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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갈대의 누명 / 신영규

부흐고비 2022. 1. 7. 08:49

가을이다. 가을은 바람으로 시작한다. 바람이 없는 가을은 멋과 운치가 없다. 바람은 낙엽을 떨어뜨려 이리저리 나뒹굴게 하지만 낙엽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가을엔 하나둘 비워야 하고 희생할 줄 알기에 새봄에 꽃을 달고 새잎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은 갈대의 계절이다. 갈대는 가을을 먹고 산다. 하지만 갈대는 바람이 없으면 그 의미를 잃고 만다. 바람과 갈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부지간이다. 바람이 남자라면 갈대는 여자이다. 바람이 불어야 갈대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 바람이 갈대를 부르면 갈대는 가느다란 허리를 부스스 떨며 사정없이 제 몸을 흔들어댄다.

어느 가을날 충남 서천 신성리 갈대밭에 간 적이 있었다. 넓은 벌판에 끝없이 펼쳐진 갈대의 무리들이 춤을 추듯 일렁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은빛 몸매는 자연이 그린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갈대는 햇살의 방향에 따라 은빛과 잿빛, 금빛 등으로 바뀐다. 바람의 속도가 빨라지면 갈대들의 살 부딪는 소리는 철썩철썩 물결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에 댓잎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마른 갈대의 북슬북슬한 씨앗 뭉치는 시골에서 보았던 수수 모가지와 약간 비슷하다.

특히 신성리 갈대밭은 문학적인 정서가 풍부한 공간이다. 갈대밭 사이사이 ‘갈대 기행 길’, ‘영화 테마 길’, ‘갈대 문학 길’, ‘솟대 소망 길’을 만들었다. 박두진, 김소월, 박목월 등 서정 시인들의 시를 써놓은 푯말도 있어 시를 읽고 문학과 낭만을 즐기며 가을의 정서에 푹 빠질 수 있어 좋다.

찬바람에 잠 못 이룬 갈대들이 서걱대며 뒤척이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진다. 바람에 쏠려 눕다가도 가까이 다가서면 곧추 일어서서 스크람을 짜고 환영하듯 너풀거린다. 누추를 입고 저무는 황혼 속에 소리 내어 울고 있는 갈대는 바람이 부리는 신음 소리다.

갈대는 외로운 식물이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강하지만 슬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생명력이 강하다.

가을이면 난 강가에 외롭게 서 있는 한 무리의 갈대가 된다. 바람이 불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른 잎새를 서걱이며 슬피 우는 갈대. 휘어진 갈대의 허리에는 짝 잃은 철새의 울음이 묻어 있다. 갈대숲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와 노니는 안식처이다.

깊은 밤 푸른 달빛을 덮고 자리에 누우면 낮 동안 쏘대던 바람이 간 곳 없어 갈대는 숨죽여 운다. 갈대는 알고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온 사연을.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셰익스피어의 이 말 한마디 때문에 그로부터 수백 년 동안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변덕쟁이로 낙인찍혔다. 아마도 셰익스피어는 여성에 대한 심각한 혐오증이 있거나, 또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는지 유추해 본다. 이에 반해 파스칼은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라고 표현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남녀가 헤어질 때 여자가 먼저 변심을 하고 헤어질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3분의 2 정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여자의 변심을 갈대에 비유한 것이.

일반적으로 갈대는 줏대 없는, 사리분별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는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는 유연성, 끈질김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전장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다시 정비하는 것과 전멸할지언정 끝까지 싸우는 경우와 부당한 권력의 압박에 굴복하여 신념을 버리는 것과 부당한 권력의 압박에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는 경우를 생각해 볼 법하다.

갈대는 감성의 언어를 자극한다. 불어오는 바람에 사각사각 노래하며 춤을 추는 모습은 상당히 몽환적이다. 갈대는 얼마 후 강풍이 몰려온다는 것도 알고 이를 미리 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있다.

갈대는 사시사철 운다. 흔들리면서 울고, 울면서 흔들린다. 그리고 갈대는 흔들려야 산다. 이것이 갈대의 숙명이다. 억울한 누명을 쓴 갈대의 한. 이 가을, 꺾이지 않고 살아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는 갈대가 하얗게 부서지는 살점들을 허공에 흩날리고 있다.


신영규 수필가 1995문예사조97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한국문협, 국제펜, 전북문협,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영호남수필문학, 전북수필문학, 임실문협, 전북불교문학 회원수필집 그리움처럼 고독이 오는 날2, 오프사이드 인생4권의 칼럼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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