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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화음 / 김영희

by 부흐고비 2021. 12. 24.

오늘은 동서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형님댁에서 김장을 하기 때문이다. 현관 입구에 들어서니 흥이 실린 목소리들이 화음처럼 울려 퍼진다.

형님은 직접 농사지은 배추를 소금에 절여 소쿠리에 물기를 빼두었다. 커다란 다라이에 젓갈, 고춧가루, 마늘, 찹쌀풀 등 양념을 섞어가며 속 준비에 분주하다. 한쪽에서는 갓, 무, 쪽파 등을 다듬는 손길이 재바르다.

형님은 간은 맞는지 더 넣을 것은 없는지 절인 배추에 양념을 쓱 묻혀 생굴을 얹고 깨를 묻혀 입에 넣어준다. 첫맛은 톡 쏘는 매운맛에 조금 짜다 싶지만 자꾸 받아먹다 보니 은근히 중독성 있는 맛이다.

각자의 입맛에 따라 짜다, 간이 맞다, 맵다 한마디씩 거든다. 미식가인 막내 동서가 이프로 부족하다는 사인을 보내자 눈치 백 단인 형님은 누른 호박과 곶감 달인 물을 보충하여 양념 맛이 골고루 어우러지게 한다.

김장의 맛은 뭐니 해도 젓갈이 좌우한다. 올해는 일찌감치 비장의 카드로 땅끝 마을에서 젓갈을 사 왔었다. 작년 김장 맛이 부족했던 것은 젓갈이 시원찮은 탓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맛을 확인하여 최상품의 멸치 진 젓을 공수해왔다. 젓갈은 비린 맛이 적고 살이 통통해 씹히는 식감이 좋다. 특히 군내가 나지 않고 풍미가 절가하여 올해 김장은 자신 있다며 형님은 소매를 걷어붙인다. 양념 맛이 조화를 이루자 둥근 다라이에 바투 앉아 배추를 버무린다. 배추와 배추 사이에 양념이 골고루 버무려지도록 한켜한켜 펴 바른다.

우리 입맛에 깊숙이 자리 잡은 김치는 식탁에서 행복한 맛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김치는 사계절 찌개와 국 전 등 먹거리에서 감초와 같은 존재감을 나타낸다. 청국장을 끓일 때,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에도, 따끈한 두부를 생김치에 싸서 먹는 맛은...

수북이 쌓인 절임 배추는 김치 통으로 차곡차곡 쟁여진다. 솥에서는 수육이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갓 담은 김장김치에 수육을 싸서 먹을 생각에 입에서는 침이 고인다. 식탁에 둘러앉아 윤기 흐르는 하얀 쌀밥에 김장김치와 김이 모락 올라오는 수육을 보면 없던 식욕도 솟구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보쌈을 싸서 입으로 가져간다. 맵싸한 김장김치에 수육의 부드러운 식감이 한데 어우러지면 함박웃음이 벙글어진다.

반주로 나온 막걸리 한 모금이 흥을 돋운다. 둘째 형님이 노랫가락에 맞추어 선창을 하면 모두 흥얼거리며 합창을 하다 자신의 옥타브에 맞추어 후렴구를 부른다.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 테너 합창부의 성원들처럼 고음과 저음을 넘나든다. 이 순간 화음과 불협화음은 중요하지 않다. 흥에 겨운 이 공간에서는 자유로울 허용치가 주어진다. 김치가 어우러지며 맛이 들 듯 노랫가락도 어우렁더우렁 화음을 만들어 낸다.

듣기 편하고 즐겁게 녹아들면 그만이다. 수고를 잊게 해 주는 막걸리가 한 순배 돌면 감흥은 절정에 이른다. 관객도 앵콜 신청도 없지만 어깨가 들썩여진다. 형님은 엉덩이를 둥싯거리며 반 춤을 춘다. 흥은 잘 버무려진 김치와 함께 익어간다.

생각해보면 김장김치의 재료들이 사 동서의 속성과 닮아있다. 큰형님은 절인 배추와 같아서 집안과 동서들을 아우르는 넓은 사랑의 테두리 역할을 하신다. 언제나 슴슴하고 질리지 않는 김장의 기본인 배추처럼 신뢰를 준다. 때로 무심해 보이는 듯해도 후덕한 성품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동서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다.

둘째 형님은 김장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젓갈과 같은 존재다. 젓갈이 곰삭고 식감이 좋으면 김치의 풍미를 한층 더하여 준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쉬울 것 같은 절인 배추에 신의 한 수처럼 시간과 정성이 담긴 젓갈이 들어가면 맛이 달라진다. 둘째 형님에게는 세월을 견뎌낸 내공이 배어있어 맛깔나고 감칠맛 나는 젓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막내 동서는 고춧가루와 마늘 같은 존재다. 이 두 가지는 김치의 맛을 한층 새뜻하게 올려주고 칼칼하게 해주는 역할에 빠져서는 안 될 재료다. 막내동서는 순수한 마늘의 빛깔로 때로는 붉은 고춧가루처럼 열정적으로 형님들의 기분을 눈치껏 헤아려 감초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나는 어떤 재료와 어울릴까. 소금과 같은 존재다. 소금은 투명하여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확한 배추에 소금이 절여지지 않으면 당장 밭으로 돌아갈 기세니 김치를 담글 수 없다. 모든 음식은 첫째간 이 맞아야 한다. 김치를 담그며 2% 부족한 맛에는 굵은 소금을 넣고 잘 저어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맛을 낸다. 이처럼 김치의 처음과 마지막의 맛을 적절히 잘 배합해 주는 것이 소금이다.

각종 재료에 정성과 손맛이 어우러지면 맛있는 김치가 된다. 자연이 주는 뜨거운 햇살과 비바람을 견딘 재료라 어느 것 하나 두드러짐이 없다. 조화롭게 곰삭아지면 ‘맛이 들었다’는 표현을 한다. 넷 동서가 각자의 파트에서 충실할 때 아름다운 화음이 만들어지듯, 김장도 숙성되고 어우러지면 담백하고 깊은 맛이 들 것이다.


김영희 수필가 대구문학, 수필세계신인상 당선. 경북문화체험전국수필대전공모 은상, 대구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2017). 수필집 『오래된 별빛』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이사. 수필세계작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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