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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저녁 종소리 / 신태순

부흐고비 2021. 12. 29. 08:44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다 보면 자주 종소리를 듣는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온 낯선 도시에서 성당의 종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비로소 내가 멀리 와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둠이 내리는 도시에 가뭇없이 밤이 깊어가고 휘황한 불빛들 사이로 길게 종이 울리면 분명 가슴 뛰는 은밀한 기쁨이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저녁 식사와 야간 투어를 위하여 도심 속을 걸을 때 어디선가 저녁 종소리가 들려온다. 댕 댕 댕~ 맑고 긴 여운의 소리가 해거름 하늘로 오르고 있다. 저물 어가는 저녁 햇빛 속에 공간을 울리는 종소리는 나의 여행의 시작을 알려주며 마음이 먼저 달뜨곤 했다.

종소리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도 자주 나온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성당 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어린 소년이 굵은 밧줄을 잡고 온몸으로 종을 치는 모습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또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는 ‘기다란 새벽종이 조례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가 하면, 대미사를 위한 무드 큰 종들의 주명 종소리, 영세와 혼례식을 알리는 종소리가 풍부한 음계로 울려 퍼져 마치 공중에서 온갖 종류의 매혹적인 소리가 수를 놓듯 서로 섞여드는 것이었다. 우렁차게 진동하는 낡은 성당은 끊임없는 종들의 환희 속에 잠겨 있었다.’ 그렇다. 그런 종소리는 구리쇠가 노래하는 환희의 절정이다.

유년 시절, 동네 언덕에 있는 교회에서는 늘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렵 나는 친구들과 교회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아버지는 예수쟁이 예배당에 다니지 말라 하셨지만 일요일마다 몰래 교회로 가곤 했다. 추수감사절엔 커다란 배추를 들고 나와 내가 맡은 역할을 했으며, 크리스마스 때는 종이별 모자를 쓰고 연극도 하였다. 무슨 역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녁 종소리가 들리면 연극 연습하러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내겐 늘 친근한 소리였다. 고즈넉한 마을에 겨울이 오고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날 종소리가 들리면 마치 크리스마스카드처럼 반짝이는 마을 풍경이었다. 그 겨울의 풍경은 시각과 청각 속의 먼 기억이 되곤 한다.

그 후 청춘의 이십대에도, 삼십대에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끝나버린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은 집안이 불교를 믿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종교에 대하여 잘 몰랐던 유년 시절의 추억으로 남았지만 어떤 종교든 진실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결혼 후, 두 아이 키울 무렵 교회가 바로 집 가까이 있어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하늘이 청명한 날은 더 맑게 더 크게 하늘 끝으로 올랐다. 마당의 감나무 우듬지에 있던 새들이 놀라 푸드덕 날고 초록 잎들 사이로 황금빛 햇빛이 흔들리곤 했다. 흔들리는 햇빛의 반점 사이로 내 영혼을 울리는 종소리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언제부턴가 교회 종소리가 사라졌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민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라 한다. 늘 듣던 정겨운 소리가 사라져 서운하였지만 흐르는 시대 따라 또 그렇게 살다 보니 차츰 잊혀 갔다. 사라져간다는 것은 오래 잊힐 뿐 기억속의 그리움이었다.

사십대 후반, 늦은 나이에 문학을 하겠다고 문학관 강의실에 앉았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마치 시인이나 소설가나 수필가가 곧 될 것처럼 모두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저녁 일곱시, 막 강의가 시작될 무렵 장복산 숲속에 있는 절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각 절에서 무슨 의식이 있는지 모르지만 항상 저녁 일곱시에 종이 울렸다. 우리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시작의 의미였지만 그 어떤 소리보다 마음을 맑히는 소리였다.

저녁 바람이 스산한 날, 산사의 종소리가 덩 덩 덩~ 깊고 고요하게 심연의 늪으로 가라앉듯 어둠의 적막 속으로 길게 울렸다. 깊은 울림은 모든 번뇌와 욕망을 다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라 하는 것도 같았다. 문학을 위하여 수업에 열중하는 우리는 저녁 일곱 시의 종소리를 오래 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란 명언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도 종소리가 울리면 좋겠다. 기독교나 가톨릭 교인이 아니라도 경건하게 의식을 깨울 수 있으면 좋겠다. 우렁차게 진동하는 종들의 환희가 아니라도 투명한 대기 속으로 멀리 더 멀리 경쾌하게 혹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낭만이 그립다.



신태순 수필가 《한국문인》 등단(2002). 한국수필가협회, 경남문인협회, 경남수필문학회, 진해문인협회 회원. 경남문인협회 우수 작품집상, 영남문학 문학상 수상. 수필집 『겨울나비』, 『이마리에 내리는 비』, 『저녁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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