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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겨울의 인수봉 / 임낙호

부흐고비 2022. 1. 2. 12:32

지난주 중국 쿤밍을 다녀왔다. 나들이의 후유증은 끈덕졌다.

새벽 1시경 집에 도착하여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지친 몸을 일으켜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그런데 찬 기운이 온몸에 돌고 코에서 액체가 주르르 흐르는 게 아닌가. 피로가 쌓여 코피가 나는가 싶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코를 닦았다. 맑은 콧물이었다. 그런데 발코니 안쪽 문이 조금 열려 있지 않은가. 꽃을 사랑하는 아내는 발코니 출입문을 아침마다 열어 놓는다. 꽃을 배려한 환기가 남편을 감기로 내몬 결과가 되고 만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시청에서 일을 보고 나온 김에 아내와 신정호를 한 바퀴 돌았다. 걷는 동안에도 마스크 속에서 콧물은 계속 흘렀다. 돌아오는 길에 점심도 먹고 화원에 들려서 조그만 화분 몇 개도 샀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지 하며 밤을 맞았다. 이튿날도 콧물은 계속 휴지를 찾으며 성화를 부렸다. 원래 병원 가기를 싫어해서 참고 견뎌보려는 게 탈이었다. 침대에 눕자 이제는 기침까지 가세했다.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좀 나은 듯했다. 여행 후담도 나눌 겸 한 친구님과 현충사 걷기에 나섰다. 냉기가 코끝에 스치자 마스크 속에서 또 콧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렇게 시작된 고뿔은 점점 골수로 파고들었다. 애들은 아프면서 성장한다는데, 나이 들어 아프니 팍팍 늙어가는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아내의 성화를 못 이기는 척 병원에 가서 알부민 한 병을 맞았다. 병 주고 약 준다더니 아내는 로얄제리를 주며, 대추, 배와 무 등을 넣고 달인 물도 대령했다. 얼큰한 콩나물 국물까지 마시고 침대 바닥의 온도를 높이고 하루 종일 낮잠을 잤다. 그 통에 산우회 회장을 뽑는 송년회 모임에도 불참했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기분은 상쾌한데 힘은 조금도 남아있질 않았다. 오후 늦게 한 산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월요일에 북한산 속을 뒤져 보자는 것이 아닌가. 난 도저히 그럴 기력이 없는 상태인지라 못 간다고 말할 것을 그만 ‘좋다’고 동의해버렸다. 반쯤은 산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의아한 생각까지 스스로 들었다.

청명한 아침 새벽에 여명을 앞세우고 문을 나섰다. 아내의 애걸하는 만류를 뒤로 한 채, 전철 시간을 체크하며 약속 장소로 내달은 것이다.

일행들과 만나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나는마스크에 겹겹의 옷으로 무장했지만, 하얀 눈이 덮인 산을 올려보며 아이젠을 챙기지 못한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건장한 청년 같은 친구님들과 합세하여 환담을 하며 비탈길을 올랐다. 나는 헉헉거리며 네발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온힘을 다해 일행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앞서 가던 친구들이 기다리다 못해 되짚어 내려왔다. 초콜릿을 건네며 당 조절을 하라고 채근했다. 한참을 나무둥치에 기대고 앉아 한숨을 돌리니 좀 안정이 되었다.

친한 친구 한 명이면 족하다는데, 난 친구 복이 아주 많은 편인가보다. 오래전 산행 중 잇몸이 얼어붙은 적도 있었는데, 손수 목도리를 벗어 둘둘 감아주던 동기간 같은 친구들이 아니던가.

가파른 언덕길은 서릿발이 앞을 막고, 곳곳에 얼음마저 숨어 있었다. 콧물은 계속 마스크 속으로 흐르고, 안경엔 입김이 서려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드디어 1차 포토 포인트에 안착했다. 날씨는 환상적이었다. 초미세먼지는 매우 나쁨 단계라는데 촬영 경쟁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염초봉과 인수봉은 설산으로 변모해 있었다. 쿤밍의 옥룡설산을 다녀온 사이에 딴 모습으로 변장한 것이다.

엉금엉금 기다가 걷다가 하며 2차 포인트에 당도했다. 그런데 눈이 번쩍 뜨였다. 웅장한 조각품이 당당하게 눈앞에 서있는 게 아닌가. 이게 뭐지? 인수봉은 맞는데 웬 웅덩이가 생겼지? 눈이 덮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인데, 산도 우리를 홀리고 있는지 눈을 비비며 다시 쳐다보았다. 눈雪의 위력이 이러한가? 때 아닌 동양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몇 컷의 시진을 찍고 오르기를 계속했다. 북측 벽 뒤를 돌아야 하는데 아뿔싸 얼음판 길이 앞을 막는다. 아이젠도 없는 상황에서 무리할 수가 없었다. 겨울산은 서둘러 장막을 내리기 때문에 욕심을 낼 수도 없었다.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을 때의 날씨는 옥룡설산의 날씨와 비슷했다.

인수봉의 겨울산은 잔혹했다. 길조차 열어주지 않으니 말이다. 신神이 그러하시듯 산님도 쉽게 허락을 하지 않았다. 입구부터 원천 봉쇄해버리다니…. 그렇지만 우리는 인수봉 뒤통수를 눈雪 위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염초봉의 위용도, 숨은 벽의 웅장함도 모두 평정한 설화雪畵 속의 인수봉 자태가 비범하기만 했다. 왜 이제야 이걸 보게 되나! 친구님들과 나는 속진의 눈目을 의심했다. 사진 속에서 그 진면목을 실감하고 우리는 또 한 번 탄성을 지를 게다. 포효하는 바다사자처럼 괴성을 지르는 인수봉의 위용은 우리를 보고 호령하는지, 하늘을 향해 외쳐대는지, 스스로 조각조각 허공으로 터져 나갔다.

아, 겨울의 인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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