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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가침박달 / 김홍은

부흐고비 2021. 12. 31. 09:04

젊은 여승의 얼굴에 살며시 짓던 미소를 다시 보고 싶어 오늘도 화장사로 향한다. 손끝만 닿아도 금세 터질 것만 같은 청순하고 깨끗한 얼굴.

색깔로 비유한다면 조금치도 때 묻지 않은 순백색이다. 색은 광선에 의해 빛이 물체에 닿을 때 반사 흡수의 작용으로 우리 눈에 지각되어 남은 색이 결정된다고 한다.

색깔은 자연에서는 백색에서 시작되어 흑색으로 진행되다가 시들고 만다.

색의 시초가 백색이듯 여승의 미소는 꼭 그러했다. 꽃봉오리가 방울방울 피어내려는 모습만큼이나 평화롭고도 자연스럽다. 어쩌면 부처님이 짓고 있는 미소를 가만히 훔쳐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인간은 수많은 세월을 보낸 후에야 웃어 보일 수 있는 그 아름다운 미소이리라.

세파에 물들지 않은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방긋이 웃는 그 웃음과도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에 사는 사람들이나 웃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젖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화장사로 가침박달꽃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젊은 여승이 살며시 바라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쳐 버렸지만 몇 년이 지나도 그 미소만은 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내 어이 그 순간의 살포시 미소 짓던 모습을 못 잊어 오랫동안 연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침박달!

생각만 하여도 여승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침박달은 우리 고장에서는 화장사 근처에서만 볼 수 있으며, 그곳에는 작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웃음소리를 들어왔다. 그 많은 웃음소리보다도 더 가슴을 파고드는 여승의 소리 없이 짓던 미소는 잊혀졌다가 어느 때는 문득 범종소리처럼 밀려와 속절없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외롭고 쓸쓸해질 때면 의례히 그 여승의 미소를 떠올리며 화장사를 찾는다. 그러나 그때의 아름답게 미소 짓던 여승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길을 간다거나 어느 한 모임에서든 젊은 여승의 미소를 찾아보려고 여인들을 아무리 바라보건만 그런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고, 질투와 시기가 둔갑한 웃음들뿐이다.

사람이 웃고 있을 때처럼 아름답게 보일 때가 없지만 웃는 모습이라 해서 반드시 곱게 보일 수는 없다. 웃음 속에서 욕심과 허욕과 가식의 때가 낀 세파에 물들어 시들은 웃음도 있다. 그러나 오욕칠정을 버리고 선에 든 여승의 그 얼굴에 가침박달 꽃봉오리와 같이 방울방울 피워내던 미소. 그 미소는 속세를 떠나 인생의 한 껍질을 벗고 난 그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해탈의 모습이라서일까.

그 여승의 미소는 가침박달나무가 하얗게 피워내는 꽃물 든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얻어낸 자태였으리라.

가침박달의 꽃봉오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면 여승의 미소를 보는 것만 같아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가침박달은 푸른 잎을 다 떨구어 낸 채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어도 밉지가 않다. 가을이면 가지 끝마다 앙증맞게 각을 지어낸 작은 열매들이 달려, 비에 젖고 이슬에 젖고 나면 바람에 날려 숲숙에 떨어져 어쩌다 싹을 틔우는 나무. 그 나무의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드물다. 곁으로 보아서는 보잘 것 없는 작달막한 키를 가진 모습이지만 오월이 시작되면 하얗게 꽃을 피운다. 그때 그 여승의 웃음은 찾아 볼 길이 없지만, 가침박달 나뭇가지서만은 지난날의 고운 미소를 느낄 수 있어 꽃이 핀 그 숲ㅎ속을 헤맨다. 가침박달나무의 꽃 같은 미소를 피워내는 꽃다운 인생이 될 수만 있다면 헐벗고 살아간들 무엇이 부끄러우랴.

나는 그 여승이 부럽고도 그립다.

가침박달나무의 푸른 숲에 몸을 묻고, 하얀 꽃 속에 마음을 쏟고, 그리운 생각에 빠져있던 어느 날. 그 여승은 내게로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가침박달 꽃가지를 꺾어주고는 말없이 돌아갔다. 한동안 넋을 잃고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환상이었다.

손에는 가침박달의 하얀 꽃가지만을 쥔 채 멍하니 서서 한동안 꽃봉오리를 들여다보니 여승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 이후 참으로 오래간만에 화장사를 찾았다. 화장사를 올라가는 산기슭의 산천은 울긋불긋 만산홍엽으로 가득하고, 감나무 가지에는 붉은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가을이 깊어 있음을 짐작케 했다. 화장사의 낡은 툇마루에는 저녁 해가 서성이고 댓돌 위에는 여승의 흰 고무신 한 켤레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마당 옆에 서 있는 늙은 느티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만이 이따금 찬바람에 날려 바스락대며 마당을 뒹굴 뿐이다. 오고 갈데없는 사람이 되어 마루에 걸터앉으니 무심한 생각에 젖어 한숨만이 솟는다.

몸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은 다스릴 길이 없구나. 괴로워하는 마음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부질없는 일임에, 만날 사람도 떠나보낼 사람도 없는 세월 속에서 그리운 추억만이 늙어 가는 건가.

황혼을 발끝으로 차내며 터덕터덕 산기슭을 내려오니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다. 돌아보니 풍경소리만이 외로움을 털어내고 초승달이 어느새 솟았는지 가침박달 나뭇가지에 걸려 빙긋이 눈웃음을 지으며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김홍은 수필가 《월간문학》 등단(1983).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잠누위원, 충북수필문학회장, 충북문인협회장 역임. 충북대학교수(농업박사) 역임. 신곡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충북수필문학상, 환국문인상 수상 외. 수필집 『자가운 세월 속에 정다운 합창』, 공저 『저 바람 속에 불꽃이』, 『꽃 이야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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