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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이 몰려온다. 번개를 동반한 천둥이 시끄럽게 다녀간다. 우레의 꼬리를 물고 빗발이 창문을 후려친다. 하늘도 삼복더위를 피하고 싶었는지 결국 작달비를 퍼붓고 만다. 거센 빗줄기에 창밖 풍경이 뿌옇다. 괜히 내 마음마저 흐려놓는다. 칼국수 생각이 굴뚝같다. 하얀 수건을 쓴 시어머니가 대청에서 만들어 주던 누른 국수 한 그릇이 오늘따라 더 그립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머리 모양을 바꿀까, 친구와 수다를 떨까 고민하면서 집을 나섰다. 빗줄기는 여전히 세차다. 속이 허전하고 기분이 우중충할 때는 먹는 게 최고라는 결론을 내렸다. 시동을 켠 채 망설이다 평소 즐겨 먹던 다전손칼국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윈도 브러시가 내 마음처럼 바삐 움직인다. 라디오에서 가야금 소리가 흘러나온다. 빗소리와 가야금의 동당거리는 소리가 서로 장단이 맞다.

휴일은 조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식당은 손님들로 붐볐다. 쏟아지는 비를 작은 우산으로 받으며 줄을 서서 기다린다. 번거로울 만도 한데 도란도란 얘기도 나눈다. 그 모습들이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제대로 우러난 국물 맛같이 개운해 보인다. 표정을 보니 날궂이 음식으로 이만한 게 또 있을까 싶다. 들어붓는 비가 저들에겐 단비나 다름없다.

식당 주변에는 주택뿐만 아니라 지산1동 행정복지센터와 대구지방경찰청, 보건환경연구원 등 관공서가 많아 평소에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작은 가게였다. 터가 좋은지 손맛이 일품인지, 차츰 재미가 쏠쏠해 이곳에다 확장 이전했다. 잘 되던 곳에서 딴 데로 옮겨가면 혹시나 하는 걱정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 식당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코로나-19로 웬만하면 대면 접촉을 피하고 싶은데 고민에 빠진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지금이라도 포기할까. 말까. 계속 어정거리다 창문을 통해 식당 안을 흘끔 살핀다. 시선이 칼국수를 먹고 있는 노부부의 그릇에 꽂힌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담백한 맛과 칼칼한 맛이 어우러진 국물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싶다.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가 번호표를 뽑고 말았다.

뜨거운 면을 식혀가며 호로록호로록 먹는 아이도 보인다. 나도 손주가 생기면 같이 와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야무지게 먹는 모습이 복스럽다. 치즈를 듬뿍 올린 피자나 햄버거를 좋아하는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칼국수를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아마도 할머니의 손길을 많이 받고 자란 게 아닌가 싶어 쿡 웃음이 나온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체온을 측정하고 손 소독까지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히도 자리를 드문드문 띄워 놓았다. 거리 두기를 해 안심되었다. 불안해하는 내 눈빛이 티가 났는지 종업원이 환한 표정으로 다가와 진정시켜준다. 기다리는 동안에 출입자 확인을 해달라며 전화번호가 적힌 안내판을 내민다. 번호를 누른다. 손으로 적거나 QR코드로 인증받을 때보다 전화 한 통으로 증명되니 나이 들어가는 나로서는 훨씬 쉽고 간단하다. 망설이지 않고 손칼국수를 시켰다.

주방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바쁘다. 칼국수를 준비하고 찹쌀 수제비를 뜨고 파전을 뒤집고 잔치국수에 맑은 육수를 붓는 등 각자 맡은 음식 준비에 분주하다. 땀이 비 오듯 할 텐데도 웃는 낯빛이다. 음식을 챙기는 주인장의 얼굴빛은 말할 것도 없다. 반찬을 담으면서도 연신 싱글벙글한다. 그뿐만 아니다. 날마다 오전에 김치를 담고 칼국수 반죽도 직접 누른다고 했다.

벽에 걸린 액자에 눈길이 멈춘다. 한 시인이 주인장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다전을 노래한 액자는 무뚝뚝한 벽을 상냥하게 만든다. 분위기도 정갈스럽고 모든 면에서 똑소리가 나는 것 같다. 한번 다녀가면 또다시 찾게 되는 집이라고 입소문이 날만 했다. 맛은 말해 뭣 할까. 아까 봤던 노부부가 내 앞자리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칼국수를 먹는다. 짧은 대화도 오간다.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함께 해서일까. 노부부의 모습이 오누이 같다. 맛나게 자시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보니 시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님은 우리가 가면 언제나 누른 국수를 해주셨다. 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만든 찰진 반죽을 큼직한 상 위에 올려놓고 홍두깨로 밀었다. 서로 붙지 않게 콩가루를 훌훌 뿌려가며 둥글고 가늘게 펴는 모습은 전문가가 따로 없었다. 가루 묻은 주름진 손길이 몇 번 더해지면 당신의 마음처럼 둥그렇고 널찍한 원판이 완성되었다. 땀을 훔치고 얇게 민 그것을 돌돌 말아 일정한 간격을 두며 칼로 썰었다.

