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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말복 / 목성균

부흐고비 2021. 12. 26. 08:42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엘리뇨’ 현상 때문일까, 아니면 참을성이 떨어진 내 체력 때문일까. 권태에 짓눌려서 무력하게 보낸 여름이었다.

‘애틀란타’의 승전보를 기다리는 것이 일루의 희망이었다. 매일 텔레비전 앞에서 열대야를 지새우곤 했다. 금메달리스트의 눈물에 감동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나 대개 좌절의 어둔 표정을 더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좌절하는 선수들의 아픈 마음을 동정하는 게 국민의 도리일 터이지만 경마장의 등외 마권자(馬券者)가 기대를 무산시킨 말을 원망하듯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원망했다. 그런 얕은 내 인간성이 불쾌해서 여름밤은 또 더 더웠다.

그들은 그 열전의 한순간을 위해서 4년간 올림픽 선수촌에 입촌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기량을 연마했을까.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의 좌절은 흘린 땀의 양만큼이나 클 것이다. 생애의 어느 한 순간도 치열해 보지 못한 내가 그 마음을 알 리 없지-!

여름은 마땅히 성숙을 도모해야 하는 계절이다. 모든 식물은 그 무지막지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노출된 만큼 광합성 작용을 한다. 충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이다. 설혹 가을에 부실한 열매를 맺은 식물이 있다면 그것은 햇볕을 덜 받은 때문인데, 식물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식물은 햇볕을 피해서 그늘에 서 있지 않는다. 다만 씨앗의 불운으로 정해진 자리가 그늘일 뿐이다. 그늘에서도 몸을 뒤틀어 햇볕을 향하는 식물의 몸부림을 나는 생각해 보지 않고 나약한 식물의 모습을 유감스러워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서 같은 들판에서 다같이 열 마지기의 벼농사를 지었는데 갈걷이의 결과가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어느 농부가 햇볕 아래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느냐 하는, 사람의 광합성 양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림픽 출전 선수의 경기 결과 순위의 후미에 선 것은 기량이 모자랐기 때문이지만 관전자가 왜 기량이 모자랐느냐고 선수에게 묻는 것은 가혹한 짓이다. 그늘에 서 있는 식물이 염원한 향일성(向日性)도 모르면서 식물의 약했음을 원망하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나는 젊어서 말복을 많이 탔다. 성숙한 여름 동안 산소동화작용을 열심히 하지 못한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내 몫, 선수의 책임이다.

내가 소년일 때 어느 해 여름 남쪽 바다에 갔다 오니까, 땀에 절어 늘 후줄근하던 할머니의 삼베 치마적삼이 가슬가슬하게 말라 있었다. 퀴퀴하게 쉰 땀내도 걷히고 알싸한 들깻잎 냄새가 났다. 뒷골 큰밭 들머리의 들깨들이 어느덧 다 자라서 제 개성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할머니는 큰밭에 들며나며 그 냄새를 묻혀 오셨다. 나는 그 들깨 냄새가 역겨워서 싫었지만 할머니는 그 냄새가 좋다고 하셨다. 그 냄새를 맡으면 식욕이 동한다고 하셨다. 들깨 냄새를 맡으면 공복감을 느끼셨던 할머니는 얼마나 열심히 또 건강하게 여름을 가꾸신 분이었을까. 아무튼 할머니의 삼베 치마저고리의 올이 살아서 가슬가슬해진 것은 한 절기가 지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할머니 삼베 적삼 자락을 들치고 등허리를 보면 새빨갛게 좁쌀멍석처럼 들이부은 땀띠가 가셔있었다.

“참 시절 빠르다”

할머니가 감탄처럼 하시던 말씀을 알지도 못 하면서 선뜻 납득은 가던 그때. 냇가의 미루나무가 예감에 우뚝 멈춰 서 있고 그 위로 솜틀에서 틀려 나오는 햇솜처럼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갔다. 미루나무 아래서 눈을 감고 하염없이 되새김질을 하는 누런 황소의 게으름이 그렇게 타당해 보일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한낮의 들판은 고즈넉하게 비어 있었다. 이미 시합을 마친 운동장처럼 열광의 여운이 목청껏 외쳐 보지도 못한 아쉬움처럼 내 가슴에 울려왔다.

이맘 때 들길에서 보는 쇠똥은 거의 건조가 다 되어 있었다. 여름 소나기에 젖어 불결하던 그 섬유질 배설물이 어느새 인도의 ‘카우덩 케이크’처럼 만져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햇볕은 정수리를 벗길 듯이 따가웠다. 열대성 고기압이 물러간 대기는 투명해서 햇볕이 기탄없이 투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늘에는 서느런 기운이 돌아서 그 그늘 아래 서면 공연히 비로소 여름이 간다는 의미가 내 마음을 공허하게 했다.

