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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남 마담, 그때 그 집 / 유영모

부흐고비 2022. 1. 10. 08:35

얼마 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친구가 동인동엘 가자고 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선뜻 앞장서 걸어갔다. 마침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슬금슬금 뒤따라가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얼핏 그의 뜻을 알아챘다. 어지럽던 시절, 때로는 술에 취해 때로는 누군가에게 쫓겨 젊음을 비비적거렸던 곳인데 여태껏 까맣게 잊고 지냈다. 괜스레 무슨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쭈뼛쭈뼛 녀석을 따라 동인동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강산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터이지만 쌉싸래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거리는 여전했다. 듬성듬성 늘어서 있던 찜갈비 식당들이 조금씩 개축되었을 뿐, 골목 어귀에서부터 풍기는 매콤한 마늘 냄새는 기억의 시곗바늘을 오래전으로 되돌려놓고 있었다. 실로 몇 년 만인가. 이제껏 무심히 잘도 지내왔건만 새삼 진득한 감회에 젖어 드는 것은 대체 무슨 알량한 심보인가. 그동안 마모라도 된 듯이 무덤덤했던 감성들이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간사함에 피식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제라도 와 본 듯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친구의 발걸음은 벌써 저편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있을까?’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마음은 이미 그때 그 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붉은 능소화가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대문 앞엔 키 작은 가로등이 깜빡깜빡 졸고 있었다. ‘저 집이었는데…,’ 활처럼 휘어진 기와집 처마 끝 선은 아직도 멋스럽기만 한데, 사랑채를 낀 너른 마당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니 퇴색된 대문 위에는 ‘남 마담’이란 세 글자가 어슴푸레 드러나고 있었다. 팝콘 튀듯이 튀어 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한동안 지켜보고 있자니 가슴만 먹먹해져 왔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꼴이 꼭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그 짝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를 이 나이 되도록 오지 못했다는 자책에 머뭇거리다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안마당 한편에는 영산홍 붉은 꽃이 잎 푸른 배롱나무와 어우러져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옹이진 목제 기둥, 퇴색된 서까래 추녀, 단아한 기와지붕은 초여름 어스름이 깔려가는 뜰을 한층 고즈넉하게 하고 있었다. 대청마루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 뜰 아래로 내려섰다. 반백의 올림머리 여인은 뒷모습만 보인 채 좀처럼 돌아서려 하질 않는다. 화단에 물을 주려는지 긴 호스를 들다 말고 갑작스러운 헛기침 소리에 뒤돌아봤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초로의 그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감전이나 된 듯이 찌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다소 작아진 듯한 몸이었지만 갸름한 얼굴선과 온화한 눈빛은 예전의 그녀가 틀림없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기억 속을 더듬다가 불쑥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이게 누고, 데모하다 쫓겨 다니던 너거들 맞제. 하도 소식 없기에 내사마 죽은 줄 알았다“

돌아온 탕자를 반기듯이 맨발로 쫓아 나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신발이 벗겨져도, 화단에 주던 물이 넘쳐흘러도 격한 반가움에 그저 애꿎은 등짝을 때리기만 했다.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어째 그리 무심하냐?’며 발갛게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학생들은 정부의 무능함에 거리로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젊은 혈기 하나로 막무가내 나서다 보니 막상 주변의 일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때로는 매캐한 최루탄을 피해 그곳이 어딘 줄도 모르고 헤매기에 십상이었다. 언젠가 기침을 콜록거리며 어느 기와집 담장 옆에 쪼그리고 있자니 누군가 살며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체 모를 그 소리에 더욱 긴장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문이 열리며 웬 여인이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잽싸게 우릴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닌가.

“아이고, 꼬락서니들 하고는, 데모는 무신 데모고. 너들 부모 눈에 엔간히 눈물 빼게 생겼다. 아직 밥도 못 묵었제.”

그리고는 뚝딱 한 상 가득 차려 내왔다. 하긴 피해 다니느라 먹을 새라도 있었겠나. 숨을 곳만 있어도 다행인 마당에 떡하니 찜갈비까지 있는 상을 받고 보니 여인이 누구인지도 묻을 겨를도 없이 게 눈 감추듯 후딱 먹어 치웠다. 그런 모습을 보던 그녀가 툭 한 마디 내뱉었다.

“야들아, 너들 목숨이 너들 거라 생각하냐? 이런 꼬라지 보면 부모 눈에 피눈물 난데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책임한 내 행동이 가족에게 미칠 영향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무리 젊은 혈기에 올바른 일을 한다 하더라도 처한 현실적 상황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소리 나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처절히 느껴지는 현실의 벽 앞에서 그녀의 말은 비수처럼 가슴속을 후벼 파왔다. ‘툭’ 찌그러진 양은 냄비 속으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때껏 누군지도 알지 못했던 여인은 누님처럼 다정히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무심히 내뱉은 그녀의 말이 아직도 파릇이 가슴속에 남아 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남은 갈비 양념에 손수 밥을 비벼 주기 바쁘다. 그까짓 사는 게 뭐라고…. 옷깃을 스쳐도 인연인데 한 세월 다가도록 무심했던 무정함에 싸늘히 식어가는 빈 양재기만을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가져다 놓았는지 식탁 위에는 붉은 능소화 한 송이가 그때처럼 처연히 놓여 있었다.



유영모 수필가 《대구문학》 등단. 수필집 『유리병 속의 시간들』. 대구수필문학상. 대구수필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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