큼직한 솥에는 멸치로 우려낸 국물이 끓고 있다. 얇게 썬 누르스름한 면을 맛국물에 먼저 넣었다. 텃밭에서 뽑은 얼갈이배추와 감자를 쌍동거려 합치고 잘 저어 주면 끝이었다. 면이 다 익으면 양푼에 넘치도록 담아냈다. 그 위에 대파와 풋고추로 만든 양념장을 얹었다. 화룡점정으로 깨소금 한 숟가락 올리면 그만이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쫄깃한 면발을 감싼 국물은 일품이었다. 어머님의 손으로 만든 면을 어찌 기계로 뽑아낸 면발에 비할까. 지금도 대청마루에서 먹었던 어머님의 손맛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더욱더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군대 간 아들이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안 돼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첫 휴가를 나온 아들 녀석이 난데없이 할머니 표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맛을 궁리하다가 시장으로 갔다. 얼갈이배추와 콩가루가 들어간 칼국수를 넉넉하게 샀다. 거기에다 온갖 재주를 부려도 어머님의 맛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들은 어미의 정성에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더 달라며 빈 그릇을 내밀었다. 아들은 할머니의 맛이라고 느끼며 기꺼이 먹었으리라.

어머님의 요술 같은 손맛을 어찌 내가 흉내 낼 수 있을까. 아들이 할머니의 손맛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동안 할머니가 매우 그리웠나 보다. 어머님이 만들 때 보기에는 쉬워 보였어도 막상 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 먹는다.

최근 들어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작고 붉은 반점이 얼굴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져 애를 먹였다. 송충이에 쏘인 듯 따갑고 가렵기까지 했다. 피부과에 들러 알레르기 검사를 받았다. 생각도 못 한 밀가루 거부반응이 나왔다. 아무리 먹어도 괜찮았는데 인제 와서 그 좋아하는 밀가루를 물리치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것 먹고 약 먹자는 심산으로 가방에 늘 알레르기약을 챙겨 다닌다. 여러 곳에서 먹고 나서 고생을 했지만, 이 집 칼국수만은 알레르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단골집이 되었다.

이곳에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만든 단순한 어머님의 맛이 그리웠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맛을 낸 이 집 맛도 으뜸이다. 하지만 어머님의 맛이 내게 최고인 것은 사랑과 정성이 더해진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칼국수에 김치만 곁들여도 꿀맛이었다. 한 번만이라도 생전의 그 맛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 주는 것만 먹었지 한 번도 해 드리지 못한 게 이제 와 마음에 걸린다. 오늘 같은 날, 고부간에 마주 앉아 맛있게 남편 흉을 봐도 좋을 텐데. 그나마 이 집의 맛이 어머님의 손맛 같아 위안이 된다.

기다린 끝에 손칼국수가 나왔다. 새우 살 같은 탱탱한 면발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새파란 얼갈이배추와 넓적한 감자, 덧얹어 놓은 먹음직스러운 표고버섯 고명에 절로 군침이 돈다. 그릇째 들어 국물 한 모금 삼키니 허전하던 속이 꽉 찬다. 대파가 들어간 양념을 끼얹어 한 젓가락 길게 들어 올린다. 면발이 끊어지지 않게 잽싸게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씹을 것도 없다. 훌훌 넘어간다. 부추가 들어간 매콤한 겉절이에 아삭한 풋고추까지 곁들이니 가슴이 후련하다. 그 맛 참 신통하다.

어머님의 손맛처럼 흡족한 맛이라서 그럴까. 나는 갈수록 면발에 휘감긴 새파란 얼갈이배추처럼 이 집 맛에 빠져든다. 맛을 보는 순간 눈에서 번쩍, 입에서 우르릉 쾅쾅거린다. 오늘은 내 입안에도 번개와 천둥이 다녀간다.



박향숙 수필가 《문학공간》 등단. 대구수필문학회, 대구수필가협회, 한국수필가연대, (사)한국문화예술연대, 수필문예회, 수필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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