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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덤 / 장호병

부흐고비 2022. 1. 8. 14:40

선이 보이지 않는 점의 연속이듯, 삶은 덤의 연속이다. 눈 뜨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밝은 하루, 역시 덤이다. 자궁에 착상도 해보지 못한 한날한시의 동료가 이미 수억에 이른다. 그뿐인가. 태중에서 유산이 되기도 하고, 호적부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한 이가 부지기수이다. 고고의 성을 발하여 이 세상에 와서 제힘으로 '이어갈 힘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조물주가 혹은 하느님이 일단 '너 좀 와야겠어.' 하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남겨둔 필생의 사업이 있다 할지라도 미련 없이 응해야 하는 것이 생명 가진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기억 이전의 사실이긴 하지만, 우선 이 세상에 오도록 점지 받은 것은 ㅡ 부모를 왕후장상으로 혹은 갑남을녀로 할 것인가. 그리고 아들로 혹은 딸로 태어날 것인가는 물론 ㅡ 그 자체는 우리의 의지로 선택한 게 아닐 것이다.

심장의 동·정맥이 뒤바뀌거나 판막이 비정상인 상태로 태어나는 아이가 있다고 듣는다. 조물주가 그 많고 많은 생명을 창조하는 데 표준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얼마나 중시하겠는가. 선천성이란 관형어가 따라붙는 예외의 경우를 보노라면, 태어날 때 이 가이드라인 안에 들었다는 사실 하나도 엄청난 덤의 덕분이다.

덤을 허락할 것인가, 거두어들일 것인가가 조물주만의 고유한 행사는 아니다. 우리의 발자국, 우리의 손길에서 목숨이 거두어져 버린 생명이 어디 한둘이랴. 적과라는 이름으로 도중하차를 당해야 했던 미숙과가 있고, 구조조정이란 미명으로 직장을 잃은 가장도 있다. 잡초라는 이름으로 뽑혀나간 많은 풀들의 운명은 또 어쩌랴. 우리가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조물주에게 억울함을 따질 수 없듯이 그 희생 또한 하소연할 데가 없다. 무릇 생명 가진 것들의 현재는 다 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현업으로부터의 정년 이후 삶을 흔히 덤이라 말한다.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사람은 자신 앞에 놓여진, 공으로의 삶을 덤이라 일컫기도 한다. 덤인 만큼 남은 삶을 유유자적 욕심 부리지 않으며 살겠다고 말한다. 식당에서 덤으로 요구한 찬은, 먹어도 그만 남겨도 그만이 아니다. 말끔히 접시를 비워야 한다. 비록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고 할지라도 소홀히 여길 일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삶도 곰곰이 따져보면 덤이 아니었던가. 덤이라는 그 삶도 결국 앞의 덤의 연장일 뿐이다.

앞의 덤은 따라올 뒷덤의 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뒷덤의 공을 가로채 오히려 멍에가 되기도 한다. 앞의 덤이 원금이라면 뒤의 덤은 이자와 같은 것, 그래서 인생은 항상 원리금으로 쌓여간다. 이자에 현혹되어 원금을 날리듯, 쌓아온 피나는 노력을 한방에 날리지 않을 수 없는 공직자나 금융인들의 일그러진 초상들을 화면에서 만난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리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하 물며 생의 크기나 한계를 안다는 것은 더더구나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명문대가의 자손으로 태어났거나, 지금 많은 것을 가지고 만인이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여 허세부릴 일은 아니다.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많은 게 허여되었다 해도 다 덤에 지나지 않는다. 지지리 궁상맞은 집에서 평생 동안 가난의 땟국을 떨치지 못하는 삶,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는 막장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한탄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이 자리도 누군가에게는 부러워 안달하는 덤이 아니던가.

실체적 값어치 외에 조금 더 얹어주는 게 덤이다. 더 이상의 덤이 없어진다는 것은 무덤에 드는 일, 비록 작고 작은 덤이라 할지라도 겸허히 그리고 치열하게 그 덤을 받아들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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