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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삶의 무게 / 임민자

부흐고비 2021. 12. 31. 08:59

얼마 전 큰아들이 다니러 왔었다. 살림이 가득한 방 안을 둘러보며

“이 많은 전자제품과 살림은 어떡하지?”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미리부터 걱정한다고 아들은 핀잔을 줬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져가겠단다. 그 말에 은근히 안심이 되었다. 자식들은 부모가 평생 곁에 있을 줄만 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떠날 것을 생각해 나는 자식들에게 유언처럼 당부하기도 했었다. 집 안 곳곳에 둔 중요한 문서나 물건들을 한 가지씩 익히도록 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떠나면서 가족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살아생전에 반짝반짝 빛나던 가재도구와 아끼던 옷가지도 주인을 잃으면 쓸모없는 쓰레기로 변해 태우거나 재활용통으로 버려졌다. 살아 있을 때 남들을 주면 고맙다고 가져가지만, 아무리 좋은 물건도 숨만 끊어지면 귀신이 붙었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손때 묻은 물건을 유품으로 간직하지 않고 마구 버 리는 것을 보면서 서글플 때가 많았었다.

언제부터 나는 봄가을로 옷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서랍에서 꺼낸 옷은 재활용통에 넣고, 옷장에 걸어 놓은 것은 주섬주섬 챙긴다. 대부분이 외출할 때 입는 새 옷들이다. 몇 번 걸치지 못한 옷이지만 치수가 비슷한 언니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옷장을 정리하고 나면 무거운 짐을 덜어내는 듯 홀가분했다.

옷도 그렇지만 살림도 마찬가지다. 새 그릇들이나 귀한 물건이라도 며느리들이 갖고 싶어 하는 눈치가 보이면 서슴없이 내주었다. 이번 김장 때도 그랬었다. 수십 년 쓰던 고무 목욕통과 양은 대야를 큰아들 집으로 가져갔다. 김장을 마치고 슬그머니 창고에 올려놓았다. 삶의 무게를 조금 내려놓은 듯 어깨가 가벼워졌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이 또 있었다. 평생 모은 책들이다. 필요한 곳을 찾아 기증할까도 싶었다. 사다 놓은 책도 있지만 생일 때마다 자식들이 선물한 것도 많았다. 또 전국에 있는 작가들이 사인까지 해서 보내온 귀한 도서들도 많다. 큰아들 집에는 좁은 다락 공간이 있었다. 천장이 낮아 쓸모가 없어 활용 방법을 찾다가 붙박이 책장을 만들었다. 마치 내 자식 같은 책들을 옮겨 놓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야금야금 갖다 놓은 책이 수백 권에 달한다. 앞으로 더 갖다 놓을 예정이다. 책을 좋아하는 자식들이나 손녀들이 배를 쭉 깔고 창밖에 자연을 음미하며 읽을 거라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집이 완성되고 막내 손녀들이 큰아들 집에 놀러갔다. 호기심 많은 손녀들은 다락을 올라가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책이 가지런히 있는 책꽂이 쪽으로 눈길이 갔다. 손녀들을 위해 친구에게 기증받은 만화책과 동화책을 한쪽에 비치해 둔 곳이 있었다. 손녀들은 서슴없이 한 권씩 뽑았다. 내가 상상했던 대로 돗자리에 배를 쭉 깔고 한 페이지씩 넘기며 낄낄대고 있었다. 책 속에 점점 빠져드는 손녀들,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아들 내외는 걱정을 많이 했었다. 진즉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 줬더라면 쫓기듯 학원으로 내몰리는 손녀들이 방학 때만이라도 책과 가까워 질 것이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때로는 서글플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책만큼은 잘한 것 같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간직해 온 책은 자식들이나 손녀들에게 오래도록 남길 유산이기도 하다. 어느 날 홀연히 떠난다. 해도 가벼워진 삶의 무게 때문에 편안히 갈 것만 같다.



임민자 수필가 《한국수필》 등단(2011).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철원지부 지회장(역). 강원작가상(2018) 수상. 저서 : 『박하꽃향기』, 『보물창고(2015·2019 세종시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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