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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천년을 준다면 / 오순자

부흐고비 2021. 12. 28. 10:35

중국 항주에서였다. 시인 소동파와 한나라 광무제가 누렸던 흥취에 젖어보려고 서호에서 배를 탔다. 두 시간 동안 서호를 한 바퀴 돌면서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절경이었다. 서호를 월나라 미녀 서시西施에게 비유하여 날이 개이면 개는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아름답다고 노래한 소동파의 시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날 밤 일정은 송성가무 쇼를 보는 것이었다. 극장 문 위에 붙어 있던 편액의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給我一天 還你千年: 나에게 하루를 준다면, 당신에게 천 년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구경하고 천 년을 돌려받으면 횡재라고 생각하면서 왁자지껄한 객석에 앉았다. 공연 중에 천 년 전의 송나라 역사 사건이 등장했고, 편액의 뜻이 이 사건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여흥에 취해서 말했다.

“천 년을 돌려받았네.” 그때, 일행 중 한 사람이

“천 년을 돌려주면 무엇을 할 거예요?”라고 물었다. 순간 나는 당황했고,

“어린 시절부터 다시 살아보고 싶어요.”라는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 때때로 내가 다시 태어나 이러저러하게 살아본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았기에 나온 답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일회성이라는 것이 발 디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하는가. ‘다시’라는 말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좀 서툰 짓을 해도 용납한다는 뜻이 아닌가.

여행에서 돌아와 지금까지 천 년이라는 숫자가 내 머리를 맴돌고 있다. ‘천 년이라!’ 과연 그것이 인간의 몫이기나 한 걸까? 천 년이면 우리 역사에서 왕조가 두 번 바뀌는 긴 세월이지만, 그 천 년을 준다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다.

우선 천 년의 시점을 언제부터 시작할까? 내가 알고 있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대를 택할까? 삼국시대? 고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끊임없이 중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늘 방어적이지 않았는가! 중국으로 갈까? 그곳 역시 너무 폐쇄적이지 않았는가! 유럽으로 건너가면 어떨까? 여행을 해보면, 국경이라는 곳이 면과 면 사이의 경계처럼, 언제 통과했는지도 모르게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개방적인 지형이 아니었나! 그래서 그들의 문화와 역사가 종횡으로 섞여 있지 않은가!

어느 나라의 어떤 시대에서 삶을 시작하지? 예술의 메카로 뽐내는 파리? 십구 세기에 인상파 천재 화가들이 쏟아 놓은 작품들이 지금도 우리를 매혹 시키지 않는가! 한때 해 지는 곳이 없는 영토를 가졌던 콧대 높은 영국? 아직도 능가할 사람이 없는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런던에 태어나, 이론이 많은 그의 생활을 정확하게 엿보며, 빛나는 문학적 재능의 원천을 알아내어 조금이라도 전수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일까? 르네상스시대의 이태리? 천재 화가와 조각가들의 황홀한 작품 제작을 도우며, 그들의 심오한 영혼과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서양 문화의 기반을 닦아 놓았던 그리스에서 태어난다면 어떨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생존과 권력을 위해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을 때에, 그들은 우주와 인간의 생성, 순환, 삶의 원칙들을 신화로 풀어낸 지혜로운 사람들이 아닌가! 기원전 3․4세기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그 시대! 아카데미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17세기까지 서양의 정신과 과학체계를 지배할 예지를 생각해내는 모습이라도 지켜볼 수 있다면! 운이 좋아서 내가 쓴 희곡 한 편이 연극 공모에 당선되어 그것을 보기위해, 아테네시민들이 열흘 동안이나 철시撤市하고,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몰려가는 축제의 주인공이 된다면 어떨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처럼 2천년 넘게 지금도 그 예술혼이 살아 있지 않을까?

갑자기, 미라가 되어버린 과거의 시간 속에서 나는 관람객일 뿐이고, 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내려다본 디오니소스 원형극장의 계단에 앉아 울고 웃는 관객들의 그림자를 좇다가 휩싸이던 적막감이 느껴진다. 지나간 사건을 돌아보는 것은 시간의 무상함으로 쓸쓸해진다.

그래서 미래의 시간으로 생각을 돌려본다. 빠르게 변하는 생활환경을 예측하기가 두렵기는 해도, 역동적일 것 같다. 다시 생명을 얻어 천 년을 살려면, 100년 이내로 한정된 한 인간의 시간 단위는 한 시기를 십 년 단위로 열 번, 즉 백 년의 어린 시절, 십대, 청년기 등이 될 것이다. 나는 바쁘게 머리를 굴려본다.

처음 시작하는 어린 시절 십 년과 십대는 어른들의 간섭에 의해 결정되므로 진정한 내 삶이 아니다. 이십 대에 맞이할 청년기의 열 가지 유형의 생활은 책에 몰두해서도 얻을 수 없는 깊고 넓은 내면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열 가지 전공을 통해서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열 명 이상의 다른 외모와 성격을 가진 이성을 만나 죄의식 없이 사랑해 본다는 것은 황홀한 삶이 될 것이다. 이런 폭넓은 경험을 통해서 삶의 현상 밑에 무의식화 된 틀, 본질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어 스스로 찾은 길을 따라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700년을 살아갈 것이다.

시간의 반복성은 일회적 시간에서 오는 과거의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게 할 것이고, 풍요한 추억 덕분에 홀로 있는 시간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한 시기의 실수가 남은 삶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도 않을 것이며, 번민의 나락으로 몰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생애에 헌신할 일을 찾아내어 몰두할 수 있음은 더없는 행운이다.

며칠 동안 나는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공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시작이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위로와 기쁨을 준다. 그러나 천 년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신의 시간이다. 장수하는 식물은 누릴 수 있는 시간이지! 나는 잠시 울컥 솟았던 욕심을 다스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강원도 정선의 몰운대沒雲臺, 구름이 잦아들어 쉬어간다는 바위 밑 양지에 엄지손가락만 한 일년생 소나무에게 나의 천 년을 의탁하고 돌아선다. 그리고 그 바위를 감싸고 흐르는 시내처럼, 햇빛, 바람과 교류하면서 천천히, 조용히, 남은 시간을 살다 가리라 생각하니 천년의 시간이 나를 떠나가고, 나는 홀가분해진다.



오순자 수필가 한일장신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퇴임한 작가는 뉴욕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되었다. ≪에세이문학≫, ≪계간수필≫(2007) 수필 등단하였으며 ≪수필과비평≫에 평론 등단했다. 수필집 『천 년을 준다면』과 저서 『생활 속의 글쓰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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