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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누비처네 / 목성균

부흐고비 2021. 12. 25. 11:38

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 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것이니까 40여 년 가까이 된 물건이다. 낡고 물이 바래서 누더기 같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흔치 않은 귀물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어?”

내가 반색을 하자 아내가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잘 간수를 해서 그렇지.” 그리고 “이제 버릴까요?” 하고 나를 의미심중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분명히 누비처네에 대한 나의 애착심을 알고 하는 소리다. “놔둬.” 그러자 아내가 눈을 흘겼다. ‘별수 없으면서-’ 하는 눈짓이다. 그것은 삶의 흔적에 대한 애착심은 자기도 별수 없으면서 뭘 그리 체를 하느냐는 뜻이다.

나는 아내의 과단성이 모자라는 정리정돈을 비아냥거리는 경향이 있다. 버릴 물건은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 아내는 그걸 못한다. 그래서 가뜩이나 궁색한 집안에 퇴직한 세간들이 현직 세 간들과 뒤섞여서 구접스레했다. 그 점이 못마땅해서 나는 늘 예를 들어서 지적을 했다. 사실은 그 예가 아내에게 고의적으로 모욕을 가하는 것이긴 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삶의 흔적들에 대한 애착에서 놓여나게 하려는 내 나름의 충격 요법이지 솔직히 모욕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장터거리 박 중사의 미치광이 마누라는 늘 일본 옥상 오비처럼 허리에 보따리를 두르고 다니는데 그걸 풀면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었어. 이빠진 얼레빗서부터 빈 동동구리무 곽에 이르기 까지 없는 게 없대. 자기 세간 모아 두는 건 흡사 박 중사 마누라 잡동사니 주워 모으는 버릇 같아’ 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내는 모욕을 느꼈는지 안 느꼈는지 오히려 역습으로 내게 모욕을 가하는 것이다.

“남자가 박 중사 미친 마누라처럼 중중거리지 좀 말아요. 체신 머리 없게시리.”

박 중사의 미친 마누라는 늘 허리에 예의 보따리를 두르고 머리에는 들꽃을 꽂고 길거리를 중얼거리면서 다녔다. 내가 박 중사 미친 마누라 허리에 두른 보따리로 ‘장군!’ 하면 아내는 침흘리듯 중얼거리는 미친 짓을 가지고 ‘멍군!’ 했다. 매사에 내가 부른 장군은 아내의 멍군에 당했다.

아내가 들고 “버릴까요?” 하는 누비포대기는 내 인생의 사적(史的)인 물건이다. 아내가 그 처네 포대기를 들고 ‘버릴까요’ 하고 묻는 것은 내 비아냥에 대한 잠재적 감정의 표출이다.

아내가 첫애 진숙이를 낳고 백일이 지나도록 나는 아기를 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인쇄업(실은 프린트사였다)을 하고 있었는데 자리를 못 잡고 허둥지둥 승산 없는 분발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업 수완이 모자라는 때문이었다. 이미 자갈논 한 두락쯤 게눈 감추듯 해먹고 이업을 할 건지 말 건지 망설이는 중이었다. 아내의 산고를 치하하러 집에 갈 형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추석 밑에 아버님의 준엄한 하서(下書)가 당도했다.

인두겁을 쓰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힐책하신 연후, 제 식구가 난 제 새끼를 백일이 넘도록 보러 오지 않는 무심한 위인은 이 세상 천지에 너 말고는 없을 것이라고 명의(名醫) 침 놓듯 내 아픈 정곡을 찌르시고, 만일 이번 추석에도 집에 오지 않으면 내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당신의 마음을 천명하셨다. 그 준엄한 하서에 동봉된 소액환 한 장과 말미의 추신(追伸)이 마침내 불민한 자식을 울렸다.

추신은 추석에 올 때 시골서는 귀한 물건이니 어린애의 누빈 처네 포대기를 사오라는 당부 말씀이었다. 소액환은 누비처네 값이었다. 그러면 네 식구가 좋아할 거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사족을 생략하신 것일 뿐 그 말이 그 말이다. 아버지는 객지의 자식이 제 새끼를 보러 오지 못하는 실정을 아시고 궁여지책을 쓰신 것이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믿을 도리밖에 없는 맏자식이니 아버지도 늘 내게 연민 정도는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에 대한 연민, 그게 얼마나 부모의 큰 고초인지 내가 당시 아버지 나이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오죽하면 소액환을 동봉하셨을까. 그 소액환은 돈이라기보다 슬하에 자식을 불러앉히는 아버지의 소환장이나 마찬가지다. 용렬하기 그지없는 자식에게 아비 노릇, 남편 노릇 하는 방법까지 일일이 일러주어야 하는 아버지의 노파심을 생각하니까 ‘불효자는 웁니다’ 하는 유행가처럼 서러웠다.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서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 위에 둥실 떴다. 그때부터 십 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으로 흐르듯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 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아버지는 푸른 달빛에 흠뻑 젖어 아기 업은 제 아내를 데리고 밤길을 가는 인생 노정에 나를 주연으로 출연시키신 것이다. ‘임마, 동반자란 그런 거야’ 하는 의미를 일깨워 준, 아버지는 탁월한 인생 연출자였다. 처네 포대기가 그 연출의 소도구인 셈이었다.

그때 “그 처네 포대기 아버지께서 사오라고 돈을 부쳐 주셔서 사온 거야.” 내가 이실직고를 하자 아내가 “알아요” 했다. 그러고 말하기를, 추석 대목 밑에 어머니가 아기 처네 포대기 사게 돈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묵묵부답이셨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려면 애를 업고 갈 포대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하고 성미를 부리자 아버지가 맞받아서 “애 아비가 어련히 사올까”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아내는 그때 시아버지께서 무심한 신랑과 친정을 보내 주실 모종의 조치를 꾸미고 계시다는 것을 눈치채고 가슴을 두근거렸다고 한다.

교교한 달빛 아래 냇물도 흐름을 멈추고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그 때 내 손을 꼭 잡던 자기 얼굴을 달빛에 보니 깎아 놓은 밤 같았어.” 아내가 누비처네를 쓸어 보며 꿈꾸듯 말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칭찬이었다. 아마 그때 내게 손을 잡힌 걸 의미 깊이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두 남녀가 이루어 가는 ‘우리’라는 단위의 인생은 단순한 연출의 누적에 의해서 결산되는 것인지 모른다. 약간의 용기와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연출을 우리들은 못하든지 안 한다. 구닥다리 세간에 대한 아내의 애착심은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연출한 소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의 애착심을 존중해야지, 누비처네를 보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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