걱댄다. 한때는 식솔들로 복작였던 따뜻한 집이었을 것이다. 삼척 골짜기 사람들은 대부분 가파른 산기슭에 화전을 일궈 살았다. 삶은 그런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스며들어 사는 거다. 천천히 들러붙어 서서히 그곳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그곳의 노예가 되기도 하는 거다.


다시 흥전리 갱 입구로 돌아왔다.

“뭣이, 볼 것 있던가요? 아이구매, 오래도 걸렸구려.”

산불감시원 어르신의 말에 반가움이 묻어 있다. 내가 오지 않아 걱정했던 모양이다.

“옛날에는 도계에 장 보러 다닐 때, 하장면面 사람들이 전부 이 산을 질렀다우. 그때 번듯한 길이 어딨소, 차도 없는 때라 하장에서 올라치면 이 길이 가장 빨랐제, 아주 옛날에는 느릅재 주변에 도적이 들끓었다잖소 날 저물면 그놈들 무서워 가질 못했다고 합니다.”

한번 봤던 얼굴이라 그런지 말씀이 익숙하다.

어쩌면 옛날, 이곳은 지금처럼 인적 드문 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중심길이었기에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그러니 국통이 기거할 만큼, 절은 크고 부유했을지도 모른다. 부처를 만나기 위해 밤낮 발길이 이어졌고, 독경에 모든 근심 걱정 내려 놓았을지도 모른다.

갱 안이 요란하다. 갱도 열차가 나왔다가 무엇을 싣고 다시 안으로 사라진다. 일상에서 괴리된 모습이다. 갱구 옆 배차계 사무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성이 회색 작업 복장으로 나왔다. 40년 넘도록 탄광 관리자로 근무 중이라 했다. 그가 갱구 안을 바라봤다. 갱 안에서 불빛 서너 개가 흔들렸다.

“어머, 저 멀리에서 불빛이 보여요.”

내가 말했다.

“안전모에 부착된 조명등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갱구 밖에서 작업자들을 맞았다. 안전모와 안전등, 방진 마스크, 장갑, 안전화로 무장한 작업자들은 모두 오십이 훌쩍 넘은 듯했다. 그들은 갱 안의 사정을 중년의 남성에게 보고했다. 수고했다며 어서 들어가 쉬라는 남성과 퇴근 인사를 건네는 작업자들 사이에 동질의 따뜻함이 흐르는 듯했다.

“곧 이 탄광도 문을 닫게 됩니다. 갱구에서 막장까지 대략 2km 정도 되는데, 매일 여기를 오가며 석탄을 캐던 한 식구들입니다. 지금 이 갱에서는 더 이상 석탄을 캐지 않습니다. 갱 안에 고인 물빼기 작업을 하느라 몇몇 작업자만 남았을 뿐입니다.”

도계의 첫인상은 춥고 쓸쓸했다. 어두운 삶의 비늘처럼, 검은 가루가 내려앉은 풍경은 적막했다. 태백과 함께 한때는 우리나라 탄광산업을 짊어졌던 대표적인 마을 중 하나였다. 탄광이 줄줄이 문을 닫고,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이 떠나면서 검은 황금을 캐는 까막동네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폐광촌의 그늘 짙은 언저리에 어느 시기, 불현듯 폐사한 절터가 나타났다. 외지에서 좀처럼 찾아들기 힘든 흥전리 고지대에 묻힌 거대한 절터는, 세상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다시 한바탕 야단법석의 시간을 펼칠 수 있을까.

쇠락의 시간이 가면 다시 번영의 시간이 찾아오듯, 까막동네의 내일도 먼 어제처럼 다시 북적이길 염원한다.

글,사진 박시윤 지음, 디앤씨북스 펴냄

 

 

⚫ 강릉 신복사 터 –천년 근심도 잠시 쉬어서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 박시윤

 부산 만덕동 절터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어찌 그릇된 것이랴 / 박시윤

 경주 용장사 터 - 주인 없는 허공에 발 딛고 서니 / 박시윤

 합천 영암사터 –눈 감고 들었네, 바람이 전하는 말 / 박시윤

 경주 감은사 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속초 향성사 터 – 그리하여, 오래오래 눈이 내렸다 / 박시윤
 고성 탑동리 절터 –볼 것 하나 없으면 어떠리 / 박시윤
 울진 구산리 절터 -바람이 흔들면 못 이긴 척 따라 나섰다 / 박시윤
 울산 운흥사 터 –구름에 들었는가, 안개에 휩싸였는가 / 박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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