왜 나는 그 고샅에서 그리도 방황했을까.

고샅을 지나다 본 그 집 뒤꼍의 장독대 옆에 칸나가 새빨갛게 피어 있었다. 숨막힐 듯 불타는 정염이 햇볕만치 따갑다. 그리고 빨랫줄에는 하얀 이불 홑청이 널려 있었다. 그 눈부신 백색의 순결함, 나는 까치발을 딛고 서서 돌담 너머 그 집 뒤꼍의 조용한 풍경을 넘겨다보았다. 집안의 정정적과 새빨간 칸나와 새하얀 이불 홑청이 나를 왜 그렇게 허망하게 했던지ㅡ. 나는 가슴 두근거리면서 한참 동안 그 집 뒤꼍 풍경을 훔쳐보다가 아쉽게 돌아서곤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바깥사랑 툇마루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바깥마당 귀퉁이의 두엄자리, 여름내 김이 오르던 부패도 멎었다. 비교적 위생적인 상태로 건조된 두엄자리 위로 메밀잠자리가 가득하게 날았다. 그 유유한 잠자리의 비행, 아직 늦지 않은 잠자리의 시작은 또 왜 그리 눈부시던지ㅡ.

아ㅡ! 새빨간 칸나의 그 열정의 빛깔도 세월에는 할 수 없이 변색했지만 그래도 여름이 갈 때면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꽃힌다.

이삼 일 사이에 백사장이 휑뎅그렇게 비었다. 우리도 오늘은 이 바다를 떠날 것이다. 파도에 발을 담그고 누워서 바라보던 밤하늘의 찬연한 별자리, 은하수가 정수리 쪽으로 조금 가까워져 있었다.

그 먼 남쪽 바다에 가서 며칠 나는 무엇을 얻어 왔나. 소라와 고동과 조개껍데기 몇 개와 쏟아질 것 같아서 이마가 간지러웠던 아름다운 별떨기의 새실대던 기억과 밤바다의 어둠을 뜬눈으로 새우게 한 파도소리와 친구와 그 어둠을 침묵으로 지켜본 기억이 전부다. 그것으로 내 마음이 얼마쯤 자랐을까.

해변의 텐트를 걷는 젊은이를 본 사람은 알리라. 파도는 침착하게 모래톱에 부딪쳐 눈물겨운 소리를 조용조용 지르고 그 뜨거운 모습들이 거의 다 떠나간 해변에서 텐트를 거두다 말고 수평선 쪽을 향해 서 있던 젊은 뒷모습의 쓸쓸함을…….

윗버들미 골짜기 어귀의 마방(馬房)집 앞 신작로, 한쪽 길은 서쪽 산모퉁이로 사라지고 한쪽 길은 동쪽 산모퉁이로 사라지는 중간, 골짜기를 내려와서 각기 반대 방향으로 헤어지는 T자 지점이다. 동쪽으로 가면 충주, 서쪽으로 가면 청주다. 이윽고 서쪽 산모퉁이를 돌아서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버스가 왔다. 지금까지 마방집 추녀 그늘 아래서 재잘거리던 몇 명의 눈처럼 새하얀 상의와 감색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저마다 이불보퉁이를 들고 버스에 탔다. 그리고 버스는 동쪽 산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 갑자기 가로수에서 말매미 우는 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 말매미 소리는 신작로 미루나무에서 계속해서 울었을 터인데 왜 그때서야 그렇게 크게 들렸는지 모른다. 남쪽 바다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는데, 소녀는 내 남쪽 바다 이야기를 들어 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그 소녀가 내 남쪽 바다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기다리긴 했을까. 풋풋한 이파리처럼 살아 있던 궁금증, 언젠가 시들어 버렸다. 그 소녀를 주려고 소중하게 간직해 가지고 온 소라 껍데기는 꽤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면 ‘파도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시인의 상상력이 아니라 사실이다. 소아 껍데기의 나선형 돌기(突起)의 공동(空洞)으로 공기가 통하는 소리가 흡사 먼 바다의 아득한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지금은 다른 소라 껍데기가 내 책상 위에 있다. 말복이면 간절해서 귀에 대 본다.

이번에는 동쪽 산모퉁이를 돌아서 버스가 왔다. 나는 이불보퉁이를 들고 그 버스를 탔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차창 밖으로 뒤돌아보니 먼지가 가라앉은 땡볕 아래 납작한 마방집만 조용히 혼자 남아 있었다.

지금도 칸나의 새빨간 꽃과 눈처럼 하얀 이불 홑청이 널려 있던 그 집 뒤꼍의 고즈넉한 정적과 휑뎅그런 해변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수평선을 향해 서서 있던 젊은이와 할머니의 삼베옷의 가슬가슬한 질감이 되살아나서 문득 달력을 보면 말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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