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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 리스트에 써둔 ‘유선여관 일박’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대둔사 입구 너부내 개울가에 있는 그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싶었다. 매일신문에 ‘구활의 풍류산하’를 5년 넘게 연재하던 중에 눈 오는 겨울 하룻밤을 유선여관에 머무는 행운을 잡았다. 그날 내린 눈은 준 폭설에 가까웠다. 소나무 가지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꺾어지며 내지르는 소리가 음악처럼 느껴졌다. 현대음악에서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소음처럼 신나게 아름다웠다.

새우깡 안주로 투명한 소주를 엎드린 채 홀짝거리고 있으니 눈 내리는 밤은 멋진 콘서트홀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칸딘스키가 그린 ‘인상 Ⅲ-콘서트’란 추상화가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칸딘스키는 친구인 빈 출신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콘서트에서 들었던 음악, 그 소리의 감흥을 캔버스 가득 노랑으로 칠했다. 이날 밤 마음의 귀를 크게 열고 소리의 향연에 취해 있으니 모든 것이 음악이었고 그 음악은 다시 그림으로 바뀌었다.

바실리 칸딘스키(1866, 12, 16~1944, 12, 13)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법과 경제를 배워 나이 서른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이 그리고 싶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독일 뮌헨으로 날아갔다. 칸딘스키는 바그너를 좋아했다. 그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들으면서 색을 느끼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그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의 ‘건초 더미’라는 그림을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이 그림은 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대상이 없었음에도 지울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내뿜고 있었다. 칸딘스키가 이 그림을 보고 추상으로 돌아서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어느 저녁 무렵 자신의 화실에 들어서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그림이 그곳에 있었다. 밝은 주황의 불타는 듯 빛나는 그림이었다. 아무런 대상이 없는 그냥 색채만으로 가득 채워진 캔버스였다. 누구의 그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며칠 전 자신이 그린 그림이 거꾸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이 그림을 보고 색채만으로도 감정을 전달하는 그림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음악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그리려 했다. 음악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꽁꽁 숨어 있는 추억을 불러내듯이 대상이 없는 모호하지만 야릇한 색채들의 조합이 음악처럼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을 상기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칸딘스키 주변에는 세 사람의 여인이 있었다. 그는 그림공부를 하기 위해 아내 안나와 함께 뮌헨에서 어렵게 살아갈 때 아내가 온갖 뒷바라지를 했다. 안나는 칸딘스키가 대학에서 강사를 할 때 법률학 수강신청을 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칸딘스키는 안나를 버리고 열한 살 어린 부잣집 딸인 미술학도와 동거를 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가브리에레 뮌터였다. 그녀는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여자미술학교에서 그림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스승인 칸딘스키 보다 데생실력은 월등 앞서 있었다.

1904년 두 사람은 뮌터의 부모가 마련해준 뮈르나우집에서 10년 동안 함께 살면서 예술적 동지로 호흡을 같이했다. 뮌터는 애기를 갖고 싶단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포대기에 싼 인형을 안고 있는 자화상을 그려 칸딘스키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1906년 나무로 깎은 목판에 짙은 턱수염과 파이프를 물고 있는 칸딘스키의 초상을 그려 거실 중앙에 걸어 두었다. ‘모네에게 카미유가 있었고, 로뎅에게 카미유 끌로델이 있었듯이 칸딘스키에겐 뮌터가 있다’는 암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칸디스키는 뮌터의 속내를 뻔히 알고 있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뮌터의 초상을 여러 장 그렸으며 소풍 갔을 때의 기억을 살려 두 사람이 누워 있는 풀밭과 뮈르나우집 거실에 앉아 있는 다정한 한때를 화폭에 옮기기도 했다. 뮌터와 동거 중에 그린 그림들은 거실 벽과 그림창고에 차곡차곡 쟁여 두었다. 그러나 예술의 동지가 인생의 동지는 될 수 없었다. 칸딘스키는 뮌터와의 결혼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듯 러시아로 떠나버렸다.

칸딘스키의 줄행랑은 그의 머릿속에 미리 기획되어 있었던 것처럼 작별인사도 없이 빈 몸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 그의 소지품과 작품들은 뮌터의 임의대로 미술관에 기증됐다. 고향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1918년 2월 만난 지 겨우 두 달 되는 러시아 장군의 딸 니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한편 뮌터는 실연의 아픔으로 병을 얻었으며 “단 한 번만 만나 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그녀는 “잘못을 뉘우친다”는 서류에 서명만 하면 남겨둔 짐과 그림을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과 뮈르나우집 그림창고에 처박혀 있는 칸딘스키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몽땅 시립미술관 렌바흐 하우스에 기증했다. 뮌터는 사랑하는 이의 체취가 묻어 있는 집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 싶은’ 소박한 소원은 이루지 못하고 85세로 숨을 거뒀다.

뮌터의 편지를 받고 쓴 칸딘스키의 답장을 줄여서 읽어 본다. “나의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36세 유부남 교수로 25세인 어린 제자 당신을 만났어요. 뮈르나우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스케치 다닐 때 생각이 나는구려. 엘라(뮌터의 애칭)가 마련해온 경비로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미술관 여행을 할 때 참 즐거웠어요. 그리고 10여 년 동안 함께 살면서 법적 결혼을 하겠단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해요. 러시아로 돌아와 니나와 만나자마자 결혼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엘라가 얼마나 날 기다렸는지를 생각하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요. 내 자신이 죽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 정도예요. 내가 두고 온 그림들이 미술관에 전시되고 연구용으로 보관되는 역할을 한 당신에게 고맙단 말 전하고 싶어요. 난 니나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 결혼 한 건 아니예요. 당신과 보낸 시절이 내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소. 다시는 그 시절처럼 작업할 수는 없을 거요. 당신의 칸딘스키가.”

칸딘스키는 78세 때 동맥경화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아내와 연인을 헌신짝처럼 버린 그가 저승에선 몇 번이나 신발을 바꿔 신고 또 누구와 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내 개인적 바램은 뮌터와 다시 만나 인형 같은 애기 하나 낳고 그렇게 살고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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