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화장하는 남자 / 유상옥

부흐고비 2022. 1. 6. 08:29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내가 화장품 회사의 경영자가 되자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화장품은 성능과 가격 등 제품 특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꿈과 희망, 욕망까지 한데 뭉쳐진 아름다운 브랜딩의 꽃을 피워야 했기 때문이다. 제품개발, 디자인, 모델 선발 등 다양한 회사의 안건이 있을 때마다 중년 아저씨인 나는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장'이었다.

생각나면 곧장 실천해야 하는 성미였던 나는 당시 내 집무실에 손님을 위해 준비해뒀던 제품들을 꺼내 하나씩 발라보기 시작했다. 아내의 것 같기도 한, 어느 날엔가 마주쳤던 고운 처녀의 것 같기도 한 향기가 나쁘지 않았다. 내친김에 당시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던 머드팩도 듬뿍 발라보았다. 사용법을 몰랐던 나는 씻어내지 않고 서류를 보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흙가루를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여자들은 참 고생하고 있었다. 고운 피부결, 밝은 안색이 거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화장’은 곧 여성의 삶이기도 하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여성의 노력을 보면 그 과정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편견에 사로잡혔던 기존의 천편일률적 광고를 확 바꿨다. 톱 탤런트였던 채시라에게 머드팩을 잔뜩 발라 얼굴도 잘 알아보기 힘들게 한 상태로 CF를 찍었다. 나의 눈에는 보였다. 머드팩에 가려진 노력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머드팩은 날개 돋힌 듯 팔렸고 창업 5년 만에 매출 100배인 1,400억의 신장 신화의 주역이 되었다.

화장하는 사장은 이내 사내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몇몇은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업무를 보는 나를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몇몇은 대놓고 망측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우려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매니큐어 나 립스틱 등 색조화장까지 직접 테스트했다. 인터뷰를 할 때면 드러 내놓고 파운데이션을 발랐다.

화장을 통해 코리아나화장품에서 일하는 많은 여성들, 우리 고객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장의 입술에 발린 립스틱은 그들과 거리낌 없는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여성의 마음을 사기 원한다며 화장조차 경험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알 수 있으랴.

화장하는 남자가 되고 나니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화장은 아름다워지려는 인간적 본능에서 비롯되었고, 스스로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가는 의미있는 자기 확인의 의식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나에겐 세 가지 즐거움, 즉 삼락三樂이 있다. ‘좋은 화장품을 만들어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기업을 키워 특히 여성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주며’, ‘이익을 많이 내 세금을 많’ 내는 것’이다. 요즘 ‘세금은 남의 주머니에서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던데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세금을 많이 내면 또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타인의 이기심을 걱정하며 내 옷깃을 여미지 말고. 인의 이타심을 믿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 또한 화장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의 겉모습에서 시작된 관심은 내면을 가꾸는 아름다움으로 뻗어갔고, 나의 이러한 관심은 전국 3만여 명이 넘는 코리아나 뷰티센터의 여성인력에게도 뻗어갔다. 살고 사랑하고 울고 웃고 화내는 그녀들과 함께 코리아나화장품은 성장한다.

최근 여성들의 삶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두 몫의 삶을 살며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는 워킹맘처럼 남성 못지않게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바쁜 현대 여성을 보며 화장품 회사를 창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아직도 나는 화장을 통해 나를 가꾼다. 나를 가꾸는 노력은 때로 타인에게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욕구로 거듭된다.



유상옥 수필가 (주)코리아나 화장품 회장,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문화재 수집과 수필작가로 활동하며 국민훈장,

                   문화훈장을 받음. 저서 『모으고 나누고 가꾸고』 외 다수.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이 좋다 / 문희봉  (0) 2022.01.07
배설기排泄記 / 백남일  (0) 2022.01.06
멀리 또 가까이 / 김성옥  (0) 2022.01.06
며느리 오는 날 / 김수인  (0) 2022.01.05
독도의 해돋이 / 김의배  (0) 2022.01.05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