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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불티 / 이동실

부흐고비 2021. 12. 27. 12:02

유월, 후덥지근한 날 저녁 무렵이다. 먹구름이 잔뜩 몰려드는 걸 보니 소나기라도 한줄기 퍼부어 댈 기세다. 그때다. 초인종을 누르는 후배의 표정이 날씨처럼 새초롬하다.

남편 옷을 사러 나갔다가 서로 얼굴만 붉히고 돌아왔단다. 그것이 원인이라니 다행이다 싶은 것은 부부가 함께하면서 칼로 물을 베기로 하듯 다투는 일이 한두 번인가. 나는 무심코 “본인이 가서 맘에 드는 옷을 사 입어라고 하면 되지 않냐”라고 했더니 그는 냉수를 벌컥거리며 들이킨다.

애연가인 남편이 담뱃불로 옷마다 구멍을 낸단다. 그때마다 옷을 사야 하니 속이 상했고, 한마디를 얻었더니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냐며 혼자 가버렸다는 것이다. 거기다 옷값조차 만만찮으니 잔뜩 부아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살갗을 찔러대듯 아려왔다.

내 남편 역시다. 담배 불똥으로 괜찮은 옷을 입지 못하게 만든 외출복이 더러 있지 않은가. 그럴 때 보여주며 한 소리를 하면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당신은 그것만 살피냐며 되려 억지소리를 해 댄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놈의 불티가 화근이다. 재가 되기 전의 불똥이 뜨거워 보았자 그 위력이 얼마나 크겠냐고 섣불리 보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한다. 담배 불씨는 떨어져 사그라지면서 온 힘을 다하듯 옷에다 뱅어 눈알 같은 구멍을 내고야 만다. 뚫린 구멍은 가장자리가 거칠다. 찌꺼기가 말라 굳어버린 것처럼 딱딱하니 흉하게 돌출된다. 구멍이 난 옷은 그때부터 격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 입고 나가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옷차림은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낸다고 했다. 반듯한 후배도 그런 옷을 남편에게 입힌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터라 조심을 당부했을 텐데, 도리어 불똥을 맞게 된 셈이다. 실수로 떨군 불티는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마음을 달랠 줄 아는 따뜻한 말 한마디면 너그러운 운명의 곡선을 타고 넘어섰을 것을. 위로가 필요했다.

여니 곱살 적이었다. 잠결에 눈을 뜨면 어머니 무릎에는 늘 하얀 옷감이 펼쳐져 있었다. 옷감은 어머니를 외부와 단절 지키는 병사들처럼 진을 치고서 계절에 따라 변화의 시간을 기다렸다. 때론 두루마기가 되기도 하고, 저고리와 바지, 조끼로 만들어지며 당신의 잠을 앗아갔다. 어머니가 여러 밤을 새우고 외출복을 마련해 놓은 다음 날은 영락없이 아버지의 출타가 있었다. 다림질한 옷을 두 팔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 안방을 지나 사랑방으로 가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어머니는 남편의 어깨가 당당해지기를 바라며 한땀 한땀 바느질했으리라.

그런 어머니 인사에도 “담뱃불 조심 좀 하이소.”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큰기침 한 번으로 끝을 내시고는 축담을 내려섰다. 무심했던 아버지처럼 무심히 떨어진 불티로 어머니의 수고로움은 잠시, 고운 옷에는 구멍이 났다. 불똥이 튄 아버지의 옷도 외출복의 기능을 상실한 채 집에서만 입게 됐다.

그런데 문득, 옷도 옷이지만 사람 마음에 떨어지는 불티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옷은 버리면 끝이지만 마음에 떨어진 불똥은 총 맞은 것처럼 심장이 상한다. 억장이 무너지는 상실감이다. 애가 끊어질 듯 한 시름이다. 마음은 병이 든다. 그 충격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만다.

중국의 정치가이자 고급 관료였던 풍도가『전당서(全唐書)·설시(舌時)』에 쓴 글이 있다. 다시 펼쳐서 읽어보았다.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 혀는 제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 : 입을 닫고 혀를 감추면,
안신처처우(安身處處宇) : 가는 곳마다 편안하리라.



말을 해야 할 때 해와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깨우쳐, 말조심을 처세의 근본으로 삼으라는 말이리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말을 경계하라 하였다. 역사 속에도 혀를 잘못 놀려 재앙을 자초한 예도 많지 않은가.

비 내리는 오늘 저녁 날씨를 핑계 삼아 후배 부부를 불러 남편 흉도 봐가면서 삼겹살 파티를 해볼까. 이참에 내 가슴에 난 불티도 치료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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