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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눈발에 서는 나무 / 김정화

부흐고비 2021. 12. 28. 09:12

하늘이 낮게 내려앉았다. 창문 밖에는 낯선 은세계의 성지가 펼쳐져 있다. 순백색 융단이 지붕 위를 다붓이 덮었고, 목화송이 같은 눈꽃은 겨울나무에 매달렸다. 침엽수 위에 옷자락을 드리우고 신선처럼 길게 누운 모습이 여느 때 보다 초연하다. 아침 햇살 대신 눈이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그의 방문에 흠칫 가슴이 싸해진다.

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서 가만히 눈 겨루기를 해본다. 넝쿨진 등나무 사이로 햇솜 같이 나부끼는 신비스런 눈발에 잠시 눈 멀미가 인다. 순결한 성자의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무의 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싶다. 떨어지는 눈발이 켜켜이 나붓대어도 나무는 잔가지 하나 흔들림 없이 눈발을 맞이한다. 동(動)과 정(靜)의 엄숙한 만남에 마음이 찡해진다.

문득 십 년 전에 지켜본 바라춤이 떠오른다. 그해 겨울, 고향 친구가 속세를 등졌다. 불가에 귀의하는 삭발식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겨울 햇살이 법당 안으로 밀려들 무렵, 서걱거리는 가위소리에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툭 흘러내렸다. 공기조차 흔들리지 않을 적요에 떨어지는 속세의 마지막 끈이랄까. 파르라니 깎인 두피의 한기가 내 몸 안으로 밀려온다.

촛불이 흔들리며 바라소리가 들려왔다. 범패(梵唄)의 홋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이내 장중한 울림으로 이어졌다. 덩실덩실 허공에서 금빛바라가 번뜩이고 맞부딪치면서 참석한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내 눈에서 왈칵 눈물이 떨어졌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부모는 당연히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친구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을 향해 세속에서 드리는 마지막 삼배를 올렸다. 그날 산사에도 마른눈이 겨울나무 가지 사이로 흩날렸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이 일자 파슬 하게 굳은 땅 위에서 눈 갈기가 피어올랐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지만 눈가루는 손바닥을 마다하고 옆으로 비켜 작은 소나무에 송화처럼 매달린다. 미욱한 인간이 내미는 과욕의 손바닥을 자연은 희한하게 알아차린다. 백설마저 사람의 몸을 피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순수하고 정직한 눈(雪)의 눈(眼)에게 욕심 부린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붉어진다.

바다로 잇댄 길목으로 접어든다. 이곳 부산에서는 눈 내리는 날이 드물어 이참에 눈 오는 바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부풀어 괜히 걸음이 급해진다. 호젓한 오솔길인지라 숫눈길에 깊고 또렷한 발자국이 찍힌다. 삭삭 이는 해안에 내리는 눈발은 바라춤이었다. 두루마리 눈이 마치 흰 장삼을 입고 바라춤을 추듯 산머리를 휘휘 감는다. 격정적으로 비탈을 구르며 휘몰아치는 광설(狂雪)은 상쇠놀음이고, 송백 위에 너울지는 가루눈의 정교한 몸짓은 엷은 가사를 입은 상좌승의 나비춤이다. 갯바위를 향해 죽죽 빗금을 긋는 눈발은 용솟음치는 파도와 어울러 사방으로 천화(天花)를 피어냈다. 잊을 뻔한 파도의 율동을 떠올리는 순간, 내 귀에는 바닷바람이 아니라 바라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라 소리는 내 가슴의 아픔이기도 했다.

낯선 강화도에서 보낸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나는 한 달이 넘도록 그곳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날마다 마니산 중턱에 자리한 고욤나무 늦잎 아래 주저앉아 빈산만 허허롭게 바라보았다. 텅 빈 겨울산은 가난한 마음에게는 더욱 한갓졌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소리 없이 내린 눈이었다. 나는 눈대답 할 기운도 없었지만 진종일 등마루를 덮어가는 눈발도 피할 수 없었다. 옭맨 눈을 시리게 하던 눈발은 나무 등걸에 매달리고 굽은 산 능선을 덧칠했다. 산길의 돌부리를 덮어주고 자갈길을 메워 평평하게 해주었다. 며칠동안 눈은 덮고, 가리고, 보듬는 포용력을 보여주었지만 내 몸은 점점 지쳐갔다.

마침내 신열을 앓았다. 며칠 후,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미닫이문을 열었다. 새벽이 조용히 어둠을 밀어내고 있을 때였다. 좁은 마당은 하얗게 눈부셨으며 앙상한 나무와 마른 풀들은 조용했다. 낮은 장독 위에는 눈 더미가 다뿍하게 쌓여있고 높다싶은 장독대에도 적지 않게 덮여있었다. 눈도 내려앉아 편안한지, 이유를 알 수 없이 마음의 틈으로 봄볕 희망이 스며들었다.

눈이 내리던 날, 그 친구는 세상의 인연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갔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눈을 감던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눈길을 마다하고 강화도를 떠날 수 있었다.

해송 사이로 다시 바람이 분다. 물안개가 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백설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을 짐작해본다. 백설은 가을 낙엽을 덮어주고 겨울나무와 허허로운 벌판을 감싸준다. 하늘과 맞닿고 바다와 손을 잡는다. 햇살에 녹을 줄도 알고 달빛에 반짝거릴 줄도 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기도 한다. 까슬까슬한 한삼 자락 같은 눈발이 얼굴과 몸을 휘감고 돈다. 옷깃에 눈발이 붙으면서 파르르 떨리는 전율이 실핏줄을 타고 흐른다. 지금처럼 눈밭 가슴에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눈 내리는 하루 같은 마음을 가지면 조금은 삶이 간간해지지나 않을까. 그러면 백의를 입은 송백에서 생명이 툭툭 터지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눈은 내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팔 높이 펼친 실한 나무가 되어 그를 맞이하고 싶다.

다시 창문을 긁는 눈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金貞花 수필가 경남 김해 출생,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 2006수필과비평신인상, 2015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19회 신곡문학상 본상, 3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19회 부산문학상 우수상. 월간 문학도시편집장 역임. 수필집 새에게는 길이 없다, 하얀 낙타, 가자미수필선집 장미, 타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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