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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고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추억과 관련이 있는 음식을 꼽는다. 어머니의 손맛이 배인 음식이 객관적으로 가장 맛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릴 적부터 먹었던 익숙한 맛이기 때문에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행복한 추억까지 가미가 되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넘사벽이 되고 만다.

호모 에렉투스는 인류를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세계로 퍼져나가게 한 주인공이다. 불을 발견함으로써 어두움과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용기.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 첫걸음을 떼었던 도전의 순간이 오늘날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한 이유일 것이다. 그 유전자의 힘으로 인류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열매를 먹고 작은 짐승을 사냥하여 날것으로 먹었던 최초의 식사에서 처음으로 고기가 불에 익어가는 냄새와 부드러운 식감을 느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인간의 유전자 속에 최초로 각인된 맛에 대한 기억이라면 아마도 불맛이 아닐까 싶다. 불에 익힌 음식을 먹었을 때 느꼈던 그 새로운 맛의 정체에 대해 그들은 놀라워하면서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유전자에는 불맛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가 배어 있을 수밖에 없다. 불맛이 나는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평범한 음식에도 불맛 하나만 살짝 가미하면 무조건 맛있다고 느낀다. 오늘날 점점 음식에 대한 취향과 요리법이 다양해지는 와중에 가장 큰 트랜드는 불맛, 바로 직화 요리이다. 의도적으로 음식에 불맛을 입혀서 맛을 내기도 한다. 나 역시 지금까지 먹어 본 음식 중 최고를 꼽는다면 철판 위에 각종 해물을 올려놓고 아래에서는 열로, 위에서는 직화로 불맛을 입혀주던 철판구이였다. 거창한 양념도 없었다. 신선한 재료에 약간의 기름과 소금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불이 다했다.

야채와 해물, 육류 등에 기름을 둘러 볶으면서 불맛을 가미하면 음식이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다. 야끼우동이 그렇다. 알고 보면 해물짬뽕에서 국물을 빼고 볶은 것인데 영리하게도 거기에다 불맛을 입혀 전혀 다른 차원의 음식처럼 느껴지게 한다. 무엇인가 익숙한 듯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그것은 인간의 유전자를 통해 각인된 불맛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가 아닐까.

야끼우동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생각한다. 지금 내 유전자가 중 아주 오래전 기억 하나를 일깨우는 중이라는 것을.

인류를 발전시킨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가르치는 아이들과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언어의 사용, 두 발로 걷기, 손의 사용, 문자의 발견 등 많은 의견이 나왔으나 가장 많은 의견은 불의 발견이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에서 인류를 세계로 퍼져나가게 한 주역이다. 불을 발견함으로써 어두움을 이겼고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이겼고 추위를 이겼다. 불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더 두려운 것이 없었고 아프리카의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인류의 유전자를 간직한 호모 에렉투스.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된 지금 우리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온 기나긴 여정 속에는 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가 있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불맛에 대한 기억이 심겨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자극적인 기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무엇으로 표현하지 못할 새로운 세계를 만났을 때.

그리고 음식을 불에 익혔을 때의 그 맛.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먹었던 것이 그동안의 식생활이었다면 음식의 맛과 기능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마도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한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원래 주어진 맛에서 벗어나 요리의 개념을 익히고 인류를 미식의 세계로 이끌었던 최초의 맛은 바로 불맛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유전자 속에는 불맛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가 배어 있다.

웬만한 음식에서 불맛을 가미하면 사람은 무조건 맛있다고 느끼게 된다. 어렸을 적 우리는 불에 구워 먹었던 고구마와 감자, 물고기, 방아깨비, 메뚜기, 개구리 뒷다리까지 그 어릴 적 입맛을 사로잡았던 것도 팔 할은 불맛이었다.

지금까지 먹어 보았던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온 화려한 요리가 아니라 단순한 재료로 철판에 구워 불맛을 입혀주던 철판구이 요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 기억 속 불맛에 대해 깊이 각인된 그 유전자에 대해.

야채와 해물, 육류 등을 볶으면서 불맛을 입히면 음식의 차원이 달라진다. 볶음 우동이 그렇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맛인 짬뽕 맛에서 국물을 빼고 재료에 불맛을 입힌 그것은 단순히 맛을 떠나서 인간에게 유전자 깊숙이 박힌 호모 에렉투스 시대의 향수를 기억하게 한다. 음식을 먹으면서 무엇인가 아득한 향수를 느낀다는 것은 단순히 맛을 떠나 인류의 역사에 대한, 그래서 불맛만큼은 개인의 취향이 아닌 인류 공통의 취향이 아닐까. 음식에 가미된 불맛은 인간의 깊숙한 곳에 각인된 향수를 건드리니 말이다.

불맛을 입힌 볶음 우동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생각한다. 나는 호모 에렉투스의 후예라는 것을. 한 손에 불을 들고 어두움과 짐승과 추위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마도 인간의 뼛속 깊이 각인된 불맛에 대한 기억을 알고 있거나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은 불맛이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맛있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불맛이 혀끝에 와 닿는 순간, 인간의 기억 세포는 원시시대를 향하여 달려가게 되고 본인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 좀 더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될지 모른다.



이명희 수필가 《예술세계》 등단. 대구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예술시대작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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