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기둥시계 / 목성균

부흐고비 2021. 12. 26. 08:43

기둥시계가 언제 어떤 경위로 없어졌을까.

우리 형제들이 죽지에 힘 오른 새 둥지를 떠나 듯 다들 집을 떠나고 할머니도 세상을 뜨시고 대주이신 아버지가 풍을 맞으신, 유수 같은 세월의 어디쯤에서 시계는 멈추었으리라. 시간을 멈춘 시계는 얼마 동안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벽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시계가 멈춰 선다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시계가 직무를 유기한 것이 아니고, 시계가 유기를 당한 것이다. 시계야 어차피 사람이 관리하는 문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계의 태엽이 다 풀린 상태를 할머니는 밥이 떨어졌다고 하셨다. 시계가 멎은 것은 밥이 떨어졌을 때뿐이었다. 시계가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건 시계 불알소리를 들으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뚝ㅡ닥, 뚝ㅡ닥’ 힘차게 불알을 흔들면 방귀 푼어치나 뀌고 사는 양반 행차소리 같아서 안심이 되지만 ‘뚜ㅡ우ㅡ다ㅡ악, 뚜ㅡ우ㅡ다ㅡ악’ 하고 사흘 굶은 남산골 샌님 나막신 끄는 소리 같으면 조만간 멈출 수밖에 없는 처지다. 얼른 밥을 줘야 한다. 미처 밥을 안 주면 시계가 멎는다.

우리 시계가 멎은 것은 시계불알 흔드는 소리에 귀 기울일 식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농업 가계(家系)인 우리 집의 윗버들미 시대가 끝난 것을 의미한다. 어느 날 고물 장수가 찾아와서 ‘고물 삽니다’ 하자 노모께서 지전 몇 푼에 시계를 넘겨주셨기 쉽다. 돈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는 당신의 시대를 정리하듯 시계를 치우셨을 것이다. 시계가 없어진 내 짐작이다.

우리 집 기둥시계는 ‘마림바’처럼 아름다운 괘종소리를 냈다. 기둥시계의 괘종소리는 현재 시간을 알리는 음향신호다. 당연히 공신력이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 기둥시계는 공신력에 구애받지 않고 살았다. 시계가 한량처럼 시간에 초연한 시건방진 삶의 태도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따질 수는 없다. 우리 식구들의 시간관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들은 시계가 정확한 현재 시간을 대는지 안 대는지 통 관심이 없었다. 농사일이 그렇듯이 날이 새면 일하고 해가 넘어가면 일을 끝냈다. 그 사이의 구체적인 일머리들이 널려 있긴 하지만 시간에 맞춰 분배할 필요도 없었다. 꾸준히 당면한대로 일을 하면 되었다. 시간이 존재하는 한 부지런한 자연 상태의 삶이 같이 존재했다. 시계도 그랬다. 보정(補正)이 필요한 시간의 오차를 꾸준히 누적했다.

문 창호지에 붐하게 여명이 물들 때 시계가 아홉 시를 쳤다면 망발이지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식구들은 종소리에 날이 새기라도 한 것처럼 감동해서 ‘날 새는구나’ 했다. 날이 새면 무슨 수 나는 일이라도 기다리는 것처럼. 뼈 힘드는 노동의 긴 하루의 시작일 뿐인데. 그 시작 시간이 여섯 시든 아홉 시든 아무 상관없다. 종소리의 아름다움이 시작의 사기를 진작시킬 뿐이었다.

나는 ‘째각, 째각’ 초침이 건강한 숨소리같이 정확한 초박형(超薄型) 손목시계를 찬 사람을 경원했다. 시간의 육백 분의 일 초까지 염두에 두고 사는 산술적 명민성이나 교활한 순발력의 출중함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좋았다. 시간을 안 맞추고도 살 수 있는 좀 무지하고, 소박하고, 솔직한 사람 같아서였다. 그러면서 나는 손목시계를 차고 살았다. 좀 더 얇고, 정확한, 금장(金匠) 시계를 차고 싶었다. ‘삶이란 가증스러운 이중인격의 출중한 연출이다’라는 삶의 괴리로 시계의 노예가 되어 살았다. 지금은 시계를 안 찬다. 필요가 없다. 자유의 반을 얻은 줄 알았는데, 아니다. 자유의 반을 잃은 데 불과하다. 시간에 도외시 당한 삶은 형기를 채우는 수형자처럼 부자유하다.

우리 기둥시계는 혼신을 다해서 맑고 깊은 울림소리를 생산했다. 굵기 1밀리미터 정도 내외 되는 강철인지 구리철사인지를 원형으로 돌돌 말아서 만든 명기(鳴器)를 도토리 알 만한 놋쇠로 된 공이로 쳐서 종소리를 냈다. 어쩌면 그렇게 깊고 맑은 울림소리를 내는 종을 달았을까. 깊고 맑은 울림소리를 얻으려고 봉덕사 대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 받아서 쇳물이 끓는 가마에 넣었다는 말이 생각 날 정도였다. 일개 기둥시계의 종소리를 국보의 웅혼(雄渾)한 종소리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경지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생각 들었다.

