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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납작만두의 추억 / 홍정식

부흐고비 2022. 1. 10. 08:38

불로동은 20번 버스의 종점이었다. 종점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버스가 마지막으로 서는 곳이다. 그런데 불로동에서도 더 들어가야 하는 곳들이 있었다. 팔공산 동화사나 파계사 인근으로 가는 사람들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오는 버스를 불로동 종점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불로동을 종점으로 불렀다. 우리 집은 승차권 판매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골 사람들은(지금은 대구시에 편입되었지만, 당시에는 경상북도 군위군이었음) 당연히 우리 가게에 진을 쳤다. 특히나 오 일마다 서는 장날이면 시골에서 가져온 각종 채소와 과일을 팔고 옷이나 이불 그리고 생선 같은 먹을거리를 사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난 다음 해였고 나는 겨우 11살이었는데 장날이면 오는 사람이 많아 어머니는 혹시나 손이 탈까 봐 장남인 나를 곁에 두었다.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가 녹록한 것은 아니었는지 어머니는 여러 날 궁리를 하시더니 남는 자투리 공간에다가 화장품 가게를 들였다. 또 조합은 잘 맞지는 않았지만 가게 앞은 납작만두와 호떡을 굽는 노점으로 내주었다.

화장품 가게가 생긴 뒤로 동네 아줌마들로 우리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화장품 본사에서 출장 나온 예쁜 누나가 얼굴 마사지를 해 주는 날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날은 승차권과 담배 판매는 내 몫이 되었다. 어머니와 그 누나는 동네 아줌마들 얼굴에 오이 팩이나 꿀 팩을 발라 미용 티슈를 덮어두고는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티슈를 벗기고 다시 스킨로션과 각종 분을 발라주었다. 그런 서비스가 있고 나면 선심이나 쓰듯 아줌마들은 몇 가지 화장품을 사 가는 것이었다. 방안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친구 엄마들도 있었고 또 갑갑하다며 웃옷을 훌렁훌렁 벗고 펑퍼짐하게 퍼진 속살을 보여 주는 이들도 있어서 어머니는 솜털이 제법 송송 나기 시작한 내가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힐끔힐끔 방안을 들여다보던 나에게 어머니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는지 납작만두와 호떡을 사 주셨다.

그렇게 납작만두를 먹으면서 동네 아줌마들이 모이면 하는 늘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낯선 말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남녀상열지사였다. 새 동네 누구 엄마는 춤바람이 나서 칠성시장에 있는 댄스홀에 나다닌다거나 아무개 집은 아무래도 남자가 두 집 살림한다는 둥 그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우리 집에 분칠하러 오는 여자들은 밥은 걱정 없이 먹고 사는 팔자 핀 여자들이라는 것이 어머니의 뒷말이었다. 그들이 가고 나면 내 임무도 끝이 났다. 파계사행, 동화사행, 평광행 승차권이 몇 장이나 나갔는지 거북선이나 청자 담배가 몇 갑이나 팔렸는지 어머니와 계산했다.

가끔이었지만, 그 누나를 기다린 것은 동네 부자 엄마들만이 아니었다. 나도 누나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촌스럽지만, 아래위로 파란 피어리스 유니폼을 입고 얼굴도 작은 누나가 부드럽고 다소 짙은 향수와 함께 방문하는 날이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마무리 정리를 하던 누나가 너도 한번 해봐, 하면서 남는 팩으로 마사지를 해 주곤 했는데 어머니의 뭉툭한 손과는 달리 촉촉한 손이 내 얼굴에 닿고 그 향긋한 냄새로 기분이 좋아지곤 해서 스르륵 잠이 들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늦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누나에게 어머니가 여분의 차비를 챙겨주었으니 어머니는 이때부터 사업수완이 있었던 것 같다.

누나와의 관계처럼 납작만두를 굽는 여자와 어머니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어머니와 주인집의 만남에서는 늘 어머니가 을이었다. 주인집은 일수거래도 하고 있었는데 늦은 밤 몇 번 일수 봉투에 몇천 원을 넣어 내가 가져다준 적이 있었다. 저녁 무렵 줘야 했지만, 돈이 모자랄 때는 밤이 늦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꼭 나에게 그 임무를 주었는데 그 봉투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했고 이 층 양옥집 문 초인종을 누르며 나도 언젠가는 이런 집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남자가 제구실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늘 밖으로만 도는 아버지처럼은 되지 말라 하는 말로 들렸다.

주인아주머니와는 달리 만두를 굽는 여자는 어머니에게 을이었다. 그래서 밤이 깊어 버스가 끊길 때 즈음이면 깨끗하게 가게 앞을 청소하고서는 꼭 ‘언니 갑니다’ 하고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실제로 어머니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늘 그렇게 언니라고 불렀다. 게다가 어차피 식어버린 납작만두와 호떡이 남기 마련이어서 그것들은 우리 세 남매의 맛있는 간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집에서도 눈이 빠지라 밥을 굶고 그녀를 기다리던 내 또래나 나보다 더 어린아이들이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늘 만두 아줌마가 가고 나면 ‘저렇게 열심히 살면 뭐가 돼도, 되는 거다.’ 하고 꼭 긍정의 말을 덧붙였다.

지금이야 어머니가 납작만두 좀 먹어보자 하시면 칼국수를 좋아하는 나는 ‘납작만두 그거 뭐 배도 안 부른데 뭐하러 먹어요, 칼국수나 한 그릇 해요.’ 하면서 한 끼를 해결한다. 그래도 ‘야야, 한 이인분만 사와 봐라, 맛이나 보게.’ 하신다. 얇디얇은 면피에 어린아이 핏줄처럼 속이 훤히 다 보이는 당면 몇 가닥이 전부이지만 그 한 점에는 어머니의 고된 세월과 그때 부지런히 남의 가게 앞을 쓸고 마지막 버스에서 내리는 취객을 기다리며 납작만두를 굽던 우리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이 다 들어있다. 그러므로 납작만두는 그냥 납작만두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있게 만든 대구 어머니들의 역사가 아닐까? 오늘은 남문시장에 들러 납작만두 이 인분만 사 봐야겠다.



홍정식 수필가 제9회 독도문예대전 시부문 특선,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대구수필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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