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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거울 / 임낙호

부흐고비 2022. 1. 2. 12:24

창가에 환히 내리며 웃음 짓는 달빛은 보았는가. 보드라운 미소를 머금은 가을의 달빛은 솜틀에서 갓 틀어낸 하얀 목화솜처럼 부드럽다. 부드러운 달빛이 잠자고 있는 내 반쪽의 얼굴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그의 입가에도 연한 미소가 달빛에 번진다. 지난날의 추억을 소환하여 누구와 담소를 나누는 것인가. 천진한 소녀의 모습인양 평화롭다. 잠든 아내를 뒤로 하고 달빛을 따라나선다.

발길은 호수를 향한다. 경포호를 흐르는 달빛! 고요하다. 창연히 내려앉는다. 달빛 따라 달도 호수에 끌려 들어간다. 호수에 내리는 달빛에 얽힌 홍장과 강원감사 박신의 애틋한 사랑의 사연이 달빛을 더 황홀하게 한다. 푸른 달빛에 반해 한참 동안이나 넋을 놓고 말았다. 호수 속을 맑게 비춘다. 이런 걸 명경지수라 하는 것이리라. 경포호를 따라 걸어 해운정 앞에 다다른다. 낮에 읽었던 해운정에 걸린 이율곡의 시가 떠오른다.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벗 삼아 외로이 사는데,
정자가 창명을 굽어보아 망천보다 낫다오.
영합하기 싫은 이 몸은 세상을 도망하여,
한가로운 우주 간 고깃배에 의탁했네.
밤이 고요하자 달빛 물결이 잔잔하고,
서리 맞은 단풍잎은 비단처럼 선명하구나.

명경지수明鏡止水란 밝고맑은 거울과 같은 잔잔한 물이요,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된 상태를 이르는 것이리라.

춘추 시대 노나라에 왕태王駘라는 선비가 있었다. 어쩌다 죄를 짓고 한쪽 발을 잘리는 형벌을 받았는데, 그런 전력과 불구에도 상관없이 그를 따르는 제자가 많아 공자의 제자 수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 점을 불만스럽게 여긴 공자의 제자 상계常季가 스승한테 말했다.

“스승님, 왕태라는 사람은 외발이 병신입니다. 풍채도 그렇고 학문도 스승님보다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를 따르는 제자가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저는 ‘그 까닭이 무엇일까.’ 하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지만, 그는 서 있어도 가르치지 않고, 앉아 있어도 대화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빈 마음으로 그를 찾아갔다가 뭔가 가득 얻어 돌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공자가 답했다.

“말을 삼가라. 그분은 성인이시다. 나도 장차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느냐.”

“본래 ‘말 없는 가르침’이란 게 있느니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속으로 완성된 마음의 소유자인 경우는 그것이 가능하다. 짐작건대 그분은 타고난 지혜로 자신을 수양하고 그것을 변함없는 본심으로 가꾸어 왔을성싶다.”

“스승님 말씀대로라면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 행한 수양이잖습니까?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왜 그의 주변에 몰려갈까요?”

“간단한 이치다.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면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이라야만 들여다보아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분의 마음도 고인 물처럼 조용해서 사람들이 제 얼굴을 비춰 보고자 모이는 것이니라.”

맹자는 사람을 사랑해도 친해지지 않으면 그 인仁을 돌이켜 보고, 사람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그 지혜를 돌이켜 보고, 사람에게 예를 행하고도 보답받지 못하면 경건함을 돌이켜 봐야 한다고 했다. 행하고도 얻지 못함이 있으면 모두 자신에게 돌이켜 구해야 하니, 그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돌아온다고 했다.

세상에 가장 큰 사람은 힘이 센 사람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은 바로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이 아닌가. 맹자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심人心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일상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즉 도를 얻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는 ‘득도다조得道多助’의 뜻이리라. 왕태라는 선비가 바로 득도다조의 표본이 아닐까.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들여다 본적이 언제였던가. 바쁘게 달려온 삶의 바퀴를 끌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울 속의 나를 제대로 본적이 별로 없지 싶다. 이제 보니 나는 어디 가고 백발만 성성한 영감이 앞니를 삐쭉 드러내고 멋쩍게 웃고 있다. 그런데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거울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고 아버지께서 서 계신 것이 아닌가. “아버지” 하고 불러보았다. 그런데 대답 대신 멋쩍게 웃으신다.

아버지는 자주 자식들을 모아 놓고 훈계의 말씀을 해주셨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실상을 보기 어렵다며 마음속의 거울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고 하셨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마음속의 거울을 꺼내보라고 하셨다. 행하고도 얻지 못함은 마음의 거울 속에서 찾으라고 하셨다. 도를 얻으면 즉,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도와주는 사람이 저절로 나타난다고 득도다조를 당부하신 말씀은 늘 유훈으로 가슴에 생생하다. 간직하고 살아오려고 애를 썼다고 생각해보지만, 돌이켜보면 얼마나 그렇게 살아왔는지!



《수필과비평사》로 등단했다. 충남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후 쌍용양회, 쌍용건설 등에서 근무했으며  한국건설구조안전연구원 자문 역임. 신안수필문학회, 천안수필문학회,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수필집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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