기둥시계는 우리 식구들이 제가 알려주는 시간에 유의한 적이 없어도 제 존재가치를 무시한다고 사보타주를 한 적이 없다. 가끔 시간을 멈춘 것은 우리 식구가 밥을 굶겨서 탈진해 쓰러진 것이지 고의적인 태업(怠業)은 아니었다. 태엽만 감아 주면 아무 불평 없이 ‘뚝ㅡ닥 뚝ㅡ닥’ 꾸준히 시간을 따라갔다. 늦었다고 뛰는 법도 없고, 이르다고 쉬는 법도 없이 일정한 걸음으로 꾸준히 세월을 걸어갔다.

우리 기둥시계 바늘이 시간을 돌리는 일은 꼭 소가 연자매를 돌리는 일과 같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꾸준히 연자매의 멍에를 지고 확을 도는 소의 끝없는 노역과 고삐를 잡고 그 노역 뒤를 따라 도는 방아 찧는 사람의 시간에 초연함 같아서 경외스러웠다. 내 선대 어른들, 아버지 할머니 증조부 등등 저 청산의 일각의 무덤 아래 드신 생전의 삶들처럼.

식구들이 다 들에 나간 빈집에서 울리는 기둥시계의 종소리는 너무 그윽해서 새삼 삶을 돌아보고 연민을 느끼게 했다. ‘뗑’하고 한 번 친 다음 다시 ‘뗑’하고 치는 간격이 좀 긴 편이었으나 그 간격을 비우지 않고 여운이 맑고 깨끗하게 이어졌다.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부엌으로, 외양간으로, 뒤꼍으로, 부엌 궁둥이로, 종소리의 여운이 잦아 들고나면 집 어디선가 ‘뚝ㅡ닥, 뚝ㅡ닥’ 하는 맥박소리가 살아났다. 종을 치기 전에는 안 들리던 기둥시계의 맥박소리가 마치 생명을 과시하듯 분명하게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우리 집, 초가삼간이 살아서 숨쉬는 소리 같았다. 힘에 겨운 짊을 지고 침착하고 진중하게 비알밭머리를 돌아서는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졌다.

툇마루에 앉아서 기둥시계의 맥박소리를 들으면 눈도 밝아져서 앞산 비알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 내외가 일나서 밭머리에 서 있는 고욤나무인지, 감나무인지, 가죽나무인지, 그늘을 지운 나무 아래로 가서 나란히 앉는, 쌍가락지 같은 삶의 애락도 보였다.

뭐니뭐니해도 우리 식구 중에서 기둥시계를 가장 사랑하신 분은 할머니다. 할머니는 깊은 겨울 밤 명을 잤다가 기둥시계가 종을 치면 물레를 돌리던 손을 멈추시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다. 기둥시계의 종소리가 할머니의 유일한 문화였다. 정갈하고 깊고 긴 여운에 할머니는 물레질하시던 손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으셨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심취한 고급 청중의 감동과 다를 바 없는 할머니의 감동을 보고 나는 우리 기둥시계의 실존가치는 시간이 아니고 소리라는 결정적 착각에 이르게 되었다.

시계의 종소리가 뒷산 솔바람 소리 속으로 잦아들면 ‘우후후’ 하고 밤 솔부엉이가 울었다. 나는 알몸으로 겨울잠 자는 산짐승처럼 이불 속의 쾌적한 온기에 웅크리고 들었다. 일정한 세월의 발자국소리 같은 ‘뚝ㅡ닥 뚝ㅡ닥’ 하는 시계불알 소리와 내 심장 박동소리와 솔부엉이 소리와 높은 산봉우리를 스치는 겨울바람 소리의 협주곡을, 그 생명의 실감이 그저 고맙고 행복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기둥시계가 굶어서 불알을 축 늘어트리고 멈추면 어머니에게 불같이 역정을 내셨다. 어머니는 별 게 다 시집살이를 시킨다면서 얼른 시계 밥을 주시고, 시간을 맞춰 놓기 위해서 현재시간을 보려고 마당에 나가 서서 이마에 손을 대고 해가 어디쯤 갔는지 하늘을 쳐다보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한지 ‘그리니치’ 표준시간이 무색할 지경이어서 감히 어머니가 새로 맞춘 시간에 대해서 맞느니 안 맞느니 아는 체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맞춰 놓으신 그 시간이 아무도 이의할 수 없는 정확한 현재였다.

그 기둥시계 어디가 있을까. 싸락눈 분분한 겨울밤 바람소리를 차분히 진정시켜 주던 ‘뚝ㅡ딱 뚝ㅡ닥’ 하는 시계불알 소리 들린다. 깜깜한 어둠 속의 납작한 초가집에서 울리는 맑고 깊은 시계의 종소리에 분분하던 싸락눈이 소담스러운 함박눈으로 바뀌던 겨울밤이 보인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멸치론 / 이동실  (0) 2021.12.27
건강해서 고맙다는 말 / 김창수  (0) 2021.12.27
말복 / 목성균  (0) 2021.12.26
미움의 세월 / 목성균  (0) 2021.12.26
할머니의 세월 / 목성규  (0) 2021.12.2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