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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망향의 매운탕 / 임영길

부흐고비 2022. 1. 10. 08:37

도시가스 회사에서 가스 자가 검침을 해 달라는 문자가 왔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매월 말일에 집 안에 있는 계량기 검침을 하여 문자로 보내야 하는데,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하는 일 없이 바빠 그걸 깜빡 한 모양이다. 달력을 보니 오월로 접어든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사월이 그냥 매달려 있다.

사월을 죽 찢었다. 떠나간 사월과 낯설어 반가운 낯선 오월을 번갈아 본다. 4월은 4일이 청명이고 20일이 곡우다. 그리고 5월 5일이 입하이니 이로써 또 한해의 봄이 다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네게 주어진 봄날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중 하나의 봄이 이렇게 지나가고 아홉 달을 기다려야 남은 봄이 다시 온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울적하다. 그리고 오랜 기억 하나 되살아난다.

이맘때면 시골에서는 여러 가지 농사 준비로 분주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하는 중요한 마을 행사가 보를 막는 일이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마을을 관통해서 흐르는 도랑을 치고 보를 손보아 들판으로 물을 끌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보막이 날은 아침 일찍부터 그해 유사와 장정 몇이 집집이 들러서 쌀을 추렴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한 집에 한 사람씩 보막이에 참석해야 했다. 장정이 없는 집은 여자나 아이라도 나와야 했다.

남자들이 보를 막는 동안 여자들은 추렴한 쌀로 시장을 보고, 공회당 마당 가장자리에 가마솥을 걸고 음식을 준비했다. 보막이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개울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커다란 돌을 일렬로 쌓는 것이다. 그다음엔 잔돌로 틈을 메우고, 그 위에 솔가지를 덮은 다음 물이 새지 않도록 뗏장과 흙으로 마무리를 했다. 일을 끝내고 나면 개울로 흐르던 물은 모두 도랑으로 흘러들고 보 아래쪽은 물이 마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물이 마른 개울에서 힘들이지 않고 물고기를 잡았다. 마을로 물이 들기 전 도랑 중간 무넘기가 있는 곳까지 긴 거리는 아니지만 고기는 의외로 많았다. 피라미, 버들치, 동사리, 미꾸라지, 기름종개, 퉁가리 등 물고기가 지천이었다. 퉁가리를 잡다 실수하여 손가락을 쏘이면 아파서 팔짝 뛰다가도, 바위 아래 물웅덩이에서 어슬렁거리는 메기나 뱀장어를 발견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반두를 들고 달려들었다.

보막이 날 오후는 민물고기 매운탕으로 마을 잔치를 했다.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여 가마솥에 푹 고아 굵은 뼈를 추린 후 양념한 나물을 넣고 다시 끓였다. 밀가루를 싫어하는 사람은 밥과 함께 먹고, 나머지에는 수제비를 뜨고 국수도 넣었다. 쫄깃한 수제비와 입에 착 감기는 국수 맛이라니, 땀 흘려 보막이를 하고 난 다음 한 양푼씩 먹던 매운탕은 별미 중 별미였다.

강 언덕에 풀빛 완연하고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계절. 고향 친구들을 만나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면, 보를 막기 위하여 지게에 솔가지를 한 짐 지고 오던 일이며 그때 먹던 매운탕이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발길은 어느새 매운탕 집으로 향하고 있다. 대구에는 두 군데 유명한 매운탕 촌이 있었다. 동쪽에는 포플러 숲과 어울려 여름철 청춘들을 불러 모으던 청천 유원지에 있었고, 서쪽에는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강정 나루터에 있었다. 모처럼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향수에 젖고 매운탕에 취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기만 했다. 그때 먹던 매운탕은 허기를 채우기 위한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고 객지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위로해주는 가슴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이었다.

하천을 정비하면서 청천 유원지가 사라지고 도시 확장과 4대 강 사업으로 강정 나루터도 옛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지금은 도심에도 꽤 유명한 메기 매운탕 집이 있기는 하지만 집단으로는 강정 유원지 식당 몇 군데 매운탕의 명맥을 잇고 있고, 도시철도 2호선 문양역 인근에 새로운 논 메기 매운탕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이곳은 농가 소득사업으로 메기양식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판로가 마땅치 않아 낚시터를 운영하면서 낚시꾼들 부탁으로 매운탕을 끓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매운탕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고, 지금은 마을 전체 이십여 곳이 메기 매운탕 집으로 성업 중이다. 문양역에 내리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운탕 집 셔틀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가 진정되면 일 년여 가까이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다. 여전히 건강하겠지만 문양역 근처 마천산도 한 바퀴 함께 돌아보고, 어머니 손맛이 생각나는 얼큰한 매운탕에 반주를 주고받으며 수구지심首丘之心을 달래고 싶다. 더불어 메기란 놈은 영양은 물론이고 이뇨 작용을 도와주고 부종을 내리는 효험까지 있다고 한다. 우리 나이에는 꼭 먹어야 할 음식이 아닌가 한다.



임영길 수필가 《대구문학》 등단. 근로자문학제 입선. 대구수필문학회, 대구문인협회